​벤살렘 한인 연합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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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 칼럼

journal

다같은 죽음은 아니다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3:1-6 예수님은 사데교회와 교인들에게 죽은 신앙을 지적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녀들의 영적 죽음에 얼마나 마음이 상하실까? 그런데 사데교회 교적 속의 한 명의 이름은 내 이름, 당신의 이름이다. “살았다 하나 넌 죽은 자다!(1)” 이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두렵고 놀라겠는가! 이것은 버가모 교회의 안디바(2:13)의 순교적 죽음과는 다른 비참한 죽음이다. 죽음이 다같은 죽음이 아니다. 어떻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느냐는 전혀 다를 수 있다. “실상은 죽은”, 죽은 자가 있다(1 b). 성령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고, 사탄에 얽매인 자이다. “그 남은 바 죽게 된”, 죽어 가는 자가 있다(2). 메마르고 파리한 영혼의 상태로 예수께 인생을 맡기지 못하고 세상 속에서 흔들리는 영혼들이다. “도둑같이 긴박하게 오실 주 앞에”, 죽도록 부끄러울 자가 있다(3). 깨어서 후회없이 살지 못하다 천국에서 주님 앞에 서는 부끄러운 구원이 이것이다. “옷을 더럽히지 않는 몇명”의 죽은 영혼조차 살리는 자가 있다(4). 캄캄한 죽음의 위협에서도 한가닥의 예수의 생명의 빛을 나누는 사람들이다. 모든 교회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붙여주신다. “이기는 자,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는 자” 죽어도 영원히 사는 자가 있다(5). 환난의 시대 속에서조차 마지막까지 신앙을 지켜내고 예수 앞에 선 자이다. 그대는 어디에 속해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무슨 죽음을 원하는지... 아직도 은혜받을 때, 구원의 날이다. 사데교회를 향한 경고를 기꺼이 새기고 오직 예수 안에 죽은 신앙이 아닌, 생명의 신앙으로 살아가자.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 그 보혈, 그 이름, 그를 향한 믿음만 있다면, 아버지 품안에서, 천사들에게 둘러싸여(5b) 죽음을 넘어선 영생의 길을 가는 것이다.

11-06-2019

회개가 겸손하고 건강한 신앙의 길이다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2:18-29 열흘 동안을 회개라는 주제에 매달리며 특별기도회 중이다. 함께 기도하는, 이 주제에 마음의 심각함으로 꽂히는 모든 이들에게 회개의 영이 함께 하시는 복이 있기를 빈다. 본문의 두아디라 교회와 교인들은 대단하였다. 예수님은 “네 사업, 사랑, 믿음, 섬김과 인내”를 잘 안다고 하신다. 이것은 교회 안에 교우들이 갖추기를 원하는 전체목록이다. 헌신을 주제로 하는 설교는 이 주제들이 전부가 아닌가! 그리고 처음보다 나중의 행위가 많다고 하신다. 날이 갈수록 잘 한다니 이보다 더 큰 인정해주심과 위로가 어디있을까? 그러나 그런 아름답고 건강한 신앙에도 위기는 존재한다. 우상 앞의 성적 유희와 욕심나는 음식, 쾌락으로 유혹하는 이방 우상종교 의식으로 섞으려 하는 이베벨같은 선지자(20)들이 치고 들어오는 일이었다. 오늘날의 타락한 인간중심적 자만, 사탄적인 온갖 문화가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한번에 나빠지고 병드는 것이 아니다. 서서히 빠져들고, 끌려들다가 어느날 이세벨 옆에 있게 되는 것이다. 남의 문제같다가 어느새 내 문제로 옮겨와 있는 것이다. 그런 세상 속에서 신자로서의 삶은 어떻해야 하는가?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회개하라 하신다(21). 주님은 우리의 “마음과 뜻을 살피시는 분(23)”이라고 하신다. 그렇다 ! 회개에 깨어서 자신의 변질을 닦아내야 한다. 내 사업, 사랑, 믿음, 섬김, 인내” 속에 자발적인 마음이 있은가 살펴야 한다. 사랑과 긍휼의 생각(23)이 흘러나오는가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빗나간 마음과 생각을 불꽃같이(18) 보시고, 주석(18)같이 다루어 치유하시는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언제 한번 하나님 앞에 통렬하게 눈물을 쏟아본 적이 있는지... 하나님 앞에서 지금도 깨어있는 회개, 이것만이 신자의 참된 겸손이다. 즈금도 예수님이 우리 교회와 우리 마음에들어오셔서, 성령이 하시는 음성에 회개로 깨어있는, 들을 귀(29)가 있는 지체들을 찾으신다. 지금도 깨닫는 내가 용납하는 작은 죄악조차 부디 내일로 미루지 않기를!

11-05-2019

내 수고를 주님은 아신다, 다 아신다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 2:12-17 주님은 다 아신다. 우리가 순교자 안디바처럼(13)은 아니어도 어떻게든 다가오는 핍박을 믿는 사람답게 이겨내려 한다는 것을. 주님은 다 보신다. 우리가 세상 발람(14), 세속 니골라당(15)의 교훈처럼 스며오는 육신의 쾌락과 정욕의 유혹에 흔들릴 때 거부하며 거룩함으로 몸부림친다는 것을. 그러므로 여전히 이기도록 순간순간 흔들리는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과 몸을 회개(16)로 주님과 하나되게 하자. 주님이 싸우시고 직접 다루시게 맡겨 드리자. 그러므로 끝까지 이기도록 약속으로 주신 성경의 말씀을(12) 굳게 붙잡자. 삶의 능력으로 주신 성령(17)에 사로잡히자. 감추었다 주시는 내 삶 속에 응답이라는 만나(17)를 먹으며 오늘을 살고, 천국의 흰돌에 떡-하니 새겨진 내 이름(17)을 환히 보며 천국까지 살아가자.

11-04-2019

그대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기를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7:14-25 한 마을에 순회선교자가 옥외에서 설교를 하였다. 한 부자는 지나가다 그의 설교를 듣게 되었는데, 목사의 설교가 “돈을 할 수 있는대로 많이 벌어야 합니다”는 말에 귀가 번쩍했다. “설교를 잘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돈을 잘 관리하고 저축해야 합니다”는 말에 “명설교가이네!”하면서 손뼉을 쳤다. 마지막으로 선교자는 “그리고 그 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써야 합니다!”라고 말하자, 부자는 “에이, 예수쟁이들은...시간 아깝게 버렸네”하면서 떠나고 말았다. 오늘 말씀이 집을 바치기로 서원한 사람, 밭을 바치기로 서원한 사람이 도중에 그 서원을 무를 때의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완전 취소가 아니라, 집과 밭이 저들의 생업에 필요하기에 대신 적절한 돈을 내고는 그 서원을 이행할 수 가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 작정한 것도 뚝 떼먹는 요즘의 시대에, 못 지켜낼까 두려워 서원도 안하는 요즘 신앙분위기에서, 본문의 집을 드리며 서원하는 성도, 밭을 드리며, 또 끝까지 서원을 지키는 성도들의 믿음이 소중하게 깨달아진다. 지금도 우리는 “주님께 충성하게 하소서, 헌신하게 하소서”라고 고백하지만, “내 집과 땅도 주님 원하시면 드리겠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느냐 물으면 대답이 시원하게 나올까? 그렇다! 분명 그렇게 아멘으로 고백할 수가 있는 성도들이 있음을 안다. 이번 주일에 그런 설교들을까 겁내지 말라. 주님은 더 풍성한 요청을 하신다. 집은 환대의 공간이고, 땅은 소득의 원천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 집, 내 땅에 연연하지 말고, 내 집을 열어 사람들을 초청하고 환대하며, 땅의 소득을 풀어 대접하고 섬기며 살라고 하신다. 우리 마음이 집이 되어 주를 아직도 모르는 불신자들을 품으라 하시고, 우리 손이 땅이 되어 필요한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적극적으로 찾아 변변찮은 내 소득이라도 나누며 섬기라 하신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가 이미 드린 집과 땅의 서원인 것이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주의 영광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기꺼이 써야 합니다”는 말에 뭐라 하겠는가? 노멘? 글쎄요멘? 부디 "아멘"으로 오늘도 내일도 살아가기를!

