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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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으로 꽉 잡아야 할 것

2020-07-10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 144:1-15

내 손가락을 쥐는 어린아기의 손힘이 너무 세서 놀란 적이 있다. 노인의 마지막 임종 앞에서도 무엇인가라도 붙들려고 애쓰는 경우를 보기도 하였다.

사람은 그 손으로 평생 무엇인가를 잡으며 살아간다. 손을 펼치기 보다 손가락을 구부려 쥐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본성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평생을 더 안정된 것, 더 좋은 것, 더 재미있는 것, 더 편리한 것, 더 높은 것들을 잡으려고 노력하며 살아간다.
내 손을 한번 자세히 보라, 뒤집어 보기도 하자. 나는 이 손으로 무엇을 잡으려고 지금 살고 있을까?

손은 도구를 사용하는 신체이기도 하지만, 무엇인가 견고한 것을 의지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잘못된 것을 붙들면 허망한 인생으로 끌려가고, 바른 것을 붙들면 복된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이방의 악한 손이 있음을 다윗은 말한다. “그들 (이방)의 오른 손은 거짓의 오른 손이니이다(8, 11절)”
오른손은 보장과 안전을 의미한다. 지금도 이방 세상에서 이것을 붙들라고 온갖 것으로 우리를 미혹한다. 그러나 안전할 것 같은, 복된 미래가 될 것 같은 이방의 오른 손은 헛된 것이요, 거짓의 오른 손이라고 한다. 이방의 거짓된 오른 손이 무엇일까? 사람중심의 돈과 물질, 과학, 권력이 그 자만과 거짓의 오른 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없는, 하나님을 잊거나 멀리하는 손이 바로 거짓된 오른 손이다. “사람은 헛것같고... 그림자 같고(4)” 지금 그 손을 잡고 만족해 하며 영원하리라 착각해서는 안된다.

다윗의 손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보라. “여호와께서 내 손을, 내 손가락을 가르쳐 싸우게 하신다(1), 위에서부터 주의 손을 펴사...구원하소서(7).” “아들 딸들을 세우시고, 곳간의 곡식과 양과 소를 채우시고, 안전을 지키시는 하나님, 그분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백성”이 복이 있다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오직 한가지 이유, 주의 오른손이 붙잡아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팔을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들고 찬양하는 사람들이다. 언제나 그 손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다.

거짓된 것이 더 아름답고, 크고 든든해 보이고, 영원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악한 이방의 자만과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은 오래갈 수가 없는 것이다. 행여 거짓된 손을 잡으려 하고 있다면 놓아버리라. 그리고 오늘도 우리 모두 “의로우신 주님의 오른손”만 붙들고 주만 따라가는 삶이 되게 하자.

굴 속같은 캄캄한 절망이 다가올지라도

2020-07-08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 1423:1-7

다윗에게 지금 굴 속의 경험은 쫓기는 자의 막다른 골목같은 절망이다.
3천의 군사를 이끌고 자기를 잡아 죽이려고 추격하는 사울왕의 광기어린 집념을 생각할 때마다 긴장되고, 작은 소리에도 놀라는 그의 상황이다.
이제 메마른 광야와 산중에서 피할 곳이란 굴 밖에 없었다. 준비도 없이 피해 들어간 굴이 얼마나 어둡고 답답했겠는가!

이스라엘의 주변들을 가보면, 곳곳에 크고 작은 자연굴과, 길게, 또는 미로처럼 파놓은 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굴이든지 다시 빠져 나갈 곳은 한 곳이나 두 곳밖에 없다. 그 안에서 적을 만난다면 누군가가 죽어야할 상황이다. 다른 길은 없는 것이다. 그곳에서의 다윗이 대면하는 마음의 고통과 강력한 적들 앞에서 예상하는 죽음의 고통은 어둠보다 더 답답했을 것이다.

우리라면 그곳에서 무엇을 생각할까? 우리라면 그런 절망의 순간에 무엇을 하려할까?
그러나 다윗의 절망의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법인, 위로부터 주어지는 길을 찾는다. 그것은 기도의 부르짖음이요 도우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 속에서 부르짖고 토로한다는 고백이 5번 이상이 나온다. (1, 2, 2, 5, 6). 극심한 절망을 기도로 바꿀 때 순전하고 강력한 기도가 하나님께 올려지게 된다. 굴속에서 울려퍼지는 기도는 증폭되고 메아리되어 주님의 마음에 반향되었으리라.

우리도 절망 속에 맥놓지 말고, 사람의 방법을 의지하지 않고 “소리내어 부르짖고, 소리내어 간구(1)”하자. 그렇다! 나의 지금의 작은 좌절과 큰 절망은 강력한 기도의 소재요, 하나님이 응답으로 빚어내실 정금같은 열매이다.

다윗의 주위는 더 이상 어둠의 자리가 아니었다. 그 속에서도 영원한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 나의 분깃이시라(5)”
하나님의 지금의 고통보다 더 크신 계획을 보았기 때문이다. “주께서 나에게 갚아주시리니(7절)”

삼상 24장을 보면 지금 절망의 뿌리인 사울왕이 자신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뒤를 보고 있은 상태라도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받는 자를 내 손으로 치지 않겠다”
하나님이 주시는 길과 응답을 보고 믿는 자가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하나님의 그의 부르짖는 기도를 응답하셨다. 미래의 결과과 축복은 다윗의 것이었다.

오늘 내게 닥치는 굴 속같은 답답함이 무엇인가? 질병인가? 재정적 압박인가? 갈등인가? 다윗처럼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와 믿음으로 내 앞의 응답과 미래의 축복을 얻어내기 바란다.

악인 처치법

2020-07-06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 140편 1-13절

139편, 140, 141... 다윗의 시 속에는 계속 악인과 그에 대한 탄원이 많이 등장한다.
어떤 특정된 사람이나 일인지는 나타나지 않으나, 본문만 해도 “포악, 독사의 독, 올무 함정”등의 그의 표현을 보면 그에게 큰 고통을 주었던 일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오늘 나에게는 ‘악인’이라는 표현이 관계가 없는 듯 싶으나, 없기를 바라지만, 아닐 것이다. 과거에 그런 사람이 있었고, 지금도, 앞으로도 “악인”이라 여기기에 합당한 사람, 일, 관계는 충분이 있을 수 있다. 그러기에 아예 악인을 다루는 법을 대비하자. "악인 처치법"을 생각해 본다.

# 무기력케 함으로 악인을 처치하는 것이다. “여호와여!(1)” - 먼저 격동시켜려는 악인의 온갖 술수를 그냥 평안하게 바라보는 눈과 마음을 갖자. 죽고 사는 것도 아닌데, 설령 죽이려해도 내 목숨이 저들에게 있나 주님 손에 있는거지... 마음의 문고리부터 주님께 드려버리면 흥분보다 놀라운 평정을 가질 것이다.

# 제대로 분별함으로 악인을 처치하는 것이다. “저들이 악을 꾀하고(2), 혀를 날카롭게 하고(3),나의 걸음을 밀치고(4)” 저들의 궤계를 분별하기는 해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지, 믿음의 형제자매의 충고인지, 아니면 달콤 혹은 분노케 하는 악한 자의 술수인지는 분별해야 한다. 성령께 더욱 매달려 영적 눈과 마음을 가동시키라.

# 당연히 기도로 악인을 처치해야 한다.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6)” -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우리들이 탄원하면 “악인들”을 다루시고자 기다리시는 분이다. 뜻밖의 일들에 패닉상태에 빠지지 말고 기도로 보고하고, 기도로 맡기고, 기도로 편안하고, 기도로 넘어가 버리자.

# 사랑의 포용으로 악인을 처치해야 한다. “뜨거운 숯불이 그들 위에 떨어지게 하시며(10)” 이 말은 태워 없애달라는 탄원이지만, 다윗도 그 말 후에 정신을 차리고 한 말의 결론은 사랑으로 품겠다는 고백이었을 것이다. 사울 왕이나 자식 압살롬을 대하는 마음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고, 우리가 잠언 25:21, 롬12:20에서 그 마음을 찾게 된다. “먹이고 마시우게 해서 그 머리에 숯불을 쌓게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나도 죄인으로서 예수님의 사랑의 십자가를 만나니, 곤고한 영혼으로서 성령님을 만나니 한마디로 내 머리에 숯불이 부어졌다.

# 여전히 감사와 기쁨,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악인을 처치해야 한다. “여호와는 고난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고,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12),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면(13)” - 감사하는 마음에 마귀가 틈탈 여지가 없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의 자족과 감사고백은 악인을 맥빠지게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오늘도 , 내일도 예수 안에서, 믿음 안에서, 사랑 안에서 아주 행복하게, 기쁘게 살아가자. 결국 악인이, 악한 일이 힘이 빠져 일곱 길로 스스르 빠져 나갈 것이다.

예배 리스트 (Worship List)

2020-07-03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 138:1-8

배고플 때 식품점에 가서 뭘 사지말라는 말을 들을 적이 있다. 배고프면 눈에 보이는데로 마구 집어 카트에 집어넣기 때문이란다.
어떤 사람은 식품점에서 물건을 살 때 눈으로 보면서 생각나는 것을 고르는 경우가 있고, 어떤 이는 리스트에 적어 둔 것을 하나하나 찾아 집어넣는 경우도 있다. 난 간혹 아내의 부탁에 머리 속으로 리스트를 중얼거리며 간다. 그리고 집으로 다시 확인전화를 한다. 리스트가 없으면 어느 순간에 멍해지거나,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다.

예배에도 리스트(Worship List)가 있다. 제대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할 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10가지를 전해주고 있다. 부디 한번의 흘낏으로 끝나지 않고 열 손가락을 꼽으면 예배때마다 점검하는 리스트가 되어, 성도의 최고 본분인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자가 되기를 바란다.

1. 복음: 오늘 복음을 가슴에 담고 예배하리라. “내가 (다윗) 주께 감사하며(1)” - 다윗조차 12번 이상 주님이라 고백한 그 분이 예수이시다. 예수를 구주로 믿음이 예배의 반석이다.

2. 회개: 오늘 죄를 회개하고 겸손으로 은혜를 붙들고자 합니다! “주의 인자를 의지하며, 낮은 자를 굽어 살피시며(2, 6)” - 오늘 예배 속에 깊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여부는 겸손과 회개하는 심령에 달려 있다.

3. 찬양: 오늘 가장 깊은 사모함으로 하나님께 경배찬양하게 하소서 “전심으로 주께 ...찬송하며, 노래 할 것은( 1, 5)”

4. 감사: 불평많은 삶이었지만, 이제는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감사합니다. “주께 감사하고, 주이름으로 감사하고 (1, 2, 4)”

5. 기도: 기도로 예배를 준비하고, 기도하면서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하면서 삶의 현장에서 예배하겠습니다. “ 내가 간구하는 날에 응답하시고(3)”

6. 설교말씀: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붙들게 하소서 “주의 말씀을 높게 하셨고, 들음이오며(2,4)”

7. 갈등과 사랑: 주님 예수님의 마음으로 내 마음에 분노를 막고 그 사람을 사랑해 보려하니 힘주소서.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7)”

8. 전도: 내 인생 영역의 모든 부분에 있는 영혼들을 끝까지 구원하게 하소서 “모든 왕들이 주께 감사할 것은(4)”

9. 섬김: 오늘도 교회와 세상 속에서 섬기며 천국의 상급되게 하소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리리이다(8절)”

10. 성령: 성령이여 이 예배중에 내 마음에 임재하소서.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3)”

136편에서 보물: 구절마다 담긴 세가지 보배

2020-07-01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 136:1-26

올해는 야외예배도 없이 (교회에서 간단히 고기파티로 치루고), 7월을 맞이하게 된다.
야외예배 때마다 보물찾기 순서가 2부로 있곤 한다.

보물찾는 모습들이 다양하다.
쏜살같이 달려가는 사람, 점잖게 걸어가는 사람, 벌써 몇개 찾고 웃고만 있는 사람, 남이 찾아간 곳만 뒤늦게 찾아와 뒤적이는 사람, 그곳에는 없다는 데도 자꾸만 멀리가는 사람, 그리고 몇개 찾아 혹 없는 사람 슬그머니 나눠주는 차목사 ^^;

시편 후반부 말씀 중에서는 꽤 긴 구절이 담긴 장의 말씀이 136편이다.
그 27절까지 절마다 빠지지 않고 들어있는 말씀의 보배가 있다. 꼭 받아 챙기라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는 것일 것이다.

# 하나님이 보배이시다. “여호와께, 하나님께, 지으신 이, 인도하신 이, 통과하게 하신 이...” - 온갖 창조물, 인생의 사건들 속에서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다. 그렇다 우리의 인생의 과거, 현재, 미래시제의 중심은 주님이셔야 한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겁니다”

# 변함없이 베풀어주시는 인자가 보배이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나님의 인자 - 긍휼과 사랑, 용서, 돌보심- 없이 우리가 어찌 살 수 있는가? 지금까지도 그 분의 은혜와 긍휼로 살아온 우리이다. 그 인자하심을 늘 품고 산다면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올 한없이 교만하고, 강퍅하고, 자꾸 생겨나는 염려를 물리치며 살 것이다. 나같은 죄인을 살려주시고 새사람되게 하신 그 인자하심이 여러분의 성품이 되게 하라. 이웃들에게 인자를 베풀라.

# 감사하며 사는 내 인생이 보배이다. “감사하라. 감사하라 감사하라...” - 성도에게 오늘을 감사하는 것이 능력이요 보배이다. 주님을 바라보노라면, 이 험한 세상에서도 살만한 기쁨과 행복을 찾으며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생각하노라면 고통도, 문제도, 아픔 속에서도 함께 해주시는 주님을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불평하는 사람 옆에서는 고통지수가 높아가고, 감사하는 사람 옆에서는 행복지수가 높아가는 것이다.

이 보물들을 찾아 마음에들 담으셨는지? 여기서 매일 매순간 누리다가 천국까지 가지고 갈 보배임을 한시도 잊지 마시기를! 우리가 이 후반기에 채워야할 보배들로 사모하시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리로다”

하나님의 밑그림까지 바라보자

2020-06-26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130:1-131:3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에는 스케치를 비롯한 밑그림이 있고, 그 위에 그리는 덧그림이 있다. 잘 보이지 않는 그 밑그림이 그림에 생명력을 주고 생동감느끼게 하고 복사판과는 전혀 다른 가치를 주는 것이다.

신앙생활도 밑그림까지 바라보는 것이다. 현재의 겪는 일과 문제들, 시련과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밑그림, 그 계획과 인도하심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한 사람의 신앙은 시련 속에서 그 진정성이 나타나게 된다.

시련을 거뜬하게 이겨내는 엄청난 능력은 아니라도, 끝까지 끈질기게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살아있는 신앙이다. 믿음의 삶에서 흔들리는 그대들이여, 내가 주를 바라보는 영적 시력이 닫히면 죽은 신앙이 될 수 있음을 스스로 경계하자!

본문에서 여러번 ‘바라본다’는 표현이 나온다. 성경의 바라봄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주를 끝까지 신뢰함을 말한다.

# “내가 주께 부르짖습니다(1, 2)” - 기도는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며 주와 대화 속에 더욱 주를 바라보는 도구이다.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5)”- 말씀은 오늘도 손에 들고, 입으로 묵상하며, 닥친 문제들 속에 주의 약속을 선포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도구이다.

# “여호와의 인자와 풍성한 용서를 바랄지어다(4, 7, 8)” - 주의 속량, 용서는 빗나가는 나의 삶의 방향을 바로잡게 해주시고, 바르게 바라보게 하시는, 때로는 야단치시고, 때로는쓰다듬어 주시는 사랑의 다루어주심이다.

# “지금부터 영원까지 주를 바랄지어다(131:3)” - 영원을 바라봄은 미래의 승리자, 결과의 주관자이신 주님편에 서서 오늘을 기다릴줄 알고, 참아낼 줄 아는 소망이라는 능력이다.

잠깐의 바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바람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신 선물이다. 믿음은 바라봄의 실상이니 오늘도 제대로 하나님의 밑그림까지 믿음으로 보고 말하며 살아가자.

주님만이 나의 안전이시다

2020-06-23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 127:1-5

예전에 교우 한사람이 집을 스스로 지었다. 기본적인 것만 맡기고 나머지는 거의 본인이 지어갔는데 경험없이 이 사람 저사람과 일을 하다보니 시일도 오래 걸렸고 짓고 나서도 모양도 깨끗하지 않고 하자가 많았다. 그 분이 하는 말이 “집을 짓는 것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예전에 우리 가정에 세째 아이까지 생기고 아이들을 위한 이층침대가 필요하였다. 한번 만들어보자고 몇 주를 일을 마친 후에 저녁마다 씨름하면서 절대로 무너지지도, 부러지지도 않을 튼튼한 이층침대를 만들었다. 칠을 하는 분이 하얗게 칠을 두텁게 발라주고 광을 내어서 아주 멋진 침대가 되었다. 얼마나 자랑스러웠던지!

문제는 이사갈 때였다. 방안에서 만든 침대가 너무 커서 나갈 수가 없었다. 견고하니 움직이기 너무 무겁고, 분리하자니 칠을 해서 못자국을 찾기도 어려웠다. 눈물을 머금고 중간 네 다리를 잘라야만 했다. 둘로 나눠지고 다 망가진 침대를 보면서 나의 우둔함을 탓했다. “물건 하나 만드는 것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님을 그 때 알았다.”

우리는 집과 성을 세우며 살아가는 중이다. 집은 가족의 울타리요, 성은 마을과 도시 전체의 울타리이다. 든든한 집과 견고한 성벽은 안전을 보장하는 것 같지만, 의외로 허약하고 하자가 많은 것이 가족과 집이요, 언제까지나 보장이 못 되는 것이 이 사회요 성벽이다.
든든한 성벽은 교만과 함께 오히려 꼼짝못할 올가미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워도, 수고의 떡으로 버티고 세워보려해도(2)” 헛될 때가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붙들어야 할 안전울타리이다. “여호와께서 세우도록 해드려야만 집과 가정이 헛되지 않고, 여호와께서 지키시도록 맡겨드려야만 성의 안전은 보장이 되는 것이다(1절).”
“주님도 별수 없던데요”라고 생각하지말라. 주님은 우리의 집과 성벽을 온 세상과 영원의 역사로 지어져 가시기에 우리는 깨닫지 못해도 전혀 착오가 없으시다.

우리에게 잠을 자는 때는 가장 필요한 시간이면서 가장 취약한 때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잠을 주신다(2절)고 하신다.
잠자도록 내버려 두신다는 것이 아니다. 잠을 통해 회복과 건강을 위해 만져주시고, 잠잘 때조차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마음의 집과 생각의 성은 주님이 지키심을 믿고 맡길 때에 건강하고 튼튼해지는 것이다.

이제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을 안식의 집으로 삼고, 예수를 반석으로 지은 성으로 삼아, 그 안에서 믿음으로 안식함으로, 이제부터 주님 앞까지는 두려움없는 안전과 평안의 여정이기를 바란다.

하나님도 마스크를 하고 싶어 하실 때

2020-06-18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32:15-36

사람이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울 때 얼굴이 빨개지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운다. 요즘같은 시기에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우기에 웃는 건지, 부끄러운 건지 구분이 안된다. 속히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때가 오기를 소망한다.

오늘 본문 중에서 하나님도 마스크를 하고 싶으시다는 표현을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역한 삶을 살아간다면)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20)”

사실 하나님이 마스크를 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은 좀 지나친 표현일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오직 우리 인생들 편에 있을 뿐이다. 우리 눈이 이생의 욕심과 교만으로 희미해져서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시다가도 결국 다시 보여주시는(36절) 긍휼하신 얼굴조차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시고자 하시는 마음 앞에 우리의 신앙태도는 무엇인가? “내가 네 앞에서 내 얼굴을 숨기고 싶구나”하실 때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얼굴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를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안에 우리가 있어도 “내 얼굴을 숨기고 싶구나”라는 주의 음성은 여전히 우리 앞에 들려올 수 있다.

“너희가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시27:8)” - 숨기시는 주님의 얼굴 앞에 우리는 주님과의 깊고 친밀한 영적관계를 회복해야 함이 지금 우선임을 알아야 한다.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어서(사59:2)” - 숨기시는 주님의 얼굴 앞에 우리는 주님이 숨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가 주님 앞을 가리울 뿐임을 알고 회개해야 하다.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대하 7:14)” - 숨기시는 주님의 얼굴 앞에 우리는 간절한 기도로 그 분께 피하고 그 분의 얼굴을 다시 구해야 한다.

“그 얼굴을 내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민6:24)”- 숨기시는 주님의 얼굴 앞에 우리는 “약속하신 은혜와 축복”을 끝까지 믿음으로 붙들어야 한다. 때로는 그 얼굴이 숨기신 것 같아도, 보이시지 않아도.

찬양을 잃으면 은혜가 반쪽납니다

2020-06-15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31:19-29

처음 예수를 믿을 때부터 지금까지 찬송이 언제나 은혜가 되어 주를 향하게 만들어 준다.
처음 믿을 때에, 전도하던 형이 바이올린을 가져와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를 연주할 때 찬송에 꽂혔고, 신앙에 마음이 열렸다.

유행가처럼 제멋대로 부르는 성가대원 입문 시절, 앞의 권사님이 듣다 못해 (^^) 지적하신 한마디가 지금도 부끄럽다 (나야 첫사랑에 충만해서 열심히 불렀지만).

목회하면서 예배 때 부르는 찬양과 홀로 부르는 찬양에서 주님을 기억하고 새 힘을 얻곤 한다. 찬양이 좋으니 어깨너머로 기타도 배우고, 피아노도 홀로 만져보고, 요즘은 내 눈과 손가락이 우크렐라와 악보 사이를 헤맨다. 찬양이 없다면, 찬송가가 없다면 주님과의 교제가 신앙생활이 얼마나 삭막할까!

오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후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그 결과로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기억하도록(19, 21) 노래를 가르치라 하신다. 비록 노래가 도구이지만 말씀이 담긴 찬양은 말씀의 반쪽이라 깨달아진다. 그러므로 찬송, 찬양의 생활을 잃어버리면 은혜의 생활을 반쪽만 누리는 것이다.

노래와 찬양은 하나님의 것이지만, 곡조와 리듬이 있는, 강한 교육적 효과가 있는 말씀이다. 어느 사이에 노래 속에 말씀이 내 안에 채워지게 하며, 어릴 때에 부른 찬송이나 동요가 평생 가슴에 남아있게 된다.

주님은 우리의 지으신 목적이 “이 백성은 나를 위해, 내게 찬송을 부르게 지었다(사43:21)”고 하셨다.

우리 일반인의 찬양의 수준은 성악가의 수준과 전혀 다르다. 우리의 수준은 주님사랑과 성령의 만져주심 속에서 곡조있는 말씀, 리듬있는 기도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면 충분한 것이다. 아기의 불분명한 목소리조차 들으며 기뻐하는 부모처럼 주님은 분명 기뻐하시며 들으신다.

성경말씀은 묵상과 암송 속에서 의지적인 부분이 많이 강조되고, 찬송, 찬양은 고백가운데 감성적인 부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건강하려면 말씀과 찬양, 양쪽 모두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책을 펼쳐 읽고 찬송가를 부르고 사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경을, 찬송가를 책으로든, 프로그램으로든 결코 내 손에서 잃어버리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노래, 찬양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도구이다. 오늘도 우리 모두가 비록 흥얼거리는 수준의 찬양이 있고, 흘려듣는 차 안에서의 찬양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배드림 속의 힘찬 찬양도 있다. 당신의 그 찬송함이 휘청이는 자신의 영혼을 이끌어주고, 세속에 혼탁해지는 내 영혼을 정결케 해주는 체험이 되기를 바란다. 반쪽의 은혜, 찬양이 살아나 주님과의 더 깊은 교제의 생활이 되기를 바란다.

