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살렘 한인 연합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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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 칼럼

journal

나의 사마리아 우물가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4:1-14 유대지방과 갈릴리지역의 중간 지역이 사마리아이다. 포로와 퇴거, 이주의 아픔의 역사가 담긴 곳이 사마리아이다. 편견과 차별 속에 미움과 굳은 마음들이 깊게 반목의 경계선을 그어 놓은 곳이다. 오늘날 그런 사마리아가 너무도 많다. 그러나 그곳에도 예수님의 연민과 사랑과 복음을 나누어주시려는 발걸음은 거침이 없으시다. 본문에서 그 곳 사마리아에서 예수님이 찾아가시고 우물가의 여인을 대면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을 복음으로 불러내 천국백성의 반열에 세우신다. 그럼에도 제자들의 사마리아, 이방을 향한 스승의 마음을 알기까지는 아직도 까마득하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사마리아... 그곳은 오늘 우리가 웬지 꺼려져서, 갈까 말까 하는 곳이다. 피하고 싶은 곳이다. 오늘도 안 만나면 좋을텐데 하면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종족, 민족주의와 집단 이기심에 빠져 무관심해 하는 모든 곳이 바로 우리의 사마리아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과 사랑을 가지고 나아가면, 그곳도 죄많고, 한많은 여인네가 남정네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영혼의 기쁨, 영생의 평안을 되찾는 곳이다. 저 니느웨처럼 오히려 패역한 세대 속에서, 마을 전체가 예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곳이다. 나의 사마리아를 알고, 기꺼이 나아가지 전에는 우리 모두 제대로 예수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사마리아! 우리가 우리끼리만이라는 유대를 지나 땅끝까지 증인으로 살아갈 첫 관문이자 시작점이 되는 곳이다. 사마리아는 그저 통과하는 자리가 아니라 바로 땅끝이다. 우리가 사마리아를 향해 기꺼이 나아갈 때 주님의 나라는 그 자리에 임하는 것이다. 나의 사마리아가 어디일까? 먼 곳만을 생각하지 말라. 내가 예수 사랑, 예수의 긍휼을 가지고 낮아지면 보이는 모든 곳이, 만나는 사람이, 들리는 모든 소식들이 사마리아이다. 잊지말자. 사마리아는 피해가는 곳이 아니라,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가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섬김의 실천과 행실로 빛을 비추어야 하는 곳이다. 우리 모두 주님의 길을 따라 사랑으로 기꺼이 나아가며, 겸손으로 찾아 들어가며, 믿음으로 만나는 지역의 사마리아 선교사가 되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가지고 기꺼이 섬김의 손길, 사랑의 발길로 들어가 그곳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의 복음의 꽃을 피워가기를 결단해 본다. 당신이 그 섬김의 자리가 영혼을 건져올리다가 예수님을 만나는 우물가가 되기를 축복한다.

2020-01-11

비교의식, 열등의식에 자유하기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 3:22-36 여러분이 남에게 무시당해서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 일이 있는가? 배우자에게 “당신은 왜 그 사람만큼 못하는거지?”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일터에서 “아니 배알도 없어? 왜 그래?”, “왜 자네는 ㅇㅇㅇ 하는 것 못하나?” 혹은 부모자녀간에 “너는 왜 ㅇㅇㅇ보다 못하니?” 이런 소리를 들으며 속상해보았는가? 그리고 지금도 스스로 자신을 보면서, “왜 난 이것밖에 안돼나?” 그런 낙심을 경험하고 있는가? 요한의 제자들이, “사람들이 모두 다 세례주는 예수에게 가잖아요!(제자들의 세례)” 질투섞인 보고를 한다. 그 때 제자들을 대하는(26) 세례요한의 삶 속에서 우리의 비교의식이나 열등의식, 그리고 자기포기의 낙심의식을 이겨내는 신앙자세를 깨닫게 해준다. “신랑친구가 되어(29)” - 내가 하는 일을 즐겨야 한다. 내 환경 속에서도 기뻐해야 한다. 그렇게 몸으로든 마음으로든 힘든 일들고 지치는 일이라도, 누가 시킨 것을 억지로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고역스러운 일이 되고, “좋아하는 일이다, 일하니 감사하다,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지금 운동하고 있다”하고 생각하는 순간 힘든 것이 행복하고 즐거워진다. 그런 자발성, 즐거움으로 바꾸기가 힘든가? 정말 사람이 긍정마인드, 행복함으로 확 바뀔 수 있는 길이 있다.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없이 주심이라(34)”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의 기쁨을 꼭 구하고 받으면서 살아가라. 그러면 내 한없이 복된 인생은 남과 비교불가이다. “(나는) 그의 (예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28)”- 내 모든 삶을 맡겨주신 분을 알고, 인정하고, 빗나가는 눈길을 오직 그 분에게 초점을 맞추면 세상에 남과 비교되고 차이나는 인생이, 내게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자유함이 된다. 성도의 자유함과 권세는 위를 바라보며 사는 것에 있다. 세례요한이 얼마나 위를 바라보는가! “하늘에서 주신 바(27), 위로부터 오시는 이(31),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31) 하나님이 보내시는 이(34), 믿는 자의 영생(36)”- 성도의 비교/열등의식으로부터 자유함과 권세는 진정 위의 것을, 위의 상급을 바라보며 사는 것에 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고(36)” - 내 마음의 소유주가 바뀌어야 한다. 아들을 영접한자, 믿는 자는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가 사시는 것이다. 그대가 예수를 영접하고 내 안에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산다면, 비교의식, 열등의식이 다 뭔가! 고약, 흉악, 강퍅, 악취나는 나를 자녀삼아 주신 그 은혜의식에 감사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2020-01-10

망쳐야 산다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 18:9-24 망쳐야 사는 사람이 있다.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다. 그러나 또 망쳐야 사는 사람이 있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본문에 나오는 세상 권세가 최고인줄 아는 왕과 정치가(9절)들과 돈과 가지가지 진귀품들과 소유가 언제나 자기 것인줄 착각하는 부자(12-13)들이다. 그들도 망쳐야 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도 일순간에, 신속히(10, 17, 19) 빠져나가버린다는 것을. 그리고 망쳐서 '사는데' 까지 나가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일순간에 망해 사라짐을(15-19) 이제라도 알아 오직 영원한 나라와 그 길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혹 부자나 권세가는 아니더라도 그대도 망쳐보았는가? 육신의 질병으로 망쳐보았다면, 물질의 곤고함으로 망쳐보았다면, 진학과 진급의 길목에서 망쳐보았다면, 인생의 갈등으로 묘하게 얽여 망쳐보았다면, 이제 세상에 망쳐서 예수 안에 사는 기회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주님은 나의 이름을 부르시며, 당신의 이름을 부르시며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속에서 망쳐진 것 같지? 완전히 망친 것은 아니다. 내게로 오너라. 망쳐서 살게 하는 것, 그것이 내가 너를 부르는 때이란다”

2019-12-02

음녀의 술잔 속에 담긴 미혹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17:1-8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던 것 같다. 좋아하셨다기보다 젊으실 때의 지방공무원직을 그만두시고, 서울로 상경하여 사업은 실패하고 할 일없이 살아가는 가운데, 의지할 것은 술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진작 예수를 아시고, 성령의 술에 취하셨으면 좋았을터인데... 평소에는 조용하시고 좋은 아버지이지만, 술이 취하면 달리지시던 모습이 너무나 이상하고 무섭기만 하였다. 그래도 아버지는 취중의 실수가 가정 안에만 머물렀지만, 오늘날의 수많은 사람들이, 술과 약의 취중에 온갖 사건과 부끄러운 일들을 벌인다. 오늘 본문의 “큰 음녀(1)와 미혹에 빠진 자들, 음행의 포도주(2), 손의 금잔(4), 핍박의 피에 젖어(6) 죄와 쾌락에 취해있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오늘날 신문에 오르내리는 범죄와 사건 들의 배경 속에서 재현되는 일들이다. 누구라도 술과 쾌락, 물질의 탐욕에 익숙해지면 실수가 가까와진다. “음행의 유혹”은 자주빛, 붉은 옷, 금과 보석 진주로, 금잔으로 아름답게 보이지만(4), 그 안에는 “가증함과 더러움(4)”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작심하지 않으면 이겨내기 어려운 일이다. 바벨론같은 세상이 종말로 다가갈 수록 많은 사람들이 분명 음란하고, 경건과 거룩을 모독하는 일들에 빠지기가 쉬운 것이다. 나는 깨끗하고 안전지대에 있다고 안심하지는 말라. 내 가족과 이웃들을 돌아보라. “예수의 증인으로 흘리는 피(6)”의 순결한 삶을 사모하며 주의 도우심을 기도하자. 연말과 연휴들, 주위의 번쩍거리는 화려함속에 음행의 포도주가 아닌, 피에 젖은 예수의 구원과 성령에 취해 사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한다. 오늘도 위태한 그대를 생각하며 기도한다.

2019-11-29

짐승의 표가 내게도 슬그머니 나타날 수 있다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 16:1-9 가끔 우체통이나 자동차 유리창, 집 문 틈으로 광고 전단지가 끼어져 있는 것을 본다. 별로 도움이 안되는 것이 많고, 심지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꽂혀있기도 한다. 원하지 않아도 내 마음에 끼어놓는 것들은 무엇일까? 오늘 말씀에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2절)”고 한다. 결국은 회개할 기회조차 잃은 (9절) 불쌍한 영혼들이 받는 것이 짐승의 표이다. 한편 지금도 우리가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이 짐승의 표이다. 그 짐승의 표는 우리 삶에, 내 마음에 그리 먼 것이 아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들어온 죄를 죽이지 못할 때, 온갖 욕정 속에 짐승의 표가 솟아나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에로의 부르심, 예수의 십자가 구원, 성령의 인치심을 거부하고, 받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 자체가 짐승의 표이다. 세상의 온갖 쾌락에 나를 맡기고 이 세상이 전부인양 끌려가는 모습들이 짐승의 표이다. 정치나, 돈이나, 문화나, 세상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미혹하고 유혹하는 악한 세력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용당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짐승의 표이다. 내 속에 그런 악한 짐승같은 표가 행여 무엇인지, 어느새 뭍어가는 짐승의 표시는 없는지... 그러나 결코 두려워 말라! 주님은 짐승의 표에는 관심이 없으시다. 그러나 짐승의 표 앞에 흔들리는 뭇 영혼들을 여전히 뜨거운 사랑으로, 보신다. 자녀인 우리에게 죄의 저주를 지워버릴 어린양 예수의 피가 있다. 짐승의 표조차 태워버릴 성령의 불과 인치심이 있다. 슬그머니 꽂으려 하는 짐승의 표같은 세상 유혹을 뽑아내 버리자.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천국의 상속자로,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어디를 봐도 종말의 참상이 보이는 이 마지막의 시대를 살아가자.

2019-11-27

날이 선 예리한 낫 앞에서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14:14-20 농사일을 오래동안 해 온 분들이 낫으로 풀을 깎는 것을 여러번 본 적이 있다. 잡풀숲의 바닥부분을 능숙하게 도려내듯 베어내고, 후려쳐 모아 시원하게 깎아내는 모습은 거의 장인의 수준이다. 그 장인의 수준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훈련된 손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날이 선 낫의 칼날이다. 제대로 날을 세워 갈 수 없다면 제대로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시퍼런 날”을 무서워하지 않고, 또 제대로 갈아 쓰는 것이 중요하다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필경 훌륭한 농부나 요리사가 아닐까 싶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이 들고 계신 예리한 낫의 광경을 요한이 보고 있다. 구원과 심판의 사이를 한치도 오차없이 베어내어 실행하실 권능의 손길을 거기서 보게 된다. 우리 모두가 그 예리한 날선 낫을 두려워말고 대면하고 또 잘 다루어 가자. 예리한 낫(계시록): 주님이 베어내시면 난 구원의 자리인가? 심판의 자리인가? 예수영접의 구원을 확신하고 심판 앞에 깨어있으라. 좌우의 날이 선 검(히브리서): 말씀의 숙련가인가? 세상정보통에 불과한가? 아직도 무딘 나의 말씀의 검을 갈아내고, 맛갈 난 영적 음식을 위해 무궁무진한 말씀의 재료를 찾으라. 성령의 검(에베소서): 지금 진동하는 영과 가슴저리는 은혜의 삶을 누리고 있는가? 애매하게 적당하게 살려하지 말라. 영적 삶과 육적 삶의 차이는 칼날처럼 분명하다. 날선 도끼(세례요한): 내 목이 잘리는 날선 칼날의 핍박을 두려워하나, 나무뿌리에 놓인 날선 도끼처럼 임박한 영원한 심판을 두려워하나? 오늘의 영혼구원과 내일의 주님 오실 날을 고대하며, 칼날처럼 선명하되, 죄를 자르시고 사랑으로 감싸신 주의 은혜속에서 우리 모두 오늘을 살아내자.

2019-11-25

예수님을 앞에 두고 하는 싸움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계시록 12:1-17 세상은 온통 싸움 투성이다. 정치가들이 싸우고, 사업가들이 싸우고, 치안을 맡은 이들이 끝없는 범죄와 싸우고, 학생조차 경쟁으로 싸우고 있다. 모두들 이겨야 하고, 이기면 주도권을 갖게 되고, 재정이나 남 앞에, 환경에 유리한 위치나 안정을 갖게 된다. 비록 한 때이겠지만.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싸우고 있다. 이 싸움이 진짜 싸움이다. 온갖 죄와 악, 전쟁과 인재, 불평등, 갈등과 아픔 뒤에서, 하나님을 외면하게 만드는, 그 원인이 되는 악한 세력에 대항하는 싸움이다. 그들의 공격이 우리의 삶에 근본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내 탓이라고 절망말고, 남 탓이라 원망말고, 수양부족이라 착각말고, 그 속에 악한 영의 계략부터 알아내고 싸워 이겨내자. 본문에서 붉은 용, 옛 뱀, 마귀, 사탄의 이름이 드러난다(3, 9). 지금까지도 우리를 흔들었고, 흔들려고 하는 영적 세력의 총칭이다. 그런데 이 악한 세력의 공격은 우리보다는, 태어날 한 어린아이, 곧 이 땅에 오셨고,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하고 있다. 누구를 잘라내야 완전히 패배시키고 승리할 줄을 너무나 잘 아는 사탄의 악한 공격이다. 우리도 잘 알아야 한다. 비록 육신의 몸에 해산된 어린아이같은 예수이시나 그 분이 결국 만국을 다스실 철장권세(5)를 가지셨고, 마귀 사탄을 내쫓는 최후의 승리자시다. 우리의 싸움은 철저히 그 예수 한 분을 앞세우고 싸우는 싸움이다. “우리 형제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그를 이겼으니(11)” -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시다. 아무리 강해도, 아무리 혹독해도, 아무리 오래 걸려도 승리는 예수님에게, 그 분을 앞에 둔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예수 앞에 악한 세력은 결국) 내쫓긴다”는 오늘 본문의 선포가 (9, 10, 13) 지금 시련을 겪는 여러분에게 담대한 대면이요, 완전한 소망이 되기를 기도한다.