10-30-2019

믿음이 있어야 서원도 한다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7:1-13 레위기 마지막 장을 묵상한다. 지루한 것 같은 레위기도 은혜의 연속임이 감사하고, 한편 좀 더 주의 뜻을 깊이 알지 못하며 지나가기에 아쉽기도 하다. 오늘 말씀에는 서원하는 것과 그 예물드림에 대해서 나온다. 서원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만 생각하는데, 본문의 강조는 오히려 내 편에서 하나님께 드릴 예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남녀, 나이별, 빈부차이를 고려해 예물을 드리고, 드릴 예물을 변경할 경우 제사장을 통해 정하도록 하고 있다. 난 무얼 드릴까 생각해 본다. 다정한 부부, 친밀한 부모와 자녀, 친한 친구 사이에서는 서로의 나눔이 있다. 다른 것이 없다면 적어도 서로간에 따뜻한 마음의 나눔이 있는 법이다. 부모를 의지하는 아이들이 어릴 때에 얼마나 아빠 엄마를 찾든가! “아빠! 아빠!...” (그 때가 그립다 ^^) 당신이 한번도 하나님 앞에 서원해 본 적이 없다면, 이유는 하나이다.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내 문제를 풀어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고, 나에게 관심있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서원, 이것은 하나님과 더 깊어지기 원하는 드림과 나눔, 무엇보다 마음의 드림과 나눔이 서원자의 마음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꼭 서원이 있는 신앙이 되자. - 믿음으로 주 앞에 나아가서 고백하고, 약속하는 것이 서원이다. - 기도가 서원이고, 서원이 기도이다. - 응답하셨고, 응답해 주실 주께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서원이다. - 그저 주님을 향하고 “주님 무엇을 원하세요?” 여쭈는 것이 서원이다. - 너무나 소중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내 안에 사시는 예수와 함께 하나님을 향하고, 세상을 향하는 것이 서원중의 서원이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뭘 원하는가?) 나머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더 하시리라." 이것이 나도, 여러분도 고백할 서원이다.

10-29-2019

엄하게 부리지 말자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5:39-55 오늘 말씀에 이스라엘 자기 동족을 “종으로, 엄하게 부리지 말라”고 네번이나 말씀하신다(39, 43, 46,, 53). 성서시대 당시에야 종이 노예의 개념과 가깝지만, “엄하게 부리지 말라”는 말씀이 지금은 하는 일에 함께 하는 일군, 직원, 동료, 이웃에게, 심지어 가족, 배우자에게 대하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러분은 가정, 일터, 학교, 사람 사이에서 자신이 부리는 사람이 생각하는가? 부림을 받는 사람이라 생각하는가? 종들 사이에도 부리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종이 주인을 부리기도 하는 세상이 지금이다. 내가 대하는 모든 사람은 사실 내가 부리는 사람이다. 마음으로든, 행동이나 말로든, 내 입장에서 대하는 모든 사람들이기에. 그러므로 “엄하게, 함부로 부리지말라”는 말씀은 내게 하시는 말씀이다. 살면서 순간순간 “애굽같은 죄의 늪에서 건져주신 나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대하실까”하는 것이 함부로 부리지 않는 길이다. 더 이상 참기 어려울 때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처럼, 내가 사랑하는 아들 딸처럼 대해주자” 하는 결론에 따르는 것이 엄하게 부리지 않는 것이다. 해도 너무한다 할 때도 “보살피고 내 안에 두고, 여전히 불쌍히 여겨주는 것이” 부리기는 하지만 함부로 부리지 않는 것이다. 남은 나처럼 여기고, 아니 나보다 낫게 여기고, 성령의 마음으로 보고 대해주는 것이 함부로 부리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이 한마디가 엄하게 부리지 않는 바른 지침이 아닐까?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나니” 오늘도 분명히 엄하게 부리지 말아야 할,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당신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아니 주님이 보내실 것이다.

10-24-2019

내 땅, 다른 주인이 있다 하네요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5:23-38 어릴 때는 “땅 땅!”하며 막대기 총을 들고 놀았고, 또 친구들과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땅따먹기 놀이를 하곤 했다. 그 때는 몰랐다 그 땅에 주인이 있는 줄. 그래서 열심히 “여기까지 내 땅이다. 내 땅 더 많아졌다”하며 흥분해서 놀았다. 그리고 저녁이면 엄마의 부르는 소리에 발로 쓱쓱 그은 금들을 지우고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 인생이 땅따먹기와 무엇이 다를까? 주님이 주신, 그리고 여전히 주님의 것인 땅 위에서 나름대로 줄긋고 “내 땅이다. 내 땅이 많다”하며 살다가 부르시면 쓱쓱 내려놓고 주께로 가는 인생이 아닌가! 오늘 말씀에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나그네”로 주님과 함께 하고 있을 뿐이라 하신다. 지금이야 내 땅, 내 건물하지만 글쎄, 300년 후에도 그 땅이, 그 집이 내집으로 남고, 내 후손이 살고 있을까? 희박한 일이다. 토지가 주님의 것이라면 주님은 우리에게는 무엇을 주신 것일까? 그것은 그 땅위에서의 가족과 이웃과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다. 땅을 잃은 친지에게 그 땅을 사서 돌려주는 것도(25), 가족들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땅위에 다시 터전을 잡는 것도(26), 희년에 다시 돌려주고 받고 함께 감사하는 것(28)도, 가난한 형제와 동거하는 것(35), 돈을 꾸어주고 이자를 받지 않는 것도(37)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며 살라는 것이다. 무디의 책자에서 이런 말이 오늘 눈에 확 뜨였다.. “ 세월은 세상에서의 셈법이고, 영원은 하나님의 셈법이다.” 그렇다 우리의 셈법도 주님과 함께 영원을 누리며 영원을 향해 즐거이 가는 것이다. 흔히들 목매는 동산이나 부동산, 돈이나 명예가 얼마나 갈까? 우리도 영원을 셈하며 주님을 따라가는, 지금 애굽같은 세상에서는 그저 잠시 머물 거류민임을 한시라도 잊지말자.

10-23-2019

내게 주신 희년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5: 1- 22 언젠가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했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의 무표정한 표정에 좀 놀란 적이 있다. 나라도 미소로 쳐다보니 이상한 사람처럼 여기기도 한다. 한국에서만 그런가? 여기 미국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실없는 것같아도, 이상한 사람처럼 여겨도 난 언제나 웃어야 할 일이 있다. 예수 때문이다. 기쁨을 주신, 희년의 주체이신 예수님 때문이다. 7년째가 되면 땅도 기뻐할 희년이 오는 것이고, 50년째가 되면 묶였던 모든 속박을 풀어주고 다시금 땅도 사람도 돌려보내는 희년(주빌리, 요벨), 하나님이 복의 근원임을 믿고 순종하는 희년을 시행하라, 이것이 본문 25장의 말씀이다. 50년이면 대부분이 조상이나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땅과 종들을 풀어주어야 할 때일 것이다. 희년의 때가 다가올 수록 싸지는 땅값도(16), 일하는데 절실한 일군들이 돌아감도 반갑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풀려 돌아가는 것이, 땅을 되찾는 일이 반갑지 않은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 하나님이 참소유자이시요 소유욕심을 막고, 만사가 때가 있을을 알게 해주시는 희년이지만, 물질의 욕심이 끼면 끝없이 복잡해진다. 제도적 희년만으론 참 기쁨과 회복의 기회가 되지는 못한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4장에서 자신의 공생애의 사역을 선포하신다. 요약하면 “성령의 기쁨 속에 오신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영육간에 복을, 포로된 자에게 희년의 자유를, 눈먼자 보게함과 눌린자에게 희년의 자유를, 은혜의 희년을 전파하려함이라” 그렇다! 바로 예수 안에서 기쁨으로 나누어주고, 감사로 받는 희년의 시혜자와 수혜자가 있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의 동등한 복받음의 인생임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누구든지 50년을 두번 지나기 전, 결국은 들어가야할 천국의 희년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예수 안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진정한 희년의 기쁨이 내게도 이루어졌다. 우리 모두의 몸도, 영혼도, 삶의 현장도 예수와 함께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희년이야말로 진정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던 자가 기쁨으로 돌아오는 날”을 주신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절기이다. 희년이야말로 예수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가 되어지는 우리에게 이미 주신 축복이다.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며 잘 관리하고 나누라고 희년의 복으로 주셨고, 갚을 길이 없는 빚진 자인 내게도 “그래도 사랑한다”시며 거져주신 희년의 은혜임을 언제나 감사하며 살아가자.