주께서 화내심이 당연하다

2020-06-11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29:22-29

본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우상숭배에 빠지면, 하나님이 진노와 격분으로, 크고 맹렬한 노하심으로(23, 24, 28) 이스라엘을 징계하실 것을 말씀한다.

크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우리의 일에, 실수와 죄악에 진노하시는 것일까? 광대한 그 분의 섭리 속에 우리의 인생은 너무도 작은 것일텐데...

진노와 격분과 통한하심(28)은 우리를 향한 그 분의 관심이시다. 사랑하는 자가 가는 그 어리석은 길이 속상하시고 배신감을 느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화내심이 당연하다. 그리고 그 분의 그 마음을 깨닫는다면 그 길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마치 아버지를 향한 탕자의 배반과 돌이킴처럼...

우리가 생명을 얻는 살 길을 저버리고 죽을 죄의 전염병에 빠지는 것(22)이기에 주님은 화가 나신다.

너무도 쉽게, 허무하기 짝이 없는, 다른 거짓신들에게 빠지는 것이 주님은 화가 나신다(26).

무엇보다도 복의 통로로 주신 아주 가까이 있는 당신의 명령, 말씀을 놓치고 사는 것(25)이 주님은 화가 나신다.

그러나 주님의 진노와 격분과 통한하심의 뒤에는 용서와 회복이라는 은혜가 남아있다. 그렇지 않다면 주께서 노하실 일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뭣이라고...

그러니 우리 모두 괜히 교만스레 역정내지 말고, 버티지말고, 주의 진노의 언저리라도 느끼면 예수 안으로 들어가라. 진정한 회개와 믿음의 회복으로 진노보다 크신 사랑으로 다시 들어가라. 지금이 그렇게 결심할 때이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30)”

자유의지도, 자유회개도 주셨다

2020-06-08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28:58-68

휴...하는 안도의 마음이랄까? 오늘 묵상말씀은 명령에 불순종하는 자에게 하실 저주의 마지막 부분이다. 순종과 복이 14절까지인데, 불순종과 저주는 68절까지 무려 54절이나 되는 긴 구절이다.

우리가 받아야할 저주까지 예수님이 대신 받으시고, 주 안에 자유함을 얻었지만, 불순종과 그 징계, 저주와 그 비참함, 특히 전쟁 속의 비극과 온갖 질병에 대한 내용들을 대하는 마음은 한없이 무겁다. “제발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지 말라”는 주님의 긴 경고이시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은 불순종하고, 겪게 되는 전쟁과 질병이라는 저주의 징계는 재현되는 교만한 인간들의 흑역사요, 선량한 사람들의 희생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불순종은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의 남용이요, 타락으로 인해서이다. 본문의 길고 다양한 불순종과 징계의 내용은 무슨 일이건 벌일 타락한 인생들의 교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율법의 조항들이 많아진 긍정적 이유를 여기서 보기도 한다. 혹자는 말하길, “오늘날 십계명을 따르기 위해 35,000개의 법조항이 생겨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에는 자유회개도 있다. 하나님은 나를 내 뜻대로 살아가도록 허락하셨지만, 세상에 만연한 아픔을 보면서 내가 저지른 것은 아니라도, 내 문제로 받아 들이고, 내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자유함을 주셨다. 주님이 억지로 우리를 회개하게 하시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신명기 28장처럼 긴 징계와 저주의 경고를 주신 이유가 아닐까?
그것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그 저주를 푸시고 나를 바라 보시는 이유가 아닐까?

복과 저주, 예수 안의 복으로 바꾼 저주”는 너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시대의 아픔으로 보면서,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스스로 흘러나오는 자유회개, 자기정화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지금도 주님은 힘껏 인간의 흑역사만큼 긴 저주를 밟으시고, 부어주실 복을 들고 계신다. 그리고 나의 그 자유회개를 여전히 기다리며 "내게 오라" 부르신다.

청종하여 복을 받는 법

2020-06-03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28:1-6

“했소? 했어요?”
"뭘? “
“하라고 했잖아요. 부탁했잖아!”
“그런 말을 했어요? 못 들었는데”
“말할 때 제대로 안 듣잖아요! 항상 건성으로 듣잖아!”
요즘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부부들 사이에서, 가족들 사이에서 들리는 말이다.
제대로 듣는게 가정의 평화를 이루어 가는 길이다. 오늘 말씀이야말로 들어야 살고 복이 된다고 하신다. 듣고 행하는, 청종의 삶을 생각해 보자.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명령을 지켜 행하면 온갖 축복(1절-14절)을 주신다고 약속하신다. “일터의 복(성읍, 들, 양떼, 소떼), 자녀의 복, 건강의 복(광주리, 떡그릇), 대인관계의 복(들어와도 나가도)...그러나 순종하여 듣지않고 행하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은 저주가 된다 하신다(15절 이하).

모두가 지켜 행해 축복을 받기를 원하지 저주 받기를 누가 원하겠는가?
“듣고 지켜 행하여 복되어라”, 주의 명령에 청종하는 법을 돌아보자.

# 말씀을 가까이 해야 청종이 된다 - “삼가 듣고 지켜 행하면(1절)...” 복이 있는 자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시1)이다. 말씀은 힘이 있어서 가까이 하면 행동으로 이어진다.

# 말씀순종이 복임을 믿어야 청종이 된다 -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임하며(2)” 다른 것을 섞지말고, 청종하는 일을 미루지도 말고 행해 나가자. 믿고 행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히11).

# 작은 청종이 온전한 청종으로 나가는 길이 된다. - “자녀의 일, 농사와 목축의 일, 먹고사는 일들 속에서 말씀의 청종이 우선할 때, 들어와도 나가도 복이 되고, 대적을 물리침, 모든 민족 앞에(12)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다.

# 자유와 해방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법(말씀)을 따라야 청종이 된다. 우리 약한 인생들에게 축복의 은혜는 머지않아 저주받을 불순종으로 오염되기 쉽다. 한번 저주의 늪에 빠지면 헤쳐나오기 어렵다. - “생명의 성령의 법(말씀)이 죄와 사망의 법(롬8)”을 이기게 하신 예수와 그 영을 따름이 진정한 축복을 받고 누리게 하신다.

우리에게는 축복이냐 저주냐가 우선이 아니다. 먼저 예수를 내 안에 모시고 믿음의 그릇을 준비하고, 약속하신 말씀을 복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풀어내어, 끈기있게 붙드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축복을 흘러 채워주시는 것이다.

6월 첫 주, 첫 날 앞에서!

2020-06-01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27:1-10

오늘은 6월 첫날, 월요일, 1일이다.
새로운 달, 새로운 날을 맞아 희망 속에 하루를 출발해야 하나, 마음이 무척 무겁다. 아직도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힘든 환경속에서, George Floyd 죽음과 항의하는 데모대와 경찰, 그리고 폭력사태속에서 교우들의 생업조차 어려움을 당하고 있어서이다. 새벽의 부르짖는 기도에도 마음에 무거운 것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오늘 말씀의 묵상을 붙든다. 60여년간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희노애락을 넘어오지 않았던가! 말씀은 살아계셔서 오늘의 삶을 인도해주심을 믿는다.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명령을 다 지킬지니라(1절)”- 몽땅 다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6월을 시작하는 오늘도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야 한다. 아무리 힘든 환경이라도 말씀이 나를 주장하시도록 해야 한다. 천지는 없어져도 남아 역사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 말씀에서부터 소망이 시작되고,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2, 3, 4)” - 요단을 건넘”은 죄에서 구원받은 삶의 자리이다. 영 죽을 죄에서 내가 구원받고 이 땅의 승리와 천국백성이 된 것 보다 귀한 것이 무엇인가? 일시적인 세상의 것을 잃을지라도 내 구원의 기쁨은 빼앗기 말자.

“큰 돌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2)”- 단단한 돌같은 마음이 아닌 석회같이 회개와 순종의 부드러운 마음으로 여전히 말씀을 내 마음에 새겨 나가자.

“쇠연장을 대지말며,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쌓으라(5,6)”- 하나님이 말씀 앞에 온갖 세상과학과 사상, 문화와 거짓종교의 쇠연장을 들이대지말고, 다듬지 않은 주신 말씀만 순종하자.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서 먹으며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라(7)” - 화목을 지향함이 최고의 치료제요 결국 축복이다. 하나님이 죄악된 우리와 화목하시고자 예수를 보내시고 죽이사 제물되게 하시고 부활의 소망을 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세상을 화목케 하는 사역을 주셨다.
경찰이건, 범죄자이건, 온갖 폭력이 난무하고, 벌건 대낮에 상점을 부수고 물건들을 들고 달아나도, 저들의 집단적인 행태가 한없이 괘씸해도, 저들의 죄악된 삶이 불쌍해서, 안타까워서 예수의 눈물을 내 눈에 담아내는 내 영혼의 아픔이 예수를 따라가는 십자가의 길인 것이다.

잊지말자. 나의 화목제에는 이런 기도가 꼭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괘씸해서 도저히 용서 못해요! 잊을 수 없어요!”라는 마음이 들어도, 그 마음의 분노를 결국 이겨내고 “예수님, 이런 황당한 일들 속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해나가야할 일이 무엇인가 알게 해주세요. 용서가 너무 힘들어도 순종하렵니다”라는 기도가 내 아픔을 치료하는 시작이요, 진정한 내 몸과 영혼 사이의 화목이요, 나와 가족 사이의 화목이요, 이 세상 속에서 화목의 사역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 오늘 성도들의 아픔을 붙들고 주님께 기도하면서-

저울추와 됫박

2020-05-29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25:11-19

됫박하면 생각나는 것이 어릴 때 쌀사러가는 쌀집, 싸전이다. 수북히 쌓아놓은 쌀 위에 올려있는 것이 원통형 한 말짜리 말박과 사각형 한 되짜리 됫박이다.
당시 쌀보리가 주식인지라, 한 두 말씩 사서 메고 올 때는 벌써 배가 부른 기분이었고, 어쩌다 한가마의 쌀이 집에 들어오면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당시에 계량기를 속이는 일이 신문에 가끔씩 올라와, 싸전을 지나노라면 됫박이 조금 작은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이런 추억이 있어서인지 어느날 주유소에서 차에 개스를 넣다가 “양을 조금씩 줄여서 넣어주는 것은 아니겠지?” 생각을 해 본적도 있다. 의심이 너무 많나? 남 생각할 때인가?

쌀장사꾼, 기름장사꾼을 돌아보기 전에 지금은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이다. 본문에서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와 되를 두어야 하나님이 이 땅에서 오래도록 축복하시리라(15절)하며, 호주머니에 큰 저울추 작은 저울추를 두지 말고(13), 집에 큰 되, 작은 되를 두지 말라(14) 하신다.

그러나 우리 삶을 생각하면 크고 작은 저울추와 됫박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 마음의 호주머니에 남을 판단하는 작은 저울추를 가지고, 자기연단의 큰 저울추를 가지고 살아가자.

우리 삶의 호주머니에 나를 위해서는 절약이라는 작은 저울추를 가지고, 남을 위해서는 힘껏 돕는 큰 저울추를 가지고 살자.

우리 마음의 집이 큰 됫박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 예수의 사랑으로 채워지게 하고, 의심과 불신의 작은 됫박조차 없어지게 하자.

우리의 삶의 집에는 내 이웃들과 더불어 진실과 정직으로 채워지는 큰 됫박이 되게 하고, 욕심과 부정직의 아주 작은 됫박조차 점점 작아지게 하자.

언제나 기억하자. 주님이 언제나 당신의 수평저울로 우리를 달아보신다. 그러나 지레 두려워하지는 말자. 한쪽에 내가 달리고, 또 한쪽에 내가 믿는 예수가 달리신다면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말씀하실 것이다. “내 사랑과 내 축복을 받기에 너는 충분하다! 합격이다!”

남겨드리는 배려와 관심

2020-05-27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24:14-22

예전에 작은 음식점을 하는 어떤 교우가 이런 말을 했다. “경기가 안 좋아요, 장사는 않돼고, 그저 우리가 먹는게 남는 거지요”

그리스도인으로써 우리 삶에서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섬기고 베푸는 것이다. 어제를 베풀고 섬기고 살았는가? 하나님과 이웃 앞에 남는 일을 한 것이다. 오늘 섬기고 베풀려 살려고 하는가 ? 오늘 하루가 보람으로 남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오늘 제목을 “남겨두는”보다 “남겨드리는”이라는 경어로 표현했다. 왜냐하면 어려운 이웃을 섬김은 곧 주님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남겨두는 삶을 살라고 하신다. 가난한 품꾼에게는 미루지말고, 해지기 전에 주머니에 품삯을 넣어 남겨 주라고 한다(15).
객이나 고아와 과부가 앞에 있는가? 송사이든, 판단할 일이든, 그들의 형편과 처지에 우리의 존중과 관심과 배려가 힘이 되도록 남겨두라 한다(17).
밭에서 곡식을 추수할 때, 올리브나 포도를 추수할 때, 가난한 자들을 소망과 용기를 가지고 밭에 찾아 오도록 열매들을 밭에 나무에 남겨두라 한다(19-21).

관심이란 말은 사전적으로 “어떤 것에, 일이나 사람에 마음이 끌려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품꾼이나 객이나 고아나 과부”와 그 같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아직도 따뜻한 마음들이 남아있음을 알려주고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남은 사역이다.

농사를 짓는 농부의 마음에는 추수하다 흘리는 쌀 한톨, 열매 한개도 아까운 법이다. 또 당연히 그런 정성과 돌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아까워도 우리의 추수, 모든 소득 속에는 이웃에게 나누어야 할 몫이 이미 들어있다. 우리가 살다 남으면 돕는 것이 아니다. 이웃과의 나눔이 먼저 실천될 때에야 우리의 한 주, 한 달, 한 해의 소득과 추수는 선한 결과로 종결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사노라면 뻔뻔한 약자를 만날 때가 있다. 도움을 받는 겸손도 없다. 그러기에 ‘누가 도움을 받는 사람인가 모르겠다, 혹은 내가 뭐하러 돕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는 애굽에서 노예가 되었던 일과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일을 잊지말라(18, 22절)” 그렇다 오늘의 삶은 약한 자들을 섬기며 살라고 하나님이 주신 여분의 삶이다. 내 남은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요, 나는 그저 말씀따라 살아가는 종이요 청지기일 뿐이다. 우리의 기쁨은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기쁨은, 주님이 약한 사람들을 돌보시며 기뻐하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덩달아 흐뭇해 하는 것이다.
그 분이 오늘도 내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 마음에 오직 기억될 것은 네가 베푼 배려와 관심이다. 저들에게 너의 소중한 소득을 먼저 떼어(남겨) 베푸는 삶을 살아가거라.”

희생까지는 아니어도 부담은 기꺼이 지자

2020-05-25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23:15-25

살아가면서 가족을 위해서는 자주, 그리고 뜻밖의 일들 앞에서는 간혹 희생을 해야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희생을 자주 겪는 것이 일상적인 생활이라고는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부담은 어떨까? “부담되는데... 부담주지 마세요” 이런 말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내가 가끔 경험하는 일일 것이다. 부담스럽다는 말은 무슨 일을 한다든지, 결정할 때에 선뜻 내키지는 않거나, 나 자신에게 어느 정도 영향이 가는 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결정적인 순간들, 주를 위해서라면 희생을 각오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를 부정하는 삶이고, 태워지고 녹아져 빛이 되고, 소금되는 삶이다.

그러나 매일의 삶 속에서는 오히려 부담되는 일을 기꺼이 짊어지는 것이 더 깊은 그리스도인의 향기라 생각을 하게 된다. 본문의 말씀이다.

내 앞에 닥친 일들 앞에서 “왜 내게 이런 귀찮은 일이 생기나” 하지않고, 고난을 피해 도망온 종과 같은 이들의 아픔을 품어주고 돌봐주는 일 (15절), 재정적 어려움에 빠진 이들에게 어느 정도는 이자를 받지 않고 꾸어주고, 도와주는 일(19), 굶주린 사람들이 밭에서 포도를 따먹는 사람, 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보고 용인해 주는 일(24, 25), 심지어 하나님께 서원한 일(성경 속의 명령이 모두 우리에게 이미 서원이지만)을 실행하는 일(21-23), 이런 일들은 생명을 걸고 하는 희생은 아니더라도 매일의 생활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부담과 관용의 기회라 여겨진다.

엄청난 희생에는 고민과 변명, 거절과 혹은 큰 결단도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부담정도가 되는 일이라면,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될 일이라면, 기꺼움으로, 자원함으로, 작은 희생쪽으로 결정하는 것이 부담을 지는 일일 것이다.

목회를 하면서 엄청난 희생도 주님이 요구하실 때가 있지만, 많은 경우가 부담스럽지만, 주님을 생각하고 즐거움으로 바꾸며 사는 일이 더 많은 것 같다. 나나 여러분들의 오늘 하루도, 내일도, 부담스러운 일이 다가온다. 그 때마다 주님을 생각하며 배려와 관용, 섬김과 도와줌 속에서, 우리의 부담스러움을 이기는 실천이 우리 주님과 곤고한 이웃들을 미소짓게 해 드리자.

나의 일인 체, 오지랖을 넓히자!

2020-05-22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22:1-12

사람이 무엇인가 잘못된 일을 직접 가하면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만, 모르는 체, 못 본 체 외면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서 그리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시고, 우리 그리스도인이 주위의 어려움을, 도움을 줄 일에 못 본 체하면, 삶의 의미가 절반이 잘려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못 본 체”의 반대말이 무엇일까? 그것은 ”본 체“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인 체하는 것“이다. 분명 내 일은 아니지만, 내가 기꺼이 그 궂은 일에 끼어들어, 한마디로 오지랖을 넗히는 것이다(오지랖을 떠는 것이 아니라 ^^).

왜 우리가 못 본 체하며 살아갈 때가 있을까? 그 원인에는 귀찮아서일 것이고, 끼어들다 어려운 일 생길까 두려워서이고, 그 일이나 사람을 무시해서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와 동행하며 살고 있다면, 귀찮음은 관심으로 바뀌는 것이고, 두려움은 희생으로 바뀌고, 무시함은 존중함으로 바뀌는 것이다.

오늘 성경묵상에서 주님은, ”반드시 못 본 체 하지말고 (1절, 3절, 4절)” 이웃 형제가 잃어버린 가축이나 물건을 발견하면(2-3절) 끌어다 돌려주고, 멀거나 모르는 사람의 것이며 잘 두었다가 돌려주고, 형제가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는걸 보면 그 형제를 기꺼이 도와주라(4절) 하신다. 이 말씀은 주 안에서 오지랖을 기꺼이 넓히라는 것이다.

내 일도 바쁘고 힘든데, 요즘처럼 질병으로 인심이 흉흉한데, 언제 남의 물건가져다 주고, 챙겨두었다 주고, 나서서 도와주겠는가! 그럼에도 이 일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나의 일인 체 하는 것”, 이것은 단순한 이웃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나 목장, 사회, 선교지, 나라와 온 세상을 위한 첫걸음인 것이다.

그렇게 내 일처럼 도우려 하다고 칭찬만 듣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도우려 하면 의외의 소리를 외부로부터, 내 마음 속에서부터 들을 수가 있다. “왜 사서 고생이니? 왜 오지랖을 떨고 있니! 푼수가 아냐?”그러나 우리는 분명 예수 안에서 오지랖쟁이요, 푼수쟁이다.

독하고도 독한 이 세상 인생들과, 천하디 천한 나를 위해 이 세상에 육신의 몸으로 오시고 십자가에 죄짐을 대신 져주시고 부활하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만큼 오지랖이 넓으신 분이 어디있을까!

잃은 소양같은 우리들을 찾고 찾아 하늘 아버지께로 돌려주신 예수님의 삶과 은혜를 체험했다면 오늘 말씀은 그저 아멘이다. “제 일입니다. 내가 할께요. 내가 수고하고, 희생하고, 기꺼이 동참하겠습니다.” 그리고 푼수처럼 이 말로 언제나 마무리하게 될 것이다. “주님 때문에 이 일을 하니 제가 오히려 감사하죠”

고독사가 멀리 있는 일이 아니다

2020-05-20

성경묵상의 나눔: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21:1-14

이제는 흔해서 더 이상 기사거리도 안되는, 고독사나 무연고 사망은 참 가슴아픈 일이다. 어떻게든 해결되고, 없어져야 할 문제임에도 나라마다 상황은 증가하는 추세이지 줄어들지는 않는다. 무자녀, 개인주의, 독신자, 사회적 고립, 복지의 한계, 자괴감... 이런 것들이 원인의 일부라 여겨진다. 이 모든 요인들은 우리 주위에서도 느껴지기에, 내 마지막도 그런 고독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한번쯤은 생각을 해 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오늘 신명기 21장에서도 “고독사”가 나온다. 피살되어 들에 엎드러진 사람(1절)이다. 죽음의 원인도, 살인자도 알 수 없지만, 죽어가는 그 사람은 고통속에서도 돌봐주는 사람없이 죽어간 한 고독사의 영혼이다. 주님은 그 죽은 시신을 절차에 따라 잘 거두어주도록 명하신다. 말씀을 따라 더 나아가서, 적어도 고독하게 숨을 거두는 일이 우리 주위에서는 없게 하자.

# “원근을 재서 가장 가까운 성읍(3절)의 장로들과 사람들이 시신을 돌보라.”
오늘날의 원근은 자로 잴 수 없다. 전화 한통, 메세지 하나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실시간 가능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다. 저들의 고통과 외로움을 내 문제로 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내 부모, 내 가족을 넘어서서 온 교인, 온 이웃들에게 대한 거리를 좁혀야 한다.
요즘 6피트 거리를 두지만, 혹 600피트 거리보다 먼 거리로 살고 있지나 않은지 돌아보라. 저들에게 내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요 내가 저들을 돌볼 사람이라는 영혼사랑을 새롭게 하자.

# “레위 제사장들도 그리로 갈지니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택하사 섬기게 한 자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고, 모든 소송을 판결할 자이다(5절)”
영적 제사장인 우리들은 산자이든, 죽어가는 자이든, 죽은 자이든 누구든지 섬겨야 한다. 밉고 답답한 인생이라도 축복해야 하고, 온갖 궂은 인생 실타래를 풀어주는 동반자로 살아야 한다. 오늘 섬겨야할 고독한 영혼이 그대에게 누구인가? 적어도 진솔한 위로와 기쁨을 그들과 나누자.

# “무죄한 자의 피흘린 죄를 너희 중에 제하라(6-9절)”
‘내가 죽였는가? 왜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나?’하지 않고, 우리의 아픔으로, 우리의 죄로 고백하라 하신다. 공동체의 고난과 아픔으로 함께 끌어안고 살아가라 하시는 것이다. 내 부모, 자녀, 가족, 내 일이라 여기는 것이 예수의 마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 “암송아지의 목을 꺾고(4절)”
우리 죄를 사하고, 천국의 안식을 열어주신 예수, 그 분이 “목을 꺾으신 어린 암송아지(4절)”이시다.
아무리 화려하게, 많은 사람 사이에서 죽을 지라도 예수가 함께 하지 못하는 죽음이라면 고독사이다.
아무리 홀로, 혹은 조촐하게 죽음을 맞이해도, 예수와 함께 하면 그의 영혼은 천사들과 함께 나아가는 설레임의 새출발이다.

육신으로나 영혼으로나, 살아있다하나 거반 고독사한 이웃들이 우리 주위에도 있다. 심지어 가족, 친지들에게도 있다. 당신의 작은 사랑의 섬김이 그들의 남은 삶에 그리스도의 양식이요, 삶이 되어주어 예수님의 가신 길을 따라가기를 축복한다.

