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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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 네 개의 덮개처럼

2021-6-15

성경묵상의 나눔: 출26:1-14

"청색 자색 홍색실로..휘장을 만들고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지니라"

주님, 해달 가죽의 덮개 아래를 지나, 숫양가죽을 지나, 염소털 가죽을 지나 청홍자색의 덮개 아래에 있는 아름답고 거룩한 주의 지성소, 주의 임재를 사모하게 하소서.

매일매일 일상의 생활보다 먼저, 분주한 일과보다 먼저, 사람들과의 만남보다 먼저, 지금도 부르시는 초청의 덮개 아래있는 주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주님, 제가 저의 못된 죄를 덮으시고 죄없다 품어주시는 예수의 보혈로 물든 사랑의 덮개를 두르게 하시고 그 은혜의 빚진 자로 살게 하소서.

주님, 타는듯 뜨거운 광야에 그늘처럼 내 인생을 지금까지 덮개그늘로 인도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지난날의 세밀한 돌보심을 알기에 남은 인생도 염려, 걱정, 근심, 두려움 없이 주님을 따라 가렵니다.
그리고 저도 작은 그늘되어 힘들어 지친 이웃들을 잠시라도 식혀주며 편안을 나누는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성막: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2021-6-14

성경묵상의 나눔: 출25:23-40

"네게 보인 식양대로 만들라(40절)" 하신 주님, 나로 확실하게 주의 구원의 식양 앞으로 나가게 하소서. 심판에서 긍휼로, 죄에서 용서로, 애씀에서 믿음으로 확실하게 나아가게 하소서. 결코 예수 앞에서 머뭇거리지 말게 하소서.

"순금으로 싸고, 순금으로 쳐만들라(24, 31절)" 하신 주님, 변치않는 영원한 주님을 예배하게 하시고, 영원한 주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고자 합니다. 순간순간 빛나는 주의 영광을 사모하오니 한줄기 빛이라도 보여 주옵소서.

"진설병의 떡"처럼 말씀이 되어 오시고, 말씀을 주신 주님, 예수의 보혈과 사랑을 먹고 마시며 주만 따르게 하소서. 다시금 성경말씀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내 시간의 소중함을 묵상으로 기꺼이 부어드리게 하소서.

그리하여 "등잔대"에 타오르는 주님의 불꽃과 같이 나도 작은 불꽃이 되어 세상을 밝혀가게 하소서. 그 진리의 불이, 그 성령의 불이 온 세상에 번져가게 하소서. 기구마다 새겨진 꽃받침, 꽃모양처럼 아름답게 드려지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의 장막이 회막이 되어 주의 임재와 만남으로 제 가슴에 경외함과 감동이 가득차게 하소서. 아멘.

하나님 앞에 철없는 아이가 되자

2021-6-11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 10:1-1

철이 든다는 말은 계절이 깊어지듯이 귀와 마음이 순해져서 가족이나 남이 하는 말을 쉽게 이해하고, 인생의 이치를 안다는 말이다.

철없는 내 자녀가 속상할 때도 있고, 너무 철이 일찍들어 안타까울 때도 있다. 그러나 자녀가 사랑스러우면 철없어도 사랑스럽고, 철이 들면 대견하기만 하다. 모두들 사랑하는 자녀로 인해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철없는 말같은 우리들의 고백을 주님도 사랑스레 보시고 대견해 하신다.

하나님께 철없이 잘 일러 바치자. "하나님! 악인들이 하나님이 안 보신다, 없다 해요.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고, 무죄한 자를 죽이려 해요!(4, 7, 8절)" 원색적인 기도는 하나님이 무시당해 속상해서 철없는 아이가 불평하듯 일러 바치는 것이다.

걸핏하면 하나님 뒤로 철없이 숨자. "여호와여 어찌하여...(1절),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손을 드옵소서(12절" - 우리도 주께로 피해야 한다. "하나님! 저 힘들어요, 무서워요, 잘못한단 말이예요! 제발 도와주세요" 한심한 듯 철없는 나의 모습이지만 주님 뒤로 잘 숨는 것이 무기력해 보이지만 진정한 기도의 시작이다.

하나님 자랑하려고 사람에게 철이 없어야 한다. "주는 보시고, 감찰하시고, 갚으시고, 외로운 자가 의지할 분입니다(14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십니다(16절), 겸손하면 소원을 들어주실 분입니다(17절)"

우리는 예수를 자랑하다 놀림받을 수 있다. 주를 자랑하다 핍박받기도 한다. 주를 자랑하다 지금은 손해볼 수 있다. 그러나 입을 닫고 세상에 철든 사람처럼 품위유지에 급급한 사람에게 주님은 고맙게 여기지 않는다.
우리도 철없는 것같이 시도 때도 없이 주를, 예수를 자랑질하는 사람이 되자. 나를 주님이 보시면서 "아이구! 나를 철없이 시인(자랑)하며 사는 착하고 충성된 녀석아, 넌 소중한 사람이고, 난 네가 너무 너무 좋다" 라는 한가지는 인정받기를 소원하자.

주님, 이런 가난한 자가 되게 하소서

2021-6-10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9:11-20

주님, 나를 곤고케 하시기에 오히려 순수하게 주를 향해 부르짖는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12절)
때를 따라 한가지씩 주시는 응답과 해결 속에 주의 잊지않으시는 구원을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단순함을 주소서(14, 18절)

주님, 내가 궁핍하고 힘들다고 남을 해할 웅덩이는 결코 파지 않게 하시고(15절)
내 스스로 행하겠다고 주님보다 앞서는 자만에 얽히는 인생이 되지 않게 하소서(16절)

주님, 편하다고 주의 베푸셨던 큰 은혜를 잊는 이방나라같이 변질되지 않게 하시고(17절)
언제나 심령이 가난하고(18절) 은혜에 배고픈 가난한 자로 살게 하소서

너무나 많은 것에 얽매이고 분주해서 주를 순간순간 잊는 영적 둔감이 아니라, 순간순간 주님께 감사하고 그 분의 하시는 일을 자랑하고 선포하는 영적 배고픔과 채우심의 감동 속에 살게 하소서.
주님 저를 가난한 자가 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아멘.

문제와 낙심은 다가온다 다만 이겨낼 뿐이다.

2021-6-03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1:1-6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합니다(1-2절)."

내가 믿음으로 산다해도 흔들리기 쉬운 것이 내 모습이다. 사람들이 말과 물리적으로 대적하고, 내 신앙을 흔들 때에 쉽게 약해지는 것이 내 신앙의 모습이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럴 때 하나님은 다윗의 처지와 대처함을 내 마음에 들려주신다.

"주는 나의 방패.. 나의 머리를 높이 들게 하시는 분 (3절)"- 문제가 나를 흔들 때에 주님의 옆에 서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그 분의 약속을 선포하는 것이다. "주는 나의 방패이시다!" 이 한마디가 흔들리는 나의 신앙중심을 바로 잡아준다.

"내가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4절)" - 선포에 믿음을 담고,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면 그것이 기도이다. 문제와 과제를 앞에 두고 기도하기 시작하면 무거운 짐이 바로 반으로 줄어들고, 기도하고 맡기면 그것이 가벼운 짐이 되는 것이다.

"내가 누워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도 (5-6절)" - 문제 속에 선포하고, 기도하고, 믿음으로 맡기면 평안할 수 있다. 지난날의 삶에 문제가 없을 때가 과연 있었나! 다만 순간 순간 주를 믿고 신뢰하며 평안의 능력으로 이겨내며 살아왔을 뿐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8절)" - 구원이란 마지막의 결과요 상급이요 승리요 완성이다. 누가 이기는가? 세상이 이기는가 믿음의 성도가 이기는가? 지는 싸움같은가? 혼돈상태인가? 그러나 하나님이 결국 이기게 하신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라.

예수와 함께 이미 이겨놓고 싸우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나의 문제가 변하여 응답과 축복과 능력이 됨을 믿자. 그리고 문제가 무엇이건 우리 모두 일어서고 대면하며 헤쳐나가자.

성경말씀에서 복의 맥을 캐내기

2021-6-01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1:1-6

"복있는 사람은...(1절)"

하나님은 율법 속에 복이 담겨 있다 하신다. 율법을 제대로 자기 것으로 삼으면 복을 받게 되어있다고 하신다. 그 복을 캐내는 자가 되어야 한다.

금맥처럼 일단 덮어있는 흙과 바위, 불순물들을 치워버려야 한다.

"악인의 꾀를 쫓지 않고(1절)"-세상의 방법, 처세술로 복을 받지 않을까, 세상의 쾌락, 세속의 영광이 복이 아닐까 하는 착각을 제거하자.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 어느 길로 갈 것인가 오늘도 결정할 때, 편한 길로만 가려는 마음, 타협의 길은 물리치라. 주님이 기뻐하는 일만 일깨어 복의 맥을 찾아 걸어가자.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않고" - 하나님을 기쁘게 못하는 곳, 예수모신 신앙의 고백이 없는 곳, 자기 자랑, 남의 판단이 주도하는 곳이 오만한 자리다. 거기서 벌떡 일어나든지, 그곳을 바꾸어 신앙의 영향력을 심어주자. 복의 맥이 가까이 있음을 서서히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2절)" - 성경이 좋아져야 복의 맥을 찾는다. 말씀이 즐거우려면, 자주 보고, 그 속에 주의 숨결과 사랑을 느끼며, 말씀이 살아서 나와 인격적 교제를 해야 맥이 환히 보이기 시작한다.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 주야는 24시간이고, 온종일이고, 어느 때나이고, 그러기에 푹 빠져 사는 것이다. 낮에, 밤에 성경말씀을 내 생각보다 앞세우면 복의 맥을 제대로 찾아가는 기적을 체험하기 직전의 사람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3절)" -시냇가의 나무는 성장이 활발하다. 그 자리는 수분도, 햇빛도, 양분도, 공기도 활발하게 적용(순환)하는 곳이다. 성경말씀이 이렇게 오늘도 나 자신에게 순종과 적용으로 생생할 때 복의 큰 맥이 나의 것으로 안겨지게 된다.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 복의 맥은 끝까지 찾는 자의 것이다. "철"이라는 계절은 나의 시간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때이다. 그 것을 알 때에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말씀을 따르는 순종은 참고 인내해야할 때가 많다. 우리 모두 지금이 주님의 때, 주님 앞에 꿋꿋하게 기다려야 할 때인 것을 깨닫자.

주님, 갚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2021-5-26

성경묵상의 나눔: 출22:1-15

"남에게 취한 것은 양 한마리에 양 네마리로 갚을지니라(1절), 남의 밭의 것을 네 가축이 먹었으면 네 밭에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할지니라(5절)"

주님, 오늘까지 살아온 내 인생에 남에게 돌아가야 할 것, 내가 취한 것이 많습니다. 양을 네배로 갚듯, 갑절로 배상하듯 나누고 환원하는 일에 삭개오처럼 적극적이 되게 하소서.

주님, 가장 좋은 것으로(5절) 평생 배상하며 갚아 드려야 할 분은 주님이시옵니다.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옥합을 깨어 부어드렸던 여인처럼 예배에 모든 것을 쏟게 하소서.

주님, 내 죄와 실수를 뼈 속에서부터 회개하며 내 죄를 배상하게 하소서. 심령의 통회함으로 기도하던 다윗처럼(시51) 마음과 영혼으로부터 주님괴 이웃에게 배상하고자 하는 진실함을 주소서.

주님, 이만하면 나도 할만큼 배상하고 헌신했다며 자만하는데 빠지지 않게 하소서. 여전히 십리까지 가주며, 속옷조차 나눌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소서.

내가 일만달란트의 빚을 졌으나 면제받은 인생임을, 내 앞의 어떤 사람이라도 백데나리온만큼도 내게 빚진 것이 못 된다는 것을 결코, 결코 잊지 않고 평생 겸손과 감사함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제대로 단속, 예방, 변상하는가?

2021-5-25

성경묵상의 나눔: 출21:28-36

본문에서는 키우는 소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고를 일으킬 때 따르는 징계및 변상등 그 후속처리에 대해 말씀한다. 목축을 주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축은 자기 가족이다. 소나 내 가족들들을 제대로 키워야지 사고치게 하면 안되는 것이다.

제대로 "단속하지 아니하면(29, 36절)"- 단속은 경고나 금지의 강제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내 가족이 지금 빗나가고 있는데도 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자식에게도, 동료들에게도 우리는 영적 해이함을 단속을 해야할 사명이 있다. 그것이 파수군인 나의 사명이다.

"(제대로 예방하지 않으면) 구덩이를 열어두거나 파고 덮지않아 ...빠지면(33절)" - 깊은 구덩이는 빠져 나오기 어렵고 물이 고여있으면 생명까지 잃는 장소이다. 지금의 구덩이는 우리가 밖으로 나가면 살아가는 현장에 유혹의 덫이 있는 곳이고, 안으로는 내 약한 부분이 구덩이가 만들어지는 곳이다.

지금 내 약점, 미혹의 여지는 무엇인지! 예배의 건조함? 영혼에 대한 무감각? 돈? 쾌락? 욕심? 두려움? 사람의 인정? 사람눈치? 일중독? 게으름?
깨닫는 것이 은혜의 시작이요, 예수와 관계를 회복하고, 성령을 쫓아 다시 살아가는 것이 구덩이를 덮어버리는 예방의 출발이다.

"(제대로 갚지 않으면) 그는 (산)소로 (죽은)소를 갚을 것이요(36절)" - 갚으며 사는 것이 우리 신앙이다. 회개에는 갚음이 있는 것이고, 진정한 회개와 새로운 삶에는 갚음과 변상의 실천력이 있다.

말로 실수한 것은 사과함으로 갚자. 물질로 피해준 것은 어떻게든 재물로 갚자. 삶 속에 실수한 것은 진지하게 용서를 빌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떳떳하자. 반면 혹 안 갚는 사람때문에 내 속이 상하는가? 그 때는 평생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용서로 통 크게 용서하자.

십계명 앞에서의 십계

2021-5-21

성경묵상의 나눔: 출애굽기 20:1-17

우리들 중에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다만 소흘하거나, 외면하거나, 어기면서도 둔해져셔 참 복을 모르고 살아갈 뿐이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계명을 분명 너에게 주었다. 그리고 내가 예수와 그의 영을 보내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러기에 본문을 묵상하며 주신 말씀에 대한 내 마름의 자세를 열가지로 가다듬어 본다.

1.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열계명만이 아니라 한 가지이건, 백 가지이건 순종하겠습니다.
2. 말씀인 계명을 주심은 순종하면 반드시 약속을 이루어주시고, 보호하시고, 책임져 주심으로 알겠습니다.
3. 내 판단을 먼저 앞세우지 않고 하라는 것을 하고, 하지말라는 것은 물리치겠습니다.
4. 하나님만이 아니라 사람들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니,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균형있게 살겠습니다.
5.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것이 최우선임을 늘 새기며 삶의 목적을 잊지 않겠습니다.
6. 안식일 계명따라 주일성수 속에서 삶의 속도를 조절하고 하나님 사랑과 내 영혼 회복과 이웃 사랑을 늘 새롭게 하겠습니다.
7. 부모공경 계명따라 부모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알고 사랑하고 공경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며, 이기적이거나 이익이나 변명을 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리겠습니다.
8. 삼사대까지의 징계의 경고와 천대까지의 복의 축복을 마음에 새기고, “하지 말라”고 하시는 눈에 보이는 다른 사람의 생명, 다른 가족들의 즐거움, 다른 사람의 소유들, 그들을 소중히여기며 자존감을 해치지 않겠습니다.
9. 열가지 계명과 함께 준수하고자 하는 노력과 애씀이 짐이 되지 않도록 날 구원하시고 자녀삼아 주신 예수 안에서 살아가겠습니다.
10. 아무리 계명이 세분화되고, 판단하고 결정하기 어렵더라도, 그 뜻을 깨닫게 하시고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바르게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아멘.

사역을 위임하는데 더욱 힘내자

2021-5-18

성경묵상의 나눔: 출18:13-27

"모세가 (이드로의 말대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삼으매(25절)..."

다양한 사람과 함께 일하며 사는 것이 목회자요 지도자요 그리스도인들이다. 돌아보면 함께 일하며 보람되고 행복했던 사람들이 있다. 또 평범한 만남들도 있었고, 지금은 잊었지만 가슴아픈 만남도 있었던 것 같다. 나의 대한 저들의 생각도 저마다 다르겠으나 우리 모두의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자.

그리고 복음을 전함에 촛점을 맞춰 맡겨주신 사역을 끝까지 감당하자. 그 일이 바로 다른 이들에게 사역을 위임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과 함께 일하고, 사역을 공유하는 것은 멋진 일이겠으나, 회사가 아닌 자발적인 신앙공동체에서는 끈질긴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 되새기지만 자손에게, 주위 형제 자매에게 사역을 끝까지 나누며 위임하는 것이 우리 할일이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지만 주님도 우리에게 그 사역을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으시고 위임해 주신다. 여전히 나를 믿어주시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사람에 대해 실망하지 말자. 성령을 좇아 사람들의 긍정적 가능성을 언 제나 보자. 때로는 속아주며 당해주며 포기하지 말자. 그것이 말씀과 주의 사랑, 성령과 중생 앞으로 저들을 밀어주고 위임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모세가 이드로의 컨설팅에 따라 천부장에서 십부장까지 지도자를 세운다. 모세는 예수의 예표다. 예수님이 우리를 십부장으로 세우셨다. 모세 앞에서와 다른 것은 "내 양을 치라"하시며 우리에게 다른 사역자를 세울 위임까지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역에 대한 마음을 함께 가다듬자.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결코 적은 일이 아니다. "주님, 평생 열 명을 일군으로 세우고 올해도 한명을 온전히 인도하고자 섬기며 위임하는 십부장이 되게 하소서!"