2019-11-21

부디 신앙의 동지를 찾으라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 11:1-14 요한 계시록의 배경인 로마의 극심한 박해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믿음의 성도들이 받을 박해는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고난 속에 나 또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핍박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게 고난이 큼은 하나님의 때가 다가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없다 자만하지는 말라.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영적 순례의 길이 아닌 것이다. 본문에서는 숫자 둘(2)이 거듭 언급된다. “두 증인(3), 두 감람나무, 두 촛대(4), 두 선지자(10)...” 그리고 남은 자들(13)도 둘에서 시작한다. 혼자 이기보려 하지 말라. 주님은 혼자가 아닌 “두 세사람이 모인” 그 곳을 주목하신다. 그대의 고난과 문제가 신앙 안에 들어와 있다면 주님은 반드시 또 한사람을 붙여 주신다. 신앙은 하나님만을 의지하지만, 대부분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의지하게 하신다. “주님 저에게 어떤 한 사람을 지금 붙여주시렵니까?” 기도하고 둘러보라. 두감람나무와 두촛대가 교회를 상징하나, 두사람이 모인 곳에서 교회가 시작이고, 그 두 사람이 바로 교회이다. 그러나 그 두사람은 그냥 하나 더하기 하나가 아니다. 둘 사이에 예수의 피로 하나됨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그대가 먼저 낮아지고 그 영혼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 나보다 그를 낫게 여기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함께해야 모두 살 수 있다는 절박감이 있어야 한다. 주님이 이 환난의 시대에 우리 각자의 약함을 아신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도 주시고, 또 한사람의 영적 동반자를 찾으라 하신다. “생기가 (죽었던)그들 속에 들어가니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11)” 허무한 세상의 친구들에게 연연하지 말고, 부디 믿음의동지, 기도의 동지와 하나되어 성령의 생기가 그대의 삶에 충만하기를!

2019-11-19

저도 보았고 사모합니다!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 7:9-17 오래전에 캔사스시티에 살 때에는 저녁하늘이 너무 좋았다. 산이 없이 도시가 온통 평지 벌판인 관계로 저녁노을이 서쪽 하늘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동서남북에서 함께 노을이 보이곤 하였다. 그리곤 늘 생각하였다. “동서남북 주위를 보면 온통 벌판뿐이니 이곳은 엉뚱한 것 안 보고, 하늘만 보고 사는 곳이야. 축복이야!” 사도요한의 밧모섬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사방이 바다이니 위를 바라보았고, 소망하는 분이 주님뿐이니 더더욱 위만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런 요한에게 하늘의 문이 열렸다. 표현을 하지만,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늘의 영광과 주를 만나는 감동의 감동을 체험하며, 오늘 말씀을 적고 있다. 이런 놀라운 광경과 체험을 비교할 대박이 어디있을까! 흰옷으로 입히운 수많은 무리와 내가 함께 할 어린양 예수...(9) 생물과 장로들과 하나님을 경배하는 최상의 예배(10), “찬송, 영광, 지혜, 감사, 존귀, 권능”속에서...(12) 천국 장막의 보좌 위의 내가 만날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15) 내게 베풀어 주실 풍성한 식탁, 끝없이 흐르는 생수, 뜨거움도 추위도 감싸주시는 따뜻함...(16) 그리고 날 쉴만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 내 눈물, 내 상처 어루만져 주시는 자애로운 하나님의 미소와 손길...(17) 주여, 저도 살아있는 말씀 속에 주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모든 위로와 기쁨이 거기에 있군요! 저도 그 곳을 사모합니다. 그리고 이 짧은 세상을 끝까지 견디게 하소서, 기꺼이 이기게 하소서.

2019-11-14

내게 주신 144,000보다 더 큰 것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 7:1-8 유대인들에게 12숫자는 완전숫자이다. 그 수에 아주 큰 숫자 1000을 곱하고, 다시 12지파를 곱한 숫자가 오늘 계시록에 나오는 144,000이다. 단순한 한정된 숫자의 인원이라는 개념보다 핍박에도 이겨낼, 순교하면서도 지켜낼 순전한 믿음의 사람들을 말한다. 엘리야가 핍박받을 당시 신앙을 지키고 있던 7,000명의 사람들이 생각난다. 완전한 숫자의 12는 예수라는 한 분으로 모아지고, 1000이라는 숫자는 모든 주를 부르는 영혼으로 넓혀지고, 12지파는 오늘날의 각 교회 속에 자리잡고 있다. 그대가 예수를 믿고 교회 안에 진정한 지체로 천국을 소유했는가? 그대는 144,000을 뛰어넘은 더 큰 자로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144,000보다 큰 예수가 우리에게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144,000보다 큰 한 영혼을 구원하려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144,000보다 큰, 믿는 자라면, 누구든지 들어갈 천국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어찌 144,000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데 144,000이 예수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한 영혼의 소중함을 위해 사는 것이라면, 천국을 소유한 자의 넉넉함이라면, 그대는 그 144,000 안에 있음을 확신하는가? 겸손히 “그 하나님이 은혜와,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지금도 “은혜아니면 살아갈 수 가 없네”라는 찬양처럼 낮아져 예수를 따라가고 있는가? 후회없이 주는 자의 섬김을 살고 있는가? 잊지말자. 이마에 인침을 받은 사람(3)은 자기 눈에 인침이 보이지 않는다. 섬기는 이웃의 얼굴을 통해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2019-11-13

다같은 죽음은 아니다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3:1-6 예수님은 사데교회와 교인들에게 죽은 신앙을 지적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녀들의 영적 죽음에 얼마나 마음이 상하실까? 그런데 사데교회 교적 속의 한 명의 이름은 내 이름, 당신의 이름이다. “살았다 하나 넌 죽은 자다!(1)” 이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두렵고 놀라겠는가! 이것은 버가모 교회의 안디바(2:13)의 순교적 죽음과는 다른 비참한 죽음이다. 죽음이 다같은 죽음이 아니다. 어떻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느냐는 전혀 다를 수 있다. “실상은 죽은”, 죽은 자가 있다(1 b). 성령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고, 사탄에 얽매인 자이다. “그 남은 바 죽게 된”, 죽어 가는 자가 있다(2). 메마르고 파리한 영혼의 상태로 예수께 인생을 맡기지 못하고 세상 속에서 흔들리는 영혼들이다. “도둑같이 긴박하게 오실 주 앞에”, 죽도록 부끄러울 자가 있다(3). 깨어서 후회없이 살지 못하다 천국에서 주님 앞에 서는 부끄러운 구원이 이것이다. “옷을 더럽히지 않는 몇명”의 죽은 영혼조차 살리는 자가 있다(4). 캄캄한 죽음의 위협에서도 한가닥의 예수의 생명의 빛을 나누는 사람들이다. 모든 교회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붙여주신다. “이기는 자,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는 자” 죽어도 영원히 사는 자가 있다(5). 환난의 시대 속에서조차 마지막까지 신앙을 지켜내고 예수 앞에 선 자이다. 그대는 어디에 속해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무슨 죽음을 원하는지... 아직도 은혜받을 때, 구원의 날이다. 사데교회를 향한 경고를 기꺼이 새기고 오직 예수 안에 죽은 신앙이 아닌, 생명의 신앙으로 살아가자.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 그 보혈, 그 이름, 그를 향한 믿음만 있다면, 아버지 품안에서, 천사들에게 둘러싸여(5b) 죽음을 넘어선 영생의 길을 가는 것이다.

2019-11-06

회개가 겸손하고 건강한 신앙의 길이다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2:18-29 열흘 동안을 회개라는 주제에 매달리며 특별기도회 중이다. 함께 기도하는, 이 주제에 마음의 심각함으로 꽂히는 모든 이들에게 회개의 영이 함께 하시는 복이 있기를 빈다. 본문의 두아디라 교회와 교인들은 대단하였다. 예수님은 “네 사업, 사랑, 믿음, 섬김과 인내”를 잘 안다고 하신다. 이것은 교회 안에 교우들이 갖추기를 원하는 전체목록이다. 헌신을 주제로 하는 설교는 이 주제들이 전부가 아닌가! 그리고 처음보다 나중의 행위가 많다고 하신다. 날이 갈수록 잘 한다니 이보다 더 큰 인정해주심과 위로가 어디있을까? 그러나 그런 아름답고 건강한 신앙에도 위기는 존재한다. 우상 앞의 성적 유희와 욕심나는 음식, 쾌락으로 유혹하는 이방 우상종교 의식으로 섞으려 하는 이베벨같은 선지자(20)들이 치고 들어오는 일이었다. 오늘날의 타락한 인간중심적 자만, 사탄적인 온갖 문화가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한번에 나빠지고 병드는 것이 아니다. 서서히 빠져들고, 끌려들다가 어느날 이세벨 옆에 있게 되는 것이다. 남의 문제같다가 어느새 내 문제로 옮겨와 있는 것이다. 그런 세상 속에서 신자로서의 삶은 어떻해야 하는가?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회개하라 하신다(21). 주님은 우리의 “마음과 뜻을 살피시는 분(23)”이라고 하신다. 그렇다 ! 회개에 깨어서 자신의 변질을 닦아내야 한다. 내 사업, 사랑, 믿음, 섬김, 인내” 속에 자발적인 마음이 있은가 살펴야 한다. 사랑과 긍휼의 생각(23)이 흘러나오는가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빗나간 마음과 생각을 불꽃같이(18) 보시고, 주석(18)같이 다루어 치유하시는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언제 한번 하나님 앞에 통렬하게 눈물을 쏟아본 적이 있는지... 하나님 앞에서 지금도 깨어있는 회개, 이것만이 신자의 참된 겸손이다. 즈금도 예수님이 우리 교회와 우리 마음에들어오셔서, 성령이 하시는 음성에 회개로 깨어있는, 들을 귀(29)가 있는 지체들을 찾으신다. 지금도 깨닫는 내가 용납하는 작은 죄악조차 부디 내일로 미루지 않기를!

2019-11-05

내 수고를 주님은 아신다, 다 아신다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 2:12-17 주님은 다 아신다. 우리가 순교자 안디바처럼(13)은 아니어도 어떻게든 다가오는 핍박을 믿는 사람답게 이겨내려 한다는 것을. 주님은 다 보신다. 우리가 세상 발람(14), 세속 니골라당(15)의 교훈처럼 스며오는 육신의 쾌락과 정욕의 유혹에 흔들릴 때 거부하며 거룩함으로 몸부림친다는 것을. 그러므로 여전히 이기도록 순간순간 흔들리는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과 몸을 회개(16)로 주님과 하나되게 하자. 주님이 싸우시고 직접 다루시게 맡겨 드리자. 그러므로 끝까지 이기도록 약속으로 주신 성경의 말씀을(12) 굳게 붙잡자. 삶의 능력으로 주신 성령(17)에 사로잡히자. 감추었다 주시는 내 삶 속에 응답이라는 만나(17)를 먹으며 오늘을 살고, 천국의 흰돌에 떡-하니 새겨진 내 이름(17)을 환히 보며 천국까지 살아가자.

2019-11-04

그대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기를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7:14-25 한 마을에 순회선교자가 옥외에서 설교를 하였다. 한 부자는 지나가다 그의 설교를 듣게 되었는데, 목사의 설교가 “돈을 할 수 있는대로 많이 벌어야 합니다”는 말에 귀가 번쩍했다. “설교를 잘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돈을 잘 관리하고 저축해야 합니다”는 말에 “명설교가이네!”하면서 손뼉을 쳤다. 마지막으로 선교자는 “그리고 그 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써야 합니다!”라고 말하자, 부자는 “에이, 예수쟁이들은...시간 아깝게 버렸네”하면서 떠나고 말았다. 오늘 말씀이 집을 바치기로 서원한 사람, 밭을 바치기로 서원한 사람이 도중에 그 서원을 무를 때의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완전 취소가 아니라, 집과 밭이 저들의 생업에 필요하기에 대신 적절한 돈을 내고는 그 서원을 이행할 수 가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 작정한 것도 뚝 떼먹는 요즘의 시대에, 못 지켜낼까 두려워 서원도 안하는 요즘 신앙분위기에서, 본문의 집을 드리며 서원하는 성도, 밭을 드리며, 또 끝까지 서원을 지키는 성도들의 믿음이 소중하게 깨달아진다. 지금도 우리는 “주님께 충성하게 하소서, 헌신하게 하소서”라고 고백하지만, “내 집과 땅도 주님 원하시면 드리겠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느냐 물으면 대답이 시원하게 나올까? 그렇다! 분명 그렇게 아멘으로 고백할 수가 있는 성도들이 있음을 안다. 이번 주일에 그런 설교들을까 겁내지 말라. 주님은 더 풍성한 요청을 하신다. 집은 환대의 공간이고, 땅은 소득의 원천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 집, 내 땅에 연연하지 말고, 내 집을 열어 사람들을 초청하고 환대하며, 땅의 소득을 풀어 대접하고 섬기며 살라고 하신다. 우리 마음이 집이 되어 주를 아직도 모르는 불신자들을 품으라 하시고, 우리 손이 땅이 되어 필요한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적극적으로 찾아 변변찮은 내 소득이라도 나누며 섬기라 하신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가 이미 드린 집과 땅의 서원인 것이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주의 영광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기꺼이 써야 합니다”는 말에 뭐라 하겠는가? 노멘? 글쎄요멘? 부디 "아멘"으로 오늘도 내일도 살아가기를!

2019-10-30

믿음이 있어야 서원도 한다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7:1-13 레위기 마지막 장을 묵상한다. 지루한 것 같은 레위기도 은혜의 연속임이 감사하고, 한편 좀 더 주의 뜻을 깊이 알지 못하며 지나가기에 아쉽기도 하다. 오늘 말씀에는 서원하는 것과 그 예물드림에 대해서 나온다. 서원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만 생각하는데, 본문의 강조는 오히려 내 편에서 하나님께 드릴 예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남녀, 나이별, 빈부차이를 고려해 예물을 드리고, 드릴 예물을 변경할 경우 제사장을 통해 정하도록 하고 있다. 난 무얼 드릴까 생각해 본다. 다정한 부부, 친밀한 부모와 자녀, 친한 친구 사이에서는 서로의 나눔이 있다. 다른 것이 없다면 적어도 서로간에 따뜻한 마음의 나눔이 있는 법이다. 부모를 의지하는 아이들이 어릴 때에 얼마나 아빠 엄마를 찾든가! “아빠! 아빠!...” (그 때가 그립다 ^^) 당신이 한번도 하나님 앞에 서원해 본 적이 없다면, 이유는 하나이다.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내 문제를 풀어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고, 나에게 관심있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서원, 이것은 하나님과 더 깊어지기 원하는 드림과 나눔, 무엇보다 마음의 드림과 나눔이 서원자의 마음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꼭 서원이 있는 신앙이 되자. - 믿음으로 주 앞에 나아가서 고백하고, 약속하는 것이 서원이다. - 기도가 서원이고, 서원이 기도이다. - 응답하셨고, 응답해 주실 주께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서원이다. - 그저 주님을 향하고 “주님 무엇을 원하세요?” 여쭈는 것이 서원이다. - 너무나 소중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내 안에 사시는 예수와 함께 하나님을 향하고, 세상을 향하는 것이 서원중의 서원이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뭘 원하는가?) 나머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더 하시리라." 이것이 나도, 여러분도 고백할 서원이다.