하나님이 싸움에 끼워주는 사람

2020-05-18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20:1-9

초등학교 때에 제일 부러운 애 중의 하나가 축구공이 있는 아이였다. 방과 후에 작은 운동장에 모여서 공을 찰 때에 모두가 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팀도 정하기 전에 정원숫자에 끼워주어 들어가야 하는데 그걸 정하는 애가 축구공 주인이었다. 모두가 긴장하며 끼워주기를 기다리곤 하였다. 난 다행히 잘 뛰고 발재간이 있어서 탈락될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 ^^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이 제사장을 통해서 “자신감”을 보여주신다. 전쟁의 대열에 아무나 끼워주지 않겠다고 하신다.
“이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두려워 말라. 내가 함께 하여 이기게 하겠다.

그러나 새집 짓고 아직 집들이 못했는데 죽을 것 같은 자 있느냐 지금 돌아갈테면 가라, 포도원을 짓고 과실을 못먹어보고 죽을 것 같아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라, 약혼하고 결혼도 못하고 죽을 것 같으냐!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라. 죽을까 무서워서, 전쟁에 질까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해 돌아가려하면 지금 돌아가라(3-8절). 진정 남은 자들이여 나의 싸움에 함께 하라!”

하나님이 자신감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냥 뜻대로 하시면 되니까. 어차피 이 전쟁은 하나님이 이기시는 것이니까.
하나님의 자신감은 우리를 위해서 표현하시는 것이다. 우리와 함께 싸움을 이기길 원하시기에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영광된 승리의 싸움에 끼워주는 사람이 누구인가?

# 자발적인 사람을 끼워 주신다. 새집같이 가진 것이 많아도, 포도원같이 할 일이 많아도, 약혼녀같이 그리운 사람이 많아도, 기꺼이 주의 나라를 위해서 싸우겠다고,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는 자원하는 사람을 끼워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누가 강제적으로 붙들어서가 아닌 내 마음으로 정해 자발적으로 주를 따라 가는 사람들이다.

# 믿음의 사람을 끼워 주신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한다(1), 너희와 함께 행하신다(4)”하신다. 안 죽는다 하신다. 이 전쟁은 어차피 숫자로 이기는 싸움이 아니다. 믿음으로 앞서 싸우시는 주님을 보며, 솟아나는 담대함으로 주께 순종하는 싸움이다.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하나님(1)”-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여기까지 한 일이 무엇인가? 믿고 순종하여 따라온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예를 보라. 기도온의 32,000용사를 1%도 안되는 300명으로 줄이시더니, 450배나 많은 135,000명의 미디안을 물리치게 하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숫자로 싸우려 말고, 숫자에 매여 살지말라 하신다. 사람의 숫자, 돈의 숫자, 나이의 숫자, 소유한 것의 숫자, ... 지금 내가 이것들에 너무 연연하며 잘못 살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라. 믿음을 놓치지 않았나 돌아보라.
그리고 자발적인 결단과, 담대한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영적 싸움에 당당하게 끼어 이겨가는 우리가 되자.

레위인과 무속인과 세속인

2020-05-14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18:1-14

봄이 되고 여러 종류의 싹이 올라온다. 지금보면 다 초록색이고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얼마 후에는 어떤 것들은 강한 잡초가 되어 모든 것을 덮고, 어떤 것들은 여린 채소가 되어 잡초에 가려 질식해 간다. 적당한 때를 놓치지말고 잡초를 뽑아주어야 밥상에 몇 젖가락이라도 올라올 수가 있는 것이다.

본문에 8절까지는 레위인에 대해서 나오는데 신령한 레위인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 이해할 수 있다. 9절부터는 점쟁이와 무당등 미신 무속인들이 나타나고, 그 이면에는 세상의 온갖 혼잡한 영에 붙들려 사는 수많은 세속 문화와 사람들의 미혹이 있다. 무엇을 뽑아내야 할지 분명한 분별이 필요하다.

레위인이나 무속인은 다같은 영적 세계를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성령님과 잡신들은 전혀 다르다. 그런데, 사람은 영적 존재라서 어딘가에 속하거나 영향을 받게 되어 있기에 우리 모두가 자신을 돌아봐야 할 문제이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들 함께 예배하고 먹고 마심을(3절) 기뻐하는 레위인인가, 혼자 거짓 미래 점을 쳐주고 온갖 복채를 챙기고 살고 싶어하는 나홀로 무속인인가?

나는 새생명을 받고, 그 생명의 복음을 나누는 영적 레위인인가, 헛된 위로와 끊임없는 두려움을 주는 가짜복을 파는 무속인인가?

나는 임마누엘과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을 예언해주는 영적 레위인인가, 이생의 길흉(10절)이나 다루어주는 무속인인가?

나는 하나님과 그 분의 일에만 관심을 갖는 영적 레위인인가? 아니면 세상 온갖 잡신이 가득한 영화, 드라마, 이야기 속의 타락한 문화에 영향을 받고 사는 세속인인가?

나는 오직 성령에 사로잡혀 사는 영적 레위인인가, 아니면 성령을 무시하고 혼잡한 세상 정욕들에 끌려사는 세속인인가?

나는 말씀에만 관심과 집중을 하는 영적 레위인인가, 아니면 운세. 정세, 날씨와 감정에 좌우되는 세속인인가?

세속인이, 무속인이 영적 레위인이 되는 길은 오직 한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이제는 현재나 미래나 되어질 일들을 예수만 붙들고 사는 일이다.

우리 모두 잊지말 것은 이것을 알려주라고, 영적 레위인으로 우리를 주님이 먼저 불러 주셨다.
“연합”이라는 뜻을 가진 ’레위’처럼 우리 모두 하나님과 세상 영혼들 사이에서 예수를 전해줌으로써 진정한 영적 연합을 예언해 주는 영적 레위인이 되자.

늘 새롭게해야할 세가지 성품

2020-05-11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16:13-22

생각은 행동이 되고 행동은 습관을 만들고, 습관은 성품을 만들고 그리고 그 성품은 인생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내 마음 생각에서부터 시작되는 인생의 변화, 끊임없는 자기 변화와 성숙을 강조하는 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음을 변화시키는 시작은 성령이 하시는 일임을 알고, 믿고, 의지하지만, 우리들의 끊임없는 자기 훈련과 실천은 또한 우리의 몫이다.

오늘 본문에서 항상 돌아보고, 새롭게 해야 할 세가지의 삶의 성품을 깨닫게 된다.

# 감사의 실천: “주어진 나의 삶을 더욱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리라”
무교절과 칠칠절, 장막절은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과 돌보심과 축복하심에 대한 감사하는 절기이다. “자녀, 노비, 객, 고아, 과부(14)” 모여서 “모두가 함께 즐거워하는(14, 15)” 자리의 기본이 무엇일까? 제물드려 예배(16)하는 근본이 무엇일까? “감사”하는 것이다.
마귀가 결국 침투하지 못하는 곳이 감사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고난을 결국 이겨내는 곳이 감사하는 자리이다. 삶을 새롭게 하고 부요하게 만드는 기적이 감사하는 것이다. 더욱 감사하며 오늘을 살자.

# 성실의 실천: “주어진 나의 삶을 더욱 성실하게만 살아가리라”
재판장과 지도자의 삶은 공의이다(20). 공의는 하나님 앞에서의 성실이요, 사람들 앞에서의 법과 규례에 대한 성실이다.
예수를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재판장이요 본을 보일 지도자이다. 무슨일이든, “굽게 말며-자기의 감정때문에 빗나가지 말고(19), 외모로 판단말고-빈부귀천따라 차별하지말고 (19), 뇌물을 받지 말고-돈과 욕심에 지배받지 말며(19)” 더욱 하나님 앞과 삶의 규범에 성실하자.

# 겸손의 실천: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는 자로 겸손하게 살아가리라”
“여호와의 제단 곁에, 자기를 위하여 세우는 주상과 아세라 상(21-22)을 세우지 말라” - 하나님의 위해 살아가는 삶의 제단 옆에, 주위 사람들에게 자기를 보여주려는(22) ‘자기 의’가 누구에게나 고개를 들려한다. 자기 의라는 교만이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고, 말씀의 통로를 막아버리고, 세상 속에 열매없는 헛된 삶을 살아가게 만든다.

겸손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예수님의 가신 길을 따라가고, 성령의 부어주심을 받을 수 있는 도구이다. 오늘도, 내일도, 어느 곳에 있든지, 더욱 하나님 앞에도, 사람 앞에도 겸손함으로 귀를 기울이고, 순종함으로 살아가자.

요즘 먹고 살기 힘들어요

2020-05-06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14:1-21

요즘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만나지는 못해도 묻고 싶은 말 중에 하나가 “요즘 먹고나 삽니까?” 아닐까 싶다. 대답도 “먹고 살기가 쉽지 않네요”일 것이고.

사람이 배고프면 먹을 것 밖에 생각이 나지 않고, 목이 너무 마르면 물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다. 식탁 예절이 있고, 차를 마시는 예절도 있지만, 굶주릴 때, 목이 탈 때 입에 집어 넣어야 하는 것은 예절보다 앞서는 것이다.

그러나 먹고 살기 힘들어도, 그래서 먹고 마시는 것이 절실해도, 무엇을 위해 먹고 마시는가를 묻고, 먹는 것보다 내게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는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본문에서 “먹을 것, 먹지 말 것”을 말씀해 주신다. 이제 식물, 음식이야 예수 안에 자유하며 가릴 것 없이 먹는다지만, 본문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이 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성민이다(2, 21)” - “이것 저것 가리면 뭘 먹고 살지”가 아니다. 먹고 사는 것, 일용할 양식조차 하나님께 맡긴 우리들이고 그 분에 우리를 “만나”처럼 매일 채워주시기에 오늘까지 살아왔다. 성민의 매일의 양식은 성도의 믿음이다. 그 믿음과 절제를, 정신없이 없고 마시고 사는 세상사람에게, 보여주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먹지 말아야할 가증한 것은...먹을 만한 짐승은(3,4)” - 음식 이전에 말씀을 먼저 먹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뭘 먹고 살지”가 우선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이것을 먹어야 할 때구나, 절제할 때이구나” 하며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먹을 때마다 말씀의 냄새를 먼저 취하고, 말씀이 에피타이저요 디저트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먹을 만한 짐승은 이러하니 소, 양, 염소, 사슴 흰노루..정한 새(3-20)...” -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먹을 생물들도, 먹지말아아 할 생물들도 내가 만날 일이 별로 없겠구나, 그래도 소고기나 양고기와 생선 품목은 보이는구나” 한 두가지 고기종류로, 어쩌다 그것을 대하여도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한 마음이 든다.

“왜 선악과를 두셔서...왜 금지식물을 두셔서 힘들게 하나”가 아니다. 많은 것을 먹을 수 있도록 풍성함으로 채워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금지 품목은 불평이고, 우리의 필수 식용품목은 감사, 감사, 감사이다.

진멸하라고 하시는 주님의 마음

2020-05-05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13:12-18

어떤 사람은 심각하게 아프지도 않았는데 검사 후에 수술을 하게 되고, 수술실에 들어 가보니 너무 암세포가 광범위하게, 깊히 퍼져있어서 수술을 못하고 다시 덮을 수 밖에 없었던 분을 보았다. 이처럼 작은 일인 줄 알았던 일이 실상은 그 안에는 큰 문제를 품고 있는 일들이 있다.

오늘 말씀에는 “가나안의 어느 성읍이 우상숭배에 빠지면, 칼날로 죽이고, 탈취물을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15-16)”라는 구절이 있다. 거의 50회나 신명기에 나타나는 “ 진멸하라”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은 무엇일까?

가나안 지역의 문제는 결코 가나안 토착민 자신들에게도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동안 악은 점점 심해졌고, 하나님이 주신 회개할 기회를 주셨으나 두고 두고 그 기회를 놓친 민족들이었다. 그럼에도 가나안 족속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여전히 회개할 수 있는 남은 기회가 있음을 사사기 속에서 보게 된다. (삿3:5)

그들이 섬기는 바알과 다른 신들은 결코 작은 못된 풍속이 아니었다. 그 우상숭배들 속에는 음란한 성전 문화가 있고, 인간제물 바침, 전염병과 온갖 패역한 일들로 가득한 일이었고, 그곳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이루어 가실 하나님 한 분의 공의와 구원을 가로막고 오염시키는 엄청난 장애물이었다. 결국 가나안 족속들이 죄를 진멸하지 못함으로 죄가 자신들을 진멸되도록 자처한 것이었다.

어디 가나안 족속만일까! 이스라엘도, 우리 조차도 타락하고 패역한 백성이 될 때에, 하나님의 경고에 회개하지 않은 때에, 결국 심판받고 진멸되어야 할 인생으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노라니, 눈의 유혹에 빠진 아담과 하와, 욕심에 붙들린 아간과 아나니아 삽비라, 사람 눈치보던 사울왕등...틈을 보이다가 실패한 경우들이 떠오른다. 진멸하라는 말씀에는 우리가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써 결코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시는 주님의 간곡한 교훈과 경고가 담겨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그 뜻을 우리가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오늘의 진멸하라는 명령은 심판과 영원한 삶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보아야 하며, 지금도 앞장 서서 싸우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다스림이기도 하다.
그리고 온갖 유혹과 우상들이 치고 들어오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 모두가 “손도 대지 말라(17)” 시면, 그 말씀대로 유혹을 물리치고 주님만 따르는 것이 지금 내가 사는 길임을 깨닫게 해 주신다.

가정예배로 신앙을 세워야할 때이다

2020-05-01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12:1-7

교우들의 가정을 방문할 때, 가구나 주위를 잘 둘러보는 편은 아니지만 언젠가 성도의 가정을 방문해서 유난히 내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거실 벽에 놓아둔 커다란 사이드 테이블인데, 주의해 보면 다리마다 인도의 여신상을 새겨놓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 집의 교우에게 잘 설명하면서 예수를 믿는 집인데, 가구도 많은데 이런 것을 집 거실에 놓아두는 것이 가족이나 손님들에게 덕이 되지 않을 것이라 권면을 하였다.

우리의 가정에는 무엇이 놓여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집의 곳곳마다 온전히 배어있는 가정인가?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은 이 때에 온갖 소문과 염려에만 매여있는지...혹 드라마에 빠져 살고 있지나 않은지...

지금은 가정예배가 회복될 때이다. 가정의 영성이 살아나야 할 때이다. 가정이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할 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건강한 신앙으로 가정을 이끌어가야 한다.

오늘 주님의 주시는 신명기 본문말씀은 민족이 함께 차지할 땅에서부터(1절) 시작해, 그 가족이 함께 즐거워 할 가정(7절)에서 끝이 난다. 이스라엘 한 나라 전체가 가나안을 진입하지만, 결국은 한 가정 가정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 가정이 건강해야 나라가 건강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가정을 영의 눈을 뜨고 그 영적 상태를 한 번 제대로 살펴보라!

각 방과 거실, 장소마다 믿음의 장애물을 없는가? “그들이 섬기는 곳은 높은 곳이든지..낮은 곳, 나무 아래, 모든 곳을 파멸하라(2)”
- 우리 집의 위층, 아래층, 방과 장소들마다, 그리고 아내 남편 아이들의 신앙형편을 돌아보라. 영적 장애물을 제거하고, 그리스도인으로써 단순함과 따뜻한 사랑을 되찾도록 결단하라.

우리 집에, 내 서랍과 창고와 장식물 중에 우상과 타락의 빌미가 될 것들은 없는가?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고 아세라상을 불사르고,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 ...멸하라(3)”
- 헐어야 할 나의 제단은 지나치게 탐닉하는 나의 쾌락과 습관이다. 깨뜨려야 할 돌로 된 주상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내세우고 사는 단단하고 교만한 내 자신이다. 불살라야 할 아세라는 하나님 말씀보다 세상의 뉴스나 정보를 붙들고 사는 세상 문화에 몰두하는 가족들의 삶의 일부분이다. 찍어버릴 조각한 신상들은 온갖 세상 유행따라 흔들리는 나의 변질된 나의 마음이다. 이 버려야 할 모두 것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 한다(요일2:16).

하나님을 예배하며 기도하는 한 곳을 가정에 두라.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그곳으로 찾아 나아와서(5)” -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왜 들어가는가? 예배드리고자 들어가는 것이다. 왜 우리 가정이 존재하는가?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는 예배하는 자리인 것이다.
가정에 지성소와 제단부터 준비하고 거기서부터 모든 삶의 즐거움을 일구어 가라. “여호와 앞에서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7)”

신앙의 우선순위를 가정에 세워가라. “너희의 제물과 십일조와 ...처음 난 것들을 가져다가 드리고(6)”
십일조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십분의 일을 주님이 우선임을 고백하며 먼저 드리는 것이다. 처음 난 것들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첫 소산, 첫 소생의 소중함을 담아 주님이 우선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대가 가정의 제사장으로써 하나님 우선순위, 신앙의 우선순위를 세워 산다면, 자녀와 후손들의 신앙이 건강하게 세워져 갈 것이다.

우리 모두의 가정이 주님의 축복처럼 “하나님 앞에서 먹고, 하나님이 우리의 수고하는 일들에 복주시고, 온 가족이 즐거워하는(7절)” 작은 교회, 작은 천국을 세워가자.

자연 위에 쓰시는 하나님의 글씨

2020-04-29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11:13-21

세상에서 가장 큰 북은? “동서남북”
세상에서 가장 큰 콩은? “홍콩”
한국사람이 함께 쓰는 가장 큰 가위는? “한가위”
세상사람이 함께 보는 가장 큰 칠판은 ? “하나님이 쓰시는 자연이라는 칠판”

본문에서 하나님은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면, “이른 비, 늦은 비, 씨의 파종부터 곡식, 포도주, 기름의 추수(14), 초목과 가축의 번성, 배부름의 넉넉한 축복(15)을 주시리라 하신다. 자연을 통해서 축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을 섬기고 절하면 자연의 가뭄과 땅의 소산의 그침으로, 모든 것을 닫아버리시겠다 하신다. 자연을 통해 스스로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이다. 곡식을 찾을 길 없는 굶주림의 재앙은 코로나 바이러스보다도 무서운 모든 인류에게 가장 큰 재앙이 된다.

오늘의 내 눈 앞에 보여지는 자연위 상태와 변화는 하나님의 칠판글씨이시다. 작은 풀한 포기, 들꽃 한 송이부터 광대한 우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뜻과 계획을 적으신다. 그 앞에서 보이지 않는다, 몰랐다 할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성과 평안, 배부름과 안락함의 축복이라는 자연 앞에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하고,
온갖 재해 속에 당하는 고통과 시련이라는 자연 앞에 하나님 앞에 우리의 잘못을 뉘우칠 줄 알아야 한다.

답답한 이겨내는 3월, 4월을 지나가며, 그럼에도 눈부신 봄날의 하늘과 화사한 이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칠판에 쓰신 글씨가 보인다.
“이 백성이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 것이다(대하7:14),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다, 미래와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렘29:11).”

세상에서 제일 큰 코는? “멕시코”
세상에서 제일 쉬운 숫자는? “19만” ^^

주님과 함께, 이 자연 속의 주님이 사랑으로 날 만져주심을 느끼며 주와 함께 웃음이 늘 흘러 나오기를 ...

어디를 가던 이것만 있으면 하나님도 걱정 안 하신다

2020-04-28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11:1-12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가나안의 여정 속에서 여린 마음, 끈질기지 못함에 마음을 많이 쓰신다. 신명기 각 장마다 반복되어 하시는 “말씀을 기억하라, 지키라, 잊지말라”는 말씀에서 그것을 깊이 느끼게 된다.
가나안까지만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가는 길도 주님은 마음을 많이 쓰신다. 왜냐하면 우리도 여리고, 조급하고, 믿음에 끈질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를 향해 지금가고 있던 극복해 낼 수 있는, 꼭 필요한 신앙의 아이템들이 있다. 어디를 가든지 이것만 있으면 걱정할 것이 없다. 주님도 마음을 턱 놓으신다.

#하나님이 주신 성경말씀에 내가 푹 젖어 있기만 한다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며... 명령을 지키라(1)” - 단순히 기억하는 정도면 안된다. 암송만 해도 안된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대하면서 하나님의 날 사랑하심과 깊으신 뜻을 꺼내 내 생각에, 내 말에, 내 판단에, 다른 이와 대화 속에 젖어들게 해야 한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한다면 걱정할 것이 없는 사람이다.

# 하나님의 능력이 내 체험이 되기만 하면!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교훈과 위엄, 강한 손, 펴신 팔, 애굽재앙, 홍애를 가름과 합치심, 광야에서 너희에게 행한 것들(3-5)” - 작은 일이라도 좋다. 하나님은 잔물결처럼 우리 삶을 만지시며 우리와의 체험과 관계를 넓혀 가신다. 그 손길, 그 작은 경험들이 나의 신앙의 체험으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라. 그렇게 체험 속에 산다면 어디에 있든지 걱정할 것이 없다.

# 신앙공동체 안에서, 겸손으로 행하고 교만을 물리친다면!
“하나님이 다단과 (고라와) 아비람에게 하신 일, 곧 땅이 입을 벌려..삼키게 하신 일(6, 민16)” -교회가 하는 일, 목사나 지도자가 하는 일을 사람의 눈으로만 보면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가기 쉽고, 신앙을 잃기 쉽고, 미혹하는 자가 꼭 틈타게 된다.

평범의 연속이라도 신앙공동체를 떠나지 말고, 내 상식과 판단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낮은 기도의 무릎으로 찾아보는 겸손을 가지라.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은혜 한가지라도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교회 안에 머물 이유가 충분한 것이다! 그저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안다면 교만이 깃들 여지가 없고 이런 공동체 속에 살아가고 있다면 그 앞날에 어떤 일이 닥쳐도 걱정할 것이 없다.

#이 땅에 남은 할일과 받을 축복과 천국의 그림들이 언제나 분명하다면!
“후손에게 주리라 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산과 골짜기...비를 흡수하는 땅, 하나님이 돌보시는 땅 (9-12)” - 애굽 때가 좋았다고 착각하지 말고, 광야에서 살다가 죽는거야 방종하지 말고, 가나안 땅의 그림이 눈에 선명하게 보여야 한다.

여기서 살고 있지만 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계획이 사명의 그림으로 보이고, 하나님의 축복이 상위에 베푸신 그림으로 보여지고, 천국의 예비되어있음이 상급으로 선명하게 보여진다면 어디에 있던 무엇이 문제인가!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도 걱정 안하신다.

내가 죄와 유혹에 흔들릴 때...

2020-04-24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9:9-21

본문은 모세가 산에서 십계명의 두 돌판을 받아오는 내용과 아론과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우상숭배하는 참담한 사건이 담겨있다.
이 말씀을 읽노라니 먼저 베드로의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던 일이 생각났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주어지고 순간, 말씀이 성취되는 중요한 순간들에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이 인생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실수와 실패도 지금까지도 많았고, 앞으로도 그 여지는 정말 많다. 오늘도, 그 때에도 이 말씀이 떠오르고 이겨낼 수 있기를 기도한다.

내가 죄악에 빠지려 할 때에 모세같이 기도하고 금식하는(9), 또 여전히 빗나가도 여전히 기도하고 있는 (18) 어머니, 아버지, 가족의 기도가 부디 생각나기를!

내가 죄악에 빠져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의 유혹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금송아지(16)같은 견고한 진이 자리잡으려 할 때에, 깨어진 두 둘(17)같이 깨어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마음과 그 아픔이 확실하게 보여지기를!

내가 아론처럼(20), 백성들처럼 죄악에 지고, 절망하고 가망없다 포기할 때에, “그 때에도, 그 때에도 기도하며(19, 20절)” 중보기도로 함께 있어주는 성령님과 믿음의 교인들의 음성이 들려지기를!