10-22-2019

자기를 괴롭혀 믿음의 도약을 하자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3: 23- 32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속죄일의 준수를 명하신다. 일을 멈추고 반드시 “자기를 괴롭게 하며(27, 29, 32)” 화제를 드리라 하시며, 불순종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하신다. 축제와 같은 다른 절기들에 비하면 심각하게 여겨지는 절기이다. 자기를 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히브리어 “아나”는 “엎드리다. 자기를 겸손하게 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영어번역의 “Self-denial”의 의미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 나태해져가는, 메말라가는 우리 몸의 구조, 정신구조를 잘 아시는 하나님의 처방이시다. 그러기에 자기 괴롭힘은 믿음으로 새롭게 되는 도약의 기회라 깨달아진다. 다윗은 금식하며 자기를 괴롭게 하며 서원기도를 드렸고, 욥은 자신의 연단으로 괴롭게 하였지만 정금같이 나옴을 고백하였고, 제자들은 마가다락방에서 기도하며 “회개하라...”를 자신에 적용하며 자기를 괴롭게 하니 성령이 임재하셨고,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자기 몸을 치며 괴롭게 하며 더욱 사역에 정진하였다. 예수님이야말로 십자가로 자신을 괴롭게 하며 구원을 이루셨고, 우리에게 자기 부정의 십자가를 기꺼이져야 제대로 따라올 수 있다 하신다. 그러므로 “자기 부정, 자기 괴롭힘”은 우리에게 필수이다. 우리도 바로 지금 하던 일을 꾹 멈추는(28, 30) 자기 괴롭힘으로, 남을 판단하기에 익숙한 맘보와 시선을 돌려 자기 괴롭힘으로, 바로 지금 회개함으로 방향을 점검하고 칼날같이 수정하는 자기 괴롭힘으로, 다시금 무릎끓리는 기도와 채워넣는 말씀의 자기 괴롭힘으로, 변질되고 둔해져 버린 나를 살리고 속죄일의 처방을 따라 다시 믿음의 도약을 시작하자.

10-17-2019

모든 것을 첫 열매로 삼고, 드리고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3:9-22 아무리 작은 논밭떼기도 추수때는 흥이 나는 것이다. 그동안의 노고도 다 씻기고 까만 얼굴들에도 웃음꽃이 번져가는 것이다. 보릿고개같은 궁핍도 순간이나마 면해보고, 온 가족이 곡식팔아 들어오는 삯으로 뭐 해볼량 저마다 속셈이 있는 때이다. 생각만 해도 한해의 절정이라 할 때이다. 그 때 철든 믿음의 가족이 한마디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하나님께 참 감사하다!” 그래서 모두가 마음을 모아 첫수확을 주께 올려 드린다 “여호와께서 먼저 기쁘시게 받음이 되도록(11)” 적은 것 탓할 것도 아니다, 많아서 끙끙될 것도 아니다. 주님이 기쁘게 받으시도록, 온 가족이 감사로 먼저 떼어드리고, 제사장이 즐겁게 번제로, 화제로, 요제로, 거제로, 전제로 춤추며 드리고, 이웃과 나그네들이 (22) 꽤쬐쬐하나 거룩한 손을 들어 축복하는 초실절의 축제이다. 이 축복보다 귀한 것이 어디있으랴! 그런데 우리가 사는 모든 삶에 처음 것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이 든다. 오늘도 첫 새벽, 오늘 처음 만나는 아내와 아이들, 첫 한마디, 첫 식사, 첫 거울, 첫 나서는 문, 처음 대할 분들... 우리가 드려야할 첫 열매가 얼마나 많은지! 이것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첫 열매일 것이다. 이것이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한다는(시4:7) 첫열매 신앙이자 축복이다. 오늘 한가지라도 첫열매의 기쁨과 감사로 대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나의 첫열매인 소중한 그대를 생각하며 축복한다.

10-16-2019

절기때마다 마음이 설레는 분이 있다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23:1-8 감사절기가 다가오고 있다. 온 가족이 모이기가 점점 어렵지만 가족들이 모인다는 것만 생각해도 가슴이 설렌다. (애들아, 아버지의 이런 마음을 딴 여행으로 바꿔먹지 말아다오...) 내 이야기만이 아니다. 절기가 다가오면 주님이 설레시고 기다리신다. 오늘 말씀에는 안식일과 유월절, 무교절의 절기를 말씀하시고 있다. “여호와의 안식일(3), 여호와의 유월절(5), 여호와의 무교절(6), 여호와의 절기(2)”이다. 여호와의 절기이니 주님이 주인공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이 절기를 지키시나 안 지키시나 노려보고 계신 날, 절기가 아니다. 우리에게 진실한 삶의 의미, 진정한 위로, 진정한 하나됨을 맛보는 절기가 되라 주신 날이다. 힘들게 살아가도, 심지어 고통스럽게 살아가도 주님을 만날 날, 그 곳을 올려보며 위로받으라는 절기이다. 살아계신 주님을 확인하고, 나머지 모든 날들을 주와 동행하며, 즐거이 살아가라 주신 절기이다. 더 나아가 영원한 절기, “천국”까지 바라보고 길게, 진실하게 살라고 일깨워주시는 절기이다. “식사하러 집에 오세요” 부르는 아내의 전갈을 무시하고 하던 일에 집중할 때가 있다. 그러다가 먹을 생각도 잊어버리고. 그러나 그래서는 안된다. 그 때는 하던 일을 멈추고 행복한 맘으로 집으로 달려야 한다. 사랑의 밥상을 함께 하기 위해서. 주님이 말씀하신다.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7, 8) 내게 오거라” 생명처럼 착각하며 매달리는 그대의 지금 일보다, 주님과 이웃의 관계가 우선임을 깨우쳐 주시는 절기이다. 사랑의 교제만큼 소중한게 없음을 절기마다, 절기 사이마다 깨닫기를 바란다.

10-15-2019

너도 흠이 있지 않겠느냐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2:17-33 우리가 주님 앞으로 나아갈 때에, 제물이든, 예물이든 주 앞에 드릴 때에 오늘 주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내게 흠이 없는(21) 제물을 가져오너라. 흠이 있는 제물들은(22-23) 내 앞으로 가져올 생각조차 말아라. 너의 마음이 또한 제물이고, 너희 몸, 삶 전체가 산제물이다. 흠있다면 내 앞에 올 생각도, 드릴 생각도 하지 말아라. 내 눈에 감추어질 흠은 어떤 것도 없다. 내가 너의 속속까지 다 안다. 이제 어떤 제물을, 어떤 예물을 내게 가져오겠느냐? 어떤 네 몸과 마음을 내게 주겠느냐? 나는 거룩하고, 거룩함만을 받고자 하느니라(32). 과연 너는 거룩함으로 내 앞에 설 수 있느냐? 정 자신이 없다면, 여전이 너의 흠이 있다 보이다면, 그래도 내 앞에 나오는 것만이 사는 길이라는 것을 안다면, 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붙잡고 따라 오너라. 내 아들이 너의 모든 흠을 덮어주리라. 그리고 흠없는 너를 내가 즐거이 받아주고, 변함없는 나의 사랑으로 너를 안아주리라.