2019-10-29

엄하게 부리지 말자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5:39-55 오늘 말씀에 이스라엘 자기 동족을 “종으로, 엄하게 부리지 말라”고 네번이나 말씀하신다(39, 43, 46,, 53). 성서시대 당시에야 종이 노예의 개념과 가깝지만, “엄하게 부리지 말라”는 말씀이 지금은 하는 일에 함께 하는 일군, 직원, 동료, 이웃에게, 심지어 가족, 배우자에게 대하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러분은 가정, 일터, 학교, 사람 사이에서 자신이 부리는 사람이 생각하는가? 부림을 받는 사람이라 생각하는가? 종들 사이에도 부리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종이 주인을 부리기도 하는 세상이 지금이다. 내가 대하는 모든 사람은 사실 내가 부리는 사람이다. 마음으로든, 행동이나 말로든, 내 입장에서 대하는 모든 사람들이기에. 그러므로 “엄하게, 함부로 부리지말라”는 말씀은 내게 하시는 말씀이다. 살면서 순간순간 “애굽같은 죄의 늪에서 건져주신 나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대하실까”하는 것이 함부로 부리지 않는 길이다. 더 이상 참기 어려울 때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처럼, 내가 사랑하는 아들 딸처럼 대해주자” 하는 결론에 따르는 것이 엄하게 부리지 않는 것이다. 해도 너무한다 할 때도 “보살피고 내 안에 두고, 여전히 불쌍히 여겨주는 것이” 부리기는 하지만 함부로 부리지 않는 것이다. 남은 나처럼 여기고, 아니 나보다 낫게 여기고, 성령의 마음으로 보고 대해주는 것이 함부로 부리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이 한마디가 엄하게 부리지 않는 바른 지침이 아닐까?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나니” 오늘도 분명히 엄하게 부리지 말아야 할,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당신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아니 주님이 보내실 것이다.

2019-10-24

내 땅, 다른 주인이 있다 하네요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5:23-38 어릴 때는 “땅 땅!”하며 막대기 총을 들고 놀았고, 또 친구들과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땅따먹기 놀이를 하곤 했다. 그 때는 몰랐다 그 땅에 주인이 있는 줄. 그래서 열심히 “여기까지 내 땅이다. 내 땅 더 많아졌다”하며 흥분해서 놀았다. 그리고 저녁이면 엄마의 부르는 소리에 발로 쓱쓱 그은 금들을 지우고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 인생이 땅따먹기와 무엇이 다를까? 주님이 주신, 그리고 여전히 주님의 것인 땅 위에서 나름대로 줄긋고 “내 땅이다. 내 땅이 많다”하며 살다가 부르시면 쓱쓱 내려놓고 주께로 가는 인생이 아닌가! 오늘 말씀에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나그네”로 주님과 함께 하고 있을 뿐이라 하신다. 지금이야 내 땅, 내 건물하지만 글쎄, 300년 후에도 그 땅이, 그 집이 내집으로 남고, 내 후손이 살고 있을까? 희박한 일이다. 토지가 주님의 것이라면 주님은 우리에게는 무엇을 주신 것일까? 그것은 그 땅위에서의 가족과 이웃과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다. 땅을 잃은 친지에게 그 땅을 사서 돌려주는 것도(25), 가족들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땅위에 다시 터전을 잡는 것도(26), 희년에 다시 돌려주고 받고 함께 감사하는 것(28)도, 가난한 형제와 동거하는 것(35), 돈을 꾸어주고 이자를 받지 않는 것도(37)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며 살라는 것이다. 무디의 책자에서 이런 말이 오늘 눈에 확 뜨였다.. “ 세월은 세상에서의 셈법이고, 영원은 하나님의 셈법이다.” 그렇다 우리의 셈법도 주님과 함께 영원을 누리며 영원을 향해 즐거이 가는 것이다. 흔히들 목매는 동산이나 부동산, 돈이나 명예가 얼마나 갈까? 우리도 영원을 셈하며 주님을 따라가는, 지금 애굽같은 세상에서는 그저 잠시 머물 거류민임을 한시라도 잊지말자.

2019-10-23

내게 주신 희년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5: 1- 22 언젠가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했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의 무표정한 표정에 좀 놀란 적이 있다. 나라도 미소로 쳐다보니 이상한 사람처럼 여기기도 한다. 한국에서만 그런가? 여기 미국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실없는 것같아도, 이상한 사람처럼 여겨도 난 언제나 웃어야 할 일이 있다. 예수 때문이다. 기쁨을 주신, 희년의 주체이신 예수님 때문이다. 7년째가 되면 땅도 기뻐할 희년이 오는 것이고, 50년째가 되면 묶였던 모든 속박을 풀어주고 다시금 땅도 사람도 돌려보내는 희년(주빌리, 요벨), 하나님이 복의 근원임을 믿고 순종하는 희년을 시행하라, 이것이 본문 25장의 말씀이다. 50년이면 대부분이 조상이나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땅과 종들을 풀어주어야 할 때일 것이다. 희년의 때가 다가올 수록 싸지는 땅값도(16), 일하는데 절실한 일군들이 돌아감도 반갑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풀려 돌아가는 것이, 땅을 되찾는 일이 반갑지 않은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 하나님이 참소유자이시요 소유욕심을 막고, 만사가 때가 있을을 알게 해주시는 희년이지만, 물질의 욕심이 끼면 끝없이 복잡해진다. 제도적 희년만으론 참 기쁨과 회복의 기회가 되지는 못한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4장에서 자신의 공생애의 사역을 선포하신다. 요약하면 “성령의 기쁨 속에 오신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영육간에 복을, 포로된 자에게 희년의 자유를, 눈먼자 보게함과 눌린자에게 희년의 자유를, 은혜의 희년을 전파하려함이라” 그렇다! 바로 예수 안에서 기쁨으로 나누어주고, 감사로 받는 희년의 시혜자와 수혜자가 있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의 동등한 복받음의 인생임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누구든지 50년을 두번 지나기 전, 결국은 들어가야할 천국의 희년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예수 안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진정한 희년의 기쁨이 내게도 이루어졌다. 우리 모두의 몸도, 영혼도, 삶의 현장도 예수와 함께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희년이야말로 진정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던 자가 기쁨으로 돌아오는 날”을 주신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절기이다. 희년이야말로 예수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가 되어지는 우리에게 이미 주신 축복이다.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며 잘 관리하고 나누라고 희년의 복으로 주셨고, 갚을 길이 없는 빚진 자인 내게도 “그래도 사랑한다”시며 거져주신 희년의 은혜임을 언제나 감사하며 살아가자.

2019-10-22

자기를 괴롭혀 믿음의 도약을 하자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3: 23- 32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속죄일의 준수를 명하신다. 일을 멈추고 반드시 “자기를 괴롭게 하며(27, 29, 32)” 화제를 드리라 하시며, 불순종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하신다. 축제와 같은 다른 절기들에 비하면 심각하게 여겨지는 절기이다. 자기를 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히브리어 “아나”는 “엎드리다. 자기를 겸손하게 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영어번역의 “Self-denial”의 의미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 나태해져가는, 메말라가는 우리 몸의 구조, 정신구조를 잘 아시는 하나님의 처방이시다. 그러기에 자기 괴롭힘은 믿음으로 새롭게 되는 도약의 기회라 깨달아진다. 다윗은 금식하며 자기를 괴롭게 하며 서원기도를 드렸고, 욥은 자신의 연단으로 괴롭게 하였지만 정금같이 나옴을 고백하였고, 제자들은 마가다락방에서 기도하며 “회개하라...”를 자신에 적용하며 자기를 괴롭게 하니 성령이 임재하셨고,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자기 몸을 치며 괴롭게 하며 더욱 사역에 정진하였다. 예수님이야말로 십자가로 자신을 괴롭게 하며 구원을 이루셨고, 우리에게 자기 부정의 십자가를 기꺼이져야 제대로 따라올 수 있다 하신다. 그러므로 “자기 부정, 자기 괴롭힘”은 우리에게 필수이다. 우리도 바로 지금 하던 일을 꾹 멈추는(28, 30) 자기 괴롭힘으로, 남을 판단하기에 익숙한 맘보와 시선을 돌려 자기 괴롭힘으로, 바로 지금 회개함으로 방향을 점검하고 칼날같이 수정하는 자기 괴롭힘으로, 다시금 무릎끓리는 기도와 채워넣는 말씀의 자기 괴롭힘으로, 변질되고 둔해져 버린 나를 살리고 속죄일의 처방을 따라 다시 믿음의 도약을 시작하자.

2019-10-17

모든 것을 첫 열매로 삼고, 드리고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3:9-22 아무리 작은 논밭떼기도 추수때는 흥이 나는 것이다. 그동안의 노고도 다 씻기고 까만 얼굴들에도 웃음꽃이 번져가는 것이다. 보릿고개같은 궁핍도 순간이나마 면해보고, 온 가족이 곡식팔아 들어오는 삯으로 뭐 해볼량 저마다 속셈이 있는 때이다. 생각만 해도 한해의 절정이라 할 때이다. 그 때 철든 믿음의 가족이 한마디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하나님께 참 감사하다!” 그래서 모두가 마음을 모아 첫수확을 주께 올려 드린다 “여호와께서 먼저 기쁘시게 받음이 되도록(11)” 적은 것 탓할 것도 아니다, 많아서 끙끙될 것도 아니다. 주님이 기쁘게 받으시도록, 온 가족이 감사로 먼저 떼어드리고, 제사장이 즐겁게 번제로, 화제로, 요제로, 거제로, 전제로 춤추며 드리고, 이웃과 나그네들이 (22) 꽤쬐쬐하나 거룩한 손을 들어 축복하는 초실절의 축제이다. 이 축복보다 귀한 것이 어디있으랴! 그런데 우리가 사는 모든 삶에 처음 것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이 든다. 오늘도 첫 새벽, 오늘 처음 만나는 아내와 아이들, 첫 한마디, 첫 식사, 첫 거울, 첫 나서는 문, 처음 대할 분들... 우리가 드려야할 첫 열매가 얼마나 많은지! 이것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첫 열매일 것이다. 이것이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한다는(시4:7) 첫열매 신앙이자 축복이다. 오늘 한가지라도 첫열매의 기쁨과 감사로 대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나의 첫열매인 소중한 그대를 생각하며 축복한다.

2019-10-16

절기때마다 마음이 설레는 분이 있다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23:1-8 감사절기가 다가오고 있다. 온 가족이 모이기가 점점 어렵지만 가족들이 모인다는 것만 생각해도 가슴이 설렌다. (애들아, 아버지의 이런 마음을 딴 여행으로 바꿔먹지 말아다오...) 내 이야기만이 아니다. 절기가 다가오면 주님이 설레시고 기다리신다. 오늘 말씀에는 안식일과 유월절, 무교절의 절기를 말씀하시고 있다. “여호와의 안식일(3), 여호와의 유월절(5), 여호와의 무교절(6), 여호와의 절기(2)”이다. 여호와의 절기이니 주님이 주인공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이 절기를 지키시나 안 지키시나 노려보고 계신 날, 절기가 아니다. 우리에게 진실한 삶의 의미, 진정한 위로, 진정한 하나됨을 맛보는 절기가 되라 주신 날이다. 힘들게 살아가도, 심지어 고통스럽게 살아가도 주님을 만날 날, 그 곳을 올려보며 위로받으라는 절기이다. 살아계신 주님을 확인하고, 나머지 모든 날들을 주와 동행하며, 즐거이 살아가라 주신 절기이다. 더 나아가 영원한 절기, “천국”까지 바라보고 길게, 진실하게 살라고 일깨워주시는 절기이다. “식사하러 집에 오세요” 부르는 아내의 전갈을 무시하고 하던 일에 집중할 때가 있다. 그러다가 먹을 생각도 잊어버리고. 그러나 그래서는 안된다. 그 때는 하던 일을 멈추고 행복한 맘으로 집으로 달려야 한다. 사랑의 밥상을 함께 하기 위해서. 주님이 말씀하신다.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7, 8) 내게 오거라” 생명처럼 착각하며 매달리는 그대의 지금 일보다, 주님과 이웃의 관계가 우선임을 깨우쳐 주시는 절기이다. 사랑의 교제만큼 소중한게 없음을 절기마다, 절기 사이마다 깨닫기를 바란다.

2019-10-15

너도 흠이 있지 않겠느냐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2:17-33 우리가 주님 앞으로 나아갈 때에, 제물이든, 예물이든 주 앞에 드릴 때에 오늘 주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내게 흠이 없는(21) 제물을 가져오너라. 흠이 있는 제물들은(22-23) 내 앞으로 가져올 생각조차 말아라. 너의 마음이 또한 제물이고, 너희 몸, 삶 전체가 산제물이다. 흠있다면 내 앞에 올 생각도, 드릴 생각도 하지 말아라. 내 눈에 감추어질 흠은 어떤 것도 없다. 내가 너의 속속까지 다 안다. 이제 어떤 제물을, 어떤 예물을 내게 가져오겠느냐? 어떤 네 몸과 마음을 내게 주겠느냐? 나는 거룩하고, 거룩함만을 받고자 하느니라(32). 과연 너는 거룩함으로 내 앞에 설 수 있느냐? 정 자신이 없다면, 여전이 너의 흠이 있다 보이다면, 그래도 내 앞에 나오는 것만이 사는 길이라는 것을 안다면, 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붙잡고 따라 오너라. 내 아들이 너의 모든 흠을 덮어주리라. 그리고 흠없는 너를 내가 즐거이 받아주고, 변함없는 나의 사랑으로 너를 안아주리라.