죄의 유혹이 너무 강해서 아무 생각도 안나고 그냥 끌려갈 때에, 옛습관과 유혹과 죄악의 금송아지를 불살라, 깨뜨려, 가루 만들어(21) 급물살 속에 흘려보내 다시는 틈타지 못하게 할 능력의 이름, “예수 그 이름”만은 부를 수 있기를! 기도한다. 나도 계속 기도하련다.

네 힘이 아니라 내 힘이다

2020-04-23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9:1-8

예전에 아이를 데리고 공원 호수에서 낚시를 한 적이 있다. 물가에 던져놓은 아이의 낚시대에 물고기가 입질도 전혀 안하자 지루했는지 별로 들고 있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내가 들고 깊은 곳에 던지고 잠시 있으니 물고기가 미끼를 덥썩 물었다. 모른체 하고 아이에게 주면서 계속 해보라고 하자 작은 손에 갑자가 낚시대가 요동을 한다. 나의 놀라는 체함과 아이의 진정한 놀람과 흥분 속에 손바닥만한 물고기를 꺼내 들어올렸다. 아이의 놀람과 흥분이 비명에 가까왔다. “내 잡았어, 내가!” 함께 경험하고 기뻐하자는 것이었지만, 스쳐가는 내 마음의 질문과 대답은 ... “네가 잡은 거니? 내가 잡은거지”

무엇가 큰 일을 해냈는데, 누군가가 “내 힘이었다” 하면, “내 힘”이라는건지 “네 힘”이라는건지 혼동될 때가 있다. 예전이 영어가 더 익숙한 아이에게 “네 힘, 내 힘”이라는 말을 읽어주며 다르게 알아들을 수 있는지 물어보니 전혀 같게 들리고 구별이 안된다고 한다.

단어의 발음만이 아니다. 삶 속에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이 “내 힘이다” 하심을, 수도 없이 “그래 네힘이라 하신다”라고 하며 자기 착각속에 동문서답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오늘 본문도 그렇다. “ 네 공의가 아니다 (4a, 5a), 내 그 땅의 백성의 악함(4b, 5b)과 내 힘으로 쫓아내 주었다” “네 앞에서 내가 앞장서서(3) 너에게 안겨준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부르짖고 기도하다가도 응답받고, 위기의 순간이 지나면, 너무 재빠르게 “하나님이 하신 것을, 내가 한 것, 나의 공로로 바꾸어 버린다.

가나안 토착민은 악하고, 이스라엘은 목이 곧은 백성(6)이라 틈만 나면 자기를 내세웠지만, 우리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때문에 내가 있음을 아는 그저 "나의 나됨이 은혜"인 백성이어야 한다.

우리 앞의 삶의 장애물이 여리고성과 같이 크고 강하다 할지라도, 장대하고 많은 아낙사람(2)들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할 일은 한가지이다. 하나님이 하시도록 말씀을 앞세우고 기도하면서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나 여호와 , 네 아버지인 내가 해 주리라. 내가 앞장 서 주리라” 그리고 기도하는 것이다. “주여 지금도 제가 믿고 순종하겠습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고 고백합니다.”

내 힘으로 했다는, 해내겠다는 착각은 금물이다. 광야같은 힘든 세상에서, 강한 가나안 앞과 같은 불가능과 절망 앞에서 말씀과 기도, 믿음으로 주의 등 뒤에 업히고 매달려 주의 힘으로 살아가자.

필히 가져야할 것과 버려야 할 것

2020-04-20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7:12-26

아이들이 어릴 때에 우리 부부가 지방을 다녀와 한밤중에 현관문을 열려니 키가 없었다. 어린아이들이야 세상모르고 자고 있으니 깨울 재간이 없었다. 부르고 두드리고 애쓰다가 결국에는 창문을 열고 들어갔다. 도둑은 아니다, 내 집에 들어간 것이니까. 가져야 할 것이 필요할 때 없으면 낭패를 당한다.

방에 좋지않은 냄새가 어디선가 자꾸 난다. 쓰레기통에 담긴 바나나 껍질이 썩는 냄새이다. 삶에서, 마음 속에서 버려야 할 것을 제 때에 버리지 않으면 결국 썩는 냄새가 나고 향기를 아는 영혼의 감각이 마비가 될 것이다.

본문에서 주님은 말씀의 언약을 지키면 조상에게 베푼 인애(12)와 함께 자녀와 땅과 소산들, 소와 양을 풍성하게 해주리라 약속하신다(13).
말씀은 달랑 새겨진 돌판이 아니다. 그 말씀 속에 주신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이 가져야 할 것은 그 약속대로 능히 이루실 하나님의 능하심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행여 “심중에라도 (17)” 대적과 장애물이 엄청나도 거기에 눌리거나 부정적이 되지 말고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기억하라(18)라 하신다. 19절에 그 분은 끝까지 챙겨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큰 시험”-열재앙을 통해서라도 자기 챙겨주시는 하나님/ “이적(signs)”-만나를 끝까지 먹이셔서 챙겨주시는 하나님/ “기사(wonders)”-홍해를 가르고 덮어서 챙겨주시는 하나님/ “강한 손”-여리고를 무너뜨리시고 챙겨 안겨주시는 하나님/ “펴신 팔”-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하며 안식처를 챙겨주시는 하나님...”

우리도 필히 가져야할 것은 오늘같은 질병에, 오늘날같은 환경의 변화와 불안에 눌리지말고 부정적이 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사는 생할이어야 한다. 그 분은 다 챙겨주신다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한편 가나안 족속들과 왕, 그 신들을 천하에서 제하여 버리라(16, 24, 26) 하신다.
아까와하지 말고(16), 탐심을 마음에 들이지 말고(25), 집에도 들이지 말라(26) 하신다. 왜 하나님이 이토록 진멸을 강조하시나 ! 탐심과 유혹, 보이는 것이 파고드는 신앙의 변절이 얼마나 강력하고 집요한지 안다면 이해할 것이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마음 속에 우리들을 향한 보호와 사랑을 알 것이다.
왜 진멸을...이라는 질문보다, 내가 버려야하지만 못 버리고 있는 그 집요한 것을 필히 버려야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부디 우리 모두가 버려야 할 것을 붙들고 살고, 가져야 할 것을 버리는 어리석은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알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필히 가져야할 믿음을 붙들고, 필히 버려야 할 세상 것들을 단호하게 내어버리고, 끊고, 거절하며 마음의 가나안에서부터 천국 가나안까지 축복을 체험하며 살아가자.

예수의 십자가는 닫혔던 문을 여는 열쇠다

2020-04-10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 27:45-56

중요한 건물이나 집일 수록 문이 견고하다. 그 문이 육중하고 견고하고 단단할 수록 그 안에는 섣불리 들어가면 않되는 곳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아무리 크고 견고해도 내게 열쇠가 주어졌다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은 간단하다. 열쇠를 넣어 돌리고 밀고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문이라 하셨는데, 본문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는 이제 무덤 문에 당신이 갇힐 패배의 끝이 아니라 문들을 여는 열쇠로 깨닫게 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성전 휘장 문(51)”- 죄와 성결의 단절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우리 모두가, 누구라도 십자가의 제물되신 예수를 통해 찢어진 성전휘장 사이를 열고 들어가 모든 죄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구원과 용서와 사랑을 받는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죽음이라는 두려움의 “무덤 문을 열고”(52) 확실한 소망을 주는 열쇠이다. 예수님이 죽자, 무덤이 열리고 죽은 사람들이 일어났다.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살아났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우리들이 부활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기에, 그것을 믿기에 우리가 부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제 죽음에 갇힐 까봐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나의 죽음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열고 가져가 버리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많은 여인들을(55-56) 견고한 믿음으로 들어가게 하는 열쇠이다. 여기까지 예수를 따르는 충성된 여인들의 모습이나, 그들의 충성은 장례까지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들에게 이것은 예수의 장례식이 되겠으나, 이것은 예수의 약속된 모든 말씀의 장례식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십자가는 오히려 저들의 영의 눈을 열어 천국의 약속까지 붙들고 사는 충성된 믿음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지금 제자들의 충성은 어디있는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56절)” 어머니라는 단어 한마디면 되지 않을까? 어머니의 믿음이 평생 자녀들의 믿음의 문으로 들어가는 열쇠이리라!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이방 백부장(54)과 이방인들이 ..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외치게 하듯이, 모든 열방의 영혼이 갈 수 있는 지옥문을 닫고 천국문을 여는 열쇠이다.

십자가의 은혜는 그 누구라 하기 이전에 나에게 주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열쇠를 우리에게 꼭 쥐어 주셨다. 이제 우리 모두 예수의 십자가가 죄로부터의 날 구원했음을, 내 앞에 닥치는 죽음조차 이기게 하심을 선포하자. 그리고 영원한 말씀 속에 이루어질 재림과 천국까지 믿으며 사는 충성과 열방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하자.

십자가 앞에서, 어느 길을 갈 것인가?

2020-04-09

성경묵상의 나눔: 마가복음15:1-15

요즘같이 하루하루가 생존으로 각박한 세상에서, 이 세상에서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철학자의 심성일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삶을 살고, 그 분 앞에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성도로서 구도자의 자세이다.

본문에서 이제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시는 예수님은 공회에서의 불의한 재판을 받고, 빌라도 앞에 서게 된다.
그 분은 이미 예상하셨지만, 불법의 재판과 모함, 선동과 광기 속에서, 예수님은 마음부터 벌써 못이 박히고 있으시다. 저들이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아는 우리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흔들리는 군중으로?
하나님의 음성은 들어보지 못하고, 공회에서 의논하고(1) 결정한 것이니 옳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13, 14) 외치는 집단주의처럼, 우리도 세상법과 정보, 과학상식, 문화유행따라 민족끼리만 와치며 살아갈 것인가?

율법에 안주하는 대제사장처럼?
내가 결정하고 내가 끝장을 내야한다는, 고발하고 충동하는(3, 11) 대제사장들처럼, 우리도 자기가 주인인양 착각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회개를 잃어버린 인생으로 나도, 가족도, 이 사회도 고집스레 파멸로 끌고 갈 것인가?

양다리 걸친 빌라도처럼?
뭔가 잘못된 것을 알아도, 죄가 없는 예수를 보아도, 무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15) 예수를 죽음에 내어주는 빌라도처럼, 우리도 몸사리고 “안전 안전”외치며, 주님사랑을 따르기 위한 도전과 위기를 회피만 할 것인가?

복수의 칼을 가는 바라바처럼?
이제 풀려나 더욱 힘주어 “민란 밖에 해결이 없다!” 더욱 외치고, 증오의 칼로 로마 병사의 옆구리를 찌를 바라바(15)처럼, 증오의 마음으로 힘을 키운 복수만이 해결이라 외치며 살 것인가?

그런데 예수는 “내가 왕이다(2). 내 나라는 이 땅이 아닌 아버지의 나라 천국이다” 라고 한마디만 하시고, 침묵으로(5) 이 길을 가신다. 십자가의 길, 부활의 길, 영생의 길을 사랑으로 끝까지 가시며 우리에게 영생구원의 길을 남기실 것이다.

이 시간 마음에 주의 음성을 듣는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대는 누구인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군중인가, 율법에 안주한 제사장인가? 양다리걸친 빌라도인가? 복수의 칼을 가는 바라바인가?

아니면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줄 예수사랑, 십자가의 길의 Follower인가? 가장 약해 보여도, 가장 무기력해 보여도, 가장 강력하고 영원한 것이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의 사랑이다. 그것만이 우리의 길이요 소망이다.
이 고난 주간에 어느 길도 아닌, 오직 예수님의 가신 그 길을 베푸신 구원의 사랑을 감복하며 우리 모두 따라가자. 험한 세상 속으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 만사를 기도하는 성도

2020-04-06

성경묵상의 나눔: 마가복음 11:15-25

예루살렘을 입성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성전에 들어가신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는 매매상, 환전상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의 상들을 둘러 엎으신다. “만민이 기도할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17)”하시며 분노하시며 안타까와 하신다.

매매상, 환전상들도 신앙이 있다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세상과 신앙을 오락가락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기보다, 판매수익의 돈액수가 저들에게는 우선이었다.
정도차이는 있지만 혹 나의 모습이 그런 모습이 아닐까 ? 우리 모두 내 삶의 장소마다 진정 기도하는 집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회개의 기도로 나 자신을 둘러 엎자! “예수께서... 둘러 엎으시며(15)” - 내 형식적 신앙, 이기적 욕심들을 둘러 엎는 회개의 기도가 절실할 때이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선포에 복음은 믿으며 회개는 까먹어서는 안된다. 회개와 구원은 끝까지 함께 가는 것이다.

예배속의 기도로 주를 경배하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17)” - 기도와 예배는 같은 어원이다. 나의 기도로 주님을 예배하는 교회의 지체가 되어야 한다. 함께 빌기를 다할 때에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믿음의 기도로 문제를 향해 선포하자! “믿음으로 기도하며, 불가능해 보이는 산조차 옮겨가라(23)” 선포하라. 산을 옮기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우리의 기도는 초점은 주님의 긍휼을 움직이는 것이지 산을 움직이기는 것이 우선이 아니다. 내 마음, 입의 선포 자체가 믿음이며 주님이 주목하신다.

믿음의 연속기도로 삶을 끝까지 헤쳐나가자! “기도하고, 의심치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24)” 예수님도 세번 기도하셨다. 바울도 질병의 고통을 세번 기도하였다.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하는 것은 불신이 아니다. 믿음을 다져가는 것이다. 성도인 우리에게 제일 큰 안타까움은 기도를 않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기도하지 않는 것이다.

중보기도로 사명의 꽃을 피우자! “기도할 때에 ...용서하라(25)” 예수님이 제일 많이 기도하신 것이 무엇일까? 중보기도이다. 제자들에게 제일 원하셨던 기도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기도하라”는 중보기도였다.

우리의 용서함과 용서받음도, 섬김도, 구제도, 전도도, 사랑조차 중보기도의 영역 안에 다 들어있다. 적어도 매일 가족 한사람, 교우 한 사람, 전도대상자 한사람, 목회자와 선교사를 중보기도에 깨어있으라.

내 신앙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성전과 함께, 내 마음 속과 삶이 만사를 기도하는 장소가 되도록 영적 영역을 넓혀가자.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러나

2020-04-03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4:25-31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실망스런 결과를 볼 때 하는 말이다. 혹시 지금 내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시는지...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갈 가나안에서 우상숭배(25)를 절대 금하신다. 만약 불순종하면 그 땅에서 날이 길지 못할 것이고(26), 여러 민족들 사이로 흩어질 것이라(27) 하신다. 이보다 더 엄한 경고가 어디있겠는가?

이스라엘이 깨닫고 바르게 하나님을 따르고 섬겼을까? 혹시나 했을지 모르지만 역시나 실망이다. 후에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고 고난의 디아스포라의 길까지 가게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고난에서도 끈질기에 버티며 이어가지만, 기회속에서도 끈질기에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고, 우상문화에 빠져들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만 탓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앞에서의 불순종과 배반의 삶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나 했을 인간이 만들어가는 과학과 자만의 삶을 돌아보라. 하나님을 멀리한 세상은 고난이 끝이 없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우리들에게도 연단의 연속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실패보다 더 무서운 것은 완전한 포기, 절망이다. 그러니 절망, 자기연민, 우울함 속에서, “우리가 혹시나 노력해보았고, 다시 일어서 보았지만, 역시나 난 안돼”라고 완전히 쳐져서 말하지 말라.

“혹시나 해도 역시나” 실수투성이인 우리들이고 그래서 이제 다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지만, “그러나” 주님도 그것조차 이미 아시고 계신다.
“내가 너의 약함을 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은혜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요 바로 복음이 아닌가!

그러므로 너무 너무 내가 약할 때에 , “인생이 끝장난 날 같을 때에(30), “마음과 뜻을 다해 주를 찾는(29)” 회개라는 마지막 카드를 사용하라. 주님은 내가 회개의 눈물로 찾아옴을 한시도 잊지 않으시고 지금도 정확하게 기다리신다. 그리고 거기에 새로운 변화와 기적이 있다.

그것이 “거기서도 네 하나님을 찾게 되리니...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29)”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역시나”하며 한숨을 토하고 힘들어하는 우리들의 삶의 현장, 거기에도 하나님은 먼저 와 계시다는 것이다.

오늘 환경을 바라보며, 또 자신을 바라보며, 여러분의 가슴 속에서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는 깊은 한숨의 고백이 아니라, “그러나” 여전히 내 기도, 내 회개를 받아주시고 함께 이기게 하시는 하니님의 자비와 언약(31)을 꼭 붙들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약속의 땅은, 땅보다 약속이 중요하다

2020-03-30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3:12-22

봄이다. 일구어야할 잡초투성이의 작은 텃밭이 자꾸 눈에 띈다. 오늘이라도 갈아엎어야 하겠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흙의 소중함, 땅의 소중함을 갈수록 느끼게 된다. 그러나 사실 ‘땅을 소유’하는 소중함은 잘 모르고 살아왔다. 땅을 내 소유로 가져본 적이 없어서가 아닐까? 한국이나 미국에 돈이 될만한 땅이라도 있으면 마음이 달라지지 않을까?

신명기 본문에서 드디어 이스라엘은 요단 동쪽부터 땅을 정복하는 일들이 시작이 된다. 그리고 르으벤, 갓, 므낫세 지파는 비옥한 동쪽 지역에서 정착하기를 원한다. 그 때 모세와 이스라엘 모든 지파는 그들이 먼저 함께 싸운 후에 차지하기를 명령하고 이에 따르게 된다. 자칫 그르치면 가나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분열될 위기를 넘기게 된다. 그리고 요단 서쪽의 가나안땅의 정복을 위해 계속 전진한다.

땅, 가나안 땅, 모세와 모든 백성이 꿈에도 그리던 그 약속의 땅이다. 목축을 주로 하는 그들에게 땅은 더욱 소중하였으리라!
그러나, 그럼에도 땅보다 더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 약속이다. 약속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한 모델하우스들을 지은 샘플 단지일 뿐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예루살렘 지역의 성전은 예배의 기초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땅이 아니라, 그 땅을 믿음의 출발이라 정해주시고, 나와 함께 하자 허락하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이 과연 조그만 가나안 땅덩어리에만 마음을 두셨을까?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그 지역에서부터 참된 율법, 복음이 생명수가 되어 흘러나고, 온 세상에 넘쳐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미국사람에게는 총소리가 “Bang Bang” 하고 들리지만, 우리 한국사람은 “땅땅”하고 듣는다. 땅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인가?

잊지말자. 온 세상 땅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예수 한 분이시다.
진정한 약속의 가나안 땅은 우리가 예수와 함께 살고 있는 지금의 현장이요, 아직 예수를 모르는 모든 영혼들의 마음 속이다. 우리에게도 아직도 정복해야할 약속의 땅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좁은 땅 소유의 욕심에 멈추거나 갇혀서는 안된다. 그 지역과 그 땅에만 목메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땅보다 소중한 것이 약속의 말씀이다. 지금 이스라엘이 공동체를 강조하듯이 열방을 공동체로 삼아 그대가 한 지체가 되기를 바란다.

왕고집과 믿음의 고집

2020-03-25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1: 34-46

세상에서 제일 고집이 센 성이 “내”가 라고 한다. 우리가 내가를 얼마나 붙들고 살았는지! “내가 이래 봬도..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내가 한 일이야...”
그 고집은 좌절하고 상처를 받아도 다를 바 없다. “내가 뭘 하겠어... 내가 이것밖에 않되나... 내게 왜 이런 일만...”
사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우리 성이 본래는 “내”씨로 바뀌었다 생각해 본다. 성에는 본이 다 있는데, 그 후 우리 가문의 본은 “왕고집 ”일 것이고...

오늘 말씀에는 불신앙으로 하나님께 책망과 징계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뉘우친다며 나가 고집스레 싸움을 시작한다. 이제 지금 싸움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모세의 만류에도 나가 싸운다(43). 물론 결과는 패배와 통곡(45)이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이제 잘해보자는 마음도 자기 고집일 때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
지금 내 삶이 성공이라 생각하나, 또는 실패라 생각하나? 하나님의 뜻에서부터 돌아보라. 내 생각과 전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일들이 고통스럽고 지루하게 여기고 있는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느껴보라. 내 판단과 전혀 다르게 내 마음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책망과 징계가 속이 상하고 왜?라는 원망이 생기는가? 하나님의 손길로 체험해보라. 내 판단과 다른, 전혀 새롭게 대면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 범죄하였습니다(41)”라고 고백하였는데, 더 나아가 이제는 자기들의 판단을 내려놓았다면, 깊은 영적 회개와 온전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만을 따랐다면 전혀 다른 결과를 허락하지 않으셨을까? 어떤 결과일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분명 그들에게 축복이었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 갈렙과 여호수아가 등장한다. 가나안 땅을 밟을 유일한 출애굽 1세대들이다. 그들도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도 우리들처럼 나름 고집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에서 왕고집이 아닌 믿음의 고집, 온전한 순종을 본다.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한(35)”한 갈렙, 그가 행한 것은 그저 우직하게 하나님이 약속만을 붙들은 것이다. 우리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담대하게 해주어 백성을 이끌고 갈 여호수아(38).” 그가 행한 것은 주인이신 모세를 그저 충실하게 따르며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든 것이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크고 비밀한, 풍성한 젖과 감사.기쁨의 꿀이 넘치는 가나안의 축복”은 우리에게도 주셨다. 오직 믿음의 고집으로 우리 다 함께 주의 손에 이끌려 그곳까지 나아가자.

그런 10명의 위험한 정탐꾼은 아예 내보내지 말자

2020-03-24

성경묵상의 나눔:신명기1:19-33

광야생활을 거의 40년을 통과하고 드디어 약속의 땅 앞에 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모세가 감격 속에 선포한다. “하나님이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말라 주저말라(21)”

그러나 하나같이 모든 백성(22)이 내놓은 것은 “사람을 보내어 먼저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 어느 성읍으로 갈지 알아보게 하자(22)”는 것이었다. 얼마나 적절한 생각으로 보이는가!
그러나 그것은 광야를 들어갈 때부터, 이제 광야를 벗어날 때까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자는 사람의 생각일 뿐이요, 깊은 마음 속에 남아있는 언젠가는 터질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12명 정탐꾼의 귀환 때에 그 두려움은 터지고 만다. 대다수의 보고가, 들어가야 할 가나안이 하늘을 닿을 크고 견고한 성읍, 장대한 성읍 군사들, 거인 아낙자손(28)들이라니! “메뚜기같은 우리가 무엇할 수 있겠나!”(민13) .. 실망, 절망, 원망(27)이 얼마나 빨리 번지는지도 모두가 알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와 함께 저들은 광야의 길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40절) 그리고 가나안의 정복은 자녀들에게 맡겨지게 되고, 그 광야가 출애굽 1세대의 무덤이 되고 만다. 저 가나안을 앞두고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힘든 여정에서 여기까지 믿음으로 살아왔는데! 이 때에 내가 그런 위험한 정탐꾼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정탐꾼을 내보내서도 안된다!