언제나, 끝까지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

2021-5-14

성경묵상의 나눔: 출16:21-36

주님은 만나를 주시고, 안식일을 명하시면서 “후손 대대를 위하여 그 만나를 담아 간수하라(32절)”고 하신다. 만나가 뭐길래.. 남아있기나 하려나... 그 만나와 안식일(주일)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의 돌봄이시다. 그리고 광야의 시련, 우리의 고난을 이길 힘이 여기에 있다.

주님은 매일 우리의 삶의 시작을 위해(21절) 준비해 주시는 분이다. 그 사랑이 만나에 담겨있다. 매일의 삶을 주님께 감사하며 살아가자.

주님은 매주일(29절) 우리의 삶의 풍성을 위해 준비해 주시는 분이다. 그 사랑이 갑절의 만나와 안식일에 담겨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함께 풍성함 속에 축제가 되는 주일이 되어 살아가자.

주님은 매년을 지나 40년이 지나도(35절) 우리의 삶이 영원 속에 안착하도록 잊지않고 준비해 주시는 분이다. 그 사랑이 사십년 한결같은 만나와 가나안의 양식에 담겨있다. 저 본향 천국에 주와 함께 하는 영원한 안식을 향해 구원을 이루며 살아가자.

매일은 그저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의 사랑으로 뛰어드는 날이다.
매주일은 지키는 것이 아니다. 내 영혼이 소생하도록, 그 분의 사랑 가운데 예배로 기뻐하는 날이다.
40년, 또 40년의 내 인생은 그것으로 끝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맛본 기쁨으로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의 나라, 천국으로 예수님과 함께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아멘! 아멘!

정말 그 때가 좋았을까?

2021-5-12

성경묵상의 나눔: 출16:1-10

과거를 반추하며 삶의 교훈을 삼고 감사하며 사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그러나 과거에 사로잡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다. 오늘의 삶의 현장이 어려우면 자연히 과거를 생각하게 되나, 결코 과거에 빠져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혹시 나 자신도, “내가 여기에 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런 만남이 없었더라면...”하면서 현실은 등지고 과거의 후회와 오늘의 원망으로 살고 있지나 않은지...

광야에서 배가 고픈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원망하며 말한다. “ 애굽에 있을 때는 고기도 먹고 떡도 배불리 먹었는데...” 그 때가 좋았는데 왜 우리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어 지금 이 꼴이 무었이냐고 하는 것이다. 목적지는 눈에 안보이고, 광야에서의 궁핍이 힘이 들기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애굽에서 배불리 먹은 것도 아니고 그 때가 결코 좋았던 것도 아니고 무슨 미래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들 마음 깊은 속에 있는 것은 선택된 백성, 약속의 땅과 하나님의 영광된 도구로 부르심을 이제는 잊어버리고, 그저 노예로 살아가는 노예근성이 배어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때가 아니라 지금, 이 때를 보며 나아가야 한다.
이 때는 하나님의 고기와 만나가 광야를 통과하며 비처럼 내리는 때이다(4절). 그러나 고기와 떡이 주제가 아니고,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언제나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이 때는 하나님과 함께 그 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때이다.

이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때이다. 만나를 주시면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 율법을 준행하나 보리라(4b)”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깨닫지 못할지라도, 걷는 지난 애굽도, 지금의 광야도, 가야 할 가나안도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된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내가 그 말씀을 따라 선택과 순종의 길을 가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요 최고의 길인 것이다.

그러기에 이제는 나의 불평과 원망을 다 버리자. 불평과 남을 판단하는 것에 중독되지 말자. 비록 광야같은 지금의 환경이라도 영의 눈을 뜨면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는 것이다(10절). 분명 우리 모두가 지금이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다. 매일 주시는 호흡과 생명, 일용할 양식과 건강, 사람들과의 만남과 사명 모두가 내게 주신 일용할 만나이다. 신비하고도 놀라운, 감사하고 소중한 만나의 감동이 매일 있기를 소망한다.

방향을 잃을 때 주님의 사랑의 배려를 느끼자

2021-5-06

성경묵상의 나눔: 출13:11-22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되돌아갈까 하셨음이라(17절)”

이제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을 향한 진군...
그 곳은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이 잘해서 갈 곳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하실 것이다. 가나안까지의 도착은 주를 신뢰함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이 일에 주님의 마음은 견고하시고 또한 깊은 배려가 있으시다.

행여 죄악된 애굽으로 이 백성이 돌아 갈까봐, 내가 구속한 내 자녀임을 첫태생과 어린양 대속(11-13)으로 계속 일깨우며 기억하라(14) 하신다. 갑자기 맨붕상태가 올 때가 있는가? 내가 누구인가? 내가 이것밖에 안되나 여겨지게 될 때 새힘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받은 복된 인생임을 상기하는 것이다.

행여 죄악된 애굽으로 이 백성이 돌아 갈까봐, 주님이 동행하리라 하신다.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이제 블레셋 땅을 우회하게 하시고(17절), 때로는 홍해 광야길로 인도하신다(18절). 지금 우리도 지도따라 길따라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지도이시고, 주님이 길이시다. 그 분과 함께 있다면 결국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그것도 최적의 시간에.

행여 죄악된 애굽으로 이 백성이 돌아 갈까봐, 주님이 앞장 서리라 하신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시작과 끝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휴식과 새로운 출발을 인도하셨다. 지금도 주님은 눈으로 구름기둥같은 시대의 징조를 보여주시고, 마음의 눈으로 불기둥같은 시대의 경고도 주신다. 구름기둥같은 말씀으로 길을 제시해주시고, 불기둥같은 성령의 임재와 조명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내 앞에 무엇이 있을 줄 모르나 두려워말자. 물러서지는 말자. 나의 약함도 아시고, 나의 필요도 아시고, 나의 간구도 아시는 하나님은 내 삶에 배려하시는 분이다. 오늘도 주님이 배려하시는 구름기둥의 한 조각과 불기둥의 짧은 반짝임을 보자. 그것으로 오늘을 끝까지 가고 이겨내기에 충분한 것이다.

드디어 평생 패키지 여행을 떠나게 되다

2021-5-04

성경묵상의 나눔: 출12:37-51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여행을 가고 싶지만 참는 사람이 많을 줄 안다. 상태가 지금보다 더 호전되면 국내 국외로 여행을 다녀오려 할 것이고, 주위에서 바람이 불면 너도 나도 여행러쉬가 일어나리라 예상이 된다.

드디어 노예로 매어있던 60만의 이스라엘백성들이 자유를 얻고 약속된 땅을 향하여 남은 평생 패키지여행을 출발한다. 사람들중에 하나님의 약속과 가나안의 성취를 알고 있었을까? 지금의 출발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대부분이 들뜬 마음으로 따라나선 출애굽이 아니었을까? 앞에 놓인 경험못한 광야를 예상이나 했을까?

나의 삶도 매일 떠나는 삶이라 생각이 든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의 삶을 향해 떠나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매 순간 찾아가고 해내고자 떠나는 삶이다. 천국을 향해 가는 이른바 천로역정이 내가 떠나고 가는 길이다.

하나님이 인도하셨던 나의 삶인 것을 고백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37절)”- 사람들은 지금 천직이라 여기며 아침부터 밤이 되도록 일만 하던 익숙한 장소를 편치않는 자유와 불안을 안고 떠나고 있다. 그러나 430년의 세월에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약속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거침없이 저들을 이끌어 내시고 앞장 서신다. 잊지말자. 내 모든 지혜, 지식, 상식, 엄청난 끈기로도 하나님의 약속보다 위에 있지 못하고 오래가지는 못한다. 모든 것을 그 분이 하셨다.

하나님이 나의 미지의 앞길을 인도하실 것을 고백한다. “그 날에 여호와 께서...인도하여 내셨더라(50절)” - 이제 언제 가나안에 도착할지, 통과해야 할 광야가 어떤 곳인지, 60만의 행로와 숙식과 마실 물이 가능한지, 어떤 대적이 가로막고 있는지 잘 모른다. 전혀 짐작할 수가 없다.
그러나 유월절의 지체않는, 준비하는 모든 의식과 결단의 떠남은 그저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내일 일을 모르나 하루하루가 주가 인도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나갈 뿐이다. 앞으로 경험케 될 외적 저항, 내적 불평이 있더라도 중요한 것은 함께 떠났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주님이 하실 것이다.

우리도 주님의 부르심에 결단한 떠난 나의 인생이 아니던가! 그 분이 하실 것이다. 그러니 내 앞 일에 대해 염려, 두려움으로 채우지 말자. 지금도 인도하시는 하나님 계획의 물살에 내 전부를 가만히 띄우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따르자. 새벽에 마음에 주신 욥의 선포가 나의 고백이 된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다(욥23:10)” 아멘.

나를 덮은 어둠에서 벗어나라

2021-4-29

성경묵상의 나눔: 출10:21-29

애굽의 떨어지는 아홉번째 재앙은 삼일동안 빛이 없는 흑암의 재앙이다. 우리가 흑암이라 생각하는 어둠에는 그래도 빛의 요소가 들어 있기에 이런 더듬어야 움직일 수 있는 이런 흑암의 재앙은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은 단지 삼일동안 눈감고 지내는 때가 아니라, 과학, 천문학, 사람의 지혜도 무력하게 되고, 세상의 종말을 직면하는 한치 앞도 안보이는 빛없는 어둠이다. 잠깐 태양과 하늘 전체가 짙은 구름에 가리워도 두려운데, 얼마나 두려운 재앙이었겠는가! 이런 어둠은 지금도 사람의 마음을 덮으며 퍼져간다. 나도 모르게 빠져든 이런 어둠 속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한다.

애굽사람들이 겪은 온갖 두려움의 어둠에서 벗어나자. 우리가 눈만 뜨면 얼마나 많은 걱정을 하면서 살아가는가? 지금 걱정을 넘어서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 무엇인가? 삼일의 흑암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맡기라.

바로가 겪는 물질 염려와 욕심의 어둠에서 벗어나자. “너희의 양과 소는 두고 가라(24절)” - 자기의 재물의 염려와 탐심이 마침내 온 애굽의 장자들을 죽게하고, 온 군대가 물 속에서 영원한 어둠의 죽음을 당한다. 우리도 돌아보자. 지금보다 가난할 때 그대는 진정 불행했는가? 아니다. 안전과 절약, 투자와 성공 속에 어둡게 감추어진 나의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고, 영적 삶이 살아나야 한다.

모세의 선포처럼 우리도 영혼구원의 사명을 덮은 어둠을 벗겨내자. “우리가 함께 하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26절)” - 양 한마리도 애굽 땅, 어둠 속에 남겨둘 수 없다고 모세는 선포한다. “한 영혼도 죄악된 세상에 남길 수 없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고, 진실한 제자들의 마음이다. 자기도 모르게 덮어온 세상 눈치, 핍박 두려움, 나태함의 어둠들을 벗겨내야 한다.

우리 모두 어둠들을 이겨내자! 어둠과 빛 사이에서 쳐든 모세의 지팡이의 끝은 결국 예수를 가르킨다. 어둠은 빛 자체이신 예수를 모실 때에 결국 이겨내게 된다. “악인의 길은 어둠같아서 거쳐 넘어져도 모른다(잠4:19)”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내가 세상의 빛이라(요8:12)”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골1:13)” ... 아멘.

지금이 마지막 경고의 때이다!

2021-4-28

성경묵상의 나눔: 출10:12-20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 내린 여덟번 재앙이 메뚜기 떼 재앙이다. 온 애굽에 먹을만한 모든 것을 메뚜기 떼가 먹어버린다.
사람이 큰 어려움도 여러번 당하다 보면 둔감해질 수 있다. 이 또한 지나가겠지, 더 큰 일이 또 있을까 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메뚜기 재앙에는 여전히 완강하게 거부한다면, 주신 마지막의 기회를 놓친다면, 앞으로 남은 더 무서운 재앙들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온 땅에 메뚜기가 덮어 어둡게 됨으로(15절) 다음의 흑암의 재앙을 예고하고 있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17절)며 호소하는 바로의 거짓 회개는 닥쳐올 장자의 죽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동풍을 따라 날라온 메뚜기 떼가 서풍에 쓸려 홍해에 장사됨은(19절)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홍해건넘과 애굽의 군대의 홍해에서의 장사됨을 예고하고 있다. 바로가 이 일들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메뚜기 떼의 재앙 후에 이스라엘을 내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왕은 여전히 완고하였고, 재앙을 막고, 이제 어려움을 회복할 기회를 놓치고 만다.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바로왕처럼 완고하고 둔한 것이 내 인생이고,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이제 많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대한 동풍을 불어 문제도 주시고, 강력한 서풍을 불어 문제도 날려버리듯, 지금 우리에게 재앙도 있고, 마지막의 기회도 있다.

지금 내 삶 속에 메뚜기떼 날개 소리들이 윙윙하듯이 내 주위가 소란스럽고, 문제가 많고, 어려움이 있는가? 그 소동 속에서도 호세아처럼 하나님이 메세지를 똑똑히 듣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주실 것임이라...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호6:1-2절)”

개구리 수난사

2021-4-21

성경묵상의 나눔: 출8:1-15

어릴 때 강아지풀로 개구리를 잡아본 적이 있다. 강아지풀이나 피의 긴 줄기를 길게 잘라 열매의 마지막부분만 남겨놓고 낚시대처럼 개구리 앞에 가져가 약하게 흔드는 것이다. 날파리인 줄 알고 개구리가 혀를 길게 뻗어 물면 거친 열매 표면과 개구리의 끈적한 혀가 달라붙어 한동안 매달려 있게 된다. 개구리를 어찌할 수는 없고 결국 놓아주지만, 잡는 재미가 있기에 친구따라 해본 적이 있다. (개구리야 미안하다!)

내게 개구리가 재미있고 친숙한 추억의 한 부분이지만, 이집트에서는 개구리를 헤케트라는 사람몸에 머리털 달린 개구리머리를 만들어, 우상으로 삼아 숭배하였다. 장마 후에 많아지는 개구리 떼를 보면서 다산과 풍요의 신으로 섬겼다고 한다.

하나님이 피재앙이후, 두번째의 재앙으로 애굽을 개구리 천지로 만들어 지겹게 만든 것은 저들의 우상을 깨뜨리는 작업이셨다.
본문의 재앙은 열가지가 계속되지만, 열이라는 숫자가 의미있기보다 내가 하나님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깨달아진다. 내가 하나님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이 지금있다면 아직 내게 우상이 남아있는 것임을 자각해야 한다.

우리도 재앙을 당할 때 있다. 그렇게 당하는 재앙을 바로처럼 숨 쉴만 하면 다시 완강해지는(15절), 지금 상황을 모면하는 기회를 삼아서는 안된다.
바로왕처럼 “정말 저들이 믿는 하나님이 한 것일까?” 의심을 담아 “내일 개구리를 치워달라면 그렇게 될까(10절), 우연이 아닐까?” 하듯 하나님 대면하기를 두려워 해서도 안된다.

나의 신앙과 고백은 “지금 내 우상을 치워주세요. 주님만이 나에게 소중한 전부입니다” 라는 고백이 되게 하자.
사람들은 절대 천한 것이나, 무의미한 것을 우상으로 삼지 않는다. 가뭄 속에 허덕이다가 비가 오고 물이 풍성해지면 울어대는 개구리가 얼마나 고맙고 귀했을까? 그러므로 우상을 삼은 것들이 문제가 아니다. 피조물을 우상으로 대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망각한 인생들이 문제일 뿐이다. 다르게 말하면 개구리 재앙은 하나님을 떠나고, 불순종하는 인생들의 완강함으로 인해 희생당한 개구리들의 수난사이다.

나에게는 몇가지 재앙이 남아있을까? 지금의 재앙같은 연단으로 이제는 온전히 주께 돌아왔는가? 깊게 경험하는 내 인생의 두번째 재앙으로 이제는 완강함을 꺽고 주께 온전히 돌아왔는가? 아니면 아직도 우상에 끌려가고 있는가? 팔짝 뛰듯 눈에 보이고, 개골개골하듯 귀에 솔깃 들리는 우상의 소재들이 주위에 많다.

그 우상화를 이겨내고자,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한가지 고백이라 깨닫는다.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그 속에서 보고, 인정하는 것이다. 개구리... 하나님이 만드신 곤충, 목석 우상들... 하나님이 만드신 돌과 나무들, 내 속의 재화...하나님이 허락하신 도구들, 인생....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형제자매들, 권력...하나님이 맡기신 섬김의 기회!.

강아지풀로 개구리를 잡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왕이신 하나님, 모든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과 그 아들예수를 믿고 사는 신앙의 길 하나로 온갖 우상꺼리를 막고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소원한다.

내가 너를 신같이 되게 하였은즉

2021-4-19

성경묵상의 나눔: 출7:1-13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다. “내가 너를 신같게 하였다(1절)”
이 말씀은 분명 하나님의 영적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게 하신 말씀이기도 하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너희는 ...온 족속을 제자삼고, 세례주고, 내가 명한 것을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마28장)”
내가 가는 길이 제자로서 섬김의 길이지만, 그 이전에 신같이 되는 영적 권세가 없어서는 안되겠다.
마치 부드러움 속에 강함을 가져야 되듯이 말이다.