2019-10-14

애들 신앙, 어른 신앙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1:1-9 평생 내 앞에는 늘 어른이 있다. 부모가, 심지어 형이 어른이었고, 선생님이 어른이고, 지혜자와 성공자들이 어른이고, 연장자들이 당연히 어른이었다. 앞으로도 어른들을 바라보며 공경하며 살아갈 것이다. 어른이란 사전적 정의는 “다 자란 사람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다. 어른의 반대어는 무엇일까? 바로 떠오르는 것이 “애들”이다. 그대는 어른인가 평생 애들인가? 주께서는 제사장들에게 “그의 백성의 어른(4)”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이제 우리 모두가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베드로를 통해 말씀하며, 우리가 애들 신앙이 아닌 어른이 된 신앙으로 살아야 함을 깨닫게 하신다. 바울선생도 디모데 후배에게 연소한 애들 신앙으로 업신여김받지 말고, 장성한 어른의 신앙이 되라고 한다. 오늘 어른으로 사는 신앙을 깨닫게 하신다. “백성의 어른인즉(4)” - 성경말씀은 백성위한, 공동체 언어이다. 어른은 남에 대한 책임과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1, 4, 9)” - 세속을 충분히 이겨내며 깔끔한 신앙의 어른이 되고 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에게 음식드리는 자이다(6, 8)” - 중재자의 사랑으로 백성의 죄와 허물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회개와 예수보혈의 상차림을 더 큰 어른에게 올려 드리는 어른이어야 한다. “나 여호와는 거룩하니라(8)” - 거룩의 정점은 성령이시다. 성령과 동행하는 순간이 나는 어른의 마음을 갖는 순간이다. 죽은 것은 멀리하나, 살붙이인 가족들에게는 자신을 더럽힐 수 있다(1, 3) - 삶의 본이 되고 기꺼이 자신을 허물어 희생과 봉사하는 어른의 삶을 살아야 한다. 언제까지 어른만 바라보겠는가? 그건 겸손을 넘어서 회한만 남은 인생이 될 것이다. 내가 어른됨은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살아가야할 바로 나의 모습이다. “너희는 백성의 어른이다” 자신밖에 모르는 애들신앙을 내려놓고 주님과 세상 앞에 어른으로 살아가고자 오늘도 말씀앞에 머리 숙인다.

2019-10-11

성도, 거룩함 속에 자라가는 사람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0:22-27 이런 말을 듣고 솔직히 놀랐다. “노인들이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이런 말을 80세가 지난 분이 하였기 때문이다. 마음은 항상 청춘이다. 아니 몸도 늘 청춘으로 살 수 있다. 그러나 젊은 마음으로 계속 살아내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레위기는 거룩함 삶이 하나의 주제이다.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26)” 그런데 그 거룩은 정체된 삶이 아니다. 부단히 거룩한 삶(26), 기꺼이 구별된 삶(24)을 살아 내는 것이다. 규례와 법도(22)도 도전하며, 지켜내며 살아가는 것이고 자라가는 것이다. 비록 젖과 꿀이 흐르는 주신 땅(24)도 싸우며 얻어내며 자라가라 주신 것이다. 정한 짐승, 부정한 짐승(25)도 늘 선택과 깨어있음 속에 정결한 방향으로 자라 가라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으로라도 기죽지 말고 자라가자. 연약한 몸일지라도 강하신 주님께 껌딱지처럼 붙어 자라가길 소망하자. 언제나 확실한 소망과 함께 도전할 일들을 주시는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 참 감사하다.

2019-10-10

온갖 죄를 말씀으로 이기고 가정을 지키라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20:9-21 어느 가정에 심한 부부 싸움을 하고 격분한 나머지 남편과 아내도, 거기다가 그 집의 아들까지도 20층 베란다에서 밑으로 뛰어내리고 말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남편은 제비족, 부인은 날나리, 아들은 비행소년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늘 말씀은 18장과 함께 타락한 이방세상 속에서, 가족이나 친척 간의 거룩한 삶을 명하신다. 특히 결코 범하지 말아야할 가증한 성관계를 경고하고 있다. “부모를 저주하지 말라. 이웃아내, 며느리, 이모, 고모, 숙모와 동침하지 말라...” 남성들 앞에, 여성들 앞에 지금도 일어나는 죄들이 아니겠는가! 그런 세상에서 거룩한 삶으로 죄를 이기며 주님과 함께 걸어가야 할 우리들이다. 말씀을 알고 있어야 죄를 이겨낸다. 본문 내용이 내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도, 우리는 몰라서, 잊어서 죄의 유혹에 빠지는 존재이다. 때로는 세상의 현혹이 너무 교묘하고 강해서, 하나님이 명령을 잊을 경우가 있다. 또 유혹은 받기도 하고 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시고, 우리는 말씀을 더욱 자세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내 가정과 친척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대의 삶으로 거룩함이 퍼져가게 하라. 말씀의 능력에 순종해야 죄를 이겨낸다. 정말 성경의 약속과 지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순종으로 살아가야 비로서 죄의 유혹을 이겨낸다. 죄를 이기고 다스리도록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붙드시고 이끌어 가실 정도로 말씀 속에 그 대의 삶을 푹 잠기게 하라. 그보다 먼저 일단 내 몸과 영혼이 구원을 받아야 말씀으로 죄를 이겨낸다. 하나님이 이제는 자녀인 날 수신자삼아 보내주셨고, 예수님이 스승되어 우리 영의 눈을 열어 주셨고, 성령님이 친구삼아 순간순간 그 말씀을 풀어주실 때에 죄악된 세상속에서 나도, 가족들도 지켜낼 수가 있다. 그러니 말씀을 붙들고 이렇게 기도하며 살아가자. “(말씀을 주신) 하나님, 내 눈을 (예수의 구원으로 )열어 주의 기이하고 (신령한) 법을 보며(시119:18) 내 주위에 다가오는 죄악들을 물리치며 이기게 하소서.” 아멘.

2019-10-09

불구덩이 몰렉에게 자식을 줄 수 없다!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0:1-8 모두가 자식을 사랑하지만, 때로는 자기 욕심을 위해 자식조차 포기하거나 버리는 악한 부모가 있기도 하다. 성경에도 그런 악한 자들이 나타난다.오늘 본문의 몰렉우상에게 자식을 바치는 제사를 행하는 자들이다. 황소머리, 인간몸처럼 만든 몰렉우상숭배는 그 속을 비워 불로 달궈 불구덩이를 만들어 그 위에, 그 속에 산제물을 바치는 이방인들의 잔인한 행태이다. 그러나 이방인들만이 여기에 빠지는 것이 아니기에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열왕기 하에 보면 아하스나 므낫세왕도 자식을 불로 지나가게 하였다는 끔찍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주사바늘 하나 찌르는 것도 못 볼 자식을 산채로 죽일 수 있다니! 그 때나 지금에나 악한 것에 사로잡힌, 제 정신이 아닌 환자가 아니면 절대 저지를 수 없는 일이다. 오늘 말씀은 그런 패륜적인 일을 저지르는 자들은 죽이고, 백성중에서 끊으라고 엄히 명하신다. 그런 짓을 결코 하지 말라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더 뜨겁고, 더 무서운 불은 하나님 없이 살다가 가게 되는 실재하는 지옥이다.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가는 천국이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지옥이라는 하나님 없는 영원한 단절의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중간지대는 없다. 요행도 없다. 지금 내 자녀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의 자녀는 예수 안에서 분명한 천국백성인지.. 세상몰렉에게 내어주고 있지나 않은지... 아니 벌써 거의 뜨거움이 확 달아오르고 있는 불 가까이로 끌려가고 있지 않은지... 방치하는 것과 내어주는 것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자식의 위급한 영혼을 위해, 내게 정해준 영적 VIP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께 911 기도를 하자. 차라리 내 마음이 뜨거움으로 불덩이가 되자. 영혼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걸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난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눅23:26).” 무거운 주제일지라도 우리 모두 깨어서 감당하는 파수군이길 소원한다.

2019-10-08

율법에 몇가지 얹어놓을 것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19:10-37 미국에 와서 처음 먹은 피자맛이 늘 기억에 남는다. 챨스톤 지역을 방문해서 그곳 현지 미국 목사와 함께 간 피자헛에서였다. 큼직한 피자, 두툼한 빵위에 온갖 타핑을 얹어놓은 뜨근한 피자! 30대 중반의 식욕왕성한 목사였으니 ... 그 때 피자가 맛은 지금 잊었어도 즐거운 추억은 여전히 남아있고 여전히 좋아하는 피자이다. 오늘 레위기 말씀에서는 여러가지 율법 실천사항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명하신다. 요약하면, “가축이나 종자 섞지말라, 하녀와 동침말라, 과일나무 3년 두고, 4년차 주께 드리고, 5년차의 열매부터 먹으라, 점, 술법, 문신, 점, 무당을 금하고, 머리 함부로 깍지말고, 노인공경하고, 거류민 학대말고, 재판공정하고, 저울과 추를 공평하게 하라...” 이 말씀만이 아니다. 계속될 다양한 말씀들이, 삶의 정황 속에서 가지치고, 적용되면 얼마나 많은 일들이 하지말아야 하고, 해야하는 것일까! 율법대로 살려하면, 지치거나 형식적이 되거나 적당히 타협하며 살게 될 것이다. 그래선지 구약의 율법을 읽고 대할 때마다 온전한 순종보다는 이제는 복음안에 사는 것이라 적당한 간격을 두고, 은혜되면 따르고, 부담되면 거리두고, 지나치다 여기면 외면하는 구절들이 있다. 그런 나의 모습 속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사소한 자세같지만 진리에서 멀어질 위기가 있는 것이 아닐까 돌아보게 된다. 그러기에 다음같은 몇가지는 율법 위에 꼭 얹어 놓아야할 것이라 깨닫는다. - “순종합니다.” 모든 규례, 모든 법도를 지켜 행하라(37)는 주의 말씀을 타협없이 순종으로 율법위에 얹으라. - “이거 사랑하시기에 주시는거죠?” 계명을 지키려하기보다 먼저 계명을 주신 주님의 마음과 그 사랑을 율법위에 얹으라. - “말씀속에 예수님이 계시네요!” 지켜내려는 일군같은 애씀보다 내가 모시고 살며 좋아하는 분과의 친밀한 기쁨을 율법위에 얹으라. - “내 눈과 마음을 여는 성령님!” 깨닫고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님을 언제나 율법위에 얹으라. - 이런 순종과 주님사랑, 살아계신 예수과 성령의 조명이 율법을 완성해가는 우리들의 핵심재료이다. 그렇게 다시 오늘 말씀을 읽자. 순간순간 살아 적용되는 말씀 속에 살기를 바란다.

2019-10-07

끈질긴 애굽습관, 거센 가나안 유혹에서 가정을 지키라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18:1-18 하나님은 애굽의 풍속, 가나안의 풍속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법도, 말씀만 순종하며 살아가가고 하신다. 그리고 살붙이, 가족관계를 하나하나 열거하시면서, 부모 자녀 형제 친척과의 문란한 성적 관계를 엄히 금지하신다. 성생활은 남편과 아내에게 허락하신 것이 바로 창조의 질서이다. 이것을 불순종하는 성적 욕망의 무절제에서 시작된 죄악이, 타락으로, 가정파괴로, 우상숭배로, 망국의 길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살붙이 외에는 문제가 안되는가? 아니다. 오늘날도 가정의 파괴가 삐뚤어진 성적 문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내 안에 애굽같은 과거의 잘못된 습관은 물리쳤는가? 내 앞에 다가오는 가나안같은 세상 온갖 타락한 문화의 거센 유혹을 담대하게 물리치고 살아가는가? 두려워하고, 숨기고, 외적 경건에만 치우쳐 사는 것과, 시험과 유혹을 담대하게 물리치고 주와 동행하며 사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 죄악된 습관과 욕망이 아직 내게 있는가? 애굽의 옛습관은 끊임없이 되살아날 수 있다. 철저한 회개와 변화의 삶을 살아가라. 오직 회개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육체의 욕망을 이겨낼 수 가 있다. -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5)” 이제 말씀만을 따르며 온전히 복종하자. “어머니, 아버지, 딸, 손녀, 외손녀, 누이, 이모, 형제 아내등등..” 말씀 속에 이런 구체적인 언급은,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말씀위에 서서, 가정에 죄를 결코 들이지 말라는 하나님의 불같은 명령이자 세심한 배려이다. 우리는 복종함으로만이 이 가나안의 거센 타락문화를 이겨낼 수 있다. - 부부 사랑, 가정화목과 기쁨을 회복하자. 순전한 사랑과 감사의 가정에 마귀가 틈을 타지 못하는 것이다. - 죄의 유혹이 가정의 문앞에, 내 마음의 문 앞에 다가올 때 하나님의 은혜, 신앙의 첫사랑을 다시 일으키며 성령께 매달리자. 부르짖은 기도와 주야로의 말씀묵상과 선포로 가족의 순결을 지켜가는 모두가 되기를 기도한다.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

2019-10-03

언제 피를 흘려보았는가?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17:10-16 “피”라는 표현이 들어가는 상황에는 격렬한 것이 많다. “피볼 일 있느냐?, 피터지게 싸운다. 피눈물난다, 피범벅, 피땀, 피를 나눈...” 부정적 표현이든지, 긍정적이든지 모두가 격렬하다. 내 평생에 내 자신의 많은 피를 본 적은 없다. 한때는 코피가 자주 난 적이 있고, 몇번 피땀의 섬김과 헌혈한 때를 제외하고는. 사람이 건강하면 피를 볼 일이 별로 없고, 희생하지 않으면, 사고가 없다면 피를 볼 일도 없다. 탐심과 혈기로 서로가, 나라와 나라가 싸우지 않으면 피를 볼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피를 보면 야만적 본능이 동요하고, 원치않는 불행에 피흘림의 아픔이 찾아오고, 온갖 복수행태와 함께 불행이 시작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피를 통한 감사와 영원한 감동이 있기도 하다. 누군가의 엄청난 희생을 통해 내가 생명을 유지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감동 위에 격렬한 피와 죽음을 통해 용서와 사랑과 평화를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있다. 누구든지 그 피를 내 죽은 양심과 죄악된 손발에 바를 때에, 그 피의 사랑과 은혜를 믿을 때에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죽을 죄인에서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로. “피는 먹지 말아라, 피에 생명이 있고,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11, 12, 14)” 이것이 오늘 레위기 말씀이다. 주님은 우리 위해 내어 줄 자신의 외아들, 독생자의 피와 생명을 담아 참 거룩을 위한 오늘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먹을 때에도 구별하며 돼새겨야할 피가 있다. 살면서 멀리해야 할 부정한 피도 있다. 제사드리면서도 매달려야할 희생의 피가 있다. 무엇보다 대신 흘려주셔서 날 살려주신 예수님의 은혜의 피가 있다. 그리고 이제는...예수님을 따라 섬기며, 전하며, 희생해야할 나의 피가 남아있을 뿐이다. 예수 안에서 내게도 피를 통한 감동과 간증이 있는 삶을 살기를 소원한다.

2019-10-02

회막문 데이트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17:1-9 와- 10월이네! 세월이 빠른지...계절을 사랑하는지...그냥 흘려보낸 아쉬움인지...아니면 나이 속에 초조함이 감추어져 있는지...아니다! 그럼에도 감사이다. 묵상책자 속의 레위기 묵상으로 다시 나아간다. 오늘 말씀은 오직 다른 곳이 아닌 회막문 앞으로 제물을 데려가 (제사장에게 주어) 여호와 앞에만 예물을 드리라(4, 5, 6, 9)고 하신다. 지금까지 들에서나 아무 곳에서 섬기던 숫염소같은 우상들(7)이 아니라 오직 한 곳 회막문 앞, 한 분 하나님 앞에 예물과 제사와 속죄를 이루라고 하신다. 회막은 말 그대로 만남의 자리이다. 주님을 만나는 자리이다. 전능자가 허락하신, 창조주와의 독대이다. 내가 사는 동네의 시장님도 만나기 힘든데 주님을 만나는 자리라니! 그것만이 아니다. 시간에 쫓기고 어쩔 수 없이 만나주는 자리가 아니다. 그 분이 기다리시고, 문앞으로 뛰어나와 반겨주시는 자리가 회막문 앞이다. 제사장을 보내고, 아들을 보내고, 주의 영을 보내 언제고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그 분은 우리를 향한 사랑의 열정이 식어버린 적이 없으시다. 그러니 우리도 사모하고 주님과의 만남을 고대하며 주께 나아가자. 제물은 아니지만 십자가에 제물되어 주신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감사하며 나아가자. 잠시도 아닌 언제나 동행해주시는 주님을 새롭게 만나고 데이트하는 그런 계절이 되자. 빠알간 단풍 한잎 한잎을 따서 예수 보혈을 감사하며 주님께 선물해 드리자.