지금 우리의 10명의 정탐꾼, 결코 내 마음 속에서조차 내 보내지 막아야 할 위험한 정탐꾼은 무엇일까?
1. 약속한 말씀을 멀리하고 그 성취를 믿지않는(19, 26) 내 생활이다.
2. 출애굽 과정의 엄청난 기적과 은혜들을 잃고(19, 32) 보는 것이 전부라는 세상문화이다.
3. 모든 사람(22)의 뜻이라고 그저 따르는 영적체험을 모르는 형식적 신앙이다.
4. 영적 지도자의 권면(21,32)을 무시하는 무감각해진 성도의 오만함이다.
5. 백성의 어리석은 강청(22)에 끌려 바른 길을 왜곡하는 지도자의 무책임이다.
6. 자기를 메뚜기(민13)라 여기는 연민을, 아직도 강한 예수님, 성령님과 바꾸지 못한 사람이다.
7. 전능자 하나님의 변함없는 자녀사랑(31)을 망각하고 혼자라 외로워하는 인생들이다.
8. 내 인생을 불로, 구름으로(33) 보호하심이, 어제 오늘, 영원히 계속됨을 모르는 사람이다.
9.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아, 평안이 없기에 염려, 걱정의 정탐꾼을 자꾸 내보내는 사람이다.
10. 하나님의 음성과 약속은 멀리하, 그저 휴대폰과 유투부와 뉴스의 소식이 진리라 여기며, 그 곳에서 위험한 정탐꾼이 물어다주는 것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잊지말자. 우리에게는 약속의 말씀이,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성령의 인도하심이 우리의 정탐꾼이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과 행동으로 옮기며, 기도로 끊임없이 그 분과 교통하며 지시를 받고, 내 문제 앞에서 용감히 전진하자. “애굽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다(30)” 아멘.

날 사랑하느냐 거듭 물으심은

2020-03-18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 21:15-25(요한복음 끝) 예수님이 베드로를 앞에 두고 마지막 질문을 하신다. 우리 모두도 그 자리, 그 분 앞에 서있다. 두번이나 날 사랑하느냐 물으실 때마다 주를 사랑한다 고백하지만, 마지막 세번째에 가서는 베드로의 마음은 근심과 아픔으로 가득 찼다. 죽기까지 따르겠다 말하고 다짐했지만(13:37) 세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예수님을 버린 자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한,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 자신이 아닌가! 그러나 예수은 베드로의, 우리의 이전의 실패를 끄집어 내고, 꼬집는 얄팍한 지적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날 사랑하느냐 물으심은, 너의 눈물도 알고, 너의 깊은 영혼의 회개도 알고, 그러기에 이미 널 용서하였다는 대답을 가지시고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이다. 이들보다 더 날 사랑하느냐 물으심(15)은, 진정 어느 제자보다 네가 약함을 이제 알았다면, 계속해서 “주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회개와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후7:10)”는 예수님의 진정 낮아짐의 일깨우심이다. 날 사랑하느냐 물으심은, 너를 통해 여전히 내 일을 하겠다는, 양들을 섬김에 (15, 16, 17) 귀하게 쓰시려는 주님의 계획을 말씀하시려는 것이다. 날 사랑하느냐 물으심은, 내가 가는 길의 고난도 네가 함께 통과하게 될 것이고 (18, 19), 그럼에도 내가 널 사랑하고, 네가 날 사랑하면 어떤 것도 그 사랑을 끊을 수 없고, 어떤 일도 감당해낼 수 있다는 (롬8:37-39) 가장 큰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니?” 하시는 예수님께, 이제 우리가 대답을 드릴 차례이다. 아니 매일 드려야할 기도를 고백할 때이다. “주님 제가 약한 것 아시잖아요. 그러기에 내가 자신있다, 자신없다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그저 주님을 의지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늘 품고 살겠습니다. 주를 위해 당하는 고난의 자리에게 세번, 삼백번, 삼천번 용서하신 그 사랑을 붙들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지금도 순종하며 도우심의 근거가 되는, “날 사랑하느냐”에 담긴 사랑의 십자가, 사랑의 부활생명, 사랑의 성령님을 의지하고 따라갑니다. 오늘도 도와주십시오. 지금도 살아계신, 날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달라지신 것이 없다!

2020-03-17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 21:1-14 사형수가 마지막 사형대로 가면서 계단에서 휘청 넘어질 뻔 했다. 그 때 한 말이 “어이쿠! 하마터면 죽을 뻔 했네!”였다나... 제자들이나 사람들은 죽음이 끝인 줄 알고 살아있는 동안에 이기심과 공명심에 붙들리기도 하고, 예수님의 죽으심 후에는 결국 모든 것이 끝인 줄 알고 두려워했고, 다시 고기잡으로 베드로와 함께 디베랴호수에서 배를 탄다(3). 그러나 작은 잡어 한마리는 커녕 아무 것도 잡지 못한 밤이 되었고, 서로들 “그렇지,뭐 되는 일이 있겠어. 다 변해버렸는데...”하며 깊은 한숨들을 꿀꺽 속으로 삼켰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하시고, 부활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에게는 달라지신 것이 없다. 제자들이 멀어져도 여전히 찾아오시고(1) “얘들아!” 부르시는(4) 예수님의 사랑과 열정이 있으시고,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게 하시고, 찢어지기 직전의 기적을 회상(눅5장)케 하시면서, 153배(11)의 축복을 여전히 경험하게 하신다. 이제 흘렸던 눈물이 호숫물이 되어 예수께로 첨벙첨벙 다가가는 베드로(7)를 맞이하는 예수님은, 베드로는 풍랑 속에 빠져가는(마14장) 자신을 손잡아주시던 그 예수님이시다. 조반을 먹으라(12)시면 떡과 생선을 떼어주시는 예수님의 손길은 여전히 5병2어의 기적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돌보아 주시는 그 손길이시다. 나의 주,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도, 부활의 발걸음에서도 달라지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우리가 세상호수로 사명을 버리고 가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주님의 은혜의 바다로 이끌려고만 한다면, 내가, 우리가 고기잡듯 세상 일만이 만사 우선이 되지 않고, 사람낚는 어부의 사명을 위해 모든 삶의 패턴을 복종시킬 수 있으면, 예수님은 여전히 살아계셔서 나와, 우리와 함께 하시며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게 하실 것이다. 지금도 당신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달라지신 것이 없는, 나와 함께 해주시는 예수님을 고백할 수 있겠는가? 난 아멘이다.

또 골고다인가? 내 마음 속인가?

2020-03-10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 19:1-16 필경 죄된 인생들에게서 시작한 변종바이러스가 모두를 두렵게 하고 삶의 모습을 바꾸어 놓고 있다. 그러나 예수 십자가의 복음을 바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은 우리가 예수의 고난에의 동참과 부활의 치유와 새생명의 능력을 구하는 사순절기이다. 오늘 19장 말씀 속에 예수님은 온갖 멸시와 조롱과 채찍질 속에서, 저들 죄의 바이러스의 유일한 백신으로 어린양의 제물이 되신다. 우리가 또 다시 그 분을 골고다로 내몰겠는가? 내가 저지른 멸시와 조롱과 채찍질로 죽으신 예수이시다. 이제는 회개로 나 자신의 불치병자됨을 시인하고, 예수의 피뭍은 십자가의 구원과 기적의 치유를 받자! 더 이상 골고다가 아닌, 내 마음 속으로 그 분을 모시자. 유대지도자의 계략과 선동(6)처럼, 지도자인 내가 사랑과 희생없이 형제 자매를 대하고, 너무 쉽게 판단의 잣대를 대곤 했던 것을 회개하자. 백성들처럼, 분위기에 휩싸이며 소문이 진리인양 퍼뜨리며 분별없이 저지른 칼같은 언어(15)와 던진 돌들을 회개하자. 군인들처럼, 명령이니, 그냥 따를 뿐이니 하며 함께 섞여 저지른 우리의 집단적인 죄(2)들을 회개하자. 빌라도처럼, 죄없는 줄 알면서 양심의 소리를 들으면서도(4), 내 희생으로 품을 자리를 발뺌하는 나의 이기적인 행동들을 회개하자. 제자들처럼, 지금 가장 힘들고 어려운 때에 예수님을 피해 숨어버린 나의 약함을 회개하자. 그래서 코로나 바이러스로 연단하시는 이 때에, 더 이상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지 말자. 우리의 회개와 십자가를 붙든 John19장의 믿음으로 Convid19의 근원을 소멸시키고, 예수와 동행하며, 정금같이 전진하자. 글로리아 코로나, 면류관의 주인공이 되자.

이미 죽었음을 선포하자

2020-03-09

성경묵상의 나눔: 18:28-40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이제 시작되었다. 유대 지도자들을 계획 속에 예수님을 한밤에 잡아 안나스의 집으로, 가야바 앞으로 끌어가 심문하고, 새벽에 관정의 빌라도에게로 끌고가 밀어넣는다. 예수님을 “행악자”라(30)하며, “죽어야할 대상(31)”이라 한다. “강도 바라바(40)”만도 못하다며 십자가에 죽어야할 자라고 소리친다. 지도자들은 계략이 집요했고, 사람들은 온갖 증오를 예수님에게 몰아갔고, 제자들에게는 온갖 두려움이 터져 본능적으로 움츠려 숨을 곳을 찾았다. 예수님 앞에 서있는 빌라도조차 긴장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은 놀랍게도 담담하시고 평온하시다. 고통의 감람산 정원의 기도시간은 있었지만 “이제는 가자”며 제자들을 이끄셨고, 이제는 고난을 기꺼이 받으실 준비가 되셨다. 그런 평안이 어디서 오는가? “자신이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32)”을 아신 주님은 이미 자신을 어린양으로, 제물로 내놓으신 것이다. 십자가 이전에 이미 죽으신 것이다. 이제 십자가 앞에서 세상이 요란할 지언정 그 분은 묵묵히 그 길을 가실 것이다. 그렇다. 내가 죽으면 평안이 온다. 육신의 숨을 스스로 끊는다면 죄가 되겠으나, 내가 예수 안에 영적으로 죽으면 평안이 다가온다. 새삶이 임한다. 문제가 해결된다. 문제가 아예 없어진다. 제자들도 십자가, 부활의 예수님 안에서 자신들이 죽을 때 비로서 평안과 담대함이 왔다. 주위에서 여러가지로, 심지어 바이러스까지 조여오는 환경 속에서, 오늘 믿는 자로서 우리에게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겠는가! 우리도 동일하다. 예수 안에 이제는 내가 죽었고, 내 안에 예수가 사심이 선포되어져야 한다. “이제는 내가 산것 아닙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실 뿐입니다!” 이것이 앞선 가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이고, 오늘의 요란한 세상 속에 나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시다.

내 근심이 기쁨이 되려면

2020-03-02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 16:16-24 근심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잠시 잊었는지는 몰라도 근심은 앙금처럼 가라앉았다가 기회만 되면 떠오른다. 십자가와 부활을 생각지도 못하는 제자들의 속내에도 근심이 가득 가라앉아있었다. 그런 제자들에게, 그리고 그처럼 근심하는 나에게,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20b)” 그렇다. 나의 다가온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될 수 있다면 근심이 나를 주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 모두 근심을 기쁨을 바꾸도록 기도하자. 주님, “지금(22, 24)과 그날(23)”을 저는 분명히 압니다. 예수님, 당신은 십자가 앞의 지금과 부활승리의 그 날을 이루셨습니다. 내 인생은 십자가같은 시련과 어려움이 닥치는 지금도 있지만, 부활의 생명처럼 시련과 어려움을 밟고 쑥쑥 나아가는 그날도 반드시 있음을 압니다. 저의 눈을 지금에서 그 날까지를 보며 근심을 기쁨으로 이겨내게 하소서. 조금 있으면(16, 17, 18, 19)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은 이 일들이 어떻게 되어갈지 몰라도, 또 주님은 침묵만 하시는 것 같아도, 내가 과연 끝까지 견디어낼 수 있을까 하는 순간에도 잊지 않게 하소서. “조금 있으면...” 당신의 수많은 약속은 모두 나를 향하여 진행 중이시고, 이루심이 결코 그리 길지 않음을 압니다. 바울이 마치 “내게 잠시받는 환난의 가벼운 것 후에 영광의 엄청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 것처럼.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순간순간 주를 의지하며 기쁨으로 그 “조금 있으면“의 때를 기대하고 기다리게 하소서. 이제는 “내 이름으로 구하라 받으리라.(23, 24)”는 보장의 말씀을 주시다니요! 어떤 내 근심보다 크신 주의 능력을 믿기에, 주님의 기도의 허락과 그 응답 앞에 정말 부족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의 부족 속에서도, 주님과 저 사이의 조근조근하는 기도와 차근차근 채워주시는 주의 손길 속에서 순간순간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며 살아가렵니다. 십자가를 지나 부활의 영광 가운데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제 예수 안에서만 평생 사는 겁니다

2020-02-27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 15:1-8 한 아이가 자전거를 타는 것을 보고 이웃집 아저씨가 물었다. “너 왜 화가 그렇게 났니?” 그러자 아이는, “엄마가 야단쳤어요! 나만 미워하나 봐요!” 다시 묻는다. “그런데 다른 데는 안가고, 왜 여기만 빙빙 돌고 있니?” 아이가 말한다. “엄마가 전에 여기에서만 놀라고 했거든요” 그렇다. 놀아도, 쉬어도, 난리를 쳐도 주 안에서, 예수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우리 신자의 삶이다. 오늘 15장의 8절까지의 말씀 속에서 “안에 있으라, 안에 있지 않으면”라는 말이 8번 이상이 나온다. 예수 안에 있어야, 그것만이 살고, 이기고, 축복받는 길이라는 것을 주님은 제자들에게 전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우리 모두 주 안으로 ‘들어가자’ - 믿고자 하는 자, 영접하고자 하는 자마다 가지로 삼으셔서 주님은 당신의 원 포도나무 몸통에 가지로 꽂아 생명을 주신다. 주 안에서 ‘머물자’ - 안에 “거하라”는 말씀이 6번 이상 나온다. 내 마음에 온갖 생각과 유혹이 세상으로 나를 불러내려 해도 이제는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다. 특히 다가오는 이 봄날 앞에서. 주안에서 ‘버티자’ -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버려지나니(6)” 세상살이 험한 바람, 뭇 인생들 서리같은 갉아먹는 비방, 춘하추동 내 몸의 변동속에서도 버티면서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주 안에서 ‘소통하자’ - “내 안에 거하고 원하는 대로 구하라(기도하라)(7)” 한 포도나무에서 30미터까지 가지가 뻗히고, 3000송이의 포도가 열린 나무를 보았다. 양분과 수분과 정성의 소통이 그 비결이란다. 기도로 주님 안에서 친밀하게 소통하자. 주 안에서 ‘열매를 맺자’ -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어 자기가 먹는 법이 없다. 나같으면 속상해서 다음해는 열매를 아니맺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법이 없다. 열매나, 나의 은사, 소득은 ‘이웃’을 위해 존재한다. “아니 남을 위해서라면 그러면 나는 뭡니까?”하는 마음이 있는가? “나”도 주님이 보실 때 “이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의미이다. 그저 예수 안에 들어가, 머물고, 버티고, 소통하고, 열매맺어 “내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시는 제자(8)”로 살아가자. 아멘.

하루도 편할 날이 ............ 있다

2020-02-26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14:25-31 주님이 오늘 본문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27)”고 하신다. 과연 우리가 근심하지 않는다고 마음먹으면 근심이 없는가? 두려울 것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오늘도 가까이 다가오는 근심과 감추어진 한숨과 두려움을 누르다가언젠가 폭발할 휴화산과 같은 나의 모습이 아닐까? 이 문제, 그리고 저 문제...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우리 인생이 아닌가! 그런 우리에게 오늘 주님은 터질 것 같은 내 마음을 뒤바꿀 진정한 평안을 말씀하신다. “나의 평안”을 주시겠다 하신다(27a). 이 예수의 평안은 내가, 누구든지 믿음으로 받아 누리면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내 마음이 격동될 때: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 주님의 평안은, 예수를 믿음과 성령의 위로를 함께 받는 자의 “마음”에 임하는 것이다. 격동하는 그대 마음에도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인정하고, 그래도 내 귀에 들려주시는 성령님의 위로를 마음에 받으며 평안을 되찾자. 예수를 마음에 영접하여 모시라. 세상이 불안하기만 할 때: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 주님의 평안은, 예수가 말씀하신 것은 이루시고 약속은 꼭 지키시는 분임을 깨닫는 자에게 임하는 것이다. 말씀이 내 마음과 영혼의 닻이다. 성경을 열어 예수님에 관한 말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예수님의 제자들이 고백한 말씀들을 의지하고 한없이 떠내려가고 흔들리는 마음을 평안으로 고정하자. 혹 힘들게 하는 일이 닥칠 때 : “성령 그가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 내 마음의 평안을 계속 휘저어 놓는 사람은 어쩔건가? 벌어지는 예상못한 일은 어쩔 것인가? 주님의 평안은, 순간순간 삶의 지혜와 적용을 겸손히 요청하는 자의 마음에 가르쳐 주시려고 작정하셨다. 이것이 예수의 영이 하시는 일이고, 예수는 떠나셔도 우리 안에 더 큰일을 행하게 하시는(12)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축복은 자유함과 평안함이라 생각한다. 세상이 온갖 풍파로 흔들려 해도, “하루 하루가 편할 날이.........예수 안에 나의 삶”인 것을 평안히 누리며 감사하자.

하나님만큼, 예수님만큼, 성령님도 사모하라

2020-02-25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 14:15-24 하나님은 우리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시해 주셨다. 우리의 신앙고백과 믿음은 삼위일체 하나님 - 성부하나님, 성령하나님, 성령하나님-위에 세워졌다. 삼위의 어느 한 분의 임재나 활동이라도 외면하고 있다면 나의 신앙과 삶은 주님의 뜻과 사랑과 능력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만큼 성령님을 높이고 사모하는지... 우리가 예수님만큼 성령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부르는지... 우리가 성탄절, 부활절만큼 성령강림절을 마음에 새기고 기다리고, 준비하고, 즐거워하는지... 성령님은 내가 사모한다면,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킨다(16, 21, 23, 26).” 말씀을 신령하게 살아있게 하시는 영이시다(16, 21, 23, 26). 오늘도 주의 성령으로 채워 주소서! 성령님은 내가 사모한다면, “보혜사, 진리의 영이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는다(16, 17, 18).” 어느 곳에서든지 내게 오셔서 나와 동행하시는 분이시다. 오늘도 함께 하시는 주의 성령으로 담대하게 하소서! 성령님은 내가 사모한다면,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게 된다(20).” 하나님의 깊은 뜻까지 통달하게 하시고, 비로서 나의 신앙을 삼각형처럼 안정되게 하신다. 오늘도 빗나가지 아니하고, 주의 성령으로 주의 뜻을 이루며 살게 하소서! 성령님은 내가 사모한다면,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27).” 그 분이 내 마음을 평안하게 하시고, 내적으로 평안한 자가 누리는 담대함과 자유함을 주시는 분이시다. 주여, 오늘도 내 마음에 치고 들어오는 염려, 걱정, 두려움의 발톱들을 성령하나님의 임재로 물리치게 하소서. 성령님이 다루시는 은사속에 오히려 내게 기쁨과 능력이 되게 하소서. 성령님이 인쳐주시는 예수복음의 자유함으로 땅끝까지 나를 증인되게 하소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나도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

2020-02-18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12:20-36 이제 주님은 십자가 수난과 구원의 성취를 앞두시고 그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신다. 한 알의 밀이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고(24)...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희를 위한 것이다(30)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심, 죽으심은 우리를, 나를 위한 것이다. 아멘하자. “십자가의 유일한 구원”을 믿으라 -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 한 알의 밀처럼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다. 이제 내가 또 죽을 필요는 없지만 그 사실을 믿어, 예수의 생명이 담긴 많은 열매의 하나가 되라.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따르라”-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27)” 주님이 속죄양으로 지고 가시는 십자가의 길이 너무 무거우시다. “인자(32, 34)”라는 예수님의 고백속에 “모든 인생의 죄와 아픔”을 모두 담고 계신다.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주를 따라가며 겪는 시련과 고통은 그 십자가로 덮을 작은 그림자들이다. “십자가의 영광”을 수시로 보라.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28)”- 거칠고 참혹한 십자가이나 그것이 내 죄의 모습이고, 그 십자가를 묵상할수록 하나님의 사랑과 새나라와 새생명의 회복이라는 주의 영광을 반드시 보게 된다. “십자가의 승리자로 끝까지 나아가라”-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31)” 십자가의 예수가 구원이라는 진리가 멸망받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여기는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고전1:18) 마지막의 승리이다. “부활의 광채로 십자가의 길을 밝히라” - “다시 들려야 하리니(32), 빛을 믿으라(36)” 십자가 없이 구원이 없고, 부활도 없다. 그대가 예수의 십자가에 자신의 죄를 내려놓고 광명을 찾았다면, 지금도 살고 영원히 사는 부활의 걷고 있는 것이다. 사순절기 시작을 한 주 앞두고 있는 때이다. 우리 모두가 예수가 지신 십자가에 기꺼이 매달려 그 영광을 하늘로부터 듣고, 우리의 고백 속에서 들려지는 계절이 되자.

작은 나귀 위에 올라타라

2020-02-17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12:12-19 언젠가 중동지역을 방문할 때에 나귀와 그 나귀를 타는 청년을 자세히 본 적이 있었다. 작은 동물에 큰 사람이 타니 쓰러질까 위태해 보였다. 그러나 가파른 비탈길도, 울퉁불퉁 바위길도 장정을 태우고 거뜬히 지나는 모습에 뚝심있는 동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 생각난 것이 예수님의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이었다. 나귀새끼에 예수님이 타셨다면 나귀의 크기보다 사람의 크기가 더 컷을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해 보라. 누가 보아도 정치적 메시야의 행진이 아니었다. 그냥 시골청년이 장난스레 새끼 나귀를 올라탄 모습일 것이다. 오히려 호산나 외치는 분위기를 잠재우는 평범한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이었다. 그러나 나귀의 의미에는 십자가를 향해 가시며, “나를 따르라”는 평화의 왕(슥9)의 분명한 의지와 사랑과 구원의 포용이 담겨있다. 우리도 그 작은 나귀를 올라타고 주님을 따르자. 나귀 위로 올라타 주인 뜻만 따르자. “큰 무리가...호산나 (12, 13)”- 사람의 헛된 칭찬과 인정을 구하지 말고 주를 보고, 주의 구원의 계획을 따르라 하신다. 나귀 위에 올라타 억척스레 섬기자. “어린 나귀 (14)”- 겸손의 왕으로서 섬기며 사셨던 예수를 따라가는 길이다. 나귀 위에 올라타고 그저 말씀이면 순종하자. “기록된 바(15)”- 말씀이 기록된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고 죽으라 하신다. 나귀 위에 올라타 십자가와 부활과 영생을 길로 들어가자. “예수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16)” 십자가 부활의 영광과 천국까지 가야 한다. 착각하지 말자. 예루살렘이 목적지가 아니다. 나귀 위에 올라, 불말과 불병거의 권세를 받자.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17)” 창조주께서 나귀를 성령의 능력으로 불말이 되게 하신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행1:8), 어린 나귀같은 약한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심으로 세상을 바꿀 권세를 주셨다. 지금 나귀를 타시고 십자가와 부활과 영생을 향해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보이는가? “나를 따르라. 나처럼 나귀새끼를 기꺼이 올라타라”하시는 예수님의 초청에 우리 모두 기꺼이 따라가자.