“모세와 아론이 명령하신대로 행하였더라(6절)” - 말씀의 순종이 영적 권세이다. 애시당초 나는 약할 뿐이다. 다만 그 분의 말씀이 나를 주장하셨고, 앞으로도 약속과 성취를 이루어가시는 그 말씀을 알고, 순종하고, 끝까지 지켜나가는 삶 속에 주신 것이, 나타나는 것이 영적 권세이다.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 모세는 80세, 아론은 83세였더라(7절)” - 영적 나눔과 배가가 영적 권세이다. 아무리 큰 은혜라도 나만 받아서는 본전치기이다. 한달란트 인생이라는 것이다. 본문에는 모세와 아론이 함께 나온다. 그것이 80세, 83세의 한계를 이기게 함을 본다. 누가 바로에게 말하나? 모세를 거쳐 아론이다. 누가 지팡이를 던지나? 모세의 손을 거쳐 아론이다. 약한 우리가 하나되고, 성령의 임재가 오고갈 때 거기에 영적 핵융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초대교회가 그래서 복음의 원자로가 되었다.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키니라(12절)” - 나의 지팡이가 영적 권세이다. 손으로 잡고 걷는 지팡이도 있겠으나 마음으로 짚고 가는 지팡이도 있다고 생각한다. 모세의 지팡이나, 다윗의 물매나, 바울의 예수 흔적은 이제 순간순간 나와 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믿는 마음의 지팡이이다. 우리 모두 믿음으로 바로왕같은 세상 속에 믿음의 지팡이를 의지하고 대면하자.
이런 질문을 이 아침에 자문해 본다. “참으로 부드럽고 착하려는 너... 영적권세는 가졌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구원길에 동참하자

2021-4-06

성경묵상의 나눔: 출1:15-22

바로의 살해명령에도 산파들은 히브리산모들이 아들을 낳아도 그 아이를 죽이지 않고 살려준다. 애굽여자들보다 건강해서 자신들이 도착 전에 벌써 낳는다고 하면서.

바로왕 앞에서 노예신분의 산파들이 서로가 한마음이 되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이미 생명을 내놓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였기에 행한 행동임을 아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의 집안들을 번성케 하신다. 그들이 누린 가장 큰 은혜는 그들의 손길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계속 흘러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그 분의 전능하심을 믿고 그 분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의 생사화복의 주관자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그 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예수를 통한 인류구원계획은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통해 실현되었다.

성경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고백과 수식어가 달린 사람들이 많다.
아브라함 -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줄을 이제 아노라"
요셉- (다시 만난 형제들 앞에서)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라"
다윗 -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습니다"
시므온, 옥합의 마리아, 아리마대 요셉, 고넬료...
계시록의 남은 자들 -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
그리고 재림의 주님을 경외함으로 기다리는 우리 모두들이다.
바로같은 권력 앞에서,
산파처럼 일하는 일터에서도,
산모처럼 고통하며 아파하는 자들에게도,
두 손 쳐들고 그저 울 수밖에 없는 갓난아이같은 도움을 찾는 사람들 앞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몸과 마음, 희생과 생명조차 나누며, 나도 지금도 저 편을 향해 가시는 예수의 구원에 동참하고자 한다.

애굽은 출애굽할 곳이다

2021-4-05

성경묵상의 나눔: 출1:1-14

“요셉은 죽고...이스라엘은 번성하고...새 (애굽)왕이 일어나...학대받을 수록 번성하니...”

오늘의 애굽은 예수없는 삶을 사는 인생이다. 인생의 고초가 끊임없다.
오늘의 가나안은 예수와 동행하는 삶이요 천국이다. 거기가 우리의 진정한 정착지이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천배나 가나안을 회복을 원하신다.

의지하던 요셉은 죽었으나, 내가 믿는 예수는 지금도 살아계시고,
애굽의 새왕처럼 심한 차별로 삶의 자리에서 나와 내 믿음을 밀어내려 하나, 우리는 천국 소유자로 의연히 대처해야 한다.
학대와 고난이 삶의 현장에 집요하게 닥치나, 내가 예수 안에, 그 분의 영으로 다스림을 받는다면,
나의 신앙은 더욱 단단해지고 오히려 번성할 뿐이다.

애굽에서처럼 내가 겪는 고난은 출애굽으로 풀어야 한다. 애굽같은 세상에서 내가 새로운 요셉이 되고, 우리의 자손들에게 신앙의 번성까지 물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주와 동행하며 천국까지, “출애굽- 입천국”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잊지않고 늘 정결한 신부처럼 준비하는 삶으로 이겨내야 한다.
문득 이 말씀을 생각나게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예수님을 따라 우리가 겪어야할 고통

2021-4-01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 27:27-44

우리는 나를 위해 대신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그 사랑속에 담긴 구원을 믿음으로 꼭 붙들자. 그때에 비로서 그 분의 가지셨던 내 고통의 몫이 깨끗이 씻어지시는 것이다.
그리고 주가 당하신 등허리의 채찍질과 가시관의 고통과 사람들에게 당하시는 온갖 조롱도 기꺼이 받으며 따라가자.

다른 이들을 위해 섬겨주고 도와준 내 등허리에 배신으로 채찍질을 안겨주어도, 주를 바라보고 결국 용서하며 살아가리라.

온갖 세상 유혹과 세속 문화와 타락의 영으로 엮은 관으로 내 머리를 덮어눌러도, 성령이 거하시는 깨끗한 생각만 머리에 담아 주와 동행하며 살아 가리라.

내게 쏟아내는 조롱와 무시함과 말의 폭력조차 불끈하지 아니하고, 십자가의 용서와 날 다 아시는 주님과, 하늘의 안식을 누리며 눈녹듯이 흘려보내며, 여전히 용서하며 사랑하며 주의 구원을 나누며 살아가리라.

주여, 십자가 주위에 있는 아픔들을 나도 이긴 후에 주시는 부활과 영광을 지금도 순간순간 체험하며 살게 하소서! 아멘.

가룟 유다의 경고

2021-3-30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 27:1-10

예수님을 팔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룟 유다...
다들 실패의 경험을 맛보는 제자들이지만, 유다의 경우는 비참함 그 자체였다.
독생자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이루어가야 하나, 예수님을 팔고, 그 일에 나서는 것은 순전히 자기의 의지와 선택이었다.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나의 작은 물질의 유혹부터 깨어 물리치자. 돈궤를 맡았던 유다의 실수는 필경 작은 동전 한닢을 제 주머니에 넣었던 것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내 삶의 부정직이 신앙의 걸림돌이 되고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되듯이 커져 가고 모든 것이 무너질 때가 올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구원받아 내 삶 속에 예수가 살아있게 하고, 내 마음에 예수의 사랑이 살아있기를 사모한다. 가룟 유다의 실패는 진정 죄사함과 구원의 주이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얄팍한 뉘우침과 목매어 죽음은 구원의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자도 실수하나 용서의 은혜를 여전히 알고, 진정한 회개로 주께로 언제든지 나아가는 것이다.

미혹의 영, 사단의 궤계가 틈타지 못하게 깨어있자. 유다의 비극은 사단에게 마음을 내어준 것이었다. 방심해서 허용하며, 둔해져서 끌어들이면 그 다음에 통제가 어려운 것이 사단의 역사이다. 세상 문화 속의 사단의 궤계는 교묘하고 광범위하다.

오늘도 말씀을 내 뼈속까지 스며들게 하자. 기도의 대화가 주님과 더욱 밀착되게 하자. 교회와 예배, 우리의 모임들을 세상 쾌락과 나태때문에 빼앗기지 말자. 사단의 영이 아닌 예수의 영, 성령을 쫓아 살아가자.

가룟 유다같은 나 자신이지만, 난 목매어 죽은 인생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에 매여 죽고 다시 산 인생이다. 이제 예수를 내 구주로 모시고, 용서받은 자로, 새 삶을 살며 물질과 세상이 전부인줄 착각하며 목매어 살아가는 세상사람들을 구출하며 살기를 사모한다.

제대로 주를 따라 가려면

2021-3-25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 26:17-35

오늘 말씀은 유월절준비와 만찬, 그리고 당하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언급, 가룟 유다의 배신, 베드로와 제자들의 죽기까지 따르겠다는 당장은 못 이룰 결심과, 베드로의 세번 예수를 자기는 모른다는 가슴아픈 부정에 대한 말씀이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떠오른 말씀이 스가랴 4:6, "힘으로 되지 않고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였다.

마음은 죽기까지 따르려했으나 순식간에 요동치고 변하는 마음을 어찌하겠는가? 후에 제대로 따라갈 베드로와 제자들을 생각하며 오늘 말씀을 붙든다.

주의 보혈에 적셔질 때 예수를 제대로 따르게 된다(28절)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니라"

주의 부활을 입을 때 예수를 제대로 따르게 된다. (32절) "내가 살아난 뒤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다." 제자들이 순교하기까지 주를 따른 것은 부활의 주, 부활의 소망이었다.

성령에 사로잡힐 때에 예수를 제대로 따르게 된다. (29절) "하늘나라에서 너희와 새 것을 마시기 전까지는 포도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먹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성령의 술로 취하게 하셨다.

내게 맡겨주신 달란트들

2021-3-22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 25:14-30

주님, 내게 주신 모든 것, 내 주변에 두신 모든 것, 환경과 가족과 이웃조차 내게 주신 달란트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무엇보다 남의 것에 두리번 거리지 않고, 맡겨주신 달란트에 감사하며 내 삶이 주님의 선물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내게 떠오르는 손익의 계산 속에 자만도, 위축도 말게 하시고, 숫자보다 큰 최선의 순종을 보시는 주님을 잊지 않게 하소서.

그래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기쁨의 결산이 되게 하시고,
주님 앞을 향해 걸어가는 지금의 순간순간도 기쁨의 결산들이 되게 하소서.

주님 앞에 서는 그 날, 남긴 것, 손해본 것 말씀드리려할 때, 내 입을 막으시고, 품에 안으시며 "내가 안다. 그만큼 열심히 살고, 나누며 살았으면 되었어!"하실 주님을 항상 잊지 않게 하소서. 아멘.

그 때에, 그 날에...

2021-3-19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 24:15-28

예수님은 세상 속의 닥칠 창세이래 큰 환난의 때(21절)를 말씀하신다. 심지어 성전까지 임할 파괴를 말씀하신다. 이미 안티오쿠스 4세 때(167BC)에 성전모독이 있었고, 곧 후에 닥칠 성전파괴(70AD)의 비극도 알고 계셨다. 그러나 큰 환난은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그리스도들이 미혹하고 힘들게 하는, 우리 모두가 언젠가 맞아야 할 환난의 때이기도 하다. 이런 환난 앞에서 "택함을 받은 (22절)" 내가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된다.

천국거주자의 눈으로 내가 머무는 세상을 돌아보자. 천국의 분명한 소망을 매일 고백하자. 성전도, 집안이나 지붕도, 심지어 가족생활조차(15-19절) 이 땅의 삶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매순간 깨닫고 살아가자.

주님의 재림의 시계를 보면서 살아가자. 순식간에 닥칠 무서운 재난, 그리고 번개처럼 임하실(27) 그리스도이신 인자의 오심이 내 앞에 있다. 깨어있는 영적 생활을 하면서 결코 나태하고 안일한 생활도 세월을 보내지 말자.

예수의 복음과 성경의 말씀은 거짓 선지자와 그리스도의 큰 표적과 기사(24)보다 내 안에서 언제나 더 커야 한다. 그래서 세상의 기적 앞에서 더 크신 예수의 복음을 놓치지 말고, 온갖 미혹 앞에서 말씀 속에 징조를 놓치지 말고, 모두가 알아보게 오실 주의 재림을 맞이하자.

무엇보다 날들을 감하시며 택하신 자(22절)를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고 늘 평안하자. 천지가 요동하고 큰 환난이 닥쳐도 우린 피난처인 주 안에 살아가는 주의 자녀이다. 나는 영원토록 그 분이 책임지시는 인생임을 예수의 이름으로 오늘도 선포한다.

속지 않도록 하라

2021-3-17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 24:1-14

"(성전이) 돌 하나 남지않고 무너지리라...세상 끝날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하라. 재난의 시작이 일어나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오늘 말씀에서, 주님이 참 신앙을 흐리는 교묘한 이 시대 속에서 속지말라 하신다.
결국 무너질 성전의 미석이나 대리석, 그 아름다움같은 세상 영광에 속지말고(1-2절), 우리를 살리실 오직 십자가의 보혈을 보라 하신다.

사람의 인기나 공포심이나 미혹함으로 나타나는 거짓 그리스도에 속지말고 (4절) 오직 예수와 그의 영으로 재림의 때를 분별하라 하신다.

혹독한 핍박 앞에 신앙을 못 지켜낸다 낙심에 속지말고(10-13) 끝까지 견디며 구원을 이루라고 하신다.

주 다시 오실 재림은 없다는 세상 바벨론 문화에 속지말고 내 앞에 주어진 한 사람을, 마지막 민족삼아 복음을 전파하며(14) 주의 재림을 맞으라 하신다.

부활이 없는 것처럼 사는 그리스도인

2021-3-12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 22:23-32

부활이 없다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한다. 일곱형제와 그들이 맏이부터 상속자없이 죽어 차례대로 그들과 일곱번 결혼한 여인이 부활 후에 누구랑 살 것이냐 묻는다.

부활의 능력은 없고 부활이 조크의 주제나 되어 사는 사두개인들처럼 우리도 부활이 없는 것처럼 살아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부활 때에는 ... 천사들과 같으니라(30절)" - 죽음을 이기고 넘어서는 영광된 부활이 우리에게 있음을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그리고 첫 열매로 보여주셨다. "부활때에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라.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말한다면...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않았느냐(31-32)" - 저들이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과 나와 함께 살아있음 말씀하신다. 우리는 죽음을 지나 예수와 함께 산 자의 주님 곁에 부활하여 서게 됨을 믿으라.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오해하였다(29)" -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성경을 보아라. 그 말씀 속에 예수의 오심, 십자가, 부활, 재림, 영생의 약속과 증거와 성취가 다 들어있다. '창세기'에 아브라함이 부활을 믿고 지금도 부활의 영과 몸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으며, '요한 계시록'에 사도요한이 "하나님과 어린 양이 보좌 가운데 있고, 우리가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계22:3-4)" 라며 감격하고 있다.

부활이 없는 것처럼 살지 말자. 부활의 확신이 없는 성도의 삶과 죽음은 초라해진다. 부활은 성도의 기다림과 성취요, 삶의 능력이요, 지금부터 영원까지 누리고 살아야 할 우리의 영광이다.

포도원같은 내 삶의 현장

2021-3-09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 21: 33-46

배은망덕이란 말은 베푼 은혜를 배반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을 말한다. 오늘 본문의 농부들의 모습이 그러하다. 모든 것을 시설을 갖춰주고, 분명 세를 주었으면 갚을 것을 갚아야 하는데, 오히려 보낸 종들을 학대하고 죽이고, 심지어 주인의 아들까지 죽이며 유산까지 가로채려 한다.

이 비유가 유대 지도자들의 악한 의도들을 지적하는 것임에 분명하나, 우리를 향한 명백한 깨우침이 있다.

포도원같은 내 삶의 현장도 주님이 세(Rent)로 주신 것이다. 주님이 세로 주신 조건이 너무 파격적이어서 우리는 내 것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하다. 주인이 누구인지 별로 따지지도 않으신다. 그러나 내 마음대로 살아도 안돼고,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주인은 계시고 언젠가는 내 앞에 갑자기 찾아 오신다. 그러므로 오늘 주인을 맞을 준비는 한가지이다. "이제까지 주인의 것으로 인정하며 살아왔습니다"

포도원같은 내 삶의 현장에 주님은 수시로 동참하기를 원하신다. 포도원의 농부들에게는 종을 보냈으나 우리에게는 지금도 주님이 직접 오신다. 우리에게는 한 해의 한 순간인 소출 때만이 아니라, 파종의 때도, 땀흘리는 경작의 때도, 가뭄과 홍수와 해충과 잡초와의 싸움에도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나와 함께 일하시는 아주 경험많은 동지이시다. 종을 보내는 것 이상으로 수시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모시고 의지하고 살아가자.

포도원같은 내 삶의 현장은 이제 내가 죽고 주님이 살아계신 곳이다. 몇번이고 죽어야할 악한 농부같은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날 사랑하고 용서하셨기에, 이제는 주만 위해 살아갈 자리이다.

오늘도 살아가야 할 나의 포도원...악한 농부와 같은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는 주위사람들을 나도 사랑으로 품고, 다시 오실 주인을 일깨워주며, 또 다시 주인의 아들이신 예수를 못박지 않도록 복음의 사랑, 복음의 능력, 복음의 기적을 위해 기도하며 포도원의 증인으로 살아가고자 다짐한다.

내가 마시려는 그 잔을 마실 수 있겠니?

2021-3-05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20:17-24

십자가를 앞에 두신 예수님은 여러가지로 힘드셨겠지만, 제일 힘든 것은 영적으로 둔감한 제자들을 보실 때였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야고보와 요한의 마음을 담은 그 어머니의 부탁이다. 하늘나라에서 자식들을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분개하는 다른 제자들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그들이 결국 가는 마지막의 영광된 모습을 이미 계획하시고 알고 계셨다. 그리고 우리가 가는 길도 그렇게 알아주실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좌우편의 영광된 삶은 십자가의 삶을 통과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나의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22절)?" 십자가의 보혈로 주시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고난의 잔을 우리도 기꺼이 마시자.