10-14-2019

애들 신앙, 어른 신앙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1:1-9 평생 내 앞에는 늘 어른이 있다. 부모가, 심지어 형이 어른이었고, 선생님이 어른이고, 지혜자와 성공자들이 어른이고, 연장자들이 당연히 어른이었다. 앞으로도 어른들을 바라보며 공경하며 살아갈 것이다. 어른이란 사전적 정의는 “다 자란 사람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다. 어른의 반대어는 무엇일까? 바로 떠오르는 것이 “애들”이다. 그대는 어른인가 평생 애들인가? 주께서는 제사장들에게 “그의 백성의 어른(4)”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이제 우리 모두가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베드로를 통해 말씀하며, 우리가 애들 신앙이 아닌 어른이 된 신앙으로 살아야 함을 깨닫게 하신다. 바울선생도 디모데 후배에게 연소한 애들 신앙으로 업신여김받지 말고, 장성한 어른의 신앙이 되라고 한다. 오늘 어른으로 사는 신앙을 깨닫게 하신다. “백성의 어른인즉(4)” - 성경말씀은 백성위한, 공동체 언어이다. 어른은 남에 대한 책임과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1, 4, 9)” - 세속을 충분히 이겨내며 깔끔한 신앙의 어른이 되고 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에게 음식드리는 자이다(6, 8)” - 중재자의 사랑으로 백성의 죄와 허물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회개와 예수보혈의 상차림을 더 큰 어른에게 올려 드리는 어른이어야 한다. “나 여호와는 거룩하니라(8)” - 거룩의 정점은 성령이시다. 성령과 동행하는 순간이 나는 어른의 마음을 갖는 순간이다. 죽은 것은 멀리하나, 살붙이인 가족들에게는 자신을 더럽힐 수 있다(1, 3) - 삶의 본이 되고 기꺼이 자신을 허물어 희생과 봉사하는 어른의 삶을 살아야 한다. 언제까지 어른만 바라보겠는가? 그건 겸손을 넘어서 회한만 남은 인생이 될 것이다. 내가 어른됨은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살아가야할 바로 나의 모습이다. “너희는 백성의 어른이다” 자신밖에 모르는 애들신앙을 내려놓고 주님과 세상 앞에 어른으로 살아가고자 오늘도 말씀앞에 머리 숙인다.

10-11-2019

성도, 거룩함 속에 자라가는 사람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0:22-27 이런 말을 듣고 솔직히 놀랐다. “노인들이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이런 말을 80세가 지난 분이 하였기 때문이다. 마음은 항상 청춘이다. 아니 몸도 늘 청춘으로 살 수 있다. 그러나 젊은 마음으로 계속 살아내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레위기는 거룩함 삶이 하나의 주제이다.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26)” 그런데 그 거룩은 정체된 삶이 아니다. 부단히 거룩한 삶(26), 기꺼이 구별된 삶(24)을 살아 내는 것이다. 규례와 법도(22)도 도전하며, 지켜내며 살아가는 것이고 자라가는 것이다. 비록 젖과 꿀이 흐르는 주신 땅(24)도 싸우며 얻어내며 자라가라 주신 것이다. 정한 짐승, 부정한 짐승(25)도 늘 선택과 깨어있음 속에 정결한 방향으로 자라 가라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으로라도 기죽지 말고 자라가자. 연약한 몸일지라도 강하신 주님께 껌딱지처럼 붙어 자라가길 소망하자. 언제나 확실한 소망과 함께 도전할 일들을 주시는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 참 감사하다.

10-10-2019

온갖 죄를 말씀으로 이기고 가정을 지키라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20:9-21 어느 가정에 심한 부부 싸움을 하고 격분한 나머지 남편과 아내도, 거기다가 그 집의 아들까지도 20층 베란다에서 밑으로 뛰어내리고 말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남편은 제비족, 부인은 날나리, 아들은 비행소년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늘 말씀은 18장과 함께 타락한 이방세상 속에서, 가족이나 친척 간의 거룩한 삶을 명하신다. 특히 결코 범하지 말아야할 가증한 성관계를 경고하고 있다. “부모를 저주하지 말라. 이웃아내, 며느리, 이모, 고모, 숙모와 동침하지 말라...” 남성들 앞에, 여성들 앞에 지금도 일어나는 죄들이 아니겠는가! 그런 세상에서 거룩한 삶으로 죄를 이기며 주님과 함께 걸어가야 할 우리들이다. 말씀을 알고 있어야 죄를 이겨낸다. 본문 내용이 내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도, 우리는 몰라서, 잊어서 죄의 유혹에 빠지는 존재이다. 때로는 세상의 현혹이 너무 교묘하고 강해서, 하나님이 명령을 잊을 경우가 있다. 또 유혹은 받기도 하고 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시고, 우리는 말씀을 더욱 자세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내 가정과 친척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대의 삶으로 거룩함이 퍼져가게 하라. 말씀의 능력에 순종해야 죄를 이겨낸다. 정말 성경의 약속과 지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순종으로 살아가야 비로서 죄의 유혹을 이겨낸다. 죄를 이기고 다스리도록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붙드시고 이끌어 가실 정도로 말씀 속에 그 대의 삶을 푹 잠기게 하라. 그보다 먼저 일단 내 몸과 영혼이 구원을 받아야 말씀으로 죄를 이겨낸다. 하나님이 이제는 자녀인 날 수신자삼아 보내주셨고, 예수님이 스승되어 우리 영의 눈을 열어 주셨고, 성령님이 친구삼아 순간순간 그 말씀을 풀어주실 때에 죄악된 세상속에서 나도, 가족들도 지켜낼 수가 있다. 그러니 말씀을 붙들고 이렇게 기도하며 살아가자. “(말씀을 주신) 하나님, 내 눈을 (예수의 구원으로 )열어 주의 기이하고 (신령한) 법을 보며(시119:18) 내 주위에 다가오는 죄악들을 물리치며 이기게 하소서.” 아멘.

10-09-2019

불구덩이 몰렉에게 자식을 줄 수 없다!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0:1-8 모두가 자식을 사랑하지만, 때로는 자기 욕심을 위해 자식조차 포기하거나 버리는 악한 부모가 있기도 하다. 성경에도 그런 악한 자들이 나타난다.오늘 본문의 몰렉우상에게 자식을 바치는 제사를 행하는 자들이다. 황소머리, 인간몸처럼 만든 몰렉우상숭배는 그 속을 비워 불로 달궈 불구덩이를 만들어 그 위에, 그 속에 산제물을 바치는 이방인들의 잔인한 행태이다. 그러나 이방인들만이 여기에 빠지는 것이 아니기에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열왕기 하에 보면 아하스나 므낫세왕도 자식을 불로 지나가게 하였다는 끔찍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주사바늘 하나 찌르는 것도 못 볼 자식을 산채로 죽일 수 있다니! 그 때나 지금에나 악한 것에 사로잡힌, 제 정신이 아닌 환자가 아니면 절대 저지를 수 없는 일이다. 오늘 말씀은 그런 패륜적인 일을 저지르는 자들은 죽이고, 백성중에서 끊으라고 엄히 명하신다. 그런 짓을 결코 하지 말라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더 뜨겁고, 더 무서운 불은 하나님 없이 살다가 가게 되는 실재하는 지옥이다.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가는 천국이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지옥이라는 하나님 없는 영원한 단절의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중간지대는 없다. 요행도 없다. 지금 내 자녀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의 자녀는 예수 안에서 분명한 천국백성인지.. 세상몰렉에게 내어주고 있지나 않은지... 아니 벌써 거의 뜨거움이 확 달아오르고 있는 불 가까이로 끌려가고 있지 않은지... 방치하는 것과 내어주는 것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자식의 위급한 영혼을 위해, 내게 정해준 영적 VIP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께 911 기도를 하자. 차라리 내 마음이 뜨거움으로 불덩이가 되자. 영혼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걸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난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눅23:26).” 무거운 주제일지라도 우리 모두 깨어서 감당하는 파수군이길 소원한다.