내쫓는 공동체

2020-02-06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 9:13-34 한번 생각해 보자. 내 삶이, 내가 참여하는 모임이, 나의 교회가 우리끼리만 좋아서, 찾아오는 불편한 사람은 “내쫓는 공동체”가 아닌가를.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이 붙들고 있는 나름대로 정돈된 율법을 자꾸 건드리는 예수가 싫었다. 자기들의 영역에 두고있는 하나님을 자꾸 건드리는 예수가 너무 불편하기만 했다. 사람들이, 심지어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자꾸 예수의 표적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일 수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16) 위기의식과 적대감으로 그가 미웠고 죽여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가 메시야라고 말만 하면 출교(22), 유대공동체에서 내 쫓기로 하였다. 맹인되었던 사람의 말과 간증에 귀를 막고 그를 내 쫓아버린다(34). 내쫓는다는 것은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우리끼리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에 대해 불쌍히 여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만 옳고, 하나님이 우리 공동체에 계신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온 인류의 하나님은 긍휼이 없는 굳어버린 율법, 제사, 종교를 원하시지 않는다. 사랑의 예수님은 요한복음 속, 곳곳에서 내쫓으시는 분이 아니라. 보시고 부르시는 분이시다. 제자들을 이곳 저곳에서 보실 때마다 부르셔서 제자 삼으시고, 환자들을 보시고 부르셔서 고쳐주시곤 하셨다. 성령님의 열정은 꼭꼭 숨었던 제자들에게 임하셔서는 그들을 쫙 뿌리셔서 세상으로 들어가게 하셨지 자기들끼리만 기뻐하게 두시지 않으셨다. 우리만 살자는 공동체는 사람을 “내쫓는 공동체”이다. 생명이 없고 있다해도 가물가물할 뿐이다. 지금 태어나서부터 눈먼 자가 광명을 얻고,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어린아이처럼 증거하고 있다(25, 31). 그 모습을 보며, 그 고백을 들으며, 눈물이 흘러 나오고, 가슴이 울컥하며 기꺼이 안아주어야 할 그 자리에, 먼저 믿는 자라는 사람들이 문닫고 내쫓는 일을 하고 있다. 지금도 예수님은 죄에 눈먼 자들을 찾아 앞서 가신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에게 보내신다. 그들을 “내쫓는” 죽은 신앙이 될 것인가? “품어지는” 산 신앙이 될 것인가? 잊지말자.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은혜, 성령님의 감동으로 채우는 사람은, 세상에서 대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자신이 죄인의 자리로 낮아지는 것이다. 우리 모두를 내쫓지 않고 불러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 열방을 품고 살아가자.

아브라함도 예수를 보고 기뻐했다면

2020-02-04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8:48-59 유대인들이 예수를 향하여 상종못할 사마리아사람,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한다(48). 영생의 말씀에는 아예 코웃음을 치고, “너희 조상의 아브라함도 나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다 보고 기뻐했다(56)”는 말씀에는 돌로 치려한다.(59) 말씀을 묵상하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같은 유대인이라도 구주이신 예수님을 보게 될 것만으로도 기뻐한 사람이 있고, 보아도 적대하는 사람들도 있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유대인들도 자기들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이신 예수를 모르고, 이해가 안되니 저러고 있지만, 아브라함같은 깨달음과 체험이 있다면 저들도 분명 예수를 보고 기뻐하겠구나!” 우리는 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고, 완전하신 하나님으로 지금도 우리 앞에 계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느 누구라도, 바로 여기에서 다 풀어지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인성은 신성의 오묘한 성육신으로 가려져있고, 예수님의 신성은 유한해 보이는 외적 인성에 가려져 있다. 아브라함이 보았던, 예수님 때문에 누렸던 기쁨이 무엇이었을까? 그 기쁨에 동참할 자 누구인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받아들였던 약속의 말씀 끝에 서신 예수를 보았기 때문이다. 기적같은 약속대로의 이삭의 출생과 그들 통한 온 세상을 구원하실 예수를 미리 보았던 것이다. 우리도 말씀의 구절구절 속에서 예수를 만나며 기뻐하자. 시간을 넘어선 삶과 죽음, 부활, 영원한 삶을 보았기 때문이다. 모리아산에서 아들 이삭의 죽음과 부활의 체험 속에 구세주가 주시는 영생을 누리며, 모세와 엘리야만 아니라, 아브라함도 살아서 예수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예수님이 지금부터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심이 기쁘지 아니한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보았고, 예수를 보았다면, 함께 하시는 성령의 임재가 거기에 있었다. 그가 성령 안에서 예수의 구원을 기뻐하는, “그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던 것이다. 성령이 눈을 열고 마음을 여시니 우리 모두가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우리도 성령안에서 예수를 구주로 만난 그 감격을 아브라함처럼 더욱 즐거워하며 기쁨을 나누자. 그리고 아무리 강퍅한 유대인같은 사람이 우리 주변에 있을지라도 언제가 믿음의 눈이 열리고, 살아계신 예수를 만나고, 성령의 만져주심이 있다면 저들도 또 하나의 아브라함이 되고, 우리의 형제자매로 함께 기뻐할 때가 올 것을 끝까지 믿고 살아가자.

저 먹으라고요?

2020-01-24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 6:52-59 오래전 들은 이야기, 게으른 아들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아버지가 아들 목에 떡들을 매달아 걸어주며 배고플 때 하나씩 먹으라고 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아들이 떼어먹기 귀찮아서 굶어 죽었단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고 하시는 것(48)은 새생명을 주시는 예수의 십자가의 구원을 (51) 내 속에 받아먹듯 믿고 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받아 먹지 못해 굶어 죽는 사람이 많다는 안타까움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믿음이 없어서 받아 먹을 기회 앞에서 “수군거리기만 하는 (43)” 말만 앞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구원의 떡으로 받아먹으면 일어날 (46)놀라운 축복의 기회에 “아버지의 초청(44)”보다는 불신의 세상 것에 매여 뒤걸음치는 사람들이 있다. 음식 창문, 쇼윈도우에 샘플 요리메뉴를 플라스틱으로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곳이 있다. 아무리 정교해도 그걸 볼 때에 음식먹고 싶은 생각이 오히려 사라질 수도 있다. 그대가 만나의 떡(49)만으로, 교회출석정도로 만족하며 플라스틱 신앙에 머물고 있다면, 이제는 예수의 생명떡을 믿음으로 받아먹고 교회를, 모임을, 가정을 살아계신 주님을 모시고, 복음의 잔치집으로 만들어 가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48),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54)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7)”

이게 왠 떡입니까!

2020-01-23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6:30-40 뜻밖의 좋은 일이나 기회가 올 때에 하는 말 중의 하나가 ‘이게 왠 떡이냐’는 표현이다. 밥을 먹어보기 힘든 세상에서 귀한 떡을 만났으니 너무 좋아하는 말이 그 시작이라 생각된다. 올해는 우리 모두가 “왠 떡이야!” 하는 좋은 일을 많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함께 나눠먹기도 하시고... 성경에서 떡이라는 한국문화에 맞춰 사용한 표현은, 지금 시대에서는 사실 빵으로 표현해야 더 이해가 될 것이다. 성경의 배경이 거의 빵문화이고, 지금 시대도 밥먹지 않고 떡만 먹고 사는 사람보다, 밥대신 빵을 먹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오병이어의 역사를 보면서 자신들의 조상이 40년간 먹은 만나를 이야기한다.(31) 그 바탕에는 예수님이 계속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빵(35)”임을 말씀해 주신다. 내 몸뚱이가 생존하려면 먹을 떡이 필요하고, 내 영도 몸도 풍성한 생을 누리려면 예수의 떡이 절대 필요하다. 떡은 매일 찾아 살벌하게 구해야 하지만, 예수의 떡은 예수 이름을 구하는 자에게 찾아오시어 배불리 먹여 주신다. 떡은 먹어도 다시 배고프고, 힘없으면 먹으려 해고 못 먹고 죽게 된다. 예수님의 떡은 우리를 결코 주리지 않게 하며(35) 믿는 자에게(35, 40) 평생공급을 약속해 주신 것이다. 그 다음의 천국은 수요 공급이 자연스레 흘러가는 주님과의 감사와 경배, 교제의 영원한 삶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우리의 매일의 떡에 무관심하시지는 않는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기도하라시는 것은 먹어야 할,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이다. “예수 믿으면 밥이 나옵니까? 떡이 나옵니까?” 라는 불신자의 비난에 “예, 예수를 믿으며 살면 먹을 밥도 주시고, 떡도 주십니다”라고 말한 어느 목사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나 자신도 예수를 믿고 살면서 먹고 살만한 인생이 된 사람들을 나를 비롯해서 수도 없이 소개할 수 있다. 오늘 점심식사로는 무엇을 먹을 계획이신지? 샌드위치 빵? 그리고 저녁은 떡같이 찰진 밥? 하루 두세번만이라도 예수님이 주신 생명의 떡, 영생의 축복을 기억하고 “이게 왠 떡입니까? 예수님!” 하며 살아가자.

예수의 극성팬과 참 제자

2020-01-22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 6:22-29 오병이어 사건 이후, 예수님을 임금삼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예수님의 광팬, 극성팬이 많아졌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강력한 요구를 물리치셨고, 지금도 제자나 그 무리를 떠나 하나님 앞과 잃은 영혼들을 홀로 대면하시고 계신다. 극성팬들이 쉽게 포기하겠는가! 가버나움, 바다 건너편에서 기어이 예수님을 만나 환호한다. 나에게는 이런 극성스런 열정이라도 있는 것인가 돌아보게 된다. 그런데 그 때 예수님의 반응이 좀 냉랭하게 느껴진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이 표적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26)”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라(27)” 배고파하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던 예수님인데, 또 배부르려는 욕구가 죄는 아닐진대 주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이 말은 언제고 배고프면, 기대할 것 없으면, 등돌릴 팬들의 모습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극성팬이 참 제자의 길로 나아가는 길은 무엇일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내가 주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27)” - 육신의 배고품과 목마름은 해결되어야 하나 거기서만 그쳐서는 안된다. 수가성의 여인에게 영생수를 말씀하듯이, 도대체 찾을 수 없는 너희 속에 영혼의 굶주림, 주와 동행하는 목마름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이다. 내가 떡이고 양식이니(27 b) 나를 영접하여 먹기위해서만 살지말고, 나 예수의 살과 피를 너희 안에 믿음으로 먹고 마셔, 영혼의 갈증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인 예수를 구주로 모시는 구원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오병이어처럼 떼고 떼도 풍성해지듯, 인자가 주신 양식(27)인 복음을 온 세상에 가득하게 전하고 또 전하라는 것이다. “나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29)”- 하나님의 일(28)을 해보려는 것도 좋고, 극성스레 나를 쫓는 것도 좋지만, 헌신적인 봉사보다 먼저인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요 참제자라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바르게 행할 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냉랭한 우리들의 마음과 영혼이라면, 복음의 감격과 흥분을 되살려 예수님의 광팬이 되자. 그러나 내 구주 예수가 내 속의 생명임을 잊지 않고, 때로는 십자가의 길을 함께 따르고, 기꺼이 세상의 불모지에 복음의 새싹들을 심고 심으며, 세상의 집단의식에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언제나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참 제자로 살아가자.

예수님에게 밥을 사드리자

2020-01-13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 4: 27-42 누군가에서 식사를 대접한다는 것은 집에서든, 밖에서든 소중한 일이다. 당연히 즐겁지만, 한편 섬기는 일이고, 때로는 희생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 예수님을 대접한다면, 밥 사드린다면 어떨까? 오늘 본문 중에서 예수님은 음식을 구해 드리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알지못하는 양식이 나에게 있다. 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과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32, 34)”라고 하신다. 여행에 고단하시고 목마른 예수님이시지만, 수가마을의 여인과 마을사람들의 믿음(41)과 예수영접에 너무 기쁘셔서(36) 그 순간에는 피로도, 배고픔도 잊으셨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원하고 기뻐하는 일을 해 드리는 것이 ㅊ히고의 대접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인 영혼 추수에 목마르시고, 배고파 하신다. 제자들의 섬김이 고맙지만, 여인과 마을 개종과 변화는 “영생의 기쁨으로 뿌리는 자, 거두는 자가 기쁨으로 가득찬(36)” 사건이셨다. 사람들이 예수께로 돌아오는 일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가 잃어버리고 버려진 수없는 영혼들을 향해 나서기만 해도 기뻐하신다, 고마워하신다. 4장 마지막 부분은 왕의 신하의 아들이 죽다가 예수님의 은총으로 살아난다. 그러나 그 치유의 은총 옆에는 “그 신하 아버지의 믿음(50)”이 있었다. 기억하라. 주님에게 밥 사드리는 것은 그대가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편안히 그 분 곁에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밥사드리려 하면, 그 분이 먼저 우리에게 성대한 만찬을 준비해 주신다. 그것이 복음이다. 지금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막다른 골목에 봉착한 것 같아도, 믿음으로 주님을 향할 때 주님은 기뻐하신다. 능히 하실 수 있는 주님의 능력을 믿어주고, 주님으로 하게 하시니까.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교회 안팍에서, 신앙에 관한 여러가지 일에 열심히 살아간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한마디 하신다. “내 양식은 아버지의 뜻, 복음을 심고, 영혼을 거두는 일이란다(34, 36).” 목말라하시고 배고파하시는 주님에게 밥사드리는 일은 꼭 해나가자. 한시라도 잊지말자.

나의 사마리아 우물가

2020-01-11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4:1-14 유대지방과 갈릴리지역의 중간 지역이 사마리아이다. 포로와 퇴거, 이주의 아픔의 역사가 담긴 곳이 사마리아이다. 편견과 차별 속에 미움과 굳은 마음들이 깊게 반목의 경계선을 그어 놓은 곳이다. 오늘날 그런 사마리아가 너무도 많다. 그러나 그곳에도 예수님의 연민과 사랑과 복음을 나누어주시려는 발걸음은 거침이 없으시다. 본문에서 그 곳 사마리아에서 예수님이 찾아가시고 우물가의 여인을 대면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을 복음으로 불러내 천국백성의 반열에 세우신다. 그럼에도 제자들의 사마리아, 이방을 향한 스승의 마음을 알기까지는 아직도 까마득하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사마리아... 그곳은 오늘 우리가 웬지 꺼려져서, 갈까 말까 하는 곳이다. 피하고 싶은 곳이다. 오늘도 안 만나면 좋을텐데 하면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종족, 민족주의와 집단 이기심에 빠져 무관심해 하는 모든 곳이 바로 우리의 사마리아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과 사랑을 가지고 나아가면, 그곳도 죄많고, 한많은 여인네가 남정네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영혼의 기쁨, 영생의 평안을 되찾는 곳이다. 저 니느웨처럼 오히려 패역한 세대 속에서, 마을 전체가 예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곳이다. 나의 사마리아를 알고, 기꺼이 나아가지 전에는 우리 모두 제대로 예수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사마리아! 우리가 우리끼리만이라는 유대를 지나 땅끝까지 증인으로 살아갈 첫 관문이자 시작점이 되는 곳이다. 사마리아는 그저 통과하는 자리가 아니라 바로 땅끝이다. 우리가 사마리아를 향해 기꺼이 나아갈 때 주님의 나라는 그 자리에 임하는 것이다. 나의 사마리아가 어디일까? 먼 곳만을 생각하지 말라. 내가 예수 사랑, 예수의 긍휼을 가지고 낮아지면 보이는 모든 곳이, 만나는 사람이, 들리는 모든 소식들이 사마리아이다. 잊지말자. 사마리아는 피해가는 곳이 아니라,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가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섬김의 실천과 행실로 빛을 비추어야 하는 곳이다. 우리 모두 주님의 길을 따라 사랑으로 기꺼이 나아가며, 겸손으로 찾아 들어가며, 믿음으로 만나는 지역의 사마리아 선교사가 되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가지고 기꺼이 섬김의 손길, 사랑의 발길로 들어가 그곳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의 복음의 꽃을 피워가기를 결단해 본다. 당신이 그 섬김의 자리가 영혼을 건져올리다가 예수님을 만나는 우물가가 되기를 축복한다.

비교의식, 열등의식에 자유하기

2020-01-10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 3:22-36 여러분이 남에게 무시당해서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 일이 있는가? 배우자에게 “당신은 왜 그 사람만큼 못하는거지?”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일터에서 “아니 배알도 없어? 왜 그래?”, “왜 자네는 ㅇㅇㅇ 하는 것 못하나?” 혹은 부모자녀간에 “너는 왜 ㅇㅇㅇ보다 못하니?” 이런 소리를 들으며 속상해보았는가? 그리고 지금도 스스로 자신을 보면서, “왜 난 이것밖에 안돼나?” 그런 낙심을 경험하고 있는가? 요한의 제자들이, “사람들이 모두 다 세례주는 예수에게 가잖아요!(제자들의 세례)” 질투섞인 보고를 한다. 그 때 제자들을 대하는(26) 세례요한의 삶 속에서 우리의 비교의식이나 열등의식, 그리고 자기포기의 낙심의식을 이겨내는 신앙자세를 깨닫게 해준다. “신랑친구가 되어(29)” - 내가 하는 일을 즐겨야 한다. 내 환경 속에서도 기뻐해야 한다. 그렇게 몸으로든 마음으로든 힘든 일들고 지치는 일이라도, 누가 시킨 것을 억지로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고역스러운 일이 되고, “좋아하는 일이다, 일하니 감사하다,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지금 운동하고 있다”하고 생각하는 순간 힘든 것이 행복하고 즐거워진다. 그런 자발성, 즐거움으로 바꾸기가 힘든가? 정말 사람이 긍정마인드, 행복함으로 확 바뀔 수 있는 길이 있다.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없이 주심이라(34)”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의 기쁨을 꼭 구하고 받으면서 살아가라. 그러면 내 한없이 복된 인생은 남과 비교불가이다. “(나는) 그의 (예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28)”- 내 모든 삶을 맡겨주신 분을 알고, 인정하고, 빗나가는 눈길을 오직 그 분에게 초점을 맞추면 세상에 남과 비교되고 차이나는 인생이, 내게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자유함이 된다. 성도의 자유함과 권세는 위를 바라보며 사는 것에 있다. 세례요한이 얼마나 위를 바라보는가! “하늘에서 주신 바(27), 위로부터 오시는 이(31),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31) 하나님이 보내시는 이(34), 믿는 자의 영생(36)”- 성도의 비교/열등의식으로부터 자유함과 권세는 진정 위의 것을, 위의 상급을 바라보며 사는 것에 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고(36)” - 내 마음의 소유주가 바뀌어야 한다. 아들을 영접한자, 믿는 자는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가 사시는 것이다. 그대가 예수를 영접하고 내 안에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산다면, 비교의식, 열등의식이 다 뭔가! 고약, 흉악, 강퍅, 악취나는 나를 자녀삼아 주신 그 은혜의식에 감사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망쳐야 산다

2019-12-02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 18:9-24 망쳐야 사는 사람이 있다.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다. 그러나 또 망쳐야 사는 사람이 있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본문에 나오는 세상 권세가 최고인줄 아는 왕과 정치가(9절)들과 돈과 가지가지 진귀품들과 소유가 언제나 자기 것인줄 착각하는 부자(12-13)들이다. 그들도 망쳐야 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도 일순간에, 신속히(10, 17, 19) 빠져나가버린다는 것을. 그리고 망쳐서 '사는데' 까지 나가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일순간에 망해 사라짐을(15-19) 이제라도 알아 오직 영원한 나라와 그 길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혹 부자나 권세가는 아니더라도 그대도 망쳐보았는가? 육신의 질병으로 망쳐보았다면, 물질의 곤고함으로 망쳐보았다면, 진학과 진급의 길목에서 망쳐보았다면, 인생의 갈등으로 묘하게 얽여 망쳐보았다면, 이제 세상에 망쳐서 예수 안에 사는 기회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주님은 나의 이름을 부르시며, 당신의 이름을 부르시며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속에서 망쳐진 것 같지? 완전히 망친 것은 아니다. 내게로 오너라. 망쳐서 살게 하는 것, 그것이 내가 너를 부르는 때이란다”

음녀의 술잔 속에 담긴 미혹

2019-11-29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17:1-8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던 것 같다. 좋아하셨다기보다 젊으실 때의 지방공무원직을 그만두시고, 서울로 상경하여 사업은 실패하고 할 일없이 살아가는 가운데, 의지할 것은 술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진작 예수를 아시고, 성령의 술에 취하셨으면 좋았을터인데... 평소에는 조용하시고 좋은 아버지이지만, 술이 취하면 달리지시던 모습이 너무나 이상하고 무섭기만 하였다. 그래도 아버지는 취중의 실수가 가정 안에만 머물렀지만, 오늘날의 수많은 사람들이, 술과 약의 취중에 온갖 사건과 부끄러운 일들을 벌인다. 오늘 본문의 “큰 음녀(1)와 미혹에 빠진 자들, 음행의 포도주(2), 손의 금잔(4), 핍박의 피에 젖어(6) 죄와 쾌락에 취해있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오늘날 신문에 오르내리는 범죄와 사건 들의 배경 속에서 재현되는 일들이다. 누구라도 술과 쾌락, 물질의 탐욕에 익숙해지면 실수가 가까와진다. “음행의 유혹”은 자주빛, 붉은 옷, 금과 보석 진주로, 금잔으로 아름답게 보이지만(4), 그 안에는 “가증함과 더러움(4)”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작심하지 않으면 이겨내기 어려운 일이다. 바벨론같은 세상이 종말로 다가갈 수록 많은 사람들이 분명 음란하고, 경건과 거룩을 모독하는 일들에 빠지기가 쉬운 것이다. 나는 깨끗하고 안전지대에 있다고 안심하지는 말라. 내 가족과 이웃들을 돌아보라. “예수의 증인으로 흘리는 피(6)”의 순결한 삶을 사모하며 주의 도우심을 기도하자. 연말과 연휴들, 주위의 번쩍거리는 화려함속에 음행의 포도주가 아닌, 피에 젖은 예수의 구원과 성령에 취해 사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한다. 오늘도 위태한 그대를 생각하며 기도한다.

짐승의 표가 내게도 슬그머니 나타날 수 있다

2019-11-27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 16:1-9 가끔 우체통이나 자동차 유리창, 집 문 틈으로 광고 전단지가 끼어져 있는 것을 본다. 별로 도움이 안되는 것이 많고, 심지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꽂혀있기도 한다. 원하지 않아도 내 마음에 끼어놓는 것들은 무엇일까? 오늘 말씀에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2절)”고 한다. 결국은 회개할 기회조차 잃은 (9절) 불쌍한 영혼들이 받는 것이 짐승의 표이다. 한편 지금도 우리가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이 짐승의 표이다. 그 짐승의 표는 우리 삶에, 내 마음에 그리 먼 것이 아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들어온 죄를 죽이지 못할 때, 온갖 욕정 속에 짐승의 표가 솟아나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에로의 부르심, 예수의 십자가 구원, 성령의 인치심을 거부하고, 받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 자체가 짐승의 표이다. 세상의 온갖 쾌락에 나를 맡기고 이 세상이 전부인양 끌려가는 모습들이 짐승의 표이다. 정치나, 돈이나, 문화나, 세상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미혹하고 유혹하는 악한 세력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용당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짐승의 표이다. 내 속에 그런 악한 짐승같은 표가 행여 무엇인지, 어느새 뭍어가는 짐승의 표시는 없는지... 그러나 결코 두려워 말라! 주님은 짐승의 표에는 관심이 없으시다. 그러나 짐승의 표 앞에 흔들리는 뭇 영혼들을 여전히 뜨거운 사랑으로, 보신다. 자녀인 우리에게 죄의 저주를 지워버릴 어린양 예수의 피가 있다. 짐승의 표조차 태워버릴 성령의 불과 인치심이 있다. 슬그머니 꽂으려 하는 짐승의 표같은 세상 유혹을 뽑아내 버리자.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천국의 상속자로,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어디를 봐도 종말의 참상이 보이는 이 마지막의 시대를 살아가자.