잊지말고 살자. 하나님 나라에서도, 이 땅에서도 주님이 영광을 나누시는 사람은, 크고 귀하게 보시는 사람은 섬기는 자이다.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이고 으뜸이 되는 자는 종이 되는 자이다(26-27절)." 오늘은 누구를, 무엇을 기꺼이 섬길까?

제자들이 철들어 제대로 주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 것은 성령을 체험하고, 성령과 동행하면서부터이다.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님은 우리의 영의 눈을 뜨게 하시는 분이시다. "너희 소원이 무엇이냐(33절)?" 물으시는 주님 앞에, "내 영의 눈을 뜨게 하시고, 살아계신 영광의 주를 보게 하소서. 주님이 앞서가신 사명의 길을 기꺼이 끝까지 보며 가게 하소서".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

2021-3-03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19:23-30

부자청년과의 대화와 그 청년이 떠나고 난 후에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부자가 천국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는 것이 더 쉽다" 그리고 놀라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26절)"고 하신다.

하나님은 부자도 가난하게, 가난한 자도 부하게 하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도 거듭나게, 부자도 거듭나게 하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도 사랑하시고 부유한 사람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으시기에 독생자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셨고, 예수를 믿는 자에게 새로 거듭난 인생을 살게 하신다. 다 하실 수 있기에 내 눈을 열어 욕심을 내려놓게 하시고, 나보다 없는 이들에게 긍휼과 나눔으로 살게 하신다. 그렇게 있는 자도, 없는 자도 서로를 위해 살도록 우리 마음 속에서 주님이 일하신다.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기에 베드로(27절)와 제자들, 그리고 우리들이 걸어가는 예수복음을 위한 희생과 헌신을 보고 계신다. 그리고 가난과 부의 차원이 아닌 영원한 풍성과 가쁨의 삶으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바늘귀는 예수님만큼 넓혀놓은 바늘귀이시다. "내(예수)가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백배의 상급과 영생을 얻으리라(29절)" 이 길을 오늘도 걸으며 예수님과 끝까지 가기를 원한다.
겨자씨만한 믿음은 주님 손에 내 모든 것을 올려드린 믿음이다. 겨자씨가 몸부림친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농부이신 주님이 시작부터 다 하시는 것이다.

나를 지금의 삶의 현장에 주님이 뿌리셨다. 땅속에서 숨통을 트이게 하는 분도, 자라게 하는 분도, 환경을 맞춰주시는 분도, 꽃피고 열매맺는 것도 그 분이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겨자씨의 믿음은 온전히 맡기는 신앙이다. 온전히 그 분에게 기대는 신앙이다. 봄이 오고 있다. 겨자씨와 온갖 씨와 함께 내 삶도 주님께 맡겨 움터나는 겨자씨의 신앙임을 아멘으로 고백하자.

겨자씨만한 믿음

2021-2-25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17:14-27

예수님은 우리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산도 움직인다 하신다. 더 큰 믿음은 나에게 없어도 겨자씨만한 믿음은 꼭 가져야겠다.

겨자씨만한 믿음은 누구나 가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을 의지하고 기대면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약속이다.

겨자씨만한 믿음은 내가 믿음으로 사느냐 믿음없이 사느냐 둘 중의 하나일뿐이라는 것이다. 아주 작아도 믿음은 주님이 개입하시는 믿음이고, 아무리 거창해도 믿음없는 일들은 주님과 상관이 없는 것이다.

겨자씨만한 믿음은 아무리 작아도, 보잘 것 없어도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죽은지 오래된 독수리와 살아있는 참새 중에 누가 보기가 좋을까? 예수 앞에서 회개에 촉촉하고, 성령의 생기로 살아있는 성도라면 겨자씨의 산 믿음으로 산을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겨자씨만한 믿음은 주님 손에 내 모든 것을 올려드린 믿음이다. 겨자씨가 몸부림친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농부이신 주님이 시작부터 다 하시는 것이다.

나를 지금의 삶의 현장에 주님이 뿌리셨다. 땅속에서 숨통을 트이게 하는 분도, 자라게 하는 분도, 환경을 맞춰주시는 분도, 꽃피고 열매맺는 것도 그 분이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겨자씨의 믿음은 온전히 맡기는 신앙이다. 온전히 그 분에게 기대는 신앙이다. 봄이 오고 있다. 겨자씨와 온갖 씨와 함께 내 삶도 주님께 맡겨 움터나는 겨자씨의 신앙임을 아멘으로 고백하자.

닥친 시험을 이기라

2021-2-22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16:1-12

본문은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 하늘의 표징을 보여달라고 한다. 예수님은 오직 요나의 표적같은 십자가를 통한 고난과 구원을 보여주리라고 하시며, 제자들에게 저들의 누룩같은 덫, 시험을 조심하라 하신다. 이런 시험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다가온다.

시험당할 때에 이겨내라. "예수를 시험하느라고...(1절)" - 드러나 외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시험들은 핍박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과 함께 견디고 이겨내야 할 나의 시험들이 있다. 주님 이겨내게 하소서!

시험에 빠질 때에 깨어 벗어나라.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지 못하느냐? (3) - 시대적으로 침투하는 시험은 미혹이라 하겠다. 서서히 병들어가게 하고 말라가게 한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4)" 영적으로 악하고 음란으로 타락한 시대이나 수많은 사람이깨닫지 못한다. 주여 깨어 분별하며 벗어나게 하소서!

시험에 쫄지말고, 믿음을 회복하라. "믿음이 적구나! 오천명이 먹고도 남은 광주리들을 잊었느냐!...(8-10)" - 제자들 마음의 이런 시험은 믿음의 둔감이라는 시험이다. 믿음을 잃으면 온갖 시험이 닥쳐온다. 걱정이 태산이고, 시험도 아닌 것이 시험이 된다.

그러나 예수동행하심에 대한 믿음으로 온전히 맡기고, 전진하면 시험이 변하여 간증과 능력이 된다. 내 앞에 닥친 시험 - 그것이 핍박이든, 유혹이든, 갈등이든, 영적 메마름이든, 두려움이든 - 믿음의 아멘으로 이겨내기를 기도한다.

마음을 먼저 씻으라

2021-2-19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15:1-20

제자들이(결국 예수님이) 장로의 전통인 손씻는 청결의식을 소흘한 것을 책잡는 바리새인, 서기관들에게 주님은 마음부터 씻어 진실하게 살라고 하신다.

마음을 예수를 모신 변화된 삶으로 씻자. 예수가 내 안에 계시면 새로운 피조물의 삶이 시작된다. 율법의 의무가 사랑으로 변하고, 전통과 현실의 혼란스러움이 순전해지는 것이다.

마음을 신령과 진정의 예배로 씻자. 한시간 남짓의 예배 속에 날 정결케 할 모든 치료제가 들어있다. 이번 주일을 그런 기대감과 사모함이 믿음과 함께, 예배의 씻음에 내 몸과 영혼이 맑아지는 체험이 되게 하자.

마음을 은혜들로 선점하자. 채운대로 나오고, 심은대로 거두는 것이지 않은가.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증언(19)...." 이 모든 것들은 빈 마음에 세상 것이 들어와 자리잡아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니 은혜로 씻어내고, 채우자. 살아있는 성경말씀, 간절한 기도, 신령한 찬양, 예배자의 갈급함, 영혼사랑, 주를 향한 경배로 내 마음을 채우자.

코비드 19 바이러스의 예방을 위해 손을 부지런히 씻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우리 마음을 예수의 보혈로, 사모하는 예배로, 갈급함의 열정으로 씻어 어둔 세상을 바르게 걸어가겠다는 아멘의 고백도 영적 청결의 시작이다. 아멘.

베드로가 알게 된 능력

2021-2-18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14:22-36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제자들이 지금 겪는 풍랑이 예수님이 의도했는지는 몰라도 베드로에게는 여러가지의 체험을 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의 남은 평생의 체험들을 한꺼번에 경험하는 것 같다.
짧은 대화들이지만 그 속에 우리가 의지해야할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보게 된다.

말씀의 능력 - "저를 오라 명령해 주세요(28절)"
기도의 능력 - "주님, 살려주십시오(30)"
믿음의 능력 - "믿음이 적구나, 왜 의심했니?(31),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33)"
회개와 용서받음 후의 능력 - "(손을 내미시며) 함께 배에 오르시니(32)"
초자연적 (성령의) 능력 - "유령이다(26)!- 결국 "성령이 임하시니 권능을 받고 (행1:8)"
잊지말자. 우리도 예수님과 한 배에 탔다. 주의 능력으로만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음을 아멘으로 고백하며 살아가자.

길밭, 돌밭, 가시밭 속의 옥토

2021-2-12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13:1-17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돌짝밭에...가시덤불에.. 더러는 좋은 땅에..."

저 앞에 다가온 봄이 어른거린다.
농부된 주님의 마음은 벌써부터 밭 속을 헤집으며 꿈틀거리셨다.
벌써 봄을 알아차린 눈 속의 히야신스보다 주님의 마음은 더 빠르시다.

길밭처럼 흙기운 빠진 인생 뒤집어 생기주고
돌밭처럼 눌린 인생 들춰주어 꼿꼿이 서게하고
가시밭처럼 꼬인 인생 풀어주어 햇볕보며 제대로 자라게 하신다.
주님 마음과 손길에는 옥토 밖에 없으시다.

이제 주님의 마음은 부드러우시며 단호하시다.
"인생의 봄을 위해서 네 마음밭을 내게 맡기렴. 내가 생명의 씨앗을 심고, 자라고, 거두는 기쁨을 너와 함께 맛보겠다. 마이너스같은 네 인생을 이제는 100배의 풍성한 플러스 안생으로 바꾸어 주겠다."

이제 알게 된다. 옥토와 넘치는 열매는 내가 만드는 것도, 주위에서 찾는 것도 아니었다. 말씀의 씨앗과 기름진 땅은 바로 주님의 손이시다. 능숙한 그 분 손 안에 있고, 그 손을 꼭 잡고 가는 내 믿음의 손에 있다.

우리 주님에게 붙어있는 옥토가 되자. 풍성한 열매를 기대하며, "아멘"으로 봄을 향해 뛰어들자.

확실히 예수와 성령의 편입니까?

2021-2-10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12:22-37

"이 사람이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내가(예수)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참 고약하다. 예수님을 귀신에 사로잡힌 자로 몰아버리니. 그러나 우리도 그렇게 변질될 수 있다.

사람들이 성령의 하시는 일을 모르면, 바리새인처럼 귀신의 수준(27)에 머물러 인간적 술수와 온갖 두려움에 사로잡힐 뿐이다.

우리가 지금 성령을 모시고, 또 따르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에 성령을 거스르는(32)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예수를 모시고 주인삼아 함께 행하지 않으면(30a) 어느새 반대하는 자들의 자리에 앉게 되고, 예수와 함께 영혼의 추수로 모으지 않으면 헤집어 망치는 짓을 (30b) 하게 된다.

우린 신령한 영적 은혜에 깨어있자. 늦겨울, 다가오는 봄을 예수와 바짝 동행하고, 성령님과 함께 생명의 약진과 천국의 언어(36-37)와 열매맺는(33) 풍성함으로 가꾸며 살아가자. 우리는 예수님과 성령님 편이다.

제자도의 순환

2021-2-04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10:1-15

땅과 바다, 하늘에서 물들이 순환되어 자연계가 유지되듯이, 제자의 삶도 제대로 순환되어야 한다. 물순환이 거대한 현상이기에 알아채기 어렵듯이, 제자도의 순환도 소흘하기 쉬우나 결코 방치해서는 안된다.

"부르사(1절)" - 날 부르셨고 또 지금도 부으신다. 주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권능을 주시니라(1)"- 주님때문에 다시 힘이 나는가? 힘을 내는가?

"내보내시며(5)"- 지금 주저말고, 몸이 가든, 메세지가 가든, 기도가 가든 만나야 한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 채우려 않고, 내 모든 것을 나눠주며 섬기며 살고 있는가? 나눠주는 자에게는 금이나 은이나 동(9절)이 없다.

"일군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10)" - 음식도 먹을 것이나, 하나님의 뜻도 예수님처럼 먹을 양식(요4:34)이다. 복음의 협력을 위해 사람들과 자원을 이끌어내고, 도움조차 기꺼이 받으며, 영혼구원에 초점을 두고 있는가?

"어느 성에 들어가면 도움을 받고... 때론 핍박도 받고(11-14)" 영혼의 추수가 준비된 사람도 있고, 아직 때가 아닌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든 자유하고 자족하라.

그럼에도 지금 힘이 들고 지치고 있는가? 제자도의 순환을 생각하며 나가야 한다. "다시 부르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 소명을 새롭게 하고 준비한 권능을 다시 챙기라. 그리고 다음 순환단계를 또 나아가자.

나는 지금 어느 부분에서 빗나가고 있는가 돌아보라. - 소명? 영적 능력? 파송과 만남? 나눔과 섬김? 서로 기꺼이 협력? 환영과 핍박 속의 자유와 자족함?
자연 속의 물순환은 생명체를 살리는 것이라면 제자도의 순환은 나와 모든 영혼을 영원토록 살리는 것이다.

예수님 앞에서

2021-2-01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9:14-26

"잔치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내가(혈루증 여인) 그 분의 옷에 손만 대어도 나을꺼야...(예수님이) 그 소녀의 손을 잡으시니 그 소녀가 (죽음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님, 제가 신랑이신, 새가죽,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과 함께 누릴 무한한 기쁨을 매일 발견하며 행복해 하게 하소서. 주의 십자가와 사명이 금식이 되어질 때조차 기쁨은 빼앗기지 않게 하소서.

주님, 제가 오랜 질병의 절망이, 상처받은 아픔이, 삶의 외로움과 걱정에 지쳐있을지라도, "기운을 내어라, 딸아(22절)" 부르시는 주님 앞에 믿음의 손을 내밀어, 능력의 옷자락을 만지며 회복의 은총을 얻게 하소서.

주님, 제 자아가 죽어 누운 소녀처럼, 스스로 죽게 하시고, 이제는 예수 안에 살아 오늘의 죽음의 두려움을 내려놓고, 천국을 맛보며 사는 출발이 되게 하소서.

주님, 그래서 제가 지금도 살아계시는 예수님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기뻐하며, 옛 자아에서 벌떡 일어나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렵니다.

기도응답의 요소들

2021-1-29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 8:1-13

"한 나병 환자가 나아와...그의 나병이 깨끗하여 진지라(2-3절)"

본문은 가장 절망적인 병에서 고침받음, 불가능한 문제에서 기도로 해결받은 나병환자, 그리고 백부장과 하인이야기이다. 오늘 말씀을 내게 적용시켜 보라.

'나아와' - 내 문제를 주 앞에, 사람 앞에 기꺼이 오픈해야 한다

'절하며' - 이제는 주를 전능자로 경배하며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는가?

'원하시면' - 주의 뜻으로 계속 내 문제를 비춰보고 있는가?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 부정적이지 않고, 문제해결을 내다보는 믿음이 있는가?

'내가(예수) 원하노니' - 날 향한 그 분의 사랑을 믿는가?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 나병이나, 쓸모없는 종의 병이나, 긍휼의 마음으로 드리는 중보기도나, 하나님에게 똑같이 상달되고 소중하기 받으신다.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10절)" 이 말씀은 중보기도를 드리는 모든 성도들을 향해 지금도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대접할 생각이시라면

2021-1-27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 7:1-12

성경의 율법이 엄중하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안다. 작은 죄도 죄일 뿐이고, 모든 율법의 한가지를 어겨도 죄인으로 서야 할 뿐이다. 그리고 심판이 그 앞에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은 더 강력하시다. "음욕을 품으면 이미 마음으로 간음한 것이다. 눈으로 범죄하면 눈을 그 눈을 뽑는 것이, 오른손이 범죄하면 그 손을 잘라버리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27-30절)".

사도요한은 이것을 '세상으로부터 온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2:16)' 미혹함이라 경고하였다.

예수님이 내 눈, 내 팔을 잘라내길 원하시지는 않겠으나, 이 말은 내 속마음과 작은 생각으로 들어오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닫게 해주신다. 그리고 결코 세상 죄와 욕심에 생각을 내맡기지 말고, 보이는 것에 끌려가거나 붙들려 하지말아서, 영적 사망에 빠지지 말라 하신다.

그러나 과연 내가 이렇게 나를 제대로 지키며 살 수 있을까 생각이 든다 ! 그렇다고 두려워 말라!

육신의 소욕을 이기게 하시는 성령을 의지하고 충만케 하라.
내 죄를 위해 먼저 눈을 뽑으시듯, 손을 자르시듯, 십자가 위에 내어주신 예수의 사랑과 은혜만을 채우라.
그리고 이렇게 감사하며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살라.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닙니다. 내 안에 예수가 주인되어 사십니다."

눈과 손이 열개라도 안 남을 것 같네요!

2021-1-22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5:27-37

성경의 율법이 엄중하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안다. 작은 죄도 죄일 뿐이고, 모든 율법의 한가지를 어겨도 죄인으로 서야 할 뿐이다. 그리고 심판이 그 앞에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은 더 강력하시다. "음욕을 품으면 이미 마음으로 간음한 것이다. 눈으로 범죄하면 눈을 그 눈을 뽑는 것이, 오른손이 범죄하면 그 손을 잘라버리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27-30절)".