10-08-2019

율법에 몇가지 얹어놓을 것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19:10-37 미국에 와서 처음 먹은 피자맛이 늘 기억에 남는다. 챨스톤 지역을 방문해서 그곳 현지 미국 목사와 함께 간 피자헛에서였다. 큼직한 피자, 두툼한 빵위에 온갖 타핑을 얹어놓은 뜨근한 피자! 30대 중반의 식욕왕성한 목사였으니 ... 그 때 피자가 맛은 지금 잊었어도 즐거운 추억은 여전히 남아있고 여전히 좋아하는 피자이다. 오늘 레위기 말씀에서는 여러가지 율법 실천사항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명하신다. 요약하면, “가축이나 종자 섞지말라, 하녀와 동침말라, 과일나무 3년 두고, 4년차 주께 드리고, 5년차의 열매부터 먹으라, 점, 술법, 문신, 점, 무당을 금하고, 머리 함부로 깍지말고, 노인공경하고, 거류민 학대말고, 재판공정하고, 저울과 추를 공평하게 하라...” 이 말씀만이 아니다. 계속될 다양한 말씀들이, 삶의 정황 속에서 가지치고, 적용되면 얼마나 많은 일들이 하지말아야 하고, 해야하는 것일까! 율법대로 살려하면, 지치거나 형식적이 되거나 적당히 타협하며 살게 될 것이다. 그래선지 구약의 율법을 읽고 대할 때마다 온전한 순종보다는 이제는 복음안에 사는 것이라 적당한 간격을 두고, 은혜되면 따르고, 부담되면 거리두고, 지나치다 여기면 외면하는 구절들이 있다. 그런 나의 모습 속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사소한 자세같지만 진리에서 멀어질 위기가 있는 것이 아닐까 돌아보게 된다. 그러기에 다음같은 몇가지는 율법 위에 꼭 얹어 놓아야할 것이라 깨닫는다. - “순종합니다.” 모든 규례, 모든 법도를 지켜 행하라(37)는 주의 말씀을 타협없이 순종으로 율법위에 얹으라. - “이거 사랑하시기에 주시는거죠?” 계명을 지키려하기보다 먼저 계명을 주신 주님의 마음과 그 사랑을 율법위에 얹으라. - “말씀속에 예수님이 계시네요!” 지켜내려는 일군같은 애씀보다 내가 모시고 살며 좋아하는 분과의 친밀한 기쁨을 율법위에 얹으라. - “내 눈과 마음을 여는 성령님!” 깨닫고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님을 언제나 율법위에 얹으라. - 이런 순종과 주님사랑, 살아계신 예수과 성령의 조명이 율법을 완성해가는 우리들의 핵심재료이다. 그렇게 다시 오늘 말씀을 읽자. 순간순간 살아 적용되는 말씀 속에 살기를 바란다.

10-07-2019

끈질긴 애굽습관, 거센 가나안 유혹에서 가정을 지키라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18:1-18 하나님은 애굽의 풍속, 가나안의 풍속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법도, 말씀만 순종하며 살아가가고 하신다. 그리고 살붙이, 가족관계를 하나하나 열거하시면서, 부모 자녀 형제 친척과의 문란한 성적 관계를 엄히 금지하신다. 성생활은 남편과 아내에게 허락하신 것이 바로 창조의 질서이다. 이것을 불순종하는 성적 욕망의 무절제에서 시작된 죄악이, 타락으로, 가정파괴로, 우상숭배로, 망국의 길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살붙이 외에는 문제가 안되는가? 아니다. 오늘날도 가정의 파괴가 삐뚤어진 성적 문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내 안에 애굽같은 과거의 잘못된 습관은 물리쳤는가? 내 앞에 다가오는 가나안같은 세상 온갖 타락한 문화의 거센 유혹을 담대하게 물리치고 살아가는가? 두려워하고, 숨기고, 외적 경건에만 치우쳐 사는 것과, 시험과 유혹을 담대하게 물리치고 주와 동행하며 사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 죄악된 습관과 욕망이 아직 내게 있는가? 애굽의 옛습관은 끊임없이 되살아날 수 있다. 철저한 회개와 변화의 삶을 살아가라. 오직 회개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육체의 욕망을 이겨낼 수 가 있다. -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5)” 이제 말씀만을 따르며 온전히 복종하자. “어머니, 아버지, 딸, 손녀, 외손녀, 누이, 이모, 형제 아내등등..” 말씀 속에 이런 구체적인 언급은,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말씀위에 서서, 가정에 죄를 결코 들이지 말라는 하나님의 불같은 명령이자 세심한 배려이다. 우리는 복종함으로만이 이 가나안의 거센 타락문화를 이겨낼 수 있다. - 부부 사랑, 가정화목과 기쁨을 회복하자. 순전한 사랑과 감사의 가정에 마귀가 틈을 타지 못하는 것이다. - 죄의 유혹이 가정의 문앞에, 내 마음의 문 앞에 다가올 때 하나님의 은혜, 신앙의 첫사랑을 다시 일으키며 성령께 매달리자. 부르짖은 기도와 주야로의 말씀묵상과 선포로 가족의 순결을 지켜가는 모두가 되기를 기도한다.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

10-03-2019

언제 피를 흘려보았는가?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17:10-16 “피”라는 표현이 들어가는 상황에는 격렬한 것이 많다. “피볼 일 있느냐?, 피터지게 싸운다. 피눈물난다, 피범벅, 피땀, 피를 나눈...” 부정적 표현이든지, 긍정적이든지 모두가 격렬하다. 내 평생에 내 자신의 많은 피를 본 적은 없다. 한때는 코피가 자주 난 적이 있고, 몇번 피땀의 섬김과 헌혈한 때를 제외하고는. 사람이 건강하면 피를 볼 일이 별로 없고, 희생하지 않으면, 사고가 없다면 피를 볼 일도 없다. 탐심과 혈기로 서로가, 나라와 나라가 싸우지 않으면 피를 볼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피를 보면 야만적 본능이 동요하고, 원치않는 불행에 피흘림의 아픔이 찾아오고, 온갖 복수행태와 함께 불행이 시작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피를 통한 감사와 영원한 감동이 있기도 하다. 누군가의 엄청난 희생을 통해 내가 생명을 유지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감동 위에 격렬한 피와 죽음을 통해 용서와 사랑과 평화를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있다. 누구든지 그 피를 내 죽은 양심과 죄악된 손발에 바를 때에, 그 피의 사랑과 은혜를 믿을 때에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죽을 죄인에서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로. “피는 먹지 말아라, 피에 생명이 있고,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11, 12, 14)” 이것이 오늘 레위기 말씀이다. 주님은 우리 위해 내어 줄 자신의 외아들, 독생자의 피와 생명을 담아 참 거룩을 위한 오늘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먹을 때에도 구별하며 돼새겨야할 피가 있다. 살면서 멀리해야 할 부정한 피도 있다. 제사드리면서도 매달려야할 희생의 피가 있다. 무엇보다 대신 흘려주셔서 날 살려주신 예수님의 은혜의 피가 있다. 그리고 이제는...예수님을 따라 섬기며, 전하며, 희생해야할 나의 피가 남아있을 뿐이다. 예수 안에서 내게도 피를 통한 감동과 간증이 있는 삶을 살기를 소원한다.

10-02-2019

회막문 데이트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17:1-9 와- 10월이네! 세월이 빠른지...계절을 사랑하는지...그냥 흘려보낸 아쉬움인지...아니면 나이 속에 초조함이 감추어져 있는지...아니다! 그럼에도 감사이다. 묵상책자 속의 레위기 묵상으로 다시 나아간다. 오늘 말씀은 오직 다른 곳이 아닌 회막문 앞으로 제물을 데려가 (제사장에게 주어) 여호와 앞에만 예물을 드리라(4, 5, 6, 9)고 하신다. 지금까지 들에서나 아무 곳에서 섬기던 숫염소같은 우상들(7)이 아니라 오직 한 곳 회막문 앞, 한 분 하나님 앞에 예물과 제사와 속죄를 이루라고 하신다. 회막은 말 그대로 만남의 자리이다. 주님을 만나는 자리이다. 전능자가 허락하신, 창조주와의 독대이다. 내가 사는 동네의 시장님도 만나기 힘든데 주님을 만나는 자리라니! 그것만이 아니다. 시간에 쫓기고 어쩔 수 없이 만나주는 자리가 아니다. 그 분이 기다리시고, 문앞으로 뛰어나와 반겨주시는 자리가 회막문 앞이다. 제사장을 보내고, 아들을 보내고, 주의 영을 보내 언제고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그 분은 우리를 향한 사랑의 열정이 식어버린 적이 없으시다. 그러니 우리도 사모하고 주님과의 만남을 고대하며 주께 나아가자. 제물은 아니지만 십자가에 제물되어 주신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감사하며 나아가자. 잠시도 아닌 언제나 동행해주시는 주님을 새롭게 만나고 데이트하는 그런 계절이 되자. 빠알간 단풍 한잎 한잎을 따서 예수 보혈을 감사하며 주님께 선물해 드리자.