날이 선 예리한 낫 앞에서

2019-11-25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14:14-20 농사일을 오래동안 해 온 분들이 낫으로 풀을 깎는 것을 여러번 본 적이 있다. 잡풀숲의 바닥부분을 능숙하게 도려내듯 베어내고, 후려쳐 모아 시원하게 깎아내는 모습은 거의 장인의 수준이다. 그 장인의 수준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훈련된 손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날이 선 낫의 칼날이다. 제대로 날을 세워 갈 수 없다면 제대로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시퍼런 날”을 무서워하지 않고, 또 제대로 갈아 쓰는 것이 중요하다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필경 훌륭한 농부나 요리사가 아닐까 싶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이 들고 계신 예리한 낫의 광경을 요한이 보고 있다. 구원과 심판의 사이를 한치도 오차없이 베어내어 실행하실 권능의 손길을 거기서 보게 된다. 우리 모두가 그 예리한 날선 낫을 두려워말고 대면하고 또 잘 다루어 가자. 예리한 낫(계시록): 주님이 베어내시면 난 구원의 자리인가? 심판의 자리인가? 예수영접의 구원을 확신하고 심판 앞에 깨어있으라. 좌우의 날이 선 검(히브리서): 말씀의 숙련가인가? 세상정보통에 불과한가? 아직도 무딘 나의 말씀의 검을 갈아내고, 맛갈 난 영적 음식을 위해 무궁무진한 말씀의 재료를 찾으라. 성령의 검(에베소서): 지금 진동하는 영과 가슴저리는 은혜의 삶을 누리고 있는가? 애매하게 적당하게 살려하지 말라. 영적 삶과 육적 삶의 차이는 칼날처럼 분명하다. 날선 도끼(세례요한): 내 목이 잘리는 날선 칼날의 핍박을 두려워하나, 나무뿌리에 놓인 날선 도끼처럼 임박한 영원한 심판을 두려워하나? 오늘의 영혼구원과 내일의 주님 오실 날을 고대하며, 칼날처럼 선명하되, 죄를 자르시고 사랑으로 감싸신 주의 은혜속에서 우리 모두 오늘을 살아내자.

예수님을 앞에 두고 하는 싸움

2019-11-21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계시록 12:1-17 세상은 온통 싸움 투성이다. 정치가들이 싸우고, 사업가들이 싸우고, 치안을 맡은 이들이 끝없는 범죄와 싸우고, 학생조차 경쟁으로 싸우고 있다. 모두들 이겨야 하고, 이기면 주도권을 갖게 되고, 재정이나 남 앞에, 환경에 유리한 위치나 안정을 갖게 된다. 비록 한 때이겠지만.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싸우고 있다. 이 싸움이 진짜 싸움이다. 온갖 죄와 악, 전쟁과 인재, 불평등, 갈등과 아픔 뒤에서, 하나님을 외면하게 만드는, 그 원인이 되는 악한 세력에 대항하는 싸움이다. 그들의 공격이 우리의 삶에 근본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내 탓이라고 절망말고, 남 탓이라 원망말고, 수양부족이라 착각말고, 그 속에 악한 영의 계략부터 알아내고 싸워 이겨내자. 본문에서 붉은 용, 옛 뱀, 마귀, 사탄의 이름이 드러난다(3, 9). 지금까지도 우리를 흔들었고, 흔들려고 하는 영적 세력의 총칭이다. 그런데 이 악한 세력의 공격은 우리보다는, 태어날 한 어린아이, 곧 이 땅에 오셨고,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하고 있다. 누구를 잘라내야 완전히 패배시키고 승리할 줄을 너무나 잘 아는 사탄의 악한 공격이다. 우리도 잘 알아야 한다. 비록 육신의 몸에 해산된 어린아이같은 예수이시나 그 분이 결국 만국을 다스실 철장권세(5)를 가지셨고, 마귀 사탄을 내쫓는 최후의 승리자시다. 우리의 싸움은 철저히 그 예수 한 분을 앞세우고 싸우는 싸움이다. “우리 형제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그를 이겼으니(11)” -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시다. 아무리 강해도, 아무리 혹독해도, 아무리 오래 걸려도 승리는 예수님에게, 그 분을 앞에 둔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예수 앞에 악한 세력은 결국) 내쫓긴다”는 오늘 본문의 선포가 (9, 10, 13) 지금 시련을 겪는 여러분에게 담대한 대면이요, 완전한 소망이 되기를 기도한다.

부디 신앙의 동지를 찾으라

2019-11-19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 11:1-14 요한 계시록의 배경인 로마의 극심한 박해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믿음의 성도들이 받을 박해는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고난 속에 나 또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핍박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게 고난이 큼은 하나님의 때가 다가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없다 자만하지는 말라.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영적 순례의 길이 아닌 것이다. 본문에서는 숫자 둘(2)이 거듭 언급된다. “두 증인(3), 두 감람나무, 두 촛대(4), 두 선지자(10)...” 그리고 남은 자들(13)도 둘에서 시작한다. 혼자 이기보려 하지 말라. 주님은 혼자가 아닌 “두 세사람이 모인” 그 곳을 주목하신다. 그대의 고난과 문제가 신앙 안에 들어와 있다면 주님은 반드시 또 한사람을 붙여 주신다. 신앙은 하나님만을 의지하지만, 대부분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의지하게 하신다. “주님 저에게 어떤 한 사람을 지금 붙여주시렵니까?” 기도하고 둘러보라. 두감람나무와 두촛대가 교회를 상징하나, 두사람이 모인 곳에서 교회가 시작이고, 그 두 사람이 바로 교회이다. 그러나 그 두사람은 그냥 하나 더하기 하나가 아니다. 둘 사이에 예수의 피로 하나됨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그대가 먼저 낮아지고 그 영혼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 나보다 그를 낫게 여기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함께해야 모두 살 수 있다는 절박감이 있어야 한다. 주님이 이 환난의 시대에 우리 각자의 약함을 아신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도 주시고, 또 한사람의 영적 동반자를 찾으라 하신다. “생기가 (죽었던)그들 속에 들어가니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11)” 허무한 세상의 친구들에게 연연하지 말고, 부디 믿음의동지, 기도의 동지와 하나되어 성령의 생기가 그대의 삶에 충만하기를!

저도 보았고 사모합니다!

2019-11-14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 7:9-17 오래전에 캔사스시티에 살 때에는 저녁하늘이 너무 좋았다. 산이 없이 도시가 온통 평지 벌판인 관계로 저녁노을이 서쪽 하늘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동서남북에서 함께 노을이 보이곤 하였다. 그리곤 늘 생각하였다. “동서남북 주위를 보면 온통 벌판뿐이니 이곳은 엉뚱한 것 안 보고, 하늘만 보고 사는 곳이야. 축복이야!” 사도요한의 밧모섬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사방이 바다이니 위를 바라보았고, 소망하는 분이 주님뿐이니 더더욱 위만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런 요한에게 하늘의 문이 열렸다. 표현을 하지만,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늘의 영광과 주를 만나는 감동의 감동을 체험하며, 오늘 말씀을 적고 있다. 이런 놀라운 광경과 체험을 비교할 대박이 어디있을까! 흰옷으로 입히운 수많은 무리와 내가 함께 할 어린양 예수...(9) 생물과 장로들과 하나님을 경배하는 최상의 예배(10), “찬송, 영광, 지혜, 감사, 존귀, 권능”속에서...(12) 천국 장막의 보좌 위의 내가 만날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15) 내게 베풀어 주실 풍성한 식탁, 끝없이 흐르는 생수, 뜨거움도 추위도 감싸주시는 따뜻함...(16) 그리고 날 쉴만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 내 눈물, 내 상처 어루만져 주시는 자애로운 하나님의 미소와 손길...(17) 주여, 저도 살아있는 말씀 속에 주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모든 위로와 기쁨이 거기에 있군요! 저도 그 곳을 사모합니다. 그리고 이 짧은 세상을 끝까지 견디게 하소서, 기꺼이 이기게 하소서.

내게 주신 144,000보다 더 큰 것

2019-11-13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 7:1-8 유대인들에게 12숫자는 완전숫자이다. 그 수에 아주 큰 숫자 1000을 곱하고, 다시 12지파를 곱한 숫자가 오늘 계시록에 나오는 144,000이다. 단순한 한정된 숫자의 인원이라는 개념보다 핍박에도 이겨낼, 순교하면서도 지켜낼 순전한 믿음의 사람들을 말한다. 엘리야가 핍박받을 당시 신앙을 지키고 있던 7,000명의 사람들이 생각난다. 완전한 숫자의 12는 예수라는 한 분으로 모아지고, 1000이라는 숫자는 모든 주를 부르는 영혼으로 넓혀지고, 12지파는 오늘날의 각 교회 속에 자리잡고 있다. 그대가 예수를 믿고 교회 안에 진정한 지체로 천국을 소유했는가? 그대는 144,000을 뛰어넘은 더 큰 자로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144,000보다 큰 예수가 우리에게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144,000보다 큰 한 영혼을 구원하려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144,000보다 큰, 믿는 자라면, 누구든지 들어갈 천국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어찌 144,000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데 144,000이 예수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한 영혼의 소중함을 위해 사는 것이라면, 천국을 소유한 자의 넉넉함이라면, 그대는 그 144,000 안에 있음을 확신하는가? 겸손히 “그 하나님이 은혜와,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지금도 “은혜아니면 살아갈 수 가 없네”라는 찬양처럼 낮아져 예수를 따라가고 있는가? 후회없이 주는 자의 섬김을 살고 있는가? 잊지말자. 이마에 인침을 받은 사람(3)은 자기 눈에 인침이 보이지 않는다. 섬기는 이웃의 얼굴을 통해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같은 죽음은 아니다

2019-11-06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3:1-6 예수님은 사데교회와 교인들에게 죽은 신앙을 지적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녀들의 영적 죽음에 얼마나 마음이 상하실까? 그런데 사데교회 교적 속의 한 명의 이름은 내 이름, 당신의 이름이다. “살았다 하나 넌 죽은 자다!(1)” 이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두렵고 놀라겠는가! 이것은 버가모 교회의 안디바(2:13)의 순교적 죽음과는 다른 비참한 죽음이다. 죽음이 다같은 죽음이 아니다. 어떻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느냐는 전혀 다를 수 있다. “실상은 죽은”, 죽은 자가 있다(1 b). 성령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고, 사탄에 얽매인 자이다. “그 남은 바 죽게 된”, 죽어 가는 자가 있다(2). 메마르고 파리한 영혼의 상태로 예수께 인생을 맡기지 못하고 세상 속에서 흔들리는 영혼들이다. “도둑같이 긴박하게 오실 주 앞에”, 죽도록 부끄러울 자가 있다(3). 깨어서 후회없이 살지 못하다 천국에서 주님 앞에 서는 부끄러운 구원이 이것이다. “옷을 더럽히지 않는 몇명”의 죽은 영혼조차 살리는 자가 있다(4). 캄캄한 죽음의 위협에서도 한가닥의 예수의 생명의 빛을 나누는 사람들이다. 모든 교회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붙여주신다. “이기는 자,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는 자” 죽어도 영원히 사는 자가 있다(5). 환난의 시대 속에서조차 마지막까지 신앙을 지켜내고 예수 앞에 선 자이다. 그대는 어디에 속해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무슨 죽음을 원하는지... 아직도 은혜받을 때, 구원의 날이다. 사데교회를 향한 경고를 기꺼이 새기고 오직 예수 안에 죽은 신앙이 아닌, 생명의 신앙으로 살아가자.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 그 보혈, 그 이름, 그를 향한 믿음만 있다면, 아버지 품안에서, 천사들에게 둘러싸여(5b) 죽음을 넘어선 영생의 길을 가는 것이다.

회개가 겸손하고 건강한 신앙의 길이다

2019-11-05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2:18-29 열흘 동안을 회개라는 주제에 매달리며 특별기도회 중이다. 함께 기도하는, 이 주제에 마음의 심각함으로 꽂히는 모든 이들에게 회개의 영이 함께 하시는 복이 있기를 빈다. 본문의 두아디라 교회와 교인들은 대단하였다. 예수님은 “네 사업, 사랑, 믿음, 섬김과 인내”를 잘 안다고 하신다. 이것은 교회 안에 교우들이 갖추기를 원하는 전체목록이다. 헌신을 주제로 하는 설교는 이 주제들이 전부가 아닌가! 그리고 처음보다 나중의 행위가 많다고 하신다. 날이 갈수록 잘 한다니 이보다 더 큰 인정해주심과 위로가 어디있을까? 그러나 그런 아름답고 건강한 신앙에도 위기는 존재한다. 우상 앞의 성적 유희와 욕심나는 음식, 쾌락으로 유혹하는 이방 우상종교 의식으로 섞으려 하는 이베벨같은 선지자(20)들이 치고 들어오는 일이었다. 오늘날의 타락한 인간중심적 자만, 사탄적인 온갖 문화가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한번에 나빠지고 병드는 것이 아니다. 서서히 빠져들고, 끌려들다가 어느날 이세벨 옆에 있게 되는 것이다. 남의 문제같다가 어느새 내 문제로 옮겨와 있는 것이다. 그런 세상 속에서 신자로서의 삶은 어떻해야 하는가?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회개하라 하신다(21). 주님은 우리의 “마음과 뜻을 살피시는 분(23)”이라고 하신다. 그렇다 ! 회개에 깨어서 자신의 변질을 닦아내야 한다. 내 사업, 사랑, 믿음, 섬김, 인내” 속에 자발적인 마음이 있은가 살펴야 한다. 사랑과 긍휼의 생각(23)이 흘러나오는가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빗나간 마음과 생각을 불꽃같이(18) 보시고, 주석(18)같이 다루어 치유하시는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언제 한번 하나님 앞에 통렬하게 눈물을 쏟아본 적이 있는지... 하나님 앞에서 지금도 깨어있는 회개, 이것만이 신자의 참된 겸손이다. 즈금도 예수님이 우리 교회와 우리 마음에들어오셔서, 성령이 하시는 음성에 회개로 깨어있는, 들을 귀(29)가 있는 지체들을 찾으신다. 지금도 깨닫는 내가 용납하는 작은 죄악조차 부디 내일로 미루지 않기를!

내 수고를 주님은 아신다, 다 아신다

2019-11-04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 2:12-17 주님은 다 아신다. 우리가 순교자 안디바처럼(13)은 아니어도 어떻게든 다가오는 핍박을 믿는 사람답게 이겨내려 한다는 것을. 주님은 다 보신다. 우리가 세상 발람(14), 세속 니골라당(15)의 교훈처럼 스며오는 육신의 쾌락과 정욕의 유혹에 흔들릴 때 거부하며 거룩함으로 몸부림친다는 것을. 그러므로 여전히 이기도록 순간순간 흔들리는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과 몸을 회개(16)로 주님과 하나되게 하자. 주님이 싸우시고 직접 다루시게 맡겨 드리자. 그러므로 끝까지 이기도록 약속으로 주신 성경의 말씀을(12) 굳게 붙잡자. 삶의 능력으로 주신 성령(17)에 사로잡히자. 감추었다 주시는 내 삶 속에 응답이라는 만나(17)를 먹으며 오늘을 살고, 천국의 흰돌에 떡-하니 새겨진 내 이름(17)을 환히 보며 천국까지 살아가자.

그대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기를

2019-10-30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7:14-25 한 마을에 순회선교자가 옥외에서 설교를 하였다. 한 부자는 지나가다 그의 설교를 듣게 되었는데, 목사의 설교가 “돈을 할 수 있는대로 많이 벌어야 합니다”는 말에 귀가 번쩍했다. “설교를 잘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돈을 잘 관리하고 저축해야 합니다”는 말에 “명설교가이네!”하면서 손뼉을 쳤다. 마지막으로 선교자는 “그리고 그 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써야 합니다!”라고 말하자, 부자는 “에이, 예수쟁이들은...시간 아깝게 버렸네”하면서 떠나고 말았다. 오늘 말씀이 집을 바치기로 서원한 사람, 밭을 바치기로 서원한 사람이 도중에 그 서원을 무를 때의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완전 취소가 아니라, 집과 밭이 저들의 생업에 필요하기에 대신 적절한 돈을 내고는 그 서원을 이행할 수 가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 작정한 것도 뚝 떼먹는 요즘의 시대에, 못 지켜낼까 두려워 서원도 안하는 요즘 신앙분위기에서, 본문의 집을 드리며 서원하는 성도, 밭을 드리며, 또 끝까지 서원을 지키는 성도들의 믿음이 소중하게 깨달아진다. 지금도 우리는 “주님께 충성하게 하소서, 헌신하게 하소서”라고 고백하지만, “내 집과 땅도 주님 원하시면 드리겠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느냐 물으면 대답이 시원하게 나올까? 그렇다! 분명 그렇게 아멘으로 고백할 수가 있는 성도들이 있음을 안다. 이번 주일에 그런 설교들을까 겁내지 말라. 주님은 더 풍성한 요청을 하신다. 집은 환대의 공간이고, 땅은 소득의 원천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 집, 내 땅에 연연하지 말고, 내 집을 열어 사람들을 초청하고 환대하며, 땅의 소득을 풀어 대접하고 섬기며 살라고 하신다. 우리 마음이 집이 되어 주를 아직도 모르는 불신자들을 품으라 하시고, 우리 손이 땅이 되어 필요한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적극적으로 찾아 변변찮은 내 소득이라도 나누며 섬기라 하신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가 이미 드린 집과 땅의 서원인 것이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주의 영광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기꺼이 써야 합니다”는 말에 뭐라 하겠는가? 노멘? 글쎄요멘? 부디 "아멘"으로 오늘도 내일도 살아가기를!

믿음이 있어야 서원도 한다

2019-10-29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7:1-13 레위기 마지막 장을 묵상한다. 지루한 것 같은 레위기도 은혜의 연속임이 감사하고, 한편 좀 더 주의 뜻을 깊이 알지 못하며 지나가기에 아쉽기도 하다. 오늘 말씀에는 서원하는 것과 그 예물드림에 대해서 나온다. 서원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만 생각하는데, 본문의 강조는 오히려 내 편에서 하나님께 드릴 예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남녀, 나이별, 빈부차이를 고려해 예물을 드리고, 드릴 예물을 변경할 경우 제사장을 통해 정하도록 하고 있다. 난 무얼 드릴까 생각해 본다. 다정한 부부, 친밀한 부모와 자녀, 친한 친구 사이에서는 서로의 나눔이 있다. 다른 것이 없다면 적어도 서로간에 따뜻한 마음의 나눔이 있는 법이다. 부모를 의지하는 아이들이 어릴 때에 얼마나 아빠 엄마를 찾든가! “아빠! 아빠!...” (그 때가 그립다 ^^) 당신이 한번도 하나님 앞에 서원해 본 적이 없다면, 이유는 하나이다.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내 문제를 풀어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고, 나에게 관심있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서원, 이것은 하나님과 더 깊어지기 원하는 드림과 나눔, 무엇보다 마음의 드림과 나눔이 서원자의 마음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꼭 서원이 있는 신앙이 되자. - 믿음으로 주 앞에 나아가서 고백하고, 약속하는 것이 서원이다. - 기도가 서원이고, 서원이 기도이다. - 응답하셨고, 응답해 주실 주께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서원이다. - 그저 주님을 향하고 “주님 무엇을 원하세요?” 여쭈는 것이 서원이다. - 너무나 소중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내 안에 사시는 예수와 함께 하나님을 향하고, 세상을 향하는 것이 서원중의 서원이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뭘 원하는가?) 나머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더 하시리라." 이것이 나도, 여러분도 고백할 서원이다.

엄하게 부리지 말자

2019-10-24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5:39-55 오늘 말씀에 이스라엘 자기 동족을 “종으로, 엄하게 부리지 말라”고 네번이나 말씀하신다(39, 43, 46,, 53). 성서시대 당시에야 종이 노예의 개념과 가깝지만, “엄하게 부리지 말라”는 말씀이 지금은 하는 일에 함께 하는 일군, 직원, 동료, 이웃에게, 심지어 가족, 배우자에게 대하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러분은 가정, 일터, 학교, 사람 사이에서 자신이 부리는 사람이 생각하는가? 부림을 받는 사람이라 생각하는가? 종들 사이에도 부리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종이 주인을 부리기도 하는 세상이 지금이다. 내가 대하는 모든 사람은 사실 내가 부리는 사람이다. 마음으로든, 행동이나 말로든, 내 입장에서 대하는 모든 사람들이기에. 그러므로 “엄하게, 함부로 부리지말라”는 말씀은 내게 하시는 말씀이다. 살면서 순간순간 “애굽같은 죄의 늪에서 건져주신 나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대하실까”하는 것이 함부로 부리지 않는 길이다. 더 이상 참기 어려울 때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처럼, 내가 사랑하는 아들 딸처럼 대해주자” 하는 결론에 따르는 것이 엄하게 부리지 않는 것이다. 해도 너무한다 할 때도 “보살피고 내 안에 두고, 여전히 불쌍히 여겨주는 것이” 부리기는 하지만 함부로 부리지 않는 것이다. 남은 나처럼 여기고, 아니 나보다 낫게 여기고, 성령의 마음으로 보고 대해주는 것이 함부로 부리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이 한마디가 엄하게 부리지 않는 바른 지침이 아닐까?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나니” 오늘도 분명히 엄하게 부리지 말아야 할,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당신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아니 주님이 보내실 것이다.

내 땅, 다른 주인이 있다 하네요

2019-10-23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5:23-38 어릴 때는 “땅 땅!”하며 막대기 총을 들고 놀았고, 또 친구들과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땅따먹기 놀이를 하곤 했다. 그 때는 몰랐다 그 땅에 주인이 있는 줄. 그래서 열심히 “여기까지 내 땅이다. 내 땅 더 많아졌다”하며 흥분해서 놀았다. 그리고 저녁이면 엄마의 부르는 소리에 발로 쓱쓱 그은 금들을 지우고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 인생이 땅따먹기와 무엇이 다를까? 주님이 주신, 그리고 여전히 주님의 것인 땅 위에서 나름대로 줄긋고 “내 땅이다. 내 땅이 많다”하며 살다가 부르시면 쓱쓱 내려놓고 주께로 가는 인생이 아닌가! 오늘 말씀에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나그네”로 주님과 함께 하고 있을 뿐이라 하신다. 지금이야 내 땅, 내 건물하지만 글쎄, 300년 후에도 그 땅이, 그 집이 내집으로 남고, 내 후손이 살고 있을까? 희박한 일이다. 토지가 주님의 것이라면 주님은 우리에게는 무엇을 주신 것일까? 그것은 그 땅위에서의 가족과 이웃과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다. 땅을 잃은 친지에게 그 땅을 사서 돌려주는 것도(25), 가족들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땅위에 다시 터전을 잡는 것도(26), 희년에 다시 돌려주고 받고 함께 감사하는 것(28)도, 가난한 형제와 동거하는 것(35), 돈을 꾸어주고 이자를 받지 않는 것도(37)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며 살라는 것이다. 무디의 책자에서 이런 말이 오늘 눈에 확 뜨였다.. “ 세월은 세상에서의 셈법이고, 영원은 하나님의 셈법이다.” 그렇다 우리의 셈법도 주님과 함께 영원을 누리며 영원을 향해 즐거이 가는 것이다. 흔히들 목매는 동산이나 부동산, 돈이나 명예가 얼마나 갈까? 우리도 영원을 셈하며 주님을 따라가는, 지금 애굽같은 세상에서는 그저 잠시 머물 거류민임을 한시라도 잊지말자.