사도요한은 이것을 '세상으로부터 온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2:16)' 미혹함이라 경고하였다.

예수님이 내 눈, 내 팔을 잘라내길 원하시지는 않겠으나, 이 말은 내 속마음과 작은 생각으로 들어오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닫게 해주신다. 그리고 결코 세상 죄와 욕심에 생각을 내맡기지 말고, 보이는 것에 끌려가거나 붙들려 하지말아서, 영적 사망에 빠지지 말라 하신다.

그러나 과연 내가 이렇게 나를 제대로 지키며 살 수 있을까 생각이 든다 ! 그렇다고 두려워 말라!

육신의 소욕을 이기게 하시는 성령을 의지하고 충만케 하라.
내 죄를 위해 먼저 눈을 뽑으시듯, 손을 자르시듯, 십자가 위에 내어주신 예수의 사랑과 은혜만을 채우라.
그리고 이렇게 감사하며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살라.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닙니다. 내 안에 예수가 주인되어 사십니다."

예수 안에서의 율법의 성취

2021-1-21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5:17-26

"내(예수)가 온 것는 ..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성취(완성)하러 왔다(17절)."

예수를 영접하고 성경의 구절마다 예수로(17절) 결론이 지어짐이 내게도 율법의 성취이다.

말씀을 가슴에 담고나니, 막힌 관계성이 보이고, 형제 자매에게(22절) 작은 사랑으로나마 다가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수 있다는 것이 내게도 율법의 성취이다.

말씀과 함께 내 깊은 마음의 동기에서부터 예배드림(23, 24절)이, 주를 기쁘게 함이 지금 최우선이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며 순종함이 율법의 성취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요15:7)..."
우리도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예수 안에서 실천하며 완성해 가며, 시절을 쫓아 과실을 주렁주렁 맺어가자.

어린 순교자들

2021-1-15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 2:13-23

"그 때를 기준으로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2:16절)..."

권력에 눈이 멀고, 잔인한 헤롯왕으로 인해 베들레헴의 수없는 두살 아래의 아이들이 죽임을 당했다. 부모와 모두에게 너무도 고통스럽고 슬픈 일이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구원의 길에 기꺼이 동참한 순교자이다.

삼십년 후에 죽음으로 예수오심을 증거한 세례요한처럼, 삼십년후에 죽음으로 온 인류구원의 길을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기꺼이 생명을 순교의 제물로 내놓은 영혼들이다.

지금도 예수와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리며 기뻐하고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며, 우리의 삶과 죽음을 돌아본다.

두살도 아닌... 너무도 오래 살고 있는 우리들... 두살 남은 인생처럼 엄마같은 주님 품안에서 자유하고 평안하자. "지금 네가 필요하단다. 너의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나를 위해 줄 수 있겠니? 네게 준 천국이면 족하잖니?" 하시는 예수님께 지금라도 아멘하자. 몽땅 맡기고 주를 위해 드리고 주님 앞에 설 날을 준비하자.

요셉처럼

2021-1-13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 1:18-25

"(19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하더니..."

주님, 요셉처럼 기막힌 상황에 처해도, 원망스러운 일이 있어도 상대방을 이해하고, 이해해 보려는 배려가 있게 하소서. 결코 미움과 원망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소서.

주님, 요셉처럼 일어난 일이 이해가 안되고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냐는 생각이 들어도, 주의 말씀이라면 나를 내려놓는 순종이 있게 하시고, 해산하는 날을 기다리듯, 주의 계획이 응답될 때까지 복종하게 하소서.

주님, 요셉처럼 성령이 하시는 일을 보거나 믿고 따르게 하소서. 영적인 일은 영으로만 분별됨을 아오니, 오늘도 내가 당하는 일들 속에 성령께서, 천사를 통해, 사람을 통해, 오늘 겪는 일들이 영적 양식이 되어 살아갈 깨어있는 영혼이게 하소서.

그리하여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내 삶이 주의 영광이 되게 하소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실만큼 소중한 그 구원사역에 요셉처럼 동참하게 하소서. 아멘.

아버지의 간곡한 사랑

2021-1-08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일서5:1-12

갈수록 깊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사도 요한은 주의 사랑을 오늘도 이렇게 전한다.

한 해를 살면서 나의 사랑을 알고 네가 누려야 하지 않겠니? 정말 내가 너에게 주고 싶은 것은 나 자신이요, 바로 사랑이다(1절). 진정 나를 만났다면 변함없는 내 사랑도 알았으리라. 내 사랑 안에 뛰어들어 흠뻑 받으렴.

내가 너에게 주는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네가 알면 좋겠다. 내 독자를 비천의 태와 물(6절)에서 꺼내 너에게 주고, 피(6절)와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너에게 준 그 예수를 보고 믿으며 내 사랑을 가슴깊이 받으렴.

너의 삶 속에 내가 부어준 사랑이 너무 쉽게 잊어져 당황스럽니? 가까이 있는 것이 말씀이요 계명(3)이란다. 그 말씀이 네 중심이 흔들리려할 때 밟고건널 징검다리이다. 너무 주위에 휘둘리지 말고 무겁지도 않고(3), 어렵지도 않은 말씀을 따라 내 사랑에 힘입어 꼿꼿이 걸어가렴.

네 가슴에 지금 이 소리가 들렸으면 좋겠다. 내 아들아, 내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 아들 예수의 생명을 받아 영생길을 가며(11,12), 톡톡 톡톡 뛰는 심장소리를 들을 때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내 소리를 들으렴. 그렇게 힘내어 살아가렴.

예수와 함께 죄를 이겨내기

2021-1-04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일서 2:28-3:10

오늘 사도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자기를 깨끗히 할 것이며(3절), 하나님께로부터 거듭났다면 죄를 짓지 아니한다(9절)고 한다.
그렇다. 우리의 거듭남과 주앞에 다시 서는 것은 오직 예수의 십자가와 구원이다.
그러나 한편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은 매순간 우리가 감당할 몫이다.

우리는 당시 침투한 영지주의 주장처럼 영적 삶만 고귀하게 여기고 육적 삶은 세속에 방치해서는 안된다. 오늘 말씀이 예수와 함께 죄와 타락된 삶에서 이기며 사는 길을 말씀해 주신다.

내 안에 예수가 계신 하나님의 자녀라야 죄를 이긴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2절)"

내가 예수 안에(말씀 안에) 사는 자라야 죄를 이긴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28절)"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요15:7)"

내가 예수 옆에서 일하면 죄를 이긴다. "주를 향한 소망을 가진 자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3)" 빛과 소금의 삶이 이것이다.

내 앞에 예수가 서 계심을 알면 죄를 이긴다.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함이라(8절)" 왜 마귀일 아닌 마귀 자체를 멸하지 않으시나? 아직 때가 아니며 지금은 우리가 예수를 앞세우고 싸워 이겨내야 한다.

내 이웃 속에 예수를 보면 죄를 이겨낸다.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다(10절)." 내 이웃들에게서 예수를 볼 때, 예수가 그 옆에 계심을 볼 때 내가 할 일은 자명해질 것이다.

2021년을 시작하고 있다. 예수와 동행하며 깨끗한 삶을 살아내며, 죄에서 자유하고, 죄를 이기고, 죄된 이웃을 건져내자.

든든히 채우고 새해를 출발하자

2021-1-02

성경묵상의 나눔: 요일 2:1-11

운전을 자주 해서 그런지 주유소에서 차에 개스를 꽉 채우면 내 배가 든든한 것처럼 느껴진다. 아내는 냉장고에 김치가 채워지면 든든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말많고 탈많은 한 해을 지나, 그 휴유증이 더 클 새해를 휘청거리지 않고 가려면 제대로 채우고 출발해야 함을 말씀에서 깨닫는다.

예수의 생기로 생각부터 몸짓까지 활발하게 열기를 채우며 출발하자. - "하나님 앞에 변호해(세워) 주시는 예수, 죄로 죽은 날 살리신 화목제물 예수(1, 2절)"가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심에 마음이 따뜻해야 한다.

말씀(계명)의 양식으로 몸, 마음, 영혼에 새힘을 얻어 출발하자. - "하나님을 아는 자는 말씀을 지키고(3)" - 올해는 예년처럼 피곤을 달고 살며 견뎌내는 정도로 살면 안된다. "옛계명(7)이 먹어두려 애쓰는 것이면, 새계명(8)은 예수의 맛과 향기로 최고의 식탁이 되는 것이다. 예수와 그의 영을 환희로 경험하는 말씀을 맛보며 출발하자.

묵은 마음들을 청소하고 용서의 은혜로 채우며 출발하자. 은혜의 수준은 용서받음과 용서함의 수준이다.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함(9)"은 내 능력이나, "그들을 사랑함(10)"은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은혜의 차원이다. 섭섭함, 불편함, 미움의 앙금이 얼마나 자주 내면에 가라앉는가! 오직 은혜만이 해독제이다.
부디 화목제물되신 예수의 은혜 안에서, 산제물된 나의 용서와 사랑으로 가득한 한 해가 되기를 축복한다.

길섭 형을 처음 만났을 때

2020-12-28

성경묵상의 나눔: 벧후2:1-11절

나를 전도했던 길섭 형을 처음 만났을 때는 70년도 중반 내가 16살이었을 때였다. 그 당시 나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포기하고 대학교 안에서 임시직원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고, 그 형은 법학과 학생으로 입학하였다.

그 형을 처음 볼 때의 첫 인상은 별로였다. 허름한 점퍼에 통바지, 도수높은 안경, 느린듯한 말투에 지나친 순수함(나중에 또스토예프스키의 '백치'라는 소설을 읽을 때 주인공에게서 이 형 생각이 났다)...당시 대학생들이 부러웠지만 그 형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런 형이 내게 다가와 주었고 관심을 가져주고, 나의 고민을 들어주고, 열등감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고 함께 만나면서 굳이 드러내지 않았던 그 형의 새로운 모습들을 보게 되었다.

영어, 불어공부에 열정적인 모습, 탁구를 칠 때 공격적이지는 않아도 점잖케 쳐도 최선을 다해 치는 모습, 바이올린을 잘 연주하는 것, 문학에도 관심이 많다는 것(몇 해전, 그 분이 한국에서 100개의 시 암송협회 사무총장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외에도 그 형이 교회에 다닌다는 것등...결국 그 형의 도움으로 영어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 계기가 예수를 만나고, 검정고시, 대학을 가게 되는 도전으로 이어졌다.

오늘 말씀속의 방탕과 탐욕의 세상 속에서 의롭게 살고자 애쓰고, 타락된 세상을 보며 가슴아파했던 노아, 롯(5-8절)의 경우를 묵상하면서 갑자기 그 길섭형이 내 마음에 떠올랐다.

수수하게, 단순한 삶을 사는 모습으로 위선과 혼돈 속에 사는 인생들에게 다가와 가장 아름답고, 깊고, 크신 예수님을 내 삶으로 소개하는 것이 신자의 저력, 모습이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세상은 눈에 보이는대로 평가하고 평가받고 사는 세상이다. 그러나 좀 느려도, 좀 모자란 것 같아도, 세상수준에 안 어울려도, 예수 한분만은 꼭 붙드는 내공이 강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 연말 연시에 예수을 향한 감사와 그 길섭 형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나의 삶도 단순함으로 차분하게 걸어가고자 한다.

성령께서 성탄절을 제대로 보게 하신다

2020-12-24

성경묵상의 나눔: 누가복음 1:39-56

성탄절을 맞이한다. 성탄절의 깊은 동참자는 성령의 감동과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다.
성령이 충만해야 예수님의 모든 생애가 구원의 감격이 된다.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 복을 받았고,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내게오시다니(42-43절). 성령이 함께 하시니 엘리사벳의 눈에 마리아가 태 안에 품은 예수가 환히 보인다. 성령의 인도 속에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예수의 구원을 발견하자.

성령이 충만해야 산신앙이 후손에게 전수된다. "내 태중의 아이가 기뻐서 뛰놀았습니다(44)." 성령이 엘리사벳을 주장했고, 성령이 그 아들 세례요한을 태에서부터 충만하게 했고 전 생애를 인도해주셨다. 자녀들을 바르게 인도하길 원한다면, 후손의 참된 복을 바란다면, 이 성탄절기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이 충만해야 세상사람들을 긍휼로 품게 된다. 마리아가 성령 충만해서 고백한 아기 예수, 메시야의 모습은 "긍휼함"(50, 54, 55)이었다. 아기예수를 품고 주의 사역과 은혜의 수혜자를 을 찬양한다. "비천한 자, 주리는 자, 가난한 자, 아브라함의 자손들..."
성령의 감동을 입을 때 사람들을 섬기고, 긍휼과 사랑으로 품게 되는 것이다.

이 성탄절기에 예수의 탄생이, 성령님의 임재 속에 함께 어우러져 캐롤송 한조각조차 주님를 향한 찬양이 되게 하자. 아무 것이 없어도 그냥 예수님의 오심때문에 기뻐하자.

마귀까지 대적할 힘이 내게 있는가?

2020-12-22

성경묵상의 나눔: 베드로전서 5:8-14

오늘 말씀에서는, 심지어 마귀에게까지도 믿음에 굳게 서고 맞서고(9절), 잠시의 고난이니 굳세고 강하게 하여 이겨내고(10), 끝까지 은혜 안에 든든히 서라(12)고 하신다.

우는 사자와 같은 마귀의 공격은 성도 앞에 닥치는 최고의 연단이라 할 수 있다. 은근하고, 끈질기게 집요하고, 큰 두려움을 주고, 깜박 속여 성도를 넘어뜨리는 것이 마귀의 궤계이다.
이것 저것 세상 속의 어려움은 이겨낸다 하나, 과연 내가 마귀의 궤계와 공격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그래서 오늘 말씀을 주신다.

마귀에게 믿음으로 대면함은 내가 아닌 예수께 생사를 철석같이 맡기고 전진하는 것이다.
고난을 감내함은 내가 아닌 주님이 피할 길, 이길 힘을 주심을 경험하여 한 순간 한 순간을 넘어가는 것이다.
은혜 안에 서는 것도 내가 아닌 오직 예수로 새생명을 얻었음을 고백하며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주인되신 주가 내 안에 계심을 선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예수 안에 있는 나를 마귀가 어떻게 이겨내겠는가? 마귀는 단지 위협의 그림자일 뿐이다. 권세와 능력과 종말의 주권자이신 주님 앞에, 살아계신 예수를 내 안에 모시고, 당당하게 일어서고, 뒷걸음치지 말고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예수의 이름!”을 붙들고, 선포하며 앞을 향해 전진해 나가자.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

2020-12-16

성경묵상의 나눔: 베드로전서 2:11-25

"자유를 악을 행하는 구실로 쓰지말고, 하나님의 종으로 살라(16),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고 참으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이다(20, 21)" - 오늘 주시는 본문중에 있는 말씀이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이다. 밉상스러워도 기꺼이 사랑을 베풀고, 뻔뻔한 사람에게 여전히 섬기고, 속에 상처준 사람을 기꺼이 용서하고, 섭섭한 일과 사람을 이해하고 웃으며 앙금없이 넘어가라는 것이다. 과연 이런 일들이 나의 일로 닥칠 때 선으로 대할 수 있을까? 해보려 해야 한다, 할 수 있음을 체험하고 뭇 사람들의 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오늘 말씀은...

선으로 이기려면, 경건과 사랑과 진실함이 내 삶 속에 변함없이 균형잡혀야 한다. "정욕은 멀리하고(경건), 이방인에게 행실을 바로 하고(사랑, 섬김), 제도에 복종하고(성실, 진실)(11-13)"

선으로 이기려면,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정말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 분의 날 알아주심을 믿는다면 어느 누구의 박대도 오해도, 내 마음을 얽어매지는 못 한다. "억울한 고난도 하나님 생각하며 참으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다(19-20)."

무엇이 지금 내 심사를 흔들고 불편하게 하는가? 그대의 내려놓음, 용서함, 양보함을 하나님이 보신다. 아름답다 인정하시고 칭찬하시고 기억하시고 상주신다. 주님에게 꽂혀서 세상을 이기자.

예수로부터 사랑의 빚진 자임을 평생 잊지말라. 그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이다. "예수께서 (내 죄로) 고난을 (기꺼이-23) 당하심으로 (내게 섬김의) 본을 남겨 놓으셨다(21절)" 선으로 악을 이기는 본을 보여주며 살라 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말만이 아닌 내 생활 속에서 예수를 제대로 따라가는 길이다.

너희도 거룩하라 하신다

2020-12-14

성경묵상의 나눔: 베드로전서 1:13-25

거룩함은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언어이고 성도들의 평생 좌우명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거룩함은 교인들을 향한 조롱으로 여겨지는 시대이다. 적어도 우리만은 거룩함을 품고 살자.