2019-10-01

꿈같은 감격, 함박꽃 같은 기쁨을 나누어 주자

성경묵상의 나눔: 시126:1-6 “우리 모두 이스라엘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가 있어요!” 오늘 본문은 바벨론에서 이스라엘로의 귀환 앞에 감격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마치 어쩌다 일어나는 메마른 광야가 와디 강물이 되어(4) 넘실거리듯 믿음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꿈이 아닐까 믿어지지 않고(1), 입과 혀에 활짝 웃음과 큰 노래(2)가 저절로 터져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일을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돌려 보내실 때에(1), 여호와께서 행하신 큰 일(2, 3)!” 돌려보내심은 몸만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불성실하고 말씀을 떠났던 죄에서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회복하심을 말한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해주신 가장 큰 일은 “구원받은 자녀됨”이다. 우리도 “죄의 포로에서 예수님의 피”로 해방받지 않았는가! 그 그치지 않은 감사와 웃음이, 적어도 미소로 언제나 감사하는 우리가 아닌가!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죄를 그냥 두실 수 없으시고, 결국 용서와 사랑으로 회복시켜 주고자 하시는 소원이 있으시다(딤전2:4).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다. 지금도 돌아와야할, 그래서 주님이 기다리시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살고있다. 저들도 꿈꾸는 것처럼, 끊이지 않은 웃음과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축복이 준비되어 있다. 다만 누군가가 이 소식을 전해주어야 하고, 나누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 함께 이 꿈같은 감격, 함박꽃같은 구원의 기쁨을 전하자. 씨를 뿌리자. 비록 딱딱하고 상처와 오해투성이의 마음들이라도 우리의 사랑과 섬김과 기도의 눈물로 씨를 뿌리고 또 뿌려주자. 주님이 약속하신다.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단을 가지고 돌아오게 하겠다(5,6). 그 곡식단들과 함께 춤추며 노래하며 기뻐하게 하겠다.”

2019-09-30

교회를 향한 사랑과 감격이 있는가?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122:1-9 미국에 좀 오래된 건물들은 교회모습과 비슷한 건물이 많다.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를 빌려서 사용할 때는 지나가다 좀 큰 건물만 보면, 저 위에 십자가를 꽂으면 괜찮은 교회 건물이 되겠지?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지금도 여러 목회자들과의 대화속에서 교회건물이 없다는 것이 사역에 한계가 되는 경우를 많이 듣게 된다. 마음껏 예배하고 부르짖고 기도하고 찬양할 수 있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 교인들은 정말 가장 귀한 축복을 하나 더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 여러분은 교회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가? 얼마나 여러분 스스로가 지체되어 교회의 유기체로 움직이고 있으며, 얼마나 주의 영광을 위해 건물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가? 물론 교회건물이 참 교회가 아니다. 그러나 교회에 담긴 모든 신앙의 체험과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교회건물이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건, 그 안에 와야할 VIP이건 다 사랑스럽고 소중하기만 할 것이다. 오늘 그 마음을 시편 기자의 고백을 통해서 본다. 교회는 하나님이 아버지로 계신 고향집이다(1). 교회에는 내가 심판을 지나 구원을 체험하고 고백했던 자리가 있는 곳이다(4, 5). 온갖 문제를 끌어안고 찾아와 평안을 체험했던 자리가 있는 곳이다 (6). 대부분 잊고 살지만, 지금까지 내가 누리는 형통의 복을 받은 곳이다(7, 9). 그러기에 오늘도 시편기자는 성전을 오르면서 예루살렘과 성전을 향한 감격을 찬양하고 있다.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고 사람이 내게 말할 때 기뻐하였다”고 한다. 비록 먼 거리지만, 험악한 여정이지만, 주의 전을 향하고, 주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과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때로는 교회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해도, 무관심한 사람이 있다해도, 나와 여러분들은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교회로 발 길을 향할 때마다 언제나 감격과 큰 기쁨으로 오고 가기를 바란다.

2019-09-27

정말 내 도움을 믿는다면 네 문제를 턱 맡기고 의지하거라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 121:1- 8 언젠가 여자전도사님과 함께 오랜 시간을 운전하며 심방을 한 적이 있다. 교회로 돌아와 차에서 내리니 전도사님이 다리가 저리고 너무 아프다고 한다. 염려가 되어서 자꾸 상태를 물어보니 별 문제가 아니라고 하신다. 나중에 고백이, “사실은 목사님 운전하는 동안 뒤에 앉아서 다리에 힘을 주면서 있지도 않는 브레이크 패달을 너무 밟았어요.” 어쩐지 창옆의 핸들을 내내 붙든 손도 편치않게 보이더니! 사람이 마음으로만 염려해도 온 몸은 온통 긴장하는 것이다. 겉으로 안 그런척해도 걱정, 염려는 야금야금 우리의 삶에, 심지어 신앙에 데미지를 주는 것이다. 그대에게도 한번 묻고싶다. 솔직히 무슨 염려, 걱정을 감추고 사는가? 시편기자는 성전에 올라가며 “내가 산을 향해 눈을 들리라”고 한다. 높은 산 앞에서 나 자신을 보면, 깨닫게 하는 것은 나의 문제요, 묵직한 짐이요, 까다로운 프로젝트이다. 나의 상처요, 두려움이요, 때로는 나의 열등감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 산은 올려다 보면, 주의 성전이 있는 곳이요, 주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다. 산꼭대기는 모두가 한곳에서 만나듯이 주님과의 만남의 장소이다. 산은 우리가 올라가는 곳이지, 산이 결코 내려와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산이 내려왔다. 아니 산보다 더 크신 분이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시다. 신앙은 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올라가려고 발버둥칠 필요가 없다. 어떻게 올라가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내려오셨고 곁에 계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면 되는 것이다. 믿음의 눈으로 올려다 보며 주와 동행하며 사는 것이다. 턱 맡기고 살면 도우시는 분이 있는 것이다. 여전히 마음에 몸이 안 따라가는가? 오늘 주시는 이 귀한 121편의 말씀을 믿음으로 듣고(읽고) 자신을 주님께 맡기라. “천지를 봐라, 지은 창조주가 너를 돕는다. 사람들을 보아라, 졸고 자고 너를 잃어도 나는 빈틈없이 너를 돕겠다. 아무도 없다고 당황하지 말아라, 내 오른손이 너에게서 떨어진 적이 없다. 낮의 해같이 달아올라 당황될 때, 밤의 달같이 두려움으로 싸해질 때, 네 영혼 네 몸을 내가 돕고 지키겠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너를 도와가니 그 작은 일이 전부라 여기고 주저앉지는 말거라. 정말 내 도움을 믿는다면 지금부터는 네 문제를 내게 턱 맡기고 나를 의지하거라”

2019-09-26

요즘 세상에 누가 속고 살까?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120:1-7 미국 북쪽에 살던 할아버지가 큰 경품에 당첨되어 플로리다까지 갔다고 한다. 가서 흥분된 마음으로 경품당첨권을 보여주니 당첨된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써놓은, 경품에 참여할 입장권이었다고 한다. 보이스피싱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사기를 당하는 경우를 매체에서 대하게 된다. 어쩜 저렇게들 속을까 생각이 들지만, 오늘도 어느 순간에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우리도 겪을 수도 있기에 부디 조심하기를 바란다. 긴 119편을 지나 오늘 120편 본문에는 “거짓 입술, 속이는 혀, 화살과 숯불같은 고통스런 공격(2,3,4,)”등, 비난과 모함에 힘들어하며 기도하는 시편기자의 고백이 나온다. 오늘날로 말하면 거기에 “거짓된 SNS의 댓글들”하나가 더 첨부되지 않을까 싶다. 얼마나 많이들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지! 부디 자신에는 겸손하고 남에게는 배려하는 조심이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조심을 넘어서 기꺼이 받아내야할 거짓입술과 속이는 혀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 때문에” 받아야할 핍박과 비난이다. 이 세상 속에서 제대로 신앙생활로 헤쳐나가는 성도라면, 사는 환경에 따라 빈도수는 다를지라도, 억울하게 여길 독한 입술과 혀의 공격이 닥칠 때가 있는 것이다. 그 때는 다른 방법이 없다. 스스로 자기에게 기도하면서 축도하며 이겨내는 것 외에는.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친밀하심만이 지금 내게 충만할지어다!” 이것이 언제나 시편 각 장마다의 결론이기도 하다. 이 기도가 내게 응답이 된다면 독한 입술과 혀도 무력하게 녹아버리는 것이다. 사도행전을 읽다가 “이게 초대교회의 성숙과 성장과 성공의 비결이야!”라고 깨달았던 적이 있었다. 이게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거짓 입술을 대하며 속아주며 사는 모습이다. “사도들도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기뻐하며...(기도하면서)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행5:41, 42)”

2019-09-25

아직도 그 귀한 평안을 못 누리십니까?

성경묵상이 나눔: 시편119:161-176(끝) 시장에서 할머니가 모처럼 장을 보고 돌아오던 길에, 비싼 굴비꾸러미를 고양이가 물고 달아났다. 온 가족이 속상해 할 때, 할머니가 가족을 위로하면서 한마디하셨다. “모두들 너무 속상해 하지 말아라. 고양이가 생선을 빼앗아갔어도, 내 입맛은 아직도 남아있잖니? 얼마나 감사하냐!” 우리가 감사할 것은 지금 많은 것을 빼앗겨도 내 마음에 여전히 남아있는 평안이다. 성도의 감사와 축복은 어느 상황에서든지 평안을 찾아내 누리며 살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사는 진정한 성도의 마음과 얼굴은 평화로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평안이 없다면 진정 모든 것을 맡기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오늘 시의 기자는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 큰 평안(Great Peace)이 있다(165)”고 일깨워 준다. 혹 여러분 중에 이 평안을 맛보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예수를 믿는 믿음과 그 신뢰함 속에서 평안을 맛보며 살기를 바란다. 지금도 믿음으로 나를 맡기면 틀림없이 놀라운 평화를 주신다. 그러나 때로는 그 평안을 세상 염려, 두려움때문에 빼앗기기도 한다. 그래서 평안과 기쁨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오늘 119편의 마지막 구절들에 눈길을 담아보자.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165)에게 큰 평안이 있다. 주의 법의 완결은 “영혼을 살게 하시는 (175)” 예수님이시다. 그 분과 오늘도 동행하라. 그것이 참평안의 샘이다. “나의 모든 행위가 주안에” 있다(169). 주님한테만은 감춘 것이 없는가? 부끄러울 것이 없는가? 회개와 용서, 자유가 있는가? 그것이 평생 순수하게 흐르는 평안의 샘솟음이다. “나의 간구가 주 앞에 이르게 하소서(170, 169, ).” 기도로 인간관계를 어루만지고, 대면하고, 세워주는 삶 속에서 성장하고 확대하며 살아가라. 그것이 결코 썩지않는 이웃과 나누어 마시는 평안의 축배이다. “하루 일곱번씩, 내 입술로 주를 찬양하고,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합니다(163, 171, 172)” 샘은 솟아 흐르고 물은 모여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찬양의 샘물의 도달은 언제나 주님의 영광된 자리요, 찬양은 주님의 것이다. 찬양으로 언제나 삶의 우선순위를 주님에게 두라. 위를 바라보는 것을 넘어서, 위에서 주님과 함께 노래하며 세상을, 사람을 보라. 그렇게도 나를 격동시키는 것들이 하찮은 것임을 알게되고, 잔잔한, 놀라운 평화, 영원한 평화가 그대의 것이 될 것이다. “내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는 평안을 너에게 주노니...”

2019-09-24

제발 나를 살리소서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119:145-160 오늘 시편본문에서 “나를 살리소서”라는 고백이 5번이나 나온다. 우리가 사느냐 죽느냐는 일을 건성으로 입에 올릴 수도 있지만, 정작 죽음이 내 앞에 닥칠 때는 누구든지 죽음이 자기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주제이다. 그러므로 “살려주세요!”라는 요청은 그만큼 간절함을 담아 부르짖고 요청하는 표현이다. “살리소서”라는 외침에는 이대로 결코 망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있는 것이다. “살리소서”라는 마음에는 그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 알아야 한다.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지금 이런 “살리소서, 살려주세요”가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145, 146, 147)” - 나의 기도하는 시간과 간절한 기도가 살아나야 한다. 주님과의 아주 친밀한 교제가 살아나야 한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리소서(154)” - 성경말씀이 내 귀에, 마음에 살아있어서 성경을 읽던지, 설교를 듣던지 내 마음에 살아나야 한다. 회개든지 감동이든지 살아서 움직어야 한다. “나의 핍박, 나의 대적자(157)들이 많으나” - 마귀가 아닌 다음에야 예수 안에 있는 나에게 “나의 핍박, 나의 대적”은 구원해내야 할 하나님의 영혼일 뿐이다. 모든 인간관계를 변명하지 않고, 제외시키지 않고 사랑의 관계성으로 살아나게 해야 한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랑함을(살아감을) 보옵소서(159)” - 내 일터에서, 내 삶의 현장은 욕심과 이기심따라 세상으로 가고 있지나 않은지! 내 대부분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그 삶의 현장속에 신앙이, 예수가 기필코 살아나야 한다. 영적으로 메마르고 죽어있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던 예수님의 눈이 지금 우리를 보고 계신다. 그러니 오늘 살고 내일 죽는 마음으로 결단하자. “주님, 제가 지금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입니다. 저를 살려주세요, 제 영혼이 살아나게 하세요, 저의 삶을 바꿔주세요!"