10-01-2019

꿈같은 감격, 함박꽃 같은 기쁨을 나누어 주자

성경묵상의 나눔: 시126:1-6 “우리 모두 이스라엘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가 있어요!” 오늘 본문은 바벨론에서 이스라엘로의 귀환 앞에 감격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마치 어쩌다 일어나는 메마른 광야가 와디 강물이 되어(4) 넘실거리듯 믿음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꿈이 아닐까 믿어지지 않고(1), 입과 혀에 활짝 웃음과 큰 노래(2)가 저절로 터져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일을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돌려 보내실 때에(1), 여호와께서 행하신 큰 일(2, 3)!” 돌려보내심은 몸만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불성실하고 말씀을 떠났던 죄에서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회복하심을 말한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해주신 가장 큰 일은 “구원받은 자녀됨”이다. 우리도 “죄의 포로에서 예수님의 피”로 해방받지 않았는가! 그 그치지 않은 감사와 웃음이, 적어도 미소로 언제나 감사하는 우리가 아닌가!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죄를 그냥 두실 수 없으시고, 결국 용서와 사랑으로 회복시켜 주고자 하시는 소원이 있으시다(딤전2:4).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다. 지금도 돌아와야할, 그래서 주님이 기다리시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살고있다. 저들도 꿈꾸는 것처럼, 끊이지 않은 웃음과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축복이 준비되어 있다. 다만 누군가가 이 소식을 전해주어야 하고, 나누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 함께 이 꿈같은 감격, 함박꽃같은 구원의 기쁨을 전하자. 씨를 뿌리자. 비록 딱딱하고 상처와 오해투성이의 마음들이라도 우리의 사랑과 섬김과 기도의 눈물로 씨를 뿌리고 또 뿌려주자. 주님이 약속하신다.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단을 가지고 돌아오게 하겠다(5,6). 그 곡식단들과 함께 춤추며 노래하며 기뻐하게 하겠다.”

09-30-2019

교회를 향한 사랑과 감격이 있는가?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122:1-9 미국에 좀 오래된 건물들은 교회모습과 비슷한 건물이 많다.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를 빌려서 사용할 때는 지나가다 좀 큰 건물만 보면, 저 위에 십자가를 꽂으면 괜찮은 교회 건물이 되겠지?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지금도 여러 목회자들과의 대화속에서 교회건물이 없다는 것이 사역에 한계가 되는 경우를 많이 듣게 된다. 마음껏 예배하고 부르짖고 기도하고 찬양할 수 있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 교인들은 정말 가장 귀한 축복을 하나 더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 여러분은 교회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가? 얼마나 여러분 스스로가 지체되어 교회의 유기체로 움직이고 있으며, 얼마나 주의 영광을 위해 건물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가? 물론 교회건물이 참 교회가 아니다. 그러나 교회에 담긴 모든 신앙의 체험과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교회건물이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건, 그 안에 와야할 VIP이건 다 사랑스럽고 소중하기만 할 것이다. 오늘 그 마음을 시편 기자의 고백을 통해서 본다. 교회는 하나님이 아버지로 계신 고향집이다(1). 교회에는 내가 심판을 지나 구원을 체험하고 고백했던 자리가 있는 곳이다(4, 5). 온갖 문제를 끌어안고 찾아와 평안을 체험했던 자리가 있는 곳이다 (6). 대부분 잊고 살지만, 지금까지 내가 누리는 형통의 복을 받은 곳이다(7, 9). 그러기에 오늘도 시편기자는 성전을 오르면서 예루살렘과 성전을 향한 감격을 찬양하고 있다.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고 사람이 내게 말할 때 기뻐하였다”고 한다. 비록 먼 거리지만, 험악한 여정이지만, 주의 전을 향하고, 주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과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때로는 교회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해도, 무관심한 사람이 있다해도, 나와 여러분들은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교회로 발 길을 향할 때마다 언제나 감격과 큰 기쁨으로 오고 가기를 바란다.

09-27-2019

정말 내 도움을 믿는다면 네 문제를 턱 맡기고 의지하거라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 121:1- 8 언젠가 여자전도사님과 함께 오랜 시간을 운전하며 심방을 한 적이 있다. 교회로 돌아와 차에서 내리니 전도사님이 다리가 저리고 너무 아프다고 한다. 염려가 되어서 자꾸 상태를 물어보니 별 문제가 아니라고 하신다. 나중에 고백이, “사실은 목사님 운전하는 동안 뒤에 앉아서 다리에 힘을 주면서 있지도 않는 브레이크 패달을 너무 밟았어요.” 어쩐지 창옆의 핸들을 내내 붙든 손도 편치않게 보이더니! 사람이 마음으로만 염려해도 온 몸은 온통 긴장하는 것이다. 겉으로 안 그런척해도 걱정, 염려는 야금야금 우리의 삶에, 심지어 신앙에 데미지를 주는 것이다. 그대에게도 한번 묻고싶다. 솔직히 무슨 염려, 걱정을 감추고 사는가? 시편기자는 성전에 올라가며 “내가 산을 향해 눈을 들리라”고 한다. 높은 산 앞에서 나 자신을 보면, 깨닫게 하는 것은 나의 문제요, 묵직한 짐이요, 까다로운 프로젝트이다. 나의 상처요, 두려움이요, 때로는 나의 열등감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 산은 올려다 보면, 주의 성전이 있는 곳이요, 주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다. 산꼭대기는 모두가 한곳에서 만나듯이 주님과의 만남의 장소이다. 산은 우리가 올라가는 곳이지, 산이 결코 내려와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산이 내려왔다. 아니 산보다 더 크신 분이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시다. 신앙은 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올라가려고 발버둥칠 필요가 없다. 어떻게 올라가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내려오셨고 곁에 계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면 되는 것이다. 믿음의 눈으로 올려다 보며 주와 동행하며 사는 것이다. 턱 맡기고 살면 도우시는 분이 있는 것이다. 여전히 마음에 몸이 안 따라가는가? 오늘 주시는 이 귀한 121편의 말씀을 믿음으로 듣고(읽고) 자신을 주님께 맡기라. “천지를 봐라, 지은 창조주가 너를 돕는다. 사람들을 보아라, 졸고 자고 너를 잃어도 나는 빈틈없이 너를 돕겠다. 아무도 없다고 당황하지 말아라, 내 오른손이 너에게서 떨어진 적이 없다. 낮의 해같이 달아올라 당황될 때, 밤의 달같이 두려움으로 싸해질 때, 네 영혼 네 몸을 내가 돕고 지키겠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너를 도와가니 그 작은 일이 전부라 여기고 주저앉지는 말거라. 정말 내 도움을 믿는다면 지금부터는 네 문제를 내게 턱 맡기고 나를 의지하거라”