성도라면 죄를 씻은 거룩함이 평생 새겨보며 살아갈 삶의 거울이다. "나의 거듭남이 ...어린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되었다(19절)"

성도의 거룩한 삶은 순간순간 은혜로 덮어져야 한다. 은혜는 내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값없는 엄청난 선물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무엇을 봐도, 누구를 만나도, 어떤 환경에 쳐해도 은혜를 진정 알고, 누리고, 그리고 베풀며 사는 것이 거룩이다. "여러분이 받을 은혜를 끝까지 바라고 있으시오(13절),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15), 서로 뜨겁게 사랑하시오(22)"

주의 말씀이 우리도 평생 주를 보며, 예수와 동행하며, 말씀을 가슴에, 삶에 품고 거룩이 능력이 되게 하라 하신다. "우리의 거듭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다(23절)" 우리 모두 거룩한 생활이라는 성도의 특권과 능력을 빼앗기지 말자. 나의 거룩함이 위선으로 바뀌려할 때, 오늘처럼 수시로 주시는 말씀과 그 속의 보혈로 적셔서 거룩함을 회복하자.

시련과 핍박을 이렇게 바라보자

2020-12-10

성경묵상의 나눔: 다니엘서 11:30-35

본문에 등장하는 왕은 북방왕 안티오코스 4세(30절)이다. 비열하고 속임수로 왕위에 오른 자라 언급한다. 그는 유대인들을 핍박하고 성전을 약탈하고 제우스신상까지 성전에 세웠던 인물로 알려진다.

교회 안에까지의 핍박은 이제는 없을까? 있을 것이다. 주님나라까지 가는 길에 장애물은 언제나 있다. 질병조차 우리를 조롱하려는 때가 아닌가! 그러기에 오늘도 말씀으로 무장하며 우리의 눈을 크게 뜨자.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용기있게 버티어 나갈 것이다(31)"- 우리가 성도임을 자각하고 문제를 대면하는 눈으로 버티고 견딜 때에 다음 길도 인도하실 것이다.

"이 일로 백성은 단련을 받고, 순결하게 되며(34)" - 짧은 연단이건, 긴 시련이건 하나님은 성도에게 보약으로 쓰시려 한다. 우리 모두 내 앞의 연단을 주님의 눈으로 보는 순결함을 잃지 말자.

"하나님이 정하신 그 끝날이 올 때까지(35)" - 마지막 때와 천국을 바라보는 열린 눈이 지금의 온갖 시련을 견디게 하고 대면하고 이기게 한다. 분명 모두가 견디어 내는 사람은 아니다. 그대만은, 우리만은 믿음으로 환난을 통과해 주 앞까지 도달하도록 영적 허리찌를 질끈 조이자.

사랑하는 자녀가 바른 것을 원한다면

2020-12-07

성경묵상의 나눔: 다니엘 10:1-9

내 사랑하는 자녀가 바른 것을 원하거나, 기특한 일을 하려한다면
부모로써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난 무엇이든 해주려 할 것이다.

세이레를 거의 금식하며(3절)
백성들을 위해,
시대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는 다니엘의 간구함을
주님은 얼마나 기쁘게, 감사하게 들으셨을까!
무엇이든 가능하신 주님은
기꺼이 그 간구를 주의 응답의 현장에 소중한 재료로 삼으실 것이다.

비록 시대 시대를 따라 패역한 인생들이
저지르는 역사의 어둠 속에서도
주님의 마음은 사랑하는 자녀들의 아픔(8절)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징계와 연단이 필요한 세상 속에서도 "현재의 고난은 장차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단다(롬8:18)"고 손을 잡아주시면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자녀에게,
그래도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자녀들에게,
결국 안겨주시는아버지와 자녀들의 승리...
이것이 환상과 묵시의 결론이다.

하나님 말씀을 느끼는 감각이 있는가?

2020-12-04

성경묵상의 나눔: 다니엘서 8:15-27

한 남자 분이 온 몸이 여기저기 아파서 왜 이런가 심히 걱정하며 의사를 만나 진단을 받았다. "왜 이렇게 온 몸이 여기저기 아픈가요? 찔러보면 안 아픈데가 없어요. 죽을 병인가요?" 묻자 의사가 대답해 주었다. "선생님 손 끝에 가시가 박혀 그렇습니다."

느끼는 감각, 때로는 아픈 감각도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다. 더구나 오늘 환상 앞의 다니엘의 체험을 보면서 말씀 앞의 감각은 우리가 영으로 살아있다는 소중함 표시임을 깨닫게 된다.

내가 말씀을 대함은 하나님의 임재의 순간이다. "두렵고 놀라는 감각"이 있게 하소서(17, 27절).

내가 말씀을 펼침은 영원한 지혜를 만나는 순간이다. "이해가 못 미쳐도" 그 뜻을 알고자 집중하게 하소서(27).

내가 말씀의 약속에 나를 맡김은 믿음으로 평안을 누리는 순간이다. 말씀을 믿고 "깊은 잠"이 들게 하소서(18).

내가 말씀을 나누며 살아갈 때 마음이 "아픈 것"은 (27) 저들의 냉소적 거절 앞에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서이다. 끝까지 사랑하게 하소서.

내가 말씀을 따라 행하며 살아갈 때 때로는 섬김에 "몹시 지쳐도 (27)"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나를 신실하게 보시며 맡겨주신 그 분을 보며 살기 때문이다. 주님, 주를 위해 내 몸과 마음, 오감조차 드리며 살아가게 하소서.

종말이 와도 심을 신자의 사과나무

2020-12-02

성경묵상의 나눔: 다니엘서 7:15-28

세상의 종말을 누구나 한번씩은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내 때에서는 아니지만 언젠가는 임할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의 종말과 남은 자의 이야기는 소설이나 영화의 단골주제이다.
지진과 홍수, 한파등 자연의 재해로, 오염과 남용으로 임한 오존층 파괴와 바이러스 질병같은 인재로,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핵전쟁의 결과로, 지구와 혜성의 충돌등등이 그 가능한 원인의 하나이다.

그러나 성경은 주님이 가져오실 종말을 선포한다. 그리고 종말에 앞서 강한 나라, 그리고 열뿔같은 연합세력으로 세상을 통제할 나라가 나타나고, 그 나라를 조종하는 적 그리스도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지금 슈퍼 컴퓨터 하나로 세상 모든 사람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세상을 볼 때 더욱 그런 마음을 갖는다.

혹자는 지구에 종말이 와도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하였지만, 신자의 고백이야말로 종말 앞에서 그러하다. 오늘 말씀 속에서 이렇게 내 믿음을 다지며 고백하며 기도한다.

한 때, 두때, 반때(25)가 어디까지든지 시련이라면 도우시는 주님과 함께 이겨내게 하소서.

적 그리스도(24)가 어떤 것이든지, 어떤 미혹함으로 속이려해도, 말씀을 내 안에 채우고, 능력과 삶의 지침을 삼아 분별하고 물리치게 하소서.

죽음과 심판의 두려움보다 열린 천국문을 예수의 손을 잡고 들어갈 그 날, 그 영원 나라(27)를 늘 고대하게 하소서.

세상에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잊지않고, 한 영혼라도 구원하고자(벧후3:9) 영혼의 사과나무를 마지막까지 심게 하소서. 아멘.

하나님의 손글씨

2020-11-26

성경묵상의 나눔: 다니엘 5:1-12

벨사살왕이 성전의 기구들을 술잔으로 삼으려 할 때,
온갖 우상들 앞에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거리로 삼으려 할 때,
하나님은 속이 상하셔서 징계의 손글씨를 벽에 쓰신다.
주의 손글씨는 우리에게는 본래 징계를 위함이 아니다.

오늘, 이 감사절의 주간에 우리도 주님의 손글씨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창조하신 내 온 주위의 환경마다 하나님의 써놓으신 “널 위해 주는 것이다”라는 손글씨 속에 삶의 감사를 새롭게 하라.

돌에 새겨주신 계명이라는 손글씨 속에서 여전히 붙들어 주시는 주님의 자상한 인도하심을 찾아보라.
죄로 비참해서 서있는 내 앞에 앉으셔서 “죄는 미워하나 널 여전히 사랑해”하시는 예수님의 땅에 쓰신 손글씨를 잊지말라.

성경책 안에 손글씨를 쓰고 또 쓰시면서 끝까지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변함없는 사랑을 나는 기뻐하고 저들에게는 알려주라.
내 확신이 희미할 때마다, 주님의 손바닥에 새겨놓으신 내 이름의 손글씨를 보면서 사랑을 다짐해 주심을 행복해 하라.

여전히 질병과 세속의 혼란 속에서도, 이제 주 앞에 서는 날, 흰 돌 위에 손글씨로 새겨놓아 주의 앞에 놓여질 새 이름처럼, 주와 함께 할 영원한 나라를 끝까지 소망하자.

주님이 오늘 손글씨로 우리 마음에 한 줄 , 한 단어를 써놓으셨다. 내게는 그것이 무엇일까?

나도 어느덧 교만해 질 수 있다

2020-11-25

성경묵상의 나눔: 다니엘서 4:28-37

자신의 반반한 외모로 인해 사람들이 자기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갖기에 자꾸 교만해지려 한다고 말하는 여성에게 상담자가 그 여성의 얼굴을 보더니, “현실을 바로 보고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데, 자매님의 문제는 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착각의 문제인 듯 싶습니다.”라고 했다.

겸손함과 교만함은 전혀 상반된 모습이다. 둘 다 한꺼번에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겸손함은 어느 사이엔가 교만함으로 굳어져 바뀔 수 있다. 한편 교만도 꺾어져 겸손으로 내려앉을 수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내 안에서 겸손과 교만은 잔존한다. 그것부터 깨닫는 것이 겸손의 시작이 아닐까? 교만의 깊은 뿌리는 죄성이고, 겸손의 깊은 회복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한다. 이것을 아는 것이 교만을 죽이는 시작이다.

오늘 묵상인 다니엘서 4:28-37은 느부갓네살의 교만으로 시작한다. “내가 세운 이 도성, 나의 권세와 능력, 나의 영화와 위엄을 보아라...(28절).” 그리고 겸손으로 바뀐 왕의 모습으로 마친다. “그 분은 참되고, 공의로우시며 교만한 이를 낮추신다(37절).”

교만의 위기는 자신의 교만을 이제는 깨닫지 못할 때부터이다. 느부갓네살도 완전히 망할 뻔한 교만이었는데, 다행히 그는 연단을 통과하면서(33절) 회복되어 새 삶을 살아간다(36절).

그 회복의 기회가 어디서 왔는가? 낮은 자리에서 고통스러울 때 철저한 깨어짐과 (다니엘의) 해석해 준 말씀 앞에서의 순종과 가장 높으신, 하늘의 하나님(34절)을 주인삼을 때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의 교만은 엄청나게 표시나는 악한 것이 아니다. 그저 주님은 잊고, 주님없이 내가 해보려고 하는 나의 모습이 교만인 것이다. 그렇게도 교만했지만, 시련 속에 낮아지고 하나님만을 높이는 느부갓네살의 회복을 주목해 본다. 우리도 그의 교훈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나의 교만을 알아채리고 주만 신뢰하는 겸손으로 살아가자.

이런 기도의 협력자들이 있는가?

2020-11-17

성경묵상의 나눔: 다니엘서 2:14-23

매사가 준비가 필요하듯이 기도에도 밑바탕, 협력자가 있어야 한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결단하는 다니엘의 매사의 기도와 응답에서 그것을 깨닫는다.

1. 사람들과의 평소의 친절과 원만한 관계성이 내 기도의 협력자이다.
"다니엘이 시위대 장관 아리옥에게 묻고...왕에게 가서 아뢰었다(14-16절)"- 다니엘을 포함해서 모든 지혜자를 죽일 살생의 권세를 받은 경호대장 앞에서 의논하고, 살기등등한 왕 앞에 나가 설득할 수 있는 담대함, 평안함이 어디서 나오는가? 평소의 서로 나눈 원만함과 친절함이다. 이런 관계성은 성령을 쫓아 사는 사람에게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것이 기도가 막히지 않고, 기도응답이 시작이 되는 기도의 협력자이다.

2. 기도의 협력자는 늘 기도하는 내 습관이다.
다니엘은 왕 앞에 나가고 돌아와 기도로 매달릴 준비를 한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함께 기도할 작정을 하고 결국 응답을 받는다. "하나님이 이 비밀을 알게해 주시기를 기도하자(18)." - 채식과 성결문제로 이미 긴급기도의 응답을 체험했던 다니엘이다. 그 전후의 삶도 기도의 삶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바로 기도로 들어간다. 함께 기도하던 팀이 모여 작정기도를 시작한다. 이렇게 우리도 꾸준히 매사를 기도하는 습관 속에 살자.

3. 기도의 협력자는 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다니엘이 처한 상황과 응답의 전후에는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지혜와 권능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왕들을 폐하기도 세우기도 하십니다.(20-21" 이것이 무서운 왕의 명령 앞에서도 다니엘이 담대히 기도로 아뢸 수 있는 기도의 바탕이었다.

평소의 성령과 동행하는 성품과 관계성, 기도의 습관와 체질, 우리의 상황을 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순전한 믿음으로 살아가며, 기도하며 다니엘의 기도와 응답이 나의 것이 되게 하자.

마음이 불안합니까?

2020-11-16

성경묵상의 나눔: 다니엘서 2:1-13절

왕조차 불안하고 답답하여 잠을 못 이룬다. 그의 꿈을 인하여 불안으로 가득 차 다 죽을 상황이 된 신하들이다. 본문의 내용이다. 다가온 불안 앞에서 오늘 말씀을 붙들자.

1. 꿈대신 말씀을 붙들자.
사람들은 꿈, 징조, 뉴스 이런데 얽매이고 눌려 살기 쉽다. 오늘 그대는 무엇이 불안한가? 바벨니아의 왕조차 불안하고 답답해 한다(1).
꿈대신에 말씀을 붙들자. 말씀의 꿈을 꾸며 이루며 사는 것이 성도의 축복이다. "고난 때문에 주의 율례를 배웠습니다. 주의 법이 천만금은 보다 귀합니다(시119:71)"

2. 세상의 방법 대신에 기도를 붙들자.
지금 지혜자들이 온갖 생각을 짜내도 해결되지 못하는 가운데 있다. 왕이 꾼 꿈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왕의 뜻밖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세상의 방법을 찾아 매달리지 말고 기도하라. 주위가 막히면 위를 바라보아라"
다니엘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다. "너희와 나는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이 비밀을 알게 해주시를 기도하자(18)"
내게 막힌 문제가 있고 불안과 생각이 많다는 것은 기도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3. 막연한 신들을 찾지말고 성령님을 모시라.
절망속에 지혜자들이 부르짖는다. "신이라면 몰라도 왕에게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11)" 사람이 만든 우상과 함께 인생지혜의 한계를 보여준다.
저들이 제대로 말했다. 그렇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시라면 가능하다. "힘, 권력으로 안되어도, 나의 신 성령으로 되느니라(슥 4:6)."
성령이 꿈을 꾸게 하신다. 성령이 그 꿈을 풀어 살아가게 하신다. 성령이 우리의 불안을 물리치게 하신다. 부디 우리 마음의 불안을 "성령의 불 안"에서 이겨내자.

가짜가 판치는 세상 속에서...

2020-11-11

성경묵상의 나눔: 데살로니가 후서 2:1-12

진품보다 더 좋은 것은 가품이다. 가짜(모조품)는 값도 싸고 막쓰기도 좋고, 심지어 더 화려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다가 큰 낭패를 당하거나 후회할 때가 오기도 한다. 모든 문제의 원인 중의 하나가 불량품이나 재료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마지막 때의 현상 중의 하나는 가짜가 진짜를 압도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조차 가짜가 판을 친다. 거짓 재림날짜, 자칭 신이라하는 멸망의 아들, 거짓 표적과 기적들...(3, 4, 9)

전문가가 아닌 다음에야 가짜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진짜만 꼭 붙들고 살아가자.

예수만이 진짜이다. "자신을 신이라 불리우든, 내세우든 (4)" 결국 예수가 심판하실 것이다.(8절)" 우리에게는 오직 예수이다. 지금도 내 안에 예수가 계시고 그 분과 동행한다면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성경말씀만이 진짜이다. 아무리 자기를 높이고, 능력, 표적, 거짓 기적, 속이더라도 말씀에서 떠난 것은 가짜이다. 지금 당신의 손에 뭘 붙들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만그대 속에, 마음에, 영의 인도와 삶의 지침으로 꼭 붙들면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영혼구원을 위해 안타까워하며 무엇인가 하는 것이 우리가 진짜 할 일이다. 주께서 불의한 모든 자들들 폐하고,심판하시리라는 말씀(8절, 12절)으로 내 마음이 속시원하다하면 안된다. 그 분의 심판과 징벌은 "한 영혼이라도 더 많이 구원하시려는(벧후3:9) 사랑이 담긴 반어법이시다.

우리의 삶은 종말이 있다. 주 앞에 설 날이 가까워오는 것은 분명한다. 진짜를 꼭 붙들자. 예수님을, 주의 말씀을, 그리고 잃은 영혼을 구원하며 살아가는 마지막 사명을.

믿음의 근육들이 튼튼한가?

2020-11-10

성경묵상의 나눔: 살후1:1-12

우리의 믿음이야 살아계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한가지이다. 그러나 세상을 여러가지로 대면하며 살아갈 때 우리 믿음은 골고루 튼튼해야 한다. 마치 사람의 근육이 어느 한 곳만 커서 이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말이다.

1. 내 믿음이 자라가며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골고루 나누어야 한다. "너의 믿음이 자라고 ...서로 사랑함이니(3절)"

2. 내 믿음이 견고해지며 고난과 문제들을 믿음으로 이겨내야 한다.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자랑하노라(4)"

3. 내 믿음이 기다림의 소망과 인내로 끝까지 이겨내야 한다.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실 하나님(6),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가운데 나타나실 예수님(7),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10)"

4. 내 믿음이 함께 기도함으로 응답 속에 현실적이 되어야 한다.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11),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라(11b)"

오늘도, 내일도 사랑함으로 믿음이 자라고, 문제들을 이겨냄으로 믿음이 견고해지고, 끝까지 소망함으로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함께 기도하며 응답 속에 산 신앙, 튼튼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한다.