내게 주신 희년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2019-10-22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5: 1- 22 언젠가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했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의 무표정한 표정에 좀 놀란 적이 있다. 나라도 미소로 쳐다보니 이상한 사람처럼 여기기도 한다. 한국에서만 그런가? 여기 미국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실없는 것같아도, 이상한 사람처럼 여겨도 난 언제나 웃어야 할 일이 있다. 예수 때문이다. 기쁨을 주신, 희년의 주체이신 예수님 때문이다. 7년째가 되면 땅도 기뻐할 희년이 오는 것이고, 50년째가 되면 묶였던 모든 속박을 풀어주고 다시금 땅도 사람도 돌려보내는 희년(주빌리, 요벨), 하나님이 복의 근원임을 믿고 순종하는 희년을 시행하라, 이것이 본문 25장의 말씀이다. 50년이면 대부분이 조상이나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땅과 종들을 풀어주어야 할 때일 것이다. 희년의 때가 다가올 수록 싸지는 땅값도(16), 일하는데 절실한 일군들이 돌아감도 반갑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풀려 돌아가는 것이, 땅을 되찾는 일이 반갑지 않은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 하나님이 참소유자이시요 소유욕심을 막고, 만사가 때가 있을을 알게 해주시는 희년이지만, 물질의 욕심이 끼면 끝없이 복잡해진다. 제도적 희년만으론 참 기쁨과 회복의 기회가 되지는 못한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4장에서 자신의 공생애의 사역을 선포하신다. 요약하면 “성령의 기쁨 속에 오신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영육간에 복을, 포로된 자에게 희년의 자유를, 눈먼자 보게함과 눌린자에게 희년의 자유를, 은혜의 희년을 전파하려함이라” 그렇다! 바로 예수 안에서 기쁨으로 나누어주고, 감사로 받는 희년의 시혜자와 수혜자가 있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의 동등한 복받음의 인생임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누구든지 50년을 두번 지나기 전, 결국은 들어가야할 천국의 희년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예수 안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진정한 희년의 기쁨이 내게도 이루어졌다. 우리 모두의 몸도, 영혼도, 삶의 현장도 예수와 함께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희년이야말로 진정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던 자가 기쁨으로 돌아오는 날”을 주신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절기이다. 희년이야말로 예수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가 되어지는 우리에게 이미 주신 축복이다.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며 잘 관리하고 나누라고 희년의 복으로 주셨고, 갚을 길이 없는 빚진 자인 내게도 “그래도 사랑한다”시며 거져주신 희년의 은혜임을 언제나 감사하며 살아가자.

자기를 괴롭혀 믿음의 도약을 하자

2019-10-17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3: 23- 32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속죄일의 준수를 명하신다. 일을 멈추고 반드시 “자기를 괴롭게 하며(27, 29, 32)” 화제를 드리라 하시며, 불순종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하신다. 축제와 같은 다른 절기들에 비하면 심각하게 여겨지는 절기이다. 자기를 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히브리어 “아나”는 “엎드리다. 자기를 겸손하게 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영어번역의 “Self-denial”의 의미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 나태해져가는, 메말라가는 우리 몸의 구조, 정신구조를 잘 아시는 하나님의 처방이시다. 그러기에 자기 괴롭힘은 믿음으로 새롭게 되는 도약의 기회라 깨달아진다. 다윗은 금식하며 자기를 괴롭게 하며 서원기도를 드렸고, 욥은 자신의 연단으로 괴롭게 하였지만 정금같이 나옴을 고백하였고, 제자들은 마가다락방에서 기도하며 “회개하라...”를 자신에 적용하며 자기를 괴롭게 하니 성령이 임재하셨고,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자기 몸을 치며 괴롭게 하며 더욱 사역에 정진하였다. 예수님이야말로 십자가로 자신을 괴롭게 하며 구원을 이루셨고, 우리에게 자기 부정의 십자가를 기꺼이져야 제대로 따라올 수 있다 하신다. 그러므로 “자기 부정, 자기 괴롭힘”은 우리에게 필수이다. 우리도 바로 지금 하던 일을 꾹 멈추는(28, 30) 자기 괴롭힘으로, 남을 판단하기에 익숙한 맘보와 시선을 돌려 자기 괴롭힘으로, 바로 지금 회개함으로 방향을 점검하고 칼날같이 수정하는 자기 괴롭힘으로, 다시금 무릎끓리는 기도와 채워넣는 말씀의 자기 괴롭힘으로, 변질되고 둔해져 버린 나를 살리고 속죄일의 처방을 따라 다시 믿음의 도약을 시작하자.

모든 것을 첫 열매로 삼고, 드리고

2019-10-16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3:9-22 아무리 작은 논밭떼기도 추수때는 흥이 나는 것이다. 그동안의 노고도 다 씻기고 까만 얼굴들에도 웃음꽃이 번져가는 것이다. 보릿고개같은 궁핍도 순간이나마 면해보고, 온 가족이 곡식팔아 들어오는 삯으로 뭐 해볼량 저마다 속셈이 있는 때이다. 생각만 해도 한해의 절정이라 할 때이다. 그 때 철든 믿음의 가족이 한마디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하나님께 참 감사하다!” 그래서 모두가 마음을 모아 첫수확을 주께 올려 드린다 “여호와께서 먼저 기쁘시게 받음이 되도록(11)” 적은 것 탓할 것도 아니다, 많아서 끙끙될 것도 아니다. 주님이 기쁘게 받으시도록, 온 가족이 감사로 먼저 떼어드리고, 제사장이 즐겁게 번제로, 화제로, 요제로, 거제로, 전제로 춤추며 드리고, 이웃과 나그네들이 (22) 꽤쬐쬐하나 거룩한 손을 들어 축복하는 초실절의 축제이다. 이 축복보다 귀한 것이 어디있으랴! 그런데 우리가 사는 모든 삶에 처음 것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이 든다. 오늘도 첫 새벽, 오늘 처음 만나는 아내와 아이들, 첫 한마디, 첫 식사, 첫 거울, 첫 나서는 문, 처음 대할 분들... 우리가 드려야할 첫 열매가 얼마나 많은지! 이것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첫 열매일 것이다. 이것이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한다는(시4:7) 첫열매 신앙이자 축복이다. 오늘 한가지라도 첫열매의 기쁨과 감사로 대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나의 첫열매인 소중한 그대를 생각하며 축복한다.

절기때마다 마음이 설레는 분이 있다

2019-10-15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23:1-8 감사절기가 다가오고 있다. 온 가족이 모이기가 점점 어렵지만 가족들이 모인다는 것만 생각해도 가슴이 설렌다. (애들아, 아버지의 이런 마음을 딴 여행으로 바꿔먹지 말아다오...) 내 이야기만이 아니다. 절기가 다가오면 주님이 설레시고 기다리신다. 오늘 말씀에는 안식일과 유월절, 무교절의 절기를 말씀하시고 있다. “여호와의 안식일(3), 여호와의 유월절(5), 여호와의 무교절(6), 여호와의 절기(2)”이다. 여호와의 절기이니 주님이 주인공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이 절기를 지키시나 안 지키시나 노려보고 계신 날, 절기가 아니다. 우리에게 진실한 삶의 의미, 진정한 위로, 진정한 하나됨을 맛보는 절기가 되라 주신 날이다. 힘들게 살아가도, 심지어 고통스럽게 살아가도 주님을 만날 날, 그 곳을 올려보며 위로받으라는 절기이다. 살아계신 주님을 확인하고, 나머지 모든 날들을 주와 동행하며, 즐거이 살아가라 주신 절기이다. 더 나아가 영원한 절기, “천국”까지 바라보고 길게, 진실하게 살라고 일깨워주시는 절기이다. “식사하러 집에 오세요” 부르는 아내의 전갈을 무시하고 하던 일에 집중할 때가 있다. 그러다가 먹을 생각도 잊어버리고. 그러나 그래서는 안된다. 그 때는 하던 일을 멈추고 행복한 맘으로 집으로 달려야 한다. 사랑의 밥상을 함께 하기 위해서. 주님이 말씀하신다.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7, 8) 내게 오거라” 생명처럼 착각하며 매달리는 그대의 지금 일보다, 주님과 이웃의 관계가 우선임을 깨우쳐 주시는 절기이다. 사랑의 교제만큼 소중한게 없음을 절기마다, 절기 사이마다 깨닫기를 바란다.

너도 흠이 있지 않겠느냐

2019-10-14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2:17-33 우리가 주님 앞으로 나아갈 때에, 제물이든, 예물이든 주 앞에 드릴 때에 오늘 주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내게 흠이 없는(21) 제물을 가져오너라. 흠이 있는 제물들은(22-23) 내 앞으로 가져올 생각조차 말아라. 너의 마음이 또한 제물이고, 너희 몸, 삶 전체가 산제물이다. 흠있다면 내 앞에 올 생각도, 드릴 생각도 하지 말아라. 내 눈에 감추어질 흠은 어떤 것도 없다. 내가 너의 속속까지 다 안다. 이제 어떤 제물을, 어떤 예물을 내게 가져오겠느냐? 어떤 네 몸과 마음을 내게 주겠느냐? 나는 거룩하고, 거룩함만을 받고자 하느니라(32). 과연 너는 거룩함으로 내 앞에 설 수 있느냐? 정 자신이 없다면, 여전이 너의 흠이 있다 보이다면, 그래도 내 앞에 나오는 것만이 사는 길이라는 것을 안다면, 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붙잡고 따라 오너라. 내 아들이 너의 모든 흠을 덮어주리라. 그리고 흠없는 너를 내가 즐거이 받아주고, 변함없는 나의 사랑으로 너를 안아주리라.

애들 신앙, 어른 신앙

2019-10-11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1:1-9 평생 내 앞에는 늘 어른이 있다. 부모가, 심지어 형이 어른이었고, 선생님이 어른이고, 지혜자와 성공자들이 어른이고, 연장자들이 당연히 어른이었다. 앞으로도 어른들을 바라보며 공경하며 살아갈 것이다. 어른이란 사전적 정의는 “다 자란 사람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다. 어른의 반대어는 무엇일까? 바로 떠오르는 것이 “애들”이다. 그대는 어른인가 평생 애들인가? 주께서는 제사장들에게 “그의 백성의 어른(4)”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이제 우리 모두가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베드로를 통해 말씀하며, 우리가 애들 신앙이 아닌 어른이 된 신앙으로 살아야 함을 깨닫게 하신다. 바울선생도 디모데 후배에게 연소한 애들 신앙으로 업신여김받지 말고, 장성한 어른의 신앙이 되라고 한다. 오늘 어른으로 사는 신앙을 깨닫게 하신다. “백성의 어른인즉(4)” - 성경말씀은 백성위한, 공동체 언어이다. 어른은 남에 대한 책임과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1, 4, 9)” - 세속을 충분히 이겨내며 깔끔한 신앙의 어른이 되고 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에게 음식드리는 자이다(6, 8)” - 중재자의 사랑으로 백성의 죄와 허물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회개와 예수보혈의 상차림을 더 큰 어른에게 올려 드리는 어른이어야 한다. “나 여호와는 거룩하니라(8)” - 거룩의 정점은 성령이시다. 성령과 동행하는 순간이 나는 어른의 마음을 갖는 순간이다. 죽은 것은 멀리하나, 살붙이인 가족들에게는 자신을 더럽힐 수 있다(1, 3) - 삶의 본이 되고 기꺼이 자신을 허물어 희생과 봉사하는 어른의 삶을 살아야 한다. 언제까지 어른만 바라보겠는가? 그건 겸손을 넘어서 회한만 남은 인생이 될 것이다. 내가 어른됨은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살아가야할 바로 나의 모습이다. “너희는 백성의 어른이다” 자신밖에 모르는 애들신앙을 내려놓고 주님과 세상 앞에 어른으로 살아가고자 오늘도 말씀앞에 머리 숙인다.

성도, 거룩함 속에 자라가는 사람

2019-10-10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0:22-27 이런 말을 듣고 솔직히 놀랐다. “노인들이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이런 말을 80세가 지난 분이 하였기 때문이다. 마음은 항상 청춘이다. 아니 몸도 늘 청춘으로 살 수 있다. 그러나 젊은 마음으로 계속 살아내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레위기는 거룩함 삶이 하나의 주제이다.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26)” 그런데 그 거룩은 정체된 삶이 아니다. 부단히 거룩한 삶(26), 기꺼이 구별된 삶(24)을 살아 내는 것이다. 규례와 법도(22)도 도전하며, 지켜내며 살아가는 것이고 자라가는 것이다. 비록 젖과 꿀이 흐르는 주신 땅(24)도 싸우며 얻어내며 자라가라 주신 것이다. 정한 짐승, 부정한 짐승(25)도 늘 선택과 깨어있음 속에 정결한 방향으로 자라 가라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으로라도 기죽지 말고 자라가자. 연약한 몸일지라도 강하신 주님께 껌딱지처럼 붙어 자라가길 소망하자. 언제나 확실한 소망과 함께 도전할 일들을 주시는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 참 감사하다.

온갖 죄를 말씀으로 이기고 가정을 지키라

2019-10-09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20:9-21 어느 가정에 심한 부부 싸움을 하고 격분한 나머지 남편과 아내도, 거기다가 그 집의 아들까지도 20층 베란다에서 밑으로 뛰어내리고 말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남편은 제비족, 부인은 날나리, 아들은 비행소년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늘 말씀은 18장과 함께 타락한 이방세상 속에서, 가족이나 친척 간의 거룩한 삶을 명하신다. 특히 결코 범하지 말아야할 가증한 성관계를 경고하고 있다. “부모를 저주하지 말라. 이웃아내, 며느리, 이모, 고모, 숙모와 동침하지 말라...” 남성들 앞에, 여성들 앞에 지금도 일어나는 죄들이 아니겠는가! 그런 세상에서 거룩한 삶으로 죄를 이기며 주님과 함께 걸어가야 할 우리들이다. 말씀을 알고 있어야 죄를 이겨낸다. 본문 내용이 내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도, 우리는 몰라서, 잊어서 죄의 유혹에 빠지는 존재이다. 때로는 세상의 현혹이 너무 교묘하고 강해서, 하나님이 명령을 잊을 경우가 있다. 또 유혹은 받기도 하고 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시고, 우리는 말씀을 더욱 자세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내 가정과 친척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대의 삶으로 거룩함이 퍼져가게 하라. 말씀의 능력에 순종해야 죄를 이겨낸다. 정말 성경의 약속과 지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순종으로 살아가야 비로서 죄의 유혹을 이겨낸다. 죄를 이기고 다스리도록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붙드시고 이끌어 가실 정도로 말씀 속에 그 대의 삶을 푹 잠기게 하라. 그보다 먼저 일단 내 몸과 영혼이 구원을 받아야 말씀으로 죄를 이겨낸다. 하나님이 이제는 자녀인 날 수신자삼아 보내주셨고, 예수님이 스승되어 우리 영의 눈을 열어 주셨고, 성령님이 친구삼아 순간순간 그 말씀을 풀어주실 때에 죄악된 세상속에서 나도, 가족들도 지켜낼 수가 있다. 그러니 말씀을 붙들고 이렇게 기도하며 살아가자. “(말씀을 주신) 하나님, 내 눈을 (예수의 구원으로 )열어 주의 기이하고 (신령한) 법을 보며(시119:18) 내 주위에 다가오는 죄악들을 물리치며 이기게 하소서.” 아멘.

불구덩이 몰렉에게 자식을 줄 수 없다!

2019-10-08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0:1-8 모두가 자식을 사랑하지만, 때로는 자기 욕심을 위해 자식조차 포기하거나 버리는 악한 부모가 있기도 하다. 성경에도 그런 악한 자들이 나타난다.오늘 본문의 몰렉우상에게 자식을 바치는 제사를 행하는 자들이다. 황소머리, 인간몸처럼 만든 몰렉우상숭배는 그 속을 비워 불로 달궈 불구덩이를 만들어 그 위에, 그 속에 산제물을 바치는 이방인들의 잔인한 행태이다. 그러나 이방인들만이 여기에 빠지는 것이 아니기에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열왕기 하에 보면 아하스나 므낫세왕도 자식을 불로 지나가게 하였다는 끔찍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주사바늘 하나 찌르는 것도 못 볼 자식을 산채로 죽일 수 있다니! 그 때나 지금에나 악한 것에 사로잡힌, 제 정신이 아닌 환자가 아니면 절대 저지를 수 없는 일이다. 오늘 말씀은 그런 패륜적인 일을 저지르는 자들은 죽이고, 백성중에서 끊으라고 엄히 명하신다. 그런 짓을 결코 하지 말라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더 뜨겁고, 더 무서운 불은 하나님 없이 살다가 가게 되는 실재하는 지옥이다.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가는 천국이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지옥이라는 하나님 없는 영원한 단절의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중간지대는 없다. 요행도 없다. 지금 내 자녀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의 자녀는 예수 안에서 분명한 천국백성인지.. 세상몰렉에게 내어주고 있지나 않은지... 아니 벌써 거의 뜨거움이 확 달아오르고 있는 불 가까이로 끌려가고 있지 않은지... 방치하는 것과 내어주는 것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자식의 위급한 영혼을 위해, 내게 정해준 영적 VIP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께 911 기도를 하자. 차라리 내 마음이 뜨거움으로 불덩이가 되자. 영혼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걸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난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눅23:26).” 무거운 주제일지라도 우리 모두 깨어서 감당하는 파수군이길 소원한다.

율법에 몇가지 얹어놓을 것

2019-10-07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19:10-37 미국에 와서 처음 먹은 피자맛이 늘 기억에 남는다. 챨스톤 지역을 방문해서 그곳 현지 미국 목사와 함께 간 피자헛에서였다. 큼직한 피자, 두툼한 빵위에 온갖 타핑을 얹어놓은 뜨근한 피자! 30대 중반의 식욕왕성한 목사였으니 ... 그 때 피자가 맛은 지금 잊었어도 즐거운 추억은 여전히 남아있고 여전히 좋아하는 피자이다. 오늘 레위기 말씀에서는 여러가지 율법 실천사항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명하신다. 요약하면, “가축이나 종자 섞지말라, 하녀와 동침말라, 과일나무 3년 두고, 4년차 주께 드리고, 5년차의 열매부터 먹으라, 점, 술법, 문신, 점, 무당을 금하고, 머리 함부로 깍지말고, 노인공경하고, 거류민 학대말고, 재판공정하고, 저울과 추를 공평하게 하라...” 이 말씀만이 아니다. 계속될 다양한 말씀들이, 삶의 정황 속에서 가지치고, 적용되면 얼마나 많은 일들이 하지말아야 하고, 해야하는 것일까! 율법대로 살려하면, 지치거나 형식적이 되거나 적당히 타협하며 살게 될 것이다. 그래선지 구약의 율법을 읽고 대할 때마다 온전한 순종보다는 이제는 복음안에 사는 것이라 적당한 간격을 두고, 은혜되면 따르고, 부담되면 거리두고, 지나치다 여기면 외면하는 구절들이 있다. 그런 나의 모습 속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사소한 자세같지만 진리에서 멀어질 위기가 있는 것이 아닐까 돌아보게 된다. 그러기에 다음같은 몇가지는 율법 위에 꼭 얹어 놓아야할 것이라 깨닫는다. - “순종합니다.” 모든 규례, 모든 법도를 지켜 행하라(37)는 주의 말씀을 타협없이 순종으로 율법위에 얹으라. - “이거 사랑하시기에 주시는거죠?” 계명을 지키려하기보다 먼저 계명을 주신 주님의 마음과 그 사랑을 율법위에 얹으라. - “말씀속에 예수님이 계시네요!” 지켜내려는 일군같은 애씀보다 내가 모시고 살며 좋아하는 분과의 친밀한 기쁨을 율법위에 얹으라. - “내 눈과 마음을 여는 성령님!” 깨닫고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님을 언제나 율법위에 얹으라. - 이런 순종과 주님사랑, 살아계신 예수과 성령의 조명이 율법을 완성해가는 우리들의 핵심재료이다. 그렇게 다시 오늘 말씀을 읽자. 순간순간 살아 적용되는 말씀 속에 살기를 바란다.

끈질긴 애굽습관, 거센 가나안 유혹에서 가정을 지키라

2019-10-03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18:1-18 하나님은 애굽의 풍속, 가나안의 풍속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법도, 말씀만 순종하며 살아가가고 하신다. 그리고 살붙이, 가족관계를 하나하나 열거하시면서, 부모 자녀 형제 친척과의 문란한 성적 관계를 엄히 금지하신다. 성생활은 남편과 아내에게 허락하신 것이 바로 창조의 질서이다. 이것을 불순종하는 성적 욕망의 무절제에서 시작된 죄악이, 타락으로, 가정파괴로, 우상숭배로, 망국의 길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살붙이 외에는 문제가 안되는가? 아니다. 오늘날도 가정의 파괴가 삐뚤어진 성적 문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내 안에 애굽같은 과거의 잘못된 습관은 물리쳤는가? 내 앞에 다가오는 가나안같은 세상 온갖 타락한 문화의 거센 유혹을 담대하게 물리치고 살아가는가? 두려워하고, 숨기고, 외적 경건에만 치우쳐 사는 것과, 시험과 유혹을 담대하게 물리치고 주와 동행하며 사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 죄악된 습관과 욕망이 아직 내게 있는가? 애굽의 옛습관은 끊임없이 되살아날 수 있다. 철저한 회개와 변화의 삶을 살아가라. 오직 회개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육체의 욕망을 이겨낼 수 가 있다. -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5)” 이제 말씀만을 따르며 온전히 복종하자. “어머니, 아버지, 딸, 손녀, 외손녀, 누이, 이모, 형제 아내등등..” 말씀 속에 이런 구체적인 언급은,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말씀위에 서서, 가정에 죄를 결코 들이지 말라는 하나님의 불같은 명령이자 세심한 배려이다. 우리는 복종함으로만이 이 가나안의 거센 타락문화를 이겨낼 수 있다. - 부부 사랑, 가정화목과 기쁨을 회복하자. 순전한 사랑과 감사의 가정에 마귀가 틈을 타지 못하는 것이다. - 죄의 유혹이 가정의 문앞에, 내 마음의 문 앞에 다가올 때 하나님의 은혜, 신앙의 첫사랑을 다시 일으키며 성령께 매달리자. 부르짖은 기도와 주야로의 말씀묵상과 선포로 가족의 순결을 지켜가는 모두가 되기를 기도한다.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

언제 피를 흘려보았는가?

2019-10-02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17:10-16 “피”라는 표현이 들어가는 상황에는 격렬한 것이 많다. “피볼 일 있느냐?, 피터지게 싸운다. 피눈물난다, 피범벅, 피땀, 피를 나눈...” 부정적 표현이든지, 긍정적이든지 모두가 격렬하다. 내 평생에 내 자신의 많은 피를 본 적은 없다. 한때는 코피가 자주 난 적이 있고, 몇번 피땀의 섬김과 헌혈한 때를 제외하고는. 사람이 건강하면 피를 볼 일이 별로 없고, 희생하지 않으면, 사고가 없다면 피를 볼 일도 없다. 탐심과 혈기로 서로가, 나라와 나라가 싸우지 않으면 피를 볼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피를 보면 야만적 본능이 동요하고, 원치않는 불행에 피흘림의 아픔이 찾아오고, 온갖 복수행태와 함께 불행이 시작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피를 통한 감사와 영원한 감동이 있기도 하다. 누군가의 엄청난 희생을 통해 내가 생명을 유지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감동 위에 격렬한 피와 죽음을 통해 용서와 사랑과 평화를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있다. 누구든지 그 피를 내 죽은 양심과 죄악된 손발에 바를 때에, 그 피의 사랑과 은혜를 믿을 때에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죽을 죄인에서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로. “피는 먹지 말아라, 피에 생명이 있고,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11, 12, 14)” 이것이 오늘 레위기 말씀이다. 주님은 우리 위해 내어 줄 자신의 외아들, 독생자의 피와 생명을 담아 참 거룩을 위한 오늘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먹을 때에도 구별하며 돼새겨야할 피가 있다. 살면서 멀리해야 할 부정한 피도 있다. 제사드리면서도 매달려야할 희생의 피가 있다. 무엇보다 대신 흘려주셔서 날 살려주신 예수님의 은혜의 피가 있다. 그리고 이제는...예수님을 따라 섬기며, 전하며, 희생해야할 나의 피가 남아있을 뿐이다. 예수 안에서 내게도 피를 통한 감동과 간증이 있는 삶을 살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