09-26-2019

요즘 세상에 누가 속고 살까?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120:1-7 미국 북쪽에 살던 할아버지가 큰 경품에 당첨되어 플로리다까지 갔다고 한다. 가서 흥분된 마음으로 경품당첨권을 보여주니 당첨된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써놓은, 경품에 참여할 입장권이었다고 한다. 보이스피싱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사기를 당하는 경우를 매체에서 대하게 된다. 어쩜 저렇게들 속을까 생각이 들지만, 오늘도 어느 순간에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우리도 겪을 수도 있기에 부디 조심하기를 바란다. 긴 119편을 지나 오늘 120편 본문에는 “거짓 입술, 속이는 혀, 화살과 숯불같은 고통스런 공격(2,3,4,)”등, 비난과 모함에 힘들어하며 기도하는 시편기자의 고백이 나온다. 오늘날로 말하면 거기에 “거짓된 SNS의 댓글들”하나가 더 첨부되지 않을까 싶다. 얼마나 많이들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지! 부디 자신에는 겸손하고 남에게는 배려하는 조심이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조심을 넘어서 기꺼이 받아내야할 거짓입술과 속이는 혀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 때문에” 받아야할 핍박과 비난이다. 이 세상 속에서 제대로 신앙생활로 헤쳐나가는 성도라면, 사는 환경에 따라 빈도수는 다를지라도, 억울하게 여길 독한 입술과 혀의 공격이 닥칠 때가 있는 것이다. 그 때는 다른 방법이 없다. 스스로 자기에게 기도하면서 축도하며 이겨내는 것 외에는.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친밀하심만이 지금 내게 충만할지어다!” 이것이 언제나 시편 각 장마다의 결론이기도 하다. 이 기도가 내게 응답이 된다면 독한 입술과 혀도 무력하게 녹아버리는 것이다. 사도행전을 읽다가 “이게 초대교회의 성숙과 성장과 성공의 비결이야!”라고 깨달았던 적이 있었다. 이게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거짓 입술을 대하며 속아주며 사는 모습이다. “사도들도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기뻐하며...(기도하면서)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행5:41, 42)”

09-25-2019

아직도 그 귀한 평안을 못 누리십니까?

성경묵상이 나눔: 시편119:161-176(끝) 시장에서 할머니가 모처럼 장을 보고 돌아오던 길에, 비싼 굴비꾸러미를 고양이가 물고 달아났다. 온 가족이 속상해 할 때, 할머니가 가족을 위로하면서 한마디하셨다. “모두들 너무 속상해 하지 말아라. 고양이가 생선을 빼앗아갔어도, 내 입맛은 아직도 남아있잖니? 얼마나 감사하냐!” 우리가 감사할 것은 지금 많은 것을 빼앗겨도 내 마음에 여전히 남아있는 평안이다. 성도의 감사와 축복은 어느 상황에서든지 평안을 찾아내 누리며 살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사는 진정한 성도의 마음과 얼굴은 평화로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평안이 없다면 진정 모든 것을 맡기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오늘 시의 기자는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 큰 평안(Great Peace)이 있다(165)”고 일깨워 준다. 혹 여러분 중에 이 평안을 맛보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예수를 믿는 믿음과 그 신뢰함 속에서 평안을 맛보며 살기를 바란다. 지금도 믿음으로 나를 맡기면 틀림없이 놀라운 평화를 주신다. 그러나 때로는 그 평안을 세상 염려, 두려움때문에 빼앗기기도 한다. 그래서 평안과 기쁨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오늘 119편의 마지막 구절들에 눈길을 담아보자.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165)에게 큰 평안이 있다. 주의 법의 완결은 “영혼을 살게 하시는 (175)” 예수님이시다. 그 분과 오늘도 동행하라. 그것이 참평안의 샘이다. “나의 모든 행위가 주안에” 있다(169). 주님한테만은 감춘 것이 없는가? 부끄러울 것이 없는가? 회개와 용서, 자유가 있는가? 그것이 평생 순수하게 흐르는 평안의 샘솟음이다. “나의 간구가 주 앞에 이르게 하소서(170, 169, ).” 기도로 인간관계를 어루만지고, 대면하고, 세워주는 삶 속에서 성장하고 확대하며 살아가라. 그것이 결코 썩지않는 이웃과 나누어 마시는 평안의 축배이다. “하루 일곱번씩, 내 입술로 주를 찬양하고,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합니다(163, 171, 172)” 샘은 솟아 흐르고 물은 모여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찬양의 샘물의 도달은 언제나 주님의 영광된 자리요, 찬양은 주님의 것이다. 찬양으로 언제나 삶의 우선순위를 주님에게 두라. 위를 바라보는 것을 넘어서, 위에서 주님과 함께 노래하며 세상을, 사람을 보라. 그렇게도 나를 격동시키는 것들이 하찮은 것임을 알게되고, 잔잔한, 놀라운 평화, 영원한 평화가 그대의 것이 될 것이다. “내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는 평안을 너에게 주노니...”

09-24-2019

제발 나를 살리소서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119:145-160 오늘 시편본문에서 “나를 살리소서”라는 고백이 5번이나 나온다. 우리가 사느냐 죽느냐는 일을 건성으로 입에 올릴 수도 있지만, 정작 죽음이 내 앞에 닥칠 때는 누구든지 죽음이 자기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주제이다. 그러므로 “살려주세요!”라는 요청은 그만큼 간절함을 담아 부르짖고 요청하는 표현이다. “살리소서”라는 외침에는 이대로 결코 망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있는 것이다. “살리소서”라는 마음에는 그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 알아야 한다.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지금 이런 “살리소서, 살려주세요”가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145, 146, 147)” - 나의 기도하는 시간과 간절한 기도가 살아나야 한다. 주님과의 아주 친밀한 교제가 살아나야 한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리소서(154)” - 성경말씀이 내 귀에, 마음에 살아있어서 성경을 읽던지, 설교를 듣던지 내 마음에 살아나야 한다. 회개든지 감동이든지 살아서 움직어야 한다. “나의 핍박, 나의 대적자(157)들이 많으나” - 마귀가 아닌 다음에야 예수 안에 있는 나에게 “나의 핍박, 나의 대적”은 구원해내야 할 하나님의 영혼일 뿐이다. 모든 인간관계를 변명하지 않고, 제외시키지 않고 사랑의 관계성으로 살아나게 해야 한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랑함을(살아감을) 보옵소서(159)” - 내 일터에서, 내 삶의 현장은 욕심과 이기심따라 세상으로 가고 있지나 않은지! 내 대부분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그 삶의 현장속에 신앙이, 예수가 기필코 살아나야 한다. 영적으로 메마르고 죽어있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던 예수님의 눈이 지금 우리를 보고 계신다. 그러니 오늘 살고 내일 죽는 마음으로 결단하자. “주님, 제가 지금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입니다. 저를 살려주세요, 제 영혼이 살아나게 하세요, 저의 삶을 바꿔주세요!"

09-23-2019

말씀은 읊조려야 맛이 난다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119:89-104 사전적 정의로 ‘읊조리다’는 말은 ‘뜻을 생각하며 감정이나 억양을 넣어 낮은 목소리로 읽거나 외우다’라고 나온다. 옛 선비들을 비롯하여 학생까지 효과적으로 수학하는 자세중의 하나가 읊조리는 것이다. 요즘 책을 읊조리는 모습을 주위에서 보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외외로 자주 주위에서 읊조리는 목소리를 듣는다. 돌아보면 이어폰꽂고 통화하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화장실에서까지. 제일 기억에 남은 읊조리는 모습은 예루살렘 성전의 남아있는 서쪽 벽인 통곡의 벽을 찾아갔을 때이다. 유대인들이 책과 토라를 펼져놓고 앞뒤로 몸을 흔들며 기도하며, 읽으며, 암송하며, 읊조리는 열정적인 모습이 잊혀지지를 않는다. 시편에서 낮은 소리로 읊조리다는 말이 자주 나타난다. 그 중의 한 구절이 오늘 본문에 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이다(v. 97).” 그렇게 읊조리다 보니 성경이 “꿀처럼 달다(103)”고 행복해 하기도 한다. 말씀에 반복되는 것은 주님의 깊은 관심이 거기에 있는 것인데, 읊조리는 마음은 무엇일까? 되풀이되는 읊조림은 은혜받은 자의 지속적인 호흡이다. 마음의 생각을 말씀을 받아 채우고 또 인정하며 내뱉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가 주위의 사람과 환경에 시달릴텐데, 내 생각과 마음 속으로 돌아올 때마다, 잠시라도 말씀을 생생하게 되살리는 것이다. 은밀한 읊조림은 주님과의 데이트이다.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을 알아채는 시간이고, 주님이 쓰신 “너를 사랑한다”는 편지 속의 한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며 행복해하는 시간이다. 그 막힘없이 줄줄히 나오는 읊조림은 내 말과 행동, 문제조차 당당하게 헤쳐나가고, 또 대면할 능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기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성경이 내게 즐거움이었기에 고난중에도 주저앉지 않았다, 망하지 않았다(92)” 너무나 아름다운 가을날이다. “만물이 주의 종(91)”이라 하신다. 만물속에 주인되신 주님을 깊이 묵상하자. 종일, 순간순간 주님의 말씀을 조용히, 그리고 확고하게 읊조리는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09-19-2019