자다가 깨어나듯이

2020-11-06

성경묵상의 나눔: 살전 4:13-18

주님, 어느날 유난히 청명한 몸과 마음으로 깨어나듯이
주님 오실 때 영광의 주(16절)를 뵈옵고,
반가운 형제자매들과 얼싸안게 하소서.

어느날 죽음이라는 초대 앞에 삶의 잡동사니를 내려놓고, 평안 가운데 주님 앞으로 걸어가 당신에게 안기게 하소서. 스쳐가는 생각이라도 당신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아직 이 땅에 남아있어도,
이 땅에 누군가를 남겨두어도,
앞서 간 그리운 사람들이라 해도,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16절) 있음을,
함께 만날 그 자리가 있음을,
그래서 삶도 죽음도 웃음으로 맞을 수 있음을 감사하며 걸어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17)" 아멘.

거룩함을 현재 진행형 동사로 삼으라

2020-11-05

성경묵상의 나눔: 살전 4:1-12

거룩하다하면 하나님의 일로만 생각하고, 형식적인 바리새인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거룩하다는 것은 웬지 딱딱하고 정머리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

아니다. 거룩함은 ...
변화된 나의 삶의 모습이요,
지금도 온갖 매임에 자유하며 사랑받는 주의 자녀로 뛰노는 것이다.

기쁨과 밝음과 평안함으로 사는 것이요,
지금도 교제하며, 나누며 사는 것이다.

즐겁게 섬기는 것이요,
지금도 힘든 일 속에서도 감사를 기쁘게 장식하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거룩해야 한다. 아니 거룩을 빼앗기지도 말고, 누려야 한다.

그것을 오늘 성경에서 그 거룩을 주님이 말씀하신다(3, 4, 7).
음란을 버리고 가정을 순결하게 행복하게 만들라(3). 모든 남자 여자를 형제, 자매로 여기며 생각하고 대하라(6). 열심히 일하며 건전하게 살아가라(11). 그 속에서 성령을 결코! 저버리지 말라(8).

거룩함,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지금도 내가 누리며 살아야할 “현재 진행형 동사”이다.

쫄딱 망할 거라 생각은 말라

2020-10-30

성경묵상의 나눔: 예레미야 52:12-23

이제 유다는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왕궁과 모든 집들은 불타고, 성벽조차 헐어졌다(13, 14절).
갈대아 사람들은 여호와의 성전의 온갖 기구들과 그릇들은 다 탈취해 갔다(17-19). 하나님을 예배하며 올려드렸던 아름다운 기구들과 그 광경, 향기는 다 사라지고 말았다.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 참담함은 컸을 것이다.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인가?"
우리들도 인생의 큰 어려움이 닥치면 절망 속에 두려울 때가 있다.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망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시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부터 새로운 도약을 예비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믿을 가진 우리도 달라야 한다.

무너진 성전에서 하나님은 무너질 수 없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받으실 (요3:23)" 수많은 교회들을 준비하고 계셨다.

빼앗긴 수많은 그릇들에서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믿음의 깨끗한 그릇(딤후2:20)이 되어 주의 은혜를 담도록 계획하셨다.

몽땅 가져간 금은의 물건들 속에서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행3: 6)의 그릇"을 준비하셨다.

잃어버린 나라 위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계21),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시며 주님은 지금도 믿는 우리에게 한말씀하신다. "쫄딱 망할 거라 생각은 말아라. 결코 빼앗길 수 없는 나와 내 아들 예수, 그의 영이 충만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굶주리며 버티는 예루살렘 성 안같은 내 마음이 아닌지...

2020-10-29

성경묵상의 나눔: 예레미야52:1-11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역사의 슬픈 장면이다. 바벨론의 포위 속에 18개월을 버티다가 결국 예루살렘은 함락된다. 시드기야왕은 도망가다 잡히고, 심문당하고 가족은 죽음을 당하고, 자신은 두 눈이 뽑혀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간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 후 결국 남유다도 완전히 멸망하고 만 것이다. 그 속에서의 백성들의 고통을 얼마나 컸을까!

"여호와의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2절), 여호와의 진노하심이 그들을 쫓아내시기까지 이르렀다(3)" 이것이 유다의 멸망의 이유이다.
하나님의 뜻은 멀리하고 악착같이 버티는 예루살렘 성내에서의 18개월간의 고통과 굶주림을 생각하니 그 고통이 내 마음에도 전달되어 온다.

우리 마음을 들여다 보자. 숱하게 부르시고 신호하시는 "돌아오라"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있지나 않은지. 어느덧 믿음은 잃어버리고 자기 두려움으로, 자기 노력으로 애쓰고 버티고 있는 내 마음의 성벽이 아닌지.

시드기야에게도 여러번의 회복, 만회의 기회가 있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그의 마음을 꼭꼭 닫혀있었다. 한번 빗나가면 돌아오기기 힘든 법이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기회를 주신다. 성령께서 도와주신다. 사랑을 담아 온갖 손짓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말씀으로 돌아가자. 이제는 주님을 향하고 기도의 문을 열자. 헛된 것을 의지하고 있음을 깨닫고 내 마음의 벽을 스스로 헐고 주님만을 온전히 모시자. 제멋대로 살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는 것보다, 죽을뻔 할때에 주님에게 돌아와 제대로 살라는 주님의 간곡한 음성을 오늘도 우리 모두 순종하자.

용서와 은혜

2020-10-21

성경묵상의 나눔: 예레미야 50:11-20

본문에 각 나라와 바벨론까지의 심판을 선포하시던 주님께서
역시나 못 참으시고 유다를 향해 용서와 베푸실 은혜를 말씀하신다.

이제는 죄악을 찾지도 못할 전적인 은혜(20절)
끝까지 남아있는 자에게 갑절의 회복을 주실 은혜(20)
온갖 전쟁과 승패를 넘어서 누릴 평화의 은혜(15)

아! 이런 은혜가 과연 있는가!
이런 은혜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누릴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아무리 찾아보아도,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라는 은혜이다.

비록 쓰임받아도 방심, 방종은 금물이다

2020-10-20

성경묵상의 나눔: 예레미야 50:1-10

예레미야의 예언의 중심에는 바벨론과 느브삿네살을 통한 유다의 징계와 연단이 있었다. 당시의 강대한 나라, 바벨론이라는 말만 들어도 온 백성은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그 바벨론에 대한 심판이다. 그들의 지나친 침략만행, 가득한 우상들(2절), 그리고 교만을 주님이 다루시고 계신다. 후에 북쪽의 바사, 페르시아가 일어나 바벨론을 무너뜨릴 것이라 하신다. 어느 누구도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죄의 문제를 그냥 넘어갈 수가 없음을 깨닫게 하신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죄에 대한 두려움에만 사로잡혀서는 안된다. 예수의 보혈로 내 죄가 씻김을 받았고, 살아오며 많은 죄를 주께서 예수 안에서 긍훌로 덮으셨다. 어느 누구의 죄라도 반드시 다루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어느 누구의 죄도 회개하는 자에게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말자.
그리고 늘 내 몸을 바울처럼 성령께 복종시키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자.

약속의 성취이신 예수와 온전히 연합하여(5절) 작은 죄, 집단적인 죄의 세력을 대항하자. 길잃은 양떼처럼 (6절) 죄에 빠진 이웃들의 영적 상태를 직시하며 예수가 살 길임을 삶으로, 섬김으로, 선포로, 호소와 설득으로 알게 해주자.

가을 잎들이 저마다 땅으로 귀환하듯, 우리 모두 겸손과 믿음으로 주님의 용서와 긍휼 안으로 들어가자.

결코 우리 편만이 아니다

2020-10-15

성경묵상의 나눔: 예레미야 48:26-35

미국 대통령과 나라의 지도자들을 뽑는 선거를 오늘 행사하여 메일로 발송을 했다. 용지를 보니 당이 나눠져 있고, 이름들이 나누어져 유권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내 편이라 생각하는 한사람씩만을 택해야하나, 기도에 모든 이름을 올려 드렸다. "결국 당락이 결정되겠으나 우리가 다 하나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라고.

오늘 예레미야의 말씀은 모압의 교만에 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러나 고난 후의 귀환도 말씀하신다. 이후에 계속되는 말씀이 모압, 암몬, 에돔....여러 주변나라에 대한 심판과 예언의 여러 장에 걸친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심판, 포로, 귀환과 회복에 대한 말씀으로 족할텐데 하나님은 왜 주변 나라들까지 이다지도 상세하게 거론하며 다루고 계시는 것일까? 심지어 왜 하나님이 모압을 위해서도 부르짖고 슬픔으로 신음하실까(31절)?

이런 마음을 가지는 나를 하나님이 다루심을 깨닫는다. 누구 편이냐? 내 편이냐 네 편이냐에만 머물지 말고, 더욱 넓은 마음을 품으라고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요, 예수님의 마음이라 하신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인생들을 향해 내편, 네편이 없으시다. 모든 인생들이 구원과 참진리로 나아오기를 원하실 뿐이다. 지금도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고, 모든 민족이 구원의 자리로 나아오기를 원하신다.
나라 안에서도, 나라들과의 사이에서도 내 편이 아니면 적으로 여기는 조류같이 혼란한 이 세상의 흐름 속에서도 깊은 해류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우리는 잊지 말자.

모두들 한 표의 신실한 행사 속에 기도가 함께 하기를 바라며 세상 끝의 영혼까지 사랑하시며 부르시는 주님의 넓고 깊으신 마음으로 나라의 치유와 회복과 안정을 사모하자.

지금 주님께 매달릴 기회임을 알자

2020-10-12

성경묵상의 나눔: 예레미야 46:13-28

"그가 기회를 놓쳤도다(17b)" 하나님이 애굽을 향한 말씀이다. 바벨론의 공격으로 패하게 될, 화친할 기회도, 평안의 기회도 놓친 애굽의 상황을 말씀해 주신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고 애굽지역에 피난해 머물고 있는 유다 백성들도 동일하게 기회를 놓치고 "고향으로 돌아가자!(16절)"부르짖으며 다시 한번 고통의 시기를 맞이 했을 것이다.

기회라는 것이 짧은 눈으로는 내 능력껏 붙드는 것이라 생각되고, 시대를 따라 다행스럽게, 우연히 내게 오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의 기회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그 분의 뜻대로 다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은 바벨론에게 승기의 기회를 주시고 계신다. "내가 애굽을 북쪽 백성의 손에 붙이고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리라(26) 그럴지라도 (애굽을) 다시 회복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기회는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까지이다. 당시에 강한 나라, 자존심으로 뭉친 애곱이나 바벨론이라도 정작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계신다.

이스라엘과 주변나라의 상황은 지금의 한국과 이웃나라들 사이의 정황을 떠올리게 된다. 아니 모든 세상의 인생들이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 사이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져야할 촛점은 내 이웃나라 애굽이냐 멀리있는 바벨론이냐가 아니다. 하나님이 나라들을 다스리신다는 확신이다.

말씀에서 하나님은 또 하나의 기회를 말씀하신다. "두려워말라 야곱아, 다시 포로에서 돌아올 것이고 평안할 것이며, 내가 너와 함께 하며, 다 멸할지라도 너는 사라지지 아니하리라(28)"
가장 막연한듯이 이 기회, 가장 희미한 소망의 약속같으나, 주님의 뜻을 붙드는 것이 마지막까지 남고, 확실하게 응답되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이다.

오늘날 예수를 믿고 따르는 우리도, 교회도 한없이 약해보이나, 하나님의 촛점은 계속해서 우리와 교회를 향하여 계실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하고 교회와 함께한다. 다 멸망해도 너희는 멸망하지 않게 하리라(28절)"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이요, 우리의 소망이다.

그러니 두려워말라는 주의 말씀이 나의 확신이 되게 하자.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말씀이 나의 평안이 되게 하자.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다는 말씀이 용기와 담대함이 되어 주만 의지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환난 앞에서의 대처와 대비와 대면

2020-10-09

성경묵상의 나눔: 예레미야 44:20-30

사람이 살아가면서 두가지의 삶의 스타일이 있다. 하나는 예상치 않게 당하면서 황급히 대처하고 해결하며 살아가는 삶의 스타일이고, 또 하나는 미리 대비하면서 준비하며 문제와 해결을 예상하며 견고하게 살아가는 삶의 스타일이다.

본문에서 주님은 수없이 당하면서 헤매이는 백성에게, 나라를 잃고 흩어진 유다백성에게 재난이 이렇게 일어난 이유를 말씀하신다(23절). 그 말씀은 곧 우리의 인생에 일어날 재난을 대비하고 방지할 방법이기도 하다.

“여호와의 율법과 법규와 여러 증거대로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23c)” - 내 모든 경험과 내 모든 힘과 물질과 기술을 다 보태어도 말씀을 순종하는 것만 못한 것이다. 내 것,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없어져서 대처할 길이 없을 때도, 주의 말씀만은 영원하다. 영원한 보장이다. 말씀의 나침반을 항상 들고 주가 주신 길로만 걸어가라.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23b)” - 인생에는 동반자가 있고, 가족이 있고, 친한 친구와 이웃들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대비를 하여도 어느 누가 나의 영원한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모두가 떠나도 나와 함께 하실 분이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이시다. 영적 순종에는 친밀함이 전제된다. 억지로가 아닌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 늘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환난을 미리 미리 대비하는 영원한 백신이다.

“너희가 (우상에) 분향하여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며(23a)” - 자기만, 우리끼리만...하다가 흩어진 민족이 유다백성이었다. 이기심의 향수를 끌어안고 취해 있으면 머지않아 하나님을 잃은 우상의 악취가 되고 만다.
나의 삶은 세상에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뿌리는 향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그 아들을 통해 주신 구원의 길을 전하며 사는 향기만이 영원히 신선한 향기요, 하늘에 올려지는 향연이 되는 것이다.

인생은 대처도 해야하고, 대비도 해야 하지만, 생명의 복음을 가슴에 안고 뭇 영혼들을 적극적으로 대면하여 살아야 한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한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시다.

당하여 해결하려 애쓰는 재난도 있고, 막아보려 애쓰는 재난도 있으나, 이것을 뛰어넘어 복음을 나누며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당하는 환난을 향해 우리 모두 기꺼이 나아가자. 이것이 우리 모두의 삶의 이유가 되기를 기도한다.

우상숭배, 나의 문제이다

2020-10-08

성경묵상의 나눔:예레미야 44:11-19

애굽을 오래전에 방문한 적이 있다. 고적지를 돌아보면서 느낀 것이 우상천지라는 것이다. 왕 자신이, 그리고 그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우상의 형상이다. 훌륭한 재목마다 다듬어 만들어 놓은 것이 우상이고, 큰 돌들은 하나없이 우상으로 다듬어 놓고, 우상의 전을 짓는데 쓰인 것이고, 특이한 동물은 다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속에 들어가서 산다면 저절로 우상 속에 둘러싸여 살 수 밖에 없게 된다. 그 곳에서의 삶은 우상을 배격하는 자체가 불가능한 곳이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 들어가지 말고, 들어가 살고자하면 징계할 것이요(12절), 들어갔으면 “도망치듯(14)” 속히 떠나라는 이유이다. 그렇다! 거룩하게 택함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따라가는 길의 첫걸음은 우상과 죄악이 만연한 세상을 간파하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고 사는 나의 모든 것이 우상숭배라면 지나치다 할 것인가?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지 않고, 경배하지 않고 사는 나의 모든 삶이 죄라고 하면 지나치다 할 것인가? 우리가 이런 우상과 죄에 둔감하다면,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고 사는 지금의 나 자신이 우상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애굽을 의지하는 자는 다 멸망하리라(12절)” - 주님의 심판과 경고 뒤에는 사랑하는 영혼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랑이 여전히 있으시다. 그래서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 어떤 우상이라도 단번에 깨뜨려 버리고, 다시는 침투하지 못하게 당신의 임재로 채우셨다.

그것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 분을 믿는 믿음이요, 내 삶속에 채우신 하나님의 영, 성령의 임재이시다.

오늘도 눈을 뜨고 살아가면서 하루를 마칠 따까지 우리의 모든 것에 우상숭배의 미혹이 아주 근접해 있다. 죄와 미혹의 영을 담대히 물리치며 끊임없이 예수의 임재와 그의 말씀의 권세와 성령의 충만함으로 말세의 때를 살아가자.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며 육체의 욕심(우상숭배)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망해도 결코 망할 수 없는...

2020-09-30

성경묵상의 나눔: 예레미야 39:1-18

남유다의 멸망이 오늘의 말씀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함락이 되고(2절), 시드기야왕은 비참하게 심문과 벌을 받고 바벨론으로 끌려간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이다. 지금 주님이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대적에게 내어주신 하나님의 슬픔을 본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실패작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이 죄악의 결과로 망해보고 거기서부터 다시 일어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망해도 결코 망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 우리들이 가는 길이다.

시드기야왕과 고관들의 비참한 말로와 대비되게 예레미야의 구출과 그를 도왔던 에벳멜렉에 대한 보호의 약속이 후반부에 나오는 말씀이다. 그리고 주님은 예레미야에게(통해서), 그리고 에벳멜렉에게 말씀하신다.