2019-09-23

말씀은 읊조려야 맛이 난다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119:89-104 사전적 정의로 ‘읊조리다’는 말은 ‘뜻을 생각하며 감정이나 억양을 넣어 낮은 목소리로 읽거나 외우다’라고 나온다. 옛 선비들을 비롯하여 학생까지 효과적으로 수학하는 자세중의 하나가 읊조리는 것이다. 요즘 책을 읊조리는 모습을 주위에서 보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외외로 자주 주위에서 읊조리는 목소리를 듣는다. 돌아보면 이어폰꽂고 통화하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화장실에서까지. 제일 기억에 남은 읊조리는 모습은 예루살렘 성전의 남아있는 서쪽 벽인 통곡의 벽을 찾아갔을 때이다. 유대인들이 책과 토라를 펼져놓고 앞뒤로 몸을 흔들며 기도하며, 읽으며, 암송하며, 읊조리는 열정적인 모습이 잊혀지지를 않는다. 시편에서 낮은 소리로 읊조리다는 말이 자주 나타난다. 그 중의 한 구절이 오늘 본문에 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이다(v. 97).” 그렇게 읊조리다 보니 성경이 “꿀처럼 달다(103)”고 행복해 하기도 한다. 말씀에 반복되는 것은 주님의 깊은 관심이 거기에 있는 것인데, 읊조리는 마음은 무엇일까? 되풀이되는 읊조림은 은혜받은 자의 지속적인 호흡이다. 마음의 생각을 말씀을 받아 채우고 또 인정하며 내뱉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가 주위의 사람과 환경에 시달릴텐데, 내 생각과 마음 속으로 돌아올 때마다, 잠시라도 말씀을 생생하게 되살리는 것이다. 은밀한 읊조림은 주님과의 데이트이다.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을 알아채는 시간이고, 주님이 쓰신 “너를 사랑한다”는 편지 속의 한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며 행복해하는 시간이다. 그 막힘없이 줄줄히 나오는 읊조림은 내 말과 행동, 문제조차 당당하게 헤쳐나가고, 또 대면할 능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기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성경이 내게 즐거움이었기에 고난중에도 주저앉지 않았다, 망하지 않았다(92)” 너무나 아름다운 가을날이다. “만물이 주의 종(91)”이라 하신다. 만물속에 주인되신 주님을 깊이 묵상하자. 종일, 순간순간 주님의 말씀을 조용히, 그리고 확고하게 읊조리는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2019-09-19

파놓은 웅덩이와 감옥 앞에서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119:73-88 “(84b)주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는 교만한 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나이다” 본문에서 시편기자는 말씀을 불순종하는 자들에게서 받을 모함과 핍박을 “파놓은 웅덩이(84)”라 표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다. 지형적인 형태로 파놓고 빠뜨리는 것이 웅덩이라면, 인공적인 웅덩이는 바로 감옥이다. 믿음대로 살고, 말씀대로 살다보면 결국은 조직적 핍박을 당할 때가 오게 된다. 히브리기자가 “너희가 피흘리기까지 아직 대항치 않았다”말, 예수님이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니 담대하라”는 말씀도, 그리고 “예수 안에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는 바울의 디모데를 향한 말도 그런 핍박을 예상해야됨을 말씀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환경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길이 당장은 감옥까지 가는 위협적인 환경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주님을 위해 웅덩이든지, 감옥이든지 불사하리라는 결단과 감당케 해주시기를 원하는 기도는 지금부터 필요한 것이다. 요셉은 말씀을 붙들고 가족과 민족구원을 위해 기꺼이 웅덩이, 감옥을 다 거쳐간 사람이다. 예레미야는 울고 기도하면서 죽음이 꽉찬 웅덩이에서 건져지고 감옥문을 드나들며 말씀의 뜨거운 것을 선포한 사람이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도 “그리아니하실지라도”라는 결단으로 풀무불 웅덩이, 사자굴 감옥에서 자기들이 죽고 하나님 앞에 다시 산 사람들이다. 빌립보감옥과 로마감옥에서 바울도 마지막까지 핍박을 감당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을 통해서 복음의 꽃은 피워지고, 죄사슬을 끊는 참 영혼의 자유가 널리 퍼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이 세상의 타락한 문화, 인간중심의 교만이, 신실하고 순전한 신자들 앞에 큰 웅덩이, 감옥을 파놓은 시대이다. 조직적으로 신앙을 핍박하는 시대가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교만한 자들이 거짓으로 나를 엎드러뜨렸으나...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78...79)” 우리 모두 말씀과 기도의 열렬함으로 무장하자. 나약한 신앙으로 이리저리 흔들리지는 말자. 웅덩이 속에서도 열려있는 저 하늘, 감옥의 철문조차 열어주실 예수이름의 능력, 그리고 무엇으로도 막지못할 영원한 천국까지, 끝까지 주님과 함께 나아가자.

2019-09-18

제발 거울 좀 닦고 보자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119:57-72 백설공주 스토리에서 “거울아 거울아 누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니?”라고 묻는 왕비처럼은 아니어도, 사람마다 친숙한 물건중의 하나가 거울이다. 거리를 나서보면 쇼윈도우의 유리로 자신을 보는 거울로 삼고, 심지어 휴대폰을 거울로도 사용하는 모습을 때때로 본다. 아내한테서도 언젠가 “아! 가방 안에 거울이 없네!”이런 아쉬워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뭐 나도 가끔 거울을 본다. 아직도 그런데로 봐 줄만 하다 생각도 하고 ^^. 우리 모두가 거울을 사용하여 자기 얼굴을 보지만 그 보는 눈은 저마다 다르다. 그런데 거울을 볼 때마다 흐뭇해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자기 얼굴에 흐뭇해 하는 젊은이는 더러 있겠지만, 때로는 아쉬워하고, 때로는 한숨이 나오고, 때로는 저게 내 얼굴인가 한다. 어쩌면 이리저리 눌러보며 여기가 바뀌면 어떨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거울 속의 내가 확 달라질 때가 있다. 거울을 바꾸어서가 아니다. 거울을 깨끗하게 닦아서가 아니다. 어떤 때에 거울의 내가 달라질 수 있을까?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 보여주신다. 1. 늘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언제나 “신속하게(60)” 말씀대로 살아보라. 거울을 볼 때마다 빛나는 나의 모습이 “이게 나인가” 놀랄 것이다. 2. “감사하며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밤중에라도 (62)” 세어보라. 거울에 비치는 여전히 내가 소중한 존재임을 새삼스레 깨닫게 될 것이다. 3. 고난의 땀과 기도의 눈물로 고난을 닦아보라. 내 모습에서 신기하게 광채가 난다. 어둠 속에서 말씀과 그 성취의 축복이 왜 이리 빛나는지! 묵상하는 본문을 보면 그 체험이 아픔속에서 탄생한 진주처럼 빛난다. “고난당하기 전에 내 맘대로 살았더니 (고난을 겪고 나서는)이제는 주의 말씀대로만 삽니다(67), 고난을 통해서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어 오히려 세상 은금과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이 되었습니다(71, 72).” 지금 우리의 환경이 문제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다. 부디 그대가 절망, 아픔, 두려움으로 흐려진 마음의 창을 말씀과 긍정 감사와 기도의 눈물로 닦아내며 하나님의 놀라운 뜻, 선물이 확 보여질 수 있기를 축복한다. 이런 말씀이 떠오른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

2019-09-17

소장품과 애용품

성경묵상의 나눔:시편119:41-56 네명의 목사가 모여서 즇아하는 성경을 서로 말했다고 한다. KJV, NIV, RSV... 이런 성경을 언급하다가 조용히 있는 한 목사에게 “자네는 어떤 성경이 좋은가?”하니 그가 말하길 ”뭐 성경들은 다 좋은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말씀대로 살아가셨던 내 어머니 삶이 최고의 성경이라네”라고 했다고 한다. 장식품이나 옷, 물건에는 귀하게 잘 보관하며, 때로는 자랑하는 소장품이 있다. 그런가하면 친하게, 편하게 막 사용하는 애용품도 있다. 성경이, 그 말씀이, 여러분에게는 어쩌나 한번 소개하는 소장품인가? 늘 자주 사용하는 애용품인가? 오늘 묵상구절 전체 16절 중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매 구절마다 말씀에 대한 단어가 나온다. 얼마나 시편기자가 말씀을 사랑하고 그 길을 따라가는지 느껴진다. 말씀에 대한 사랑과 열정, 이것이 시편 119장 1절부터 176절까지의 전체 분위기이다. 시편기자의 사랑과 열정 속에 예수님이 베푸신 구원과 성령의 감동을 더하면 어떻게 될까? 말씀에 미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말씀에 심장마비가 올 정도가 아닐까? 이렇게 귀한 말씀이지만, 그 말씀은, 성경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보관하라 소장품으로 주신 것이 아니다. 막그릇같이 비록 깨질지언정, 닳아 꾸겨지고 찢어질지언정 막 사용하라고 애용품으로 주신 것이 말씀이다. 다 헤어지도록 섬기며 사신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말씀을 읽다가 나를 향한 사랑과 구원을 알게 되었습니다(41)”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다가 비난과 수치를 무장해제할 답을 찾았습니다(42, 46)” 그리고, “말씀 속에서 삶의 고난을 대면하니 영혼의 소생의 기회가 되었습니다(50)” “말씀을 묵상하며 매순간 읊조리다보니 이제는 내 속에서 즐거움과 행복으로 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옵니다(47, 48, 54)” 오늘도 여전히, “누군가가 말씀을 비웃고 공격하겠지만, 나는 결코 말씀을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습니다(51, 53)” 우리 잊지말자. 성경말씀은 설교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주일예배 속에 한 부분이 아니다. 나의 삶의 각 편린마다 고백하고, 대입하고, 적용하며 막 사용해야 하는 애용품이 되어야 한다.

2019-09-16

예수를 믿는 자에게 헛된 희망은 없다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14:1-20 병원에서 시한부 환자에게 헛된 희망만 심어주고, 진실을 감추기만 한다면 의사도 가족도 바른 자세는 아닐 것이다. 여러분이 재정문제나 삶의 여러 난관 속에서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잘 될거야, 좋은 일이 일어날거야”라면 막연한 희망, 위로를 해주면서, 정작 마음 속 한 군데서는 “정말 이건 위로가 안되는구나!” 느낄 때가 있었는가?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 예수와 동행하는 것, 예수를 소개하는 것은 언제 어느때나 참된 소망을 주시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누구든지 믿음을 붙들면, 예수를 모시면 확실한 소망을 가질 수가 있다. 그 이유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어제, 오늘, 영원토록 동일하게 우리에게 역사하시며, 예수와 함께 서있는 우리들, 당신의 자녀에게 진정 변치않는 사랑을 주시고, 사랑으로 감싸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여기 고난의 자리일지라도 그 넘어 회복과 평안이라는 내일도 그 분 손안에 있고, 이 짧은 세상의 불공평과 알 수 없는 고난과 질병을 넘어선 영원한 나라와 안식이 그 분의 예비하심 속에 있기 때문이다. 주의 살아계신 손길을 맛보고, 천국을 한번 봐 버리면 희망의 지평선은 끝이 없이 펼쳐지게 되어있다. 예수 안에 있는 나의 고난을, 심지어 죽음을 슬퍼만 하기에는 그 기쁨과 희망이 너무너무 큰 것이다. 오늘 레위기 14장에서는 나병환자가 회복될 때 이스라엘 사회로의 복귀의식을 말씀한다. 제사장이 환자회복을 위해서 할 일이 참 많음을 본다. 그러나 제사장은 정하게 됨을 선포하는 것이지, 정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치유자는 아닌 것이다. 참된 희망이 거기에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치유자이시다. 나병과 마음에 병든 자, 각색 병든 자를 치유하여 건강하게 하여 주신다. 죄와 온갖 두려움에서 자유하게 해 주시며, 삶과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희망을 안겨주시는 분이다. 그대가 지금 희미하고 막연한 희망 속에 산다면 예수가 삶의 중심에 계신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제 어떤 환경에 있더라도 희망의 끈 정도가 아닌 희망의 반석이신 예수를 온전히 의지하라. 그 분과 동행하라. 지금도 영생을 맛보며 사는 확실한 희망의 사람이 될 것이다.

2019-09-05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13:1-17 어제는 한 교인의 부탁에 그 자녀의 연약함 앞에 치유와 건강을 위해 기도해 주었고, 오늘도 여전히 기도하고 있다. 질병앞에는 하나님의 개입이나, 은사받은 의사의 개입이나, 중보기도자의 간구라는 개입이 있을 때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기적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진찰에는 진단도 있고, 치료도 있고, 예방의 차원도 있다. 구약의 시대에는 제사장이 의학적 진찰도 하였음을 본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피부병, 나병등의 진단과 격리, 사회로의 복권등을 제사장이 진단하고 진행하였음을 본다. 예수를 내 안에 모셨다면, 우리가 지도자라면 우리도 영적 의사의 사명이 있다. 본문의 나병처럼 영혼이 메마르고 비틀어진 가족이나 사람들을 향해서 “제사장인 아버지, 어머니, 사회인으로써” 담대한 예수이름의 선포와 함께 진찰을 제대로 해야 하는 것이다. 때로는 가족과 이웃들의 영적 상태를 바르게 진단해 주어야 하고, 말씀과 기도, 사랑과 성령의 은사로 치료도 해주어야 하고, 양육과 공동체의 삶 속에서 병들지 않도록 예방도 해주어야 한다. 의사가 훈련과 기술과 라이센스를 가지고 의료행위를 하듯이, 우리들은 기도라는 훈련과 말씀을 선포하는 기술과 내안에 계신 예수이름의 믿음과 성령의 권세라는 라이센스로 영혼들을 살리고 돌봐야 한다. 유능하고 바른 의사는 끊임없이, 평생을 배움과 훈련과 인격함양에 힘을 쏟는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유능하고 신실한 영적 의사임을 안다면 말씀과 영적 능력과 사랑의 인격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와 배움으로 정진해야 할 것이다. 소중한 영적 의사의 사명을 결코 잊지 말자.

2019-09-02

여러분의 식탁, 거룩합니까?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10:12-20 자기 자녀들이 음식먹는 것에 대해서 무관심한 부모는 없다. 어린 자녀를 둔 부모일 수록 먹이는 일에 결사적이다. 어떤 때는 애처러울 정도이다. 아이를 향한 사랑과 관심이 지대한걸 어쩌랴? 그 사랑과 돌봄 속에 부디 자녀들이 쑥쑥 커주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 하나님도 우리들의 먹은 일에 관심이 지대하시다. 본문의 화목제 속의 제사물의 나눔은 제사장과 제사자, 그 가족과 이웃까지 함께 참여하게 되는 식탁의 자리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거룩하게 먹으라(13, 18)” 하신다. 그 자리는 결코 침묵의 자리는 아니었다. 찬양, 감사, 축복까지 해주는 활달한 축제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의 가정의 식탁이 그저 간편하게, 되는대로 먹고, 저마다 황급히 물러나는 자리가 아니라, 이제 성도라면 우리의 식탁도 거룩한 식탁의 자리이다. 주님과 함께 여러분의 식탁을 거룩하게 만들어 보라. 주님과 함께 준비해 보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이(고전10:31)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주님께 감사하는 기도로 시작하고 또 마칠 때, 그 자리는 거룩한 자리가 된다. (내 아내는 맛있게 먹고 나면 “할렐루야”하곤 한다.) 주의 말씀과 함께 위로, 격려, 유머, 경청의 자리가 된다면 그 식탁은 거룩한 자리가 된다. (내 문제는 너무 빨리 먹어치우고 다음 할 일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다른 이웃들을 가족으로 삼아 나누어 먹는 일이 거룩한 식탁의 자리이다. (남자라도 라면 끓이는 것보다 조금은 업그레이드된 요리를 배워두는 것도 거룩한 식탁의 준비자세이다.) 때로는 식탁 위의 모든 자리를 비우고 말씀만을 올려놓고 금식과 말씀의 양식으로 살아보는 것도 거룩한 식탁이다. 우리 집의 식탁, 은혜와 사랑과 기쁨으로 기획되어야 하는 놓쳐서는 안 될 거룩한 식탁의 자리이다.