파놓은 웅덩이와 감옥 앞에서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119:73-88 “(84b)주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는 교만한 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나이다” 본문에서 시편기자는 말씀을 불순종하는 자들에게서 받을 모함과 핍박을 “파놓은 웅덩이(84)”라 표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다. 지형적인 형태로 파놓고 빠뜨리는 것이 웅덩이라면, 인공적인 웅덩이는 바로 감옥이다. 믿음대로 살고, 말씀대로 살다보면 결국은 조직적 핍박을 당할 때가 오게 된다. 히브리기자가 “너희가 피흘리기까지 아직 대항치 않았다”말, 예수님이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니 담대하라”는 말씀도, 그리고 “예수 안에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는 바울의 디모데를 향한 말도 그런 핍박을 예상해야됨을 말씀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환경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길이 당장은 감옥까지 가는 위협적인 환경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주님을 위해 웅덩이든지, 감옥이든지 불사하리라는 결단과 감당케 해주시기를 원하는 기도는 지금부터 필요한 것이다. 요셉은 말씀을 붙들고 가족과 민족구원을 위해 기꺼이 웅덩이, 감옥을 다 거쳐간 사람이다. 예레미야는 울고 기도하면서 죽음이 꽉찬 웅덩이에서 건져지고 감옥문을 드나들며 말씀의 뜨거운 것을 선포한 사람이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도 “그리아니하실지라도”라는 결단으로 풀무불 웅덩이, 사자굴 감옥에서 자기들이 죽고 하나님 앞에 다시 산 사람들이다. 빌립보감옥과 로마감옥에서 바울도 마지막까지 핍박을 감당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을 통해서 복음의 꽃은 피워지고, 죄사슬을 끊는 참 영혼의 자유가 널리 퍼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이 세상의 타락한 문화, 인간중심의 교만이, 신실하고 순전한 신자들 앞에 큰 웅덩이, 감옥을 파놓은 시대이다. 조직적으로 신앙을 핍박하는 시대가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교만한 자들이 거짓으로 나를 엎드러뜨렸으나...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78...79)” 우리 모두 말씀과 기도의 열렬함으로 무장하자. 나약한 신앙으로 이리저리 흔들리지는 말자. 웅덩이 속에서도 열려있는 저 하늘, 감옥의 철문조차 열어주실 예수이름의 능력, 그리고 무엇으로도 막지못할 영원한 천국까지, 끝까지 주님과 함께 나아가자.

09-18-2019

제발 거울 좀 닦고 보자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119:57-72 백설공주 스토리에서 “거울아 거울아 누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니?”라고 묻는 왕비처럼은 아니어도, 사람마다 친숙한 물건중의 하나가 거울이다. 거리를 나서보면 쇼윈도우의 유리로 자신을 보는 거울로 삼고, 심지어 휴대폰을 거울로도 사용하는 모습을 때때로 본다. 아내한테서도 언젠가 “아! 가방 안에 거울이 없네!”이런 아쉬워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뭐 나도 가끔 거울을 본다. 아직도 그런데로 봐 줄만 하다 생각도 하고 ^^. 우리 모두가 거울을 사용하여 자기 얼굴을 보지만 그 보는 눈은 저마다 다르다. 그런데 거울을 볼 때마다 흐뭇해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자기 얼굴에 흐뭇해 하는 젊은이는 더러 있겠지만, 때로는 아쉬워하고, 때로는 한숨이 나오고, 때로는 저게 내 얼굴인가 한다. 어쩌면 이리저리 눌러보며 여기가 바뀌면 어떨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거울 속의 내가 확 달라질 때가 있다. 거울을 바꾸어서가 아니다. 거울을 깨끗하게 닦아서가 아니다. 어떤 때에 거울의 내가 달라질 수 있을까?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 보여주신다. 1. 늘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언제나 “신속하게(60)” 말씀대로 살아보라. 거울을 볼 때마다 빛나는 나의 모습이 “이게 나인가” 놀랄 것이다. 2. “감사하며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밤중에라도 (62)” 세어보라. 거울에 비치는 여전히 내가 소중한 존재임을 새삼스레 깨닫게 될 것이다. 3. 고난의 땀과 기도의 눈물로 고난을 닦아보라. 내 모습에서 신기하게 광채가 난다. 어둠 속에서 말씀과 그 성취의 축복이 왜 이리 빛나는지! 묵상하는 본문을 보면 그 체험이 아픔속에서 탄생한 진주처럼 빛난다. “고난당하기 전에 내 맘대로 살았더니 (고난을 겪고 나서는)이제는 주의 말씀대로만 삽니다(67), 고난을 통해서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어 오히려 세상 은금과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이 되었습니다(71, 72).” 지금 우리의 환경이 문제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다. 부디 그대가 절망, 아픔, 두려움으로 흐려진 마음의 창을 말씀과 긍정 감사와 기도의 눈물로 닦아내며 하나님의 놀라운 뜻, 선물이 확 보여질 수 있기를 축복한다. 이런 말씀이 떠오른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

09-17-2019

소장품과 애용품

성경묵상의 나눔:시편119:41-56 네명의 목사가 모여서 즇아하는 성경을 서로 말했다고 한다. KJV, NIV, RSV... 이런 성경을 언급하다가 조용히 있는 한 목사에게 “자네는 어떤 성경이 좋은가?”하니 그가 말하길 ”뭐 성경들은 다 좋은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말씀대로 살아가셨던 내 어머니 삶이 최고의 성경이라네”라고 했다고 한다. 장식품이나 옷, 물건에는 귀하게 잘 보관하며, 때로는 자랑하는 소장품이 있다. 그런가하면 친하게, 편하게 막 사용하는 애용품도 있다. 성경이, 그 말씀이, 여러분에게는 어쩌나 한번 소개하는 소장품인가? 늘 자주 사용하는 애용품인가? 오늘 묵상구절 전체 16절 중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매 구절마다 말씀에 대한 단어가 나온다. 얼마나 시편기자가 말씀을 사랑하고 그 길을 따라가는지 느껴진다. 말씀에 대한 사랑과 열정, 이것이 시편 119장 1절부터 176절까지의 전체 분위기이다. 시편기자의 사랑과 열정 속에 예수님이 베푸신 구원과 성령의 감동을 더하면 어떻게 될까? 말씀에 미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말씀에 심장마비가 올 정도가 아닐까? 이렇게 귀한 말씀이지만, 그 말씀은, 성경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보관하라 소장품으로 주신 것이 아니다. 막그릇같이 비록 깨질지언정, 닳아 꾸겨지고 찢어질지언정 막 사용하라고 애용품으로 주신 것이 말씀이다. 다 헤어지도록 섬기며 사신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말씀을 읽다가 나를 향한 사랑과 구원을 알게 되었습니다(41)”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다가 비난과 수치를 무장해제할 답을 찾았습니다(42, 46)” 그리고, “말씀 속에서 삶의 고난을 대면하니 영혼의 소생의 기회가 되었습니다(50)” “말씀을 묵상하며 매순간 읊조리다보니 이제는 내 속에서 즐거움과 행복으로 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옵니다(47, 48, 54)” 오늘도 여전히, “누군가가 말씀을 비웃고 공격하겠지만, 나는 결코 말씀을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습니다(51, 53)” 우리 잊지말자. 성경말씀은 설교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주일예배 속에 한 부분이 아니다. 나의 삶의 각 편린마다 고백하고, 대입하고, 적용하며 막 사용해야 하는 애용품이 되어야 한다.

09-16-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