“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18절)” 오늘 마지막절 말씀이다. 이것이 망해도 결코 망할 수 없는 실마리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최종적인 망함은 죽음이다. 죽음이 끝장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은 죽음조차 넘어서는 승리의 시작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삶은 망했도, 실패작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분의 죽음은 믿음의 희망을 열어놓으셨고, 이제 우리의 믿음과 만날 때 새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다. 망한 줄 알았던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새롭게 사는 역사가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네가 나를 믿었으므로” - 우리 모두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믿자. 예수님의 대속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자. 절망의 자리에서도 내 속의 깊은 곳에서부터 새롭게 희망을 호흡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임재를 믿고 구하자. 그리고 바울처럼 성령에 사로잡혀 외치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8:35)”

주여 이렇게 살게 하소서

2020-09-28

성경묵상의 나눔: 예레미야 38:1-13

섬세하신 주님, 인심이 흉흉한 말세 분위기의 속에서도 주의 음성을 듣는 예레미야와 같이(3절),
나도 온갖 세상사의 소음 속에서도 언제나 내 마음을 단순케 해서 주의 음성을 듣는 귀가 되게 하소서.

은혜의 주님, 핍박과 고통이 아프게 해도, 진흙탕 구덩이에 사방이 막혀도 주의 말씀만을 전하고 또 전한 예레미야와 같이(6절),
우리도 주의 사랑과 성령의 탄식이 내 마음에 채워져 분명한 심판과, 은혜의 기회까지 저들에게 나누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능력의 주님, 힘없는 왕이라 자조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시드기야 왕을 교훈삼아(5절),
나도 사람 앞의 체면과 눈치때문에, 환경 탓하는 심사 때문에, 주의 말씀 앞에서의 내려놓음과 결심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사랑의 주님, 위기가 예상되어도, 손해가 불보듯 해도, 주 앞에서의 바른 말을 하며 악을 꾸짖고, 선한 예레미야를 위해 왕에게 호소하는 에벳멜렉처럼(9절),
우리도 복음과 의를 위해 살아가는 외로운 지도자들의 옆에 기꺼이 서주는 위로와 격려자가 되게 하소서.

소망의 주님, 새 언약, 새 영과 구원을 마음에 부어주실(렘31:31-34) 예수의 오심과 성령의 임재를 보았던 예레미야처럼,
나의 살아계신 예수님과 내 안에 계신 성령과 동행하게 하시고, 빼앗길 수 없는 소망으로 오늘도, 내일도 꿋꿋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아멘.

History in His-story

2020-09-26

성경묵상의 나눔: 예레미야 37:1-10

바벨론의 침공으로 나라가 함락되고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를 유다의 꼭두각시 왕으로 세우고 예루살렘과 유다를 지배하게 된다. 그가 유다의 마지막 왕이다.

당시 애굽의 군대가 바벨론을 저지하기 위해 나서매 바벨론의 군대는 잠시 예루살렘을 떠난다. 바벨론의 침략은 이것으로 끝인가? 예레미야의 예언은 과장된 것이고, 이정도로 성취된 것인가? 마침 예레미야에게 기도하라 요청했던 시드기야의 반 바벨론, 친 애굽정책은 이루어지는 것인가?

그러나 상황과 세상의 역사는 변해도, 하나님의 손 안에서 하나 하나 이루어져 가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움직여 가는 한 부분일 뿐이다.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이 결국 인도하심을 믿고 사는 것이 우리들의 바른 신앙생활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에 벗어난 우리의 욕심이 담긴 이기적인 기도를 조심하자. “시드기야, 신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니라(2절)”, “예레미야에게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라(3) 하였으니” 내 기도보다 더 우선적이고, 더 깊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시다. 말씀의 온전한 확신과 순종이 있어야 기도응답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사건과 일어난 상황을 보며 하나님의 뜻이라 속단하지 말라. “너희는 스스로 속여 말하기를(9)” - 이제 바벨론에게 점령당했는데, 하나님이 어디 계시기나 하는가? 애굽이 일어나니 바벨론은 끝났구나! 시드기야와 백성들의 착각이 “불타 황폐해질 성(8)으로” 더 큰 문제를 만들게 된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은 바벨론의 포로라는 연단을 지나게 하시는 것이다. 바벨론은 결국 다시 침략하고 시드기야는 비참한 포로로, 그리고 유다는 멸망하게 된다.

온 우주와 나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온 세상과 사람 앞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과 함께 담대하라. 세상에서 사건들이 일어나고, 상황이 변해도, 어느 나라가 득세해도, 어느 나라가 곤경에 빠져도,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계획은, 주의 뜻대로 이루어져 간다.

그리므로 우리의 역사는 사람이 주관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역사(History in His-story)임을 믿고, 언제나 깊고 넓은 주님의 마음을 알고 의지하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자. 세상나라들이 보여주는 흥망성쇄가 무엇을 말해주나? 하나님의 역사(His-story)가 지금까지, 지금도, 앞으로도 이루어져 감을 말해주는 것이다.

지금은 코로나 팬데믹 시대? 아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이끌어가시는 시대이다. 오늘도 일어날 온갖 세상 일들과 상황 속에서도 휘둘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살아가는 견고한 신앙이 되도록 겸손히, 견고한 믿음으로 기도하자.

왜 안들어 먹을까?

2020-09-23

성경묵상의 나눔: 예레미야 35:12-19

주님이 유다 백성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정말 안 듣는구나!
오늘까지 그렇게 말하여도(14b)
나의 사람들을 그렇게 보내어도(15)
그래서 돌이키면 살 수 있다 그렇게 말하여도(15 b)
안 그러면 재앙이라 그렇게 말하고 불러도 대답조차 않는구나!(17)
지금 보여주는 레갑사람들을 보아도 마음을 바꾸려 않는구나!(16)

우리가 왜 이다지도 안들어 먹을까? 우리의 오관이 마비가 되어서이다.
말씀에는 축복만이 아니라 심판도 분명함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설마설마하기 때문이다.

좋은 말만 듣고자 귀가 익숙하고, 편한 사람만 가까이하고자 우리끼리의 위안에 귀가 길들어져서이다.
내 삶의 행태를 고쳐갈 마음의 깨어짐이 달콤한 세상우상들의 맛에 혀가 휘둘려서이다.

초라한 예언자를의 심판 메세지보다 그럴듯한 거짓 제사장들이 향내에 빠져 분별의 감각을 맡겨 버려서이다.
주님의 음성과 친밀한 교제의 신령한 촉감을 죄된 삶의 쾌락으로 자꾸만 문질러버려서이다.

주님의 아픔이 담긴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그들에게 선포한 모든 재앙을 내리리니 이건 너희가 듣지 않아서이다(17b)”
잊지말자. 지금도 듣는 자와 안 들어먹는 자는 확연히 갈라진다. 듣는 자로 살 것인가 안 듣는 자로 살 것인가 내 길은 두 갈래 뿐이다.

여전히 죄악과 재앙의 길을 향해 고집스레 가는 자도 있겠다.
내게 무슨 일이 있을라고 하며 태연한 척하는 이도 있겠다.
그 속에서도 “아! 내 앞에 닥친 심판이 이것이구나!” 깨닫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우리가 어찌할꼬!” 탄식하며 귀를 여는, 그 귀가 들어먹는 자도 있으리라!(행2: 37)

듣는 자가 복이 있다. 들리는 자가 은혜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우리를 부르시고 손잡아 주시는 예수가 계시다!
“너희가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고) 각각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모든 사람에게 (너에게도) 준 것이다(행2:38-39)” 귀로 듣고 마음으로 하는 아멘이 종일 살아 행동하는 변화가 그대에게도 진정 있기를 축복한다.

예수와 함께 하는 미니멀 라이프

2020-09-22

성경묵상의 나눔: 예레미야 35:1-11

본문에서 하나님은 타락하고 불순종하는 유대지도자들과 백성들 앞에 예레미야를 명하여 레갑사람들을 데려다가 술을 마셔보라 하며 비교하게 하신다.

예후와 함께 바알 선지자들을 물리쳤던 조상 요나답(여호나답)의 유훈을 따라 지금껏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요나답의 명령에 대대로 순종하며,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집도 짓지 않고 파종도 하지않고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장막(Tents)에서 살라(7절)”는 명령에 후손 대대로 지금까지 순종하며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술마시기를 거부한다. 하나님의 저들의 삶을 아시고 보여주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한 삶을 자각하기를 원하셨다.

레갑사람들이 살아온 모습에서 하나님께 서원한 나실인의 모습을 보지만, 이들의 고백과 삶은 오늘날 우리들의 고백과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야말로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마시고 먹는 일을 절제해야 하는 나눔이 있어야 하고, 집도 짓지 않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파종하지 않고 주의 뜻이라면 어디든지 가리라는 떠남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한다.
포도원을 소유하지 않듯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간소한 장막에서 살아가는 비움을 실행하며 주를 바라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의 오심을 고대하는 자, 구원받은 성도라면, 천국과 주의 재림을 믿는 성도라면 이렇게 살아야 옳은 것이다.

어느 글에 보니 미니멀 라이프를 이렇게 정의한다. “소유욕 혹은 소유물에 얽매이는 삶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양식...”

신앙인의 미니멀 라이프도 다를 것이 없다. “소유욕과 소유물에 얽매이는 삶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를 이웃을 향해 추구하는 믿음의 양식”, 이것이 레갑사람들의 삶의 가치였고, 우리들이 살아가는 예수 안에서의 미니멀 라이프이다.

하나님이 지금도 세상의 타락과 불순종을 일깨우시려 할 때 레갑사람들처럼 나의 가정과 미니멀 라이프가 샘플이 되도록 지금도 나눔과 비움을 실천하며 떠남을 늘 준비하며 살아가자.

요즘 크고 비밀한 일이 뭐 있나?

2020-09-18

성경묵상의 나눔: 예레미야 33:1-13

불경기에 고민하던 회사 사장과 부장이 대화중이다. 사장이 부장의 뾰족한 턱을 만지면서 뭐 뾰족한 수가 없을까? 그러자 부장이 사장의 대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뭐 반짝반짝하는 일이 없을까요?”

뾰족한 일정도가 아니라, 반짝하는 정도가 아니라 성도라면 알아야 한다. 주님은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3절)”고 하신다. 그렇다! 어느 누구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님은 크고 비밀한 일을 주신다.

“갇혀있을 때에(1절)” - 힘들고 어렵고 답답한가? 위를 바라볼 때이다. 부르짖던, 속삭이던 주를 바라볼 때임을 알고 그 분만을 바라보고 친구삼은 깊은 영혼의 침잠이 되게 하라. 크고 비밀한 일은 그분과 함께 기도할 수 있고 응답을 받고 사는 지금의 내 삶이다.

“치료하고 고쳐 낫게 하고(6절)” - 내 자신을 한번 자세히 돌아보라. 내 이 손과 발과 몸, 내 삶, 내 가족과 내 환경, 지금까지 지내온 것....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었고, 치료가 있었고, 중한 병조차 낫게 하신 분이 주님이시다. 내 삶이 주님이 주신 기적의 현장이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크고 비밀한 일이 나 자신의 감사하는 삶인 것을 알게 된다.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9절)” - 예수를 영접하고 그의 자녀가 되었고, 벌써부터 내 이름 석자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이름이다. 내 장담할 수 있건데, 그 분을 영접하고 그 분과 동행하면 인생의 구비구비마다 크고 놀라운 일이 선물처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지난날처럼 되게 할 것이라(11절)” - 지난날은 예루살렘도, 다윗과 솔로몬의 부귀영화도 아니다. 우리는 지난 날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인생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함께 하시던 에덴같은 영원한 나라 천국을 향해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천국을 보는 자만이 크고 놀라운 주의 응답을 진정 누리며 매순간을 사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주신 오직 예수

2020-09-17

성경묵상의 나눔: 예레미야 32:36-44

율법을 주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영원한 언약을 우리 마음에 세워주시겠다(40절) 하신다. 서슴없이 고백하자. 마음에 새길 수 있는 영원한 언약은 예수 밖에 없다. 그 분이, 그 분을 영접한 자가 진정한 복이 되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40).
그러므로 그 약속을 우리 마음에 담고 새기자.

노여움과 분함과 큰 분노로 버림받은 우리(37)를 회복과 축복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42)가 예수이시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여는 것, 그 분을 향해 갈 수 있는 오직 한 길이 예수이시다(39).

놀랍게도 하나님 자신이 마음과 정성을 다해(41) 다시 심으시리라는, 이 사랑을 흠뻑 받을 수 있는, 복된 삶을 심어가는 일이 예수를 믿을 때에 일어난다.

“그들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리라(44)” - 얽매였던 온갖 우상을 끊고, 하나님의 축복된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은 오직 예수를 믿는 자들이다. 본문에 예수란 이름은 보이지 않으나 본문을 포함해서 이 영원한 언약의 말씀을 쓰시고 약속해 주시고 이루어 주신 이가 성부 성령 그리고 성자 예수님이시다.

“오직 예수!” 이 약속의 말씀의 열려진 비밀을 아는 우리들... 세상의 포로됨에서 자유하고, 돌아갈 영원한 약속의 안식처인 천국까지 늘 희망을 안고 이 비밀을 세상 끝까지 전해주며 살아가자.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달라지는 것들

2020-09-11

성경묵상의 나눔: 예레미야 31:1-9

군에서 대령이 장군으로 진급하게 되면 계급장이 별로 바뀌는 것과 함께 30가지 이상이 달라진다고 한다.

오늘 성경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 백성이 되리라(30:22, 31:1), 내가 이스라엘의 아버지다(9)”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내가 하나님의 책임 안에서 살고, 하나님의 자녀요 하늘의 별처럼 여기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나에게도 적용되는 것이기에 엄청난 특권을 내가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본문만 보아서도 주의 백성, 주의 자녀가 되었기에 누려야할 것이 많다. 혹 놓치고 산다면 꼭 다시 찾아 누리며 살기를 바란다. 찾아먹지 못하면 어리석은 바보이니까.

광야같은 어려움에서 안식할 수가 있다.(2절)
그 분의 사랑을 받는 자로 행복할 수가 있다(3).
처녀가 혼인식장에서 기뻐하듯이 기쁨이 넘치는 일들이 많아진다(4). 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심는 것도 흥분이 되지만, 풍성한 열매를 거두면서 살아가는 일이 많아진다(5).
주님이 계신 시온으로 올라가는 예배와 기도하는 것이 거침이 없고 당당하다(6).
힘없이 남아있는 것 같으나 결국 온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을 알리고 함께 기뻐하게 된다(7). 왜? 우리가 그의 백성이요 자녀이니까.

맹인처럼, 장애인처럼, 임신부처럼 약한 것 같아 흩어지고 망할 것 같으나, 천만에! 오히려 단단해져 함께 모여 돌아오게 된다(8). 회복을 이루어 낸다.
삶의 자리가 힘들고 어려워 눈물나고 고통스럽지만, 부르짖으면서 그 자리를 샘물의 계곡으로 바꾸어 버린다.

어떻게 ? 왜? 우리는 하나님이 백성이요, 그 분의 자녀요, 그 분의 영이 내 안에 지금도 살아계시니까! 오늘부터라도 당당하게 누리며 살자.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 분이 내 아버이시다!

상처와 새살과 흉터

2020-09-10

성경묵상의 나눔: 예레미야 30:12-24

누구나 모든 사람이 죄인이듯이, 몸에든 마음 속에든 상처의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다. 잠깐을 내 손과 발, 몸을 살펴봐도 상처의 흔적들이 보이고, 살면서 어느 사람을 문득 생각하노라면 가라앉은 상처의 기억이 슬쩍 속에서 치고 나와도 되는지 힐끗거린다.

“네 죄로 잔인한 징계를 내가 내렸고, 네 고통이 심하다(14, 15절). 그러나 내가 너의 상처로부터 새살이 돋아나게 하여 너를 고쳐주리라(17절).” 유다백성이나 나아만장군만이 아니라 내게도 주시는 본문의 주의 말씀이시다.

잔인한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잔인함이 아니라 우리의 죄의 잔인함이다. 내 상처는 우리 스스로 빠지고 저지른 죄의 유혹이요, 욕심과 교만으로 인한 나 스스로의 온갖 자해행위이었다.

그런 나에게 예수가 와주셨다. 그의 피가 치료의 능력이요, 회복의 묘약이다. 이대로 죽을 것 같았던 내 아픈 상처마다 죄악마다 치유와 용서의 당신 피로 새살(17)같은 새삶을 주셨다. 그러기에 어느 상처의 흔적 하나라도 당연하듯 여기지 말고 거기에서 예수의 사랑을 만져보라.

이제 문득문득 보이는 것이 상처로 남은 흉터이다. 이것마져 지워버리고 싶지만 이건 감추어야할 흉터가 아니다. 이것은 “너는 내 백성, 나는 너희 하나님(22절)”이라시는 하나님의 인치심이다.바울처럼 (행20:7) 밤새도록! 누구에게든 기꺼이 풀어 나누어 주어야할, 하나님이 베푼 사랑(18절)의 추억이 담긴 이야기 보따리이다.

들통날 거짓예언을 왜 하나?

2020-09-04

성경묵상의 나눔: 예레미야 28:1-17

본문에선 거짓 선지자 하나냐가 시드기야왕과 백성들, 예레미야 앞에서 예언을 한다. 하나님이 바벨론 왕을 꺽으시고, 바