2019-08-29

예배의 응답은 여기까지 가야 한다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9:15 - 24 우리는 흠없는 마음의 예배(9장 전반부)와 함께 하나님이 주시는 분명한 예배의 응답까지 받아야 한다.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 내려오니라(22)” 위임식 후 아론과 자녀들, 모세의 첫 제사를 마치는 순간이다. 반듯한 예배자와 하나님의 응답이 임함을 보게 된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마다 이런 응답이 언제나 있어야 함을 깨닫게 해준다. 속죄와 함께 축복(22, 23)까지 받아야 한다. 축복은 열려진 하늘과 하나님의 마음에서 흘러나온다. 속죄가 하늘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그리스도의 속죄 속에 자녀가 누리게 되는 것이 하늘의 복, 축복이다. 속죄없이 축복은 없다. 모두가 하나되어 주의 영광(23)을 나타내야 한다. 제사장도, 백성들도 하나되어 하나님만 향해 드리는 화목제 속에 하나님의 영광은 임하신다. 하나되는 화목이 없는 자리에 주의 영광은 없다. 기도의 제단 위에 함께 불(24)을 보아야 한다. 번제물에 불이 임하듯이, 초대교회 성령의 기도의 제물위에 불붙듯이, 우리의 예배는 계속 기도로 타올라야 한다. 기도가 없는(식어버린) 자리에 “소리지르며 엎드릴(24b)” 뜨거움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예배자이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속에서 축복과 영광과 불같은 감동을 체험하자. 결코 놓치지 말자.

2019-08-27

흠없는 것과 흠없는 마음

레위기9:1-14 기억에 남아있는 오래 전 이야기. 두 집이 사과 한 상자씩을 사두고 한 개씩 먹었는데, 한 집은 지나면서 좋지 않은 것부터, 그리고 썩은 과일부터 먹었기에 내내 제일 안 좋은 것만 먹었다고. 그리고 다른 한 집은 제일 좋은 것부터 매일 골라 먹어서, 내내 제일 좋은 과일만 먹었다고 한다. 글쎄 맞는 이야기일까? 과일의 보존상태와 그 기간, 입맛에 따라 달라지는 이야기일 것이다. 여러분은 무엇부터 잡수시는지? (나같으면 안 좋은 것 부터 내가 먹고, 좋은 것 부터 아내에게 주겠다. ^^) 이 이야기 속에 한가지는 확실하다. 열어본 사람의 눈에 좋은 것, 안 좋은 것이 금방 눈에 띤다. 그리고 무엇을 고를런지는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다. 오늘 말씀에 “흠없는 송아지를 가져오고(2, 3)”라 명하신다. 우리 눈에는 비슷해 보여도, 목축업을 주로하는 이스라엘에서 주인의 눈에는 여러 마리의 동물 중에 흠이 있고 없고, 흠이 많고 적고가 금방 눈에 띄는 법이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 가장 흠없는 것인지 우선순위는 남은 몰라도 본인이 잘 안다. 또 정말 비슷비슷한 동물들 중에는 어떤 것을 고를까? 주인의 마음에 달려있다. 흠없는 제사드림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분명하고 중요한 것, 하나님은 그 마음을 보시는 것이다. 흠없는 예쁜 것을 드리려는 마음이 믿음의 분량이고 사랑함의 분량이다. 그러기에 제사(예배)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매번 물으시는 것이다. “나를 순전히 사랑하니?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은 것을 더 귀하게 여기니? 너보다 남을 낫게 여기니? 혹 입술로만, 형식으로만 날 공경하고 있는 것 아니니?”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어느 영상에서 가인이 제물로 곡식을 준비하여 드리려다가 한움큼 도로 자기에게 덜어내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 모두 일평생 예배와 섬김, 헌신과 헌금 앞에서 흠없는 마음을 드리자.

2019-08-26

내 삶의 모든 것과 공간에 관유와 보혈을 바르라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8:10-21 오래 전에 초신자의 가정을 방문하니 그 거실에 눈에 먼저 보이는 것이 동남아시아에서 가져온 커다란 장식품들이었다. 그럴 듯한 작품같지만 자세히 보니 그 지역 신상들을 새겨놓은 것이다. 믿음의 가정에 굳이 그런 것을 놓아둘 필요는 없다고 권면을 하였다. 나의 집은 과연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상조각만이 아니라 거룩한 성도에게는 합당치 않은, 내버려야 할 것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 안에 자유하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조각 따위에 연연할 필요가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가정 속에 균열을 일으키는 세속적 영향력과 영적 둔감함과 변질을 지금도 면밀하게 보신다. 오늘 말씀이 그렇다. “관유를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10), 그 피를 제단의 네 귀퉁이 뿔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1)...”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고, 우리 가정에 교회이기에 이 거룩을 명하시는 주의 말씀은 여전히, 구체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의 집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돌아보라. 내 방과 침대가, 거실이, 나의 부엌이, 나의 옷과 심지어 화장실에 거룩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믿음, 소망, 사랑의 관유가 채워져야 할 곳이 그저 세속적이고, 방치되어 있지 않은가? 내가 사는 삶의 영역인 “네 뿔”, 동서남북을 돌아보라. 내 일터가, 내 취미생활이, 내 시간 자체가, 내 휴대폰과 컴퓨터가, 사람들과의 교제 속에 거룩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예수의 피에 발라야할 곳이 무기력하게 방치되어 있지 않은가? 야곱의 거룩한 결단이 문득 떠오른다.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벧엘로 올라가자... 그들이 이방신상과 귀고리를 상수리 나무아래 묻고 떠났다.”(창35장) 우리가 기꺼이 세속적인 삶에 내려가 살아가더라도, 거룩한 삶은 성도가 주님께 매순간 드리는 소중한 선물이고, 성도의 아름다운 자존심이다.

2019-08-24

여호와의 명령대로...

성경묵상이 나눔: 레위기8:1-9 예전에 교회연합으로 겨울철 홈리스 담요전달하기를 진행하였다. 잘 전달하고 마지막 순서로 이제는 신문사 사진찍기. 저마다 조심스레, 그러나 잘 보이는 위치선점에 재빠르다. 순간적이기는 하지만, 어쩜 자기들만 생각하는지! 나도 밀리기는 했지만 한 자리를 차지하여 착한 얼굴로 내밀었다. 그리고 돌아오면서 내가 살아야할 낮은 자리에서의 순수한 섬김을 생각해 보았다. 8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백성 앞에서 아론과 그 아들들을 공식 제사장으로 세운다. 전반부에서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정결케 하고, 아론에게 하나님이 제정하신 제사장의 복장을 입혀 세운다. “속옷, 겉옷, 에봇 장식띠, 흉패, 우림과 둠빔, 금패를 붙인 머리관...” 고운 색채의 옷과 장식속에서 완전 달라진 고귀한 아론의 풍채가 나타난다. 누더기같은 모습들로 광야를 통과하는 백성들로선, 그를 우러러 보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지금 이 모든 위임식은 모세가 직접 진행하는 일이었다. 순간 그런 생각이들었다. 그 제사장의 옷을, 모세 자신이 입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백성앞에 서고 싶어하진 않았을까? 모세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성경은 이렇게 4번이나 모세의 마음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대로...(1, 4, 5, 9)” 우리는 평생을 세상의 부귀영화와 권세와 화려함이라는 유혹과, 주께 그저 순종과 겸손한 예수의 길 따름이라는 섬김의 길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주의 명하심에 마음과 기쁨을 두는 자만이 변함없는 평강과 기쁨, 비할데없는 하늘의 영광을 맛보는 것이다. 우리 오늘도 모세가, 예수가 가신 길을 따르며, 남을 진정 높이며 주의 길을 따라가자.

2019-08-23

소득의 요제를 제대로 흔들며 살자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7:28-38 이건 들은 이야기이다. 어느 교회의 교육관을 지으면서 한 헌금작정자가 나머지 헌금을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유를 물으니 크게 헌금한 자신의 이름을 명단 중간에다가 (가다다 순인데) 붙여놓았고, 남들과 크기를 같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다. 드믄 케이스지만 이번 분들이 분명히 있다. 말로는 쉽지만, 나의 피땀어린 소득을 몽땅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명심하자. 우리의 은행잔고와 지갑 안에 신앙의 자유함과 기쁨, 그리고 믿음의 고백을 담지 못한다면 결코 신앙은 자라날 수 없다. 오늘 본문에서는 “(제물의) 가슴과 든 뒷다리는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주었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을 영원한 소득이니라... 그들에게 돌리게 하신 것이라(34, 36)”고 하셨다. 영적 지도자들이 받은 몫을 어떻게 쓰느냐는 당연히 점검을 받아야 하지만, 먼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분명한 내 소득도, 내 삶도, 내 자신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물질관과 청지기 삶이다. 사전에 보니 앞 뒤로 흔드는 요제의 의미 속에는 하나님에게 드리고 그것을 제사장이 되받아 자신의 양식으로 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예수 안에 우리 모두가 제사장이기에, 우리도 내 삶의 세번 흔드는 요제가 필요하다 생각이 든다. 내게 주신 물질과 모든 소득마다(돈, 추수, 자녀도...) 앞쪽으로, 위로 올리며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라 고백하고, 다시 내 쪽으로, 아래로 내리며 “내게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고백하고, 다시 좌우로 흔들며 “내 가족과 이웃을 위해 제대로 쓰게 하소서” 고백하며 사는 것이다. 기억하자. 내가 벌어 들고 있는 모든 돈에는 이미 하나님과 교회, 이웃을 위해 써야하는 몫이 들어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 돈을 들고 나누기가 두렵고, 싫어서 손이 떨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감사의 손길로 기꺼이 올려드리며, 감사하며, 나누며 살아가는 요제의 시행자가 되자.

2019-08-22

함께 먹는 일이 큰 사역이다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7:11-27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람들이 식구이다. 함께 먹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 식탁과 함께 온갖 일들을 나누며 경험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구라 할지라도 그 자리에는 섬기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받는 사람이 언젠가 섬기는 것이다. 저마다 받기만 하고 제 욕심만 부린다면 그 자리가 결코 행복과 기쁨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역은 주님의 맡기신 일로 섬기는 것이다. 오늘 레위기 말씀 속에서 바로 그런 “먹음 = 사역”에 대한 것을 깨닫게 된다. 함께 기쁘게 먹는 자리로 우리가 평생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본문의 화목제는 제사중 유일하게 제사장이 먹고, 봉헌자가 먹고, 가족, 이웃이 분배하여 먹는 제사이다. 물론 주님도 드려진 기름과 향기로 함께 잡수신다. 이것은 축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예수님이 동참하신다면, 완벽한 에덴동산의 축제의 회복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또 하나의 화목제가 성찬식이다. 성찬은 예수님과 함께 주의 자녀들이 먹는 식탁의 자리이다. 이 자리는 후로 참석하게 될 이웃들을 미리 보면서 함께할 자리를 준비해 둔 애찬의 자리이기도 하다. 다르다면 살아계신 예수님이 나누고 부어주시는 몸의 희생과 피의 생명을 먹는 자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의 자녀로 우리가 새롭게 되는 축제의 자리요 섬김을 결단하는 자리이다. 주님은 더 나아가 우리의 가정에서의 화목제를 기대하신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이 나눔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예수를 모신 심령, 가정은 에덴동산이요, 교회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가정이 해야 할 평생 프로젝트는 육신의 가족끼리를 넘어서, 이웃들과 함께 평생 함께 밥을 먹는 일이다. 거기에 준비가 있고, 초청이 있고, 차별없음이 있고, 희생이 있고, 섬김과 목양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화목제의 수행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누구를 섬기고 누구랑 밥먹지?” 나가 사서 먹든, 집에 초청하든 따뜻한 사랑과, 돈-시간-관심이 투자되는 희생과, 핑게없는 섬김으로 기획된 화목제의 복된 사역자로 살아가자.

2019-08-21

아무리 힘들어도 책임있는 삶을 살라 하신다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6:24-7:10 살면서 주위에서 빚을 지고 파산하여 부담이야 있겠지만, 손털고 책임없이 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 빚을 오래도록 갚아가며 사는 책임있는 사람도 보았다. 힘은 들지만, 제대로 갚지도 못하지만, 갚으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책임있는 모습이 소중하고 아름답게까지 보였다. 본문에는 속죄제와 속건제가 제시된다. 두가지가 모두 죄의 속죄를 위한 것이지만, 근본 죄에 대한 용서의 길을 주신 것이 속죄제라면, 살면서 짓게 되는 여러가지 허물과 실수에 대한 용서의 자리가 속건제이다. 그러기에 속건제에는 본래의 물건과 1/5을 더한 배상(5:5)을 하도록 명하고 있다. 물론 마음의 회개가 우선일 것이다. 마음의 깊은 회개와 감동은 삭개오처럼 4배가 갚은 배상도 결단할 수 가 있을 것이다. 속죄가 죄의 회개와 중생의 길이라면, 속건은 삶 속의 회개와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성화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깨닫게 된다. 아마 이 묵상을 나누는 모든 분들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일 것이다. 속죄제 속의 구원받음을 감사를 회복하고, 속건제 속의 삶의 구체적인 거룩을 실천하며 함께 살아가자. 오늘 말씀에서 거룩이란 단어가 8번 이상 나온다. 단순한 단어표현이 아니다. 그런 책임지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주님의 깊은 당부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2019-08-20

꺼뜨리지 말아야 할 불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6:9-23 활활 타는 불에는 어떤 장작이든지 올려놓아 태우는 것은 아주 쉽다. 그러나 한번 꺼진 장작불을 피우는데는 아주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더구나 젖는 장작만 있으면 이건 정말 진땀나고, 오랜시간 걸리고, 매워서 눈물 쏙 빼는 일이다. 신앙생활도 한번 식으면 회복하는 것은 몇배나 힘들다. 은혜와 기쁨, 자원하는 마음이 없는 자는 있는 것마져 쉽게 빼앗기는 것이다. 한번 빼앗긴 것, 부정적으로 되어버린 마음, 세상에 얽매인 마음을 되찾고, 주 앞으로 돌리기란 아주 어렵다. 오늘 말씀에 제단의 불을 “끊임없이 피워 꺼지지않게 하라(12, 13)” 하신다. 우리도 세마포옷(10)을 입고 제단으로 나아가는 제사장들처럼, 예수의 옷을 입고, 주님을 갈망하는 예배자의 마음이 꺼지지 않게 하자. 불살라 제물(12)의 향기를 올리듯이, 우리의 기도의 향기가 잦아들지 않고, 꺼지지 않도록 힘써, 지속적으로, 아주 친밀한 기도생활을 이어가자. 불이 타는 힘도 다양하다. 장작 종류와 상태에 따라 불힘이 다른 것이다. 불길 중에 가장 깊고, 강하고, 역사하는 성령의 임재를 결코 내 심령에 꺼지지 않게 하자. 내 신앙은 다른 사람과의 공동체를 통해 완성된다는 본회퍼의 글이 생각난다. 제사장이 다루는 꺼지지 않는 불은 다른 제사장이 이어받는다. 이제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으로 주의 믿음, 소망, 사랑의 불을 모든 사람, 족속, 땅끝까지 옮겨붙게 하여 주의 거룩한 임재를 결코 꺼지지 않게 하자.

2019-08-19

힘이 미치지 못하면...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5:1-13 오늘 말씀에서는 죄와 허물, 사체를 만져 부정하여지면 암컷 어린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리라(2-6) 하신다. 그리고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집비둘기(7)라도 제물로 드리라 하신다. 없는 사람에게 대한 배려이지만, 없는 사람에게는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도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힘이 미치지 못하면 안 드려도 된다”고 하지는 않는다. 헌신이 있는 곳에 가치가 있는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건 속죄에는 반드시 희생과 피의 제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말 주님 앞에 나아올 때 드릴 힘이 미치지 못하는 형편인가? 주님은 그런 이들에게 말씀하신다. “집비둘기 새끼라도 힘이 미치지 못하면, 마음이 미치지 못하면, 내 아들 예수를 믿어라. 그것이면 어떤 제물보다 내 마음이 족하다.” 오늘날 예배가 제사의 완성이기에 예배에도 힘에 미치지 못한다고 그냥 덜렁 교회에 와서는 안된다. 어느 예배이든지 참석해주는 것만도 돕는 것이라 생각해서도 안된다. 힘이 미치지 못해도 마음이 열리고, 갈급함만은 보좌까지 미쳐야 한다. 여기에는 핑계를 댈 수 없는 것이다. 내 사랑만은 예배의 보좌 앞에, 예수님 앞에 기꺼이 드려야 한다. 그러면 내 힘이 그 이상도 미치고, 할 수 있음을 놀라게 될 것이다.

2019-08-17

죄를 깨우쳐 주는 자

레위기 4:22-35 오늘 말씀에서 “범한 죄조차 모르는 인생에게 깨우쳐 주는 사람”이 있음을 말씀한다.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23, 28)” 누가 감히 갖은 손해를 각오하고 족장의 죄(22)를 깨우쳐 주겠는가! 누가 외면하지 않고 여전히 애타하며 평민(27)의 죄를 깨우쳐 주겠는가? 계명, 하나님 말씀의 권세와 그 응답의 능력을 알고 체험한 사람이 깨우쳐 주는 것이다. 죄값, 죄의 결과와 하나님없는 두려운 삶을 아는 사람이 깨우쳐 주는 것이다. 사랑, 그 영혼을 사랑하며 진정 속죄와 함께 잘 되기를 원하는 사람만이 깨우쳐 주는 것이다. 주의 영, 성령의 탄식과 눈물을 마음에 느끼는 사람만이 깨우쳐 주는 것이다. 축복, 지금 나도, 저 교만한 족장과 비열한 평민도, 죄에 벗어나 진정한 평안과 축복이 앞에 있음을 알고, 오늘의 손해를 기꺼이 받아가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만이 깨우쳐 주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대는 예수의 사랑을 받았는가? 그렇다면 어떤 환경이라도,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깨우쳐 주는 자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2019-08-16

회개를 지나 아버지 품으로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4: 1-21 자녀중에는 잘못하면 야단도 치기 전에 바로 눈물을 흘리며 잘못했다는 아이도 있고, 혼이 나도 고집스레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아이도 있다. 야단치는 부모가 원하는 것은 엄청난 벌이나 보상이 아니다. 단지 잘못을 깨달으라는 것이고, 용서는 이미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때론 자식은 오래도록 섭섭할지 몰라도, 부모의 마음은 벌써 그 문제를 잊고 자녀의 형통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자녀이야기를 하니 여러분의 아들 딸들이 생각나는가? 아니다. 그 자녀는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그 부모는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다. 오늘 말씀은 속죄제의 절차를 설명하고 있다. 그 대상은 제사장도, 백성들도 모두가 해당이 된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면(2, 13)” 계명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그릇 행하지 않는 인생이 누가 있을까! 모두가 죄인일 뿐이다. 이걸 벌써 아시는 주님이 계명의 그물망으로 죄된 인생들을 건져올리시고, 징계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일까? 아니다, 분명히 주님은 용서부터 해놓고 회개를 통한 더 친밀한 교제를 우리와 함께 하시길 원하신다. 그것이 오늘 말씀을 주신 이유이다. 제사장을 세운 이유이고, 속죄제와 예수까지 이어지는 피뿌림의 이유이다. 그래선지 제단뿔과 피뿌림의 묵상에 십자가가 오버랩이 된다. “하나라도 그릇 범하는 자(2, 13)”가 우리이기에, 단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됨과 때때로 내 잘못을 주께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 뿐이다. “그래요! 주님, 아버지, 제가 또 잘못했네요”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회개이다. 그런데 과연 이 강퍅한 시대에 “내가 죄인”이라 고백하며 오히려 하나님과 더욱 친밀함으로 나아가는 인생들이 얼마나 있을까! 혹 죄없다하며 고집스런 아이로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13-14)” 이 말씀에 베드로의 권면이 떠오른다. “우리 모두가, 각자 회개해야 합니다. 보혈의 세례로 씻겨야 합니다. 그래야 죄용서를 받고 성령의 은사를 받습니다. 이것이 당신과 자녀들과 모든 인생들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2019-08-15

안수의 축복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3:1-17 난 그런데로 우둔하지 않은 내 머리라고 생각한다. 외적으로도 머리숱이 많이 줄었지만 그런데로 아직 봐 줄만하다고도 여긴다. 그런데 오늘 말씀 속에서 내 머리가 아주 귀한 것임을 깨닫게 하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다 기억도 못할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안수의 손길이 내 머리에, 내 어깨에 얹어졌고 축복을 받았다. 그 안수받음에 회개와 성령의 역사가 임하였고, 그 안수의 능력 속에서 내 병이 치유를 받았고, 그 안수속에서 목회자로 소명을 받았고, 그 안수의 은혜속에 오늘까지 갖은 축복을 받고 살고 있다. 물이 낮은곳으로 흐르듯이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안수의 축복을 내려 보내신다. 탕자의 귀환을 제일 기뻐하지 않은 이는 살진 송아지라나? 오늘 3장에 안수받고 제물되는 소와 양들의 마음은 어떠할까 생각을 해본다. 억울한 일일까? 말없는 짐승들이지만, 창조와 영원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안수 속에 임한 죽음이라면, 그것이 예수의 죽음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축복이라 여겨진다. 나의 죽음도 주의 손으로 어루만짐에서 끝날 것이기에 그렇게 생각한다. 그대의 안수받음 속에 짐승들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 다시 사심이 있다. 나의 안수받음 속에 이미 죽은 내 자아와 예수의 새생명이 있다. 우리의 안수받음 속에 예수의 피젖은 채찍받으심과 우리의 치유가 함께 일어난다. 또한 내 안의 예수와 믿음의 안수 행함 속에 분명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 축복과 언약이 응답이 되어진다. 주의 손이 함께 얹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주의 안수하심을 사모하자. 더욱 겸손히 믿음으로,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무릎을 꿇자. 예수 이름과 함께 전가해주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죄용서의 은혜와 축복을 믿자. 오늘도 교만을 내려놓고, 회개와 간구와 간절함으로 주의 거룩한 손의 안수를 받으며 주의 산제물로 살아가자. 주님이 나를 거두어가실 때까지.

2019-08-14

하나님의 코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2:1-16 공항에서 탐지견, 개가 내 주위에서 킁킁하니 이유없이 신경이 쓰였다. 마치 내 과거 현재를 다 코로 맡아 알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개의 코는 완전 밀봉된 여러 그릇들 중에서도 암세포가 든 그릇을 정확히 찾아낸다고 한다. 인생과 동물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코는 어떠하실까? 오늘 말씀에 하나님은 구어지고, 태워지는 향기로운 소제를 원하신다. 그러나 분명 제물보다, 드리는 백성들, 올려 드리는 제사장들의 그 마음의 향기를 더 원하신다. 참된 믿음과 의로운 삶의 변화의 냄새를 즐거워하신다. 어떤 곡식이든, 씨앗이든 고운 가루(1)되어, 압력을 크게 받으면 기름되어 향기가 흐른다. 무색의 가루 속의 기름과 향기는 경이롭다. 우리의 자아가 포기된, 아니 죽어서 가루됨과 연단과 고난의 억누름 속에서 오히려 흘러나와 퍼져가는 놀라운 향기를 주님은 맡아보기를 원하신다. 어렵게 살아선지 기름발라 떡굽는 냄새가 그리 좋았다. 성령은 향기이시다. 우리를 구우시는 (5) 뜨거운 불의 임재가 어찌 무취가 되겠는가? 성령께서 내 안에서부터 죄를 제하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향기로 우리를 구워 하나님이 받으시게 하라. 식탁의 자리는 그 가정영성의 수준을 보는 현장이다. 하나님은 제단의 식탁(4-6)이 아론 가족의 식탁(10)으로 이어지고, 백성들의 식탁으로 이어지기를 원하셨다. 주를 송축함과 베푸신 감사와 즐거움의 축제로 식탁을 장식하라. 소제물마다 빠지지 않은 소금언약(13)은 변치않는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상징한다. 향기가 일차적 감각을 이끈다면 적당한 소금간은 언제나 향기를 피와 살과 건강이 되게 하는 재료이다. 그대의 섬김과 희생때문에 오늘도 주위의 악취가 물러가고, 향기가 풍경나서 좀 살아갈 맛이 나는 세상이 되게 하고, 언제나 함께 하시는 주님의 코를 기쁘게 해드리자.

2019-08-13

흠없는 것으로 드리고 있는가?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1:1-17 오늘 레위기 첫 장에서 번제사와 제물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 제물의 종류들과 함께 제단과 제사장 앞으로 나아가 드리는 자세를 설명하고 있다. 그 자세중의 하나가 흠없는 것(3)을 드리라는 말씀이다. 흠없는 것 드리는 것이 쉬운듯 하나 한마디로 은혜없이는 못 드리는 것이 흠없는 것이다. 은혜를 잃어버린 말라기의 이스라엘 제사장과 백성들은 “흠있는” 짐승들만 골라 제물로 드렸던 것을 보게 된다. 오늘 우리도 드리는 삶을 살아간다. 그대의 일이 소명이기에 드려야 하고, 여러가지 봉사가 드림이고, 또한 헌금도 드림이다. 흠없는 것을 드리기 원하는가? 흠없는 것은 내가 제일 아끼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님이 우선순위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아끼는 것을 기꺼이 주님과 이웃을 위해 드려보았는가? 흠없는 것은 즐거움으로 드리는 것이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그 분이 주셨음을 아는 사람이 드리는 것이다. 드릴 수 있어서, 나눌 수 있어서 행복함을 느끼는가? 흠없는 것은 자신을 먼저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레위기의 중심주제인 “거룩”을 이루어 가는 길이다. 지금도 여전히 남보다, 환경보다 자신을 더욱 깊이 돌아보는가? 흠없는 것은 주의 보혈로 덮어진 것이다. 수도 없는 피의 제사와 속죄(5, 4)의 언급 속에 주님이 한시인들 독생자의 십자가와 피를 잊으셨겠는가! 이런 흠없는 것을 드리다보면, 흠없는 삶을 살다보면 그 사람에게서 향기로운 냄새(9, 13, 17) 풍겨나게 된다. 그것이 거룩함의 향기이다. “예수님 때문에, 오직 예수로 인해서” 나의 나됨을 고백하면서 은혜로 살아가는 흠없는 인생이 되기를 기도하며 또한 바란다

2019-08-12

우리 한번 뛰어볼까요?

성경묵상: 빌립보서3:1-21 요즘 런닝을 다시 시작해서 거부하는 온 근육과 폐, 심장과 조심스레 씨름하고 있다. 힘들어도 무리하지 않는다면 달리기보다 건강에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바울이 달리기를 자주 했는지는 모르지만, 달리는 사람들을 분명 보았을 것이다. 본문에서도 신앙과 달음질(12, 14)을 비교하며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 오늘 주님과 함께 뛰어보지 않겠는가?! 이것저것 걸치고는 뛸 수 없다. 한동안 뛰어보라, 가지고 있는 것은 다 배설물(8)처럼 여겨진다. 이제는 헛된 욕심들 미리 다 내려놓고, 율법같은 변명 내려놓고, 내게 주신 인생의 코스 앞에 서라. 함께 사람이 있으면 행복하고 힘이 난다.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예수가 나와 함께 뛰시는 분이시다. 3장에 예수 그리스도가 10번 이상이 나온다. “힘내!" 그 분의 음성을 들으라. 뛰는 사람이 다시 돌아오던지, 정한 거리까지 가든지 목표가 있다. 그런데 긴 목표가 있다면 작은 목표를 뛰어넘을 수 있다. 마라톤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이제 1마일은 문제가 아닐 것이다. 하늘 시민권자 성도의 목표는 예수와 함께 부활에 이름이고, 천국까지이다(11, 20). 몇걸음 뛰든, 먼 거리를 뛰든, 뛰어보면 단 한번도 힘든 순간을 없었던 적이 없다. 달리기는 정신싸움이라나? 예수 십자가의 원수(18)에게 온갖 위협과 유혹과 타협에 틈을 주지 말라. 결코 멈추지 말라. 신앙의 길을 달려가다가 걸어가는 것과 아주 멈춰버리는 것은 전혀 다르다. 우리 모두 “오직 예수”의 이름표가 달린 옷을 입고 있다. “영광과 천국”의 상을 바라보며, 예수와, 형제자매들과 함께 힘껏 흔들며 나서보지 않겠는가? 뛰어보지 않겠는가? 나는 오늘도 예수와 함께 뛰는, 그것도 끝까지 뛰는 믿음의 런너이다.

2019-08-08

마음의 소원과 구원을 이루어 길

성경묵상의 나눔: 빌립보서 2:12-18 우리가 받은 구원은 지금도 기꺼이 이루어가야 할 진행형의 구원이기도 하다. 바울을 오늘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12)”고 한다. 두렴과 떨림 속에는 아주 진지한 믿음의 길, 마음의 소원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가까이하며 복종과 갈급함 소원으로 구원의 길을 걸어가자(12, 16). 우리 여전히 성령과 함께 내 마음의 거룩한 소원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 바른 구원의 길을 걸어가자 (1) 우리 여전히 원망과 시비(14), 흠집내는 세상 속에서(1) 예수사랑이라는 한가지 소원의 순수함으로 사람들을 비추며(15b) 모두에게 주신 구원의 길을 보여주자. 우리 여전히 아직 예수를 모르는 뭇 영혼들을 찾아가 내 소원이 그대를 위한 제물됨과 섬김(17)임을 실천하며 하나님나라 구원의 영역을 확장해 가자.

2019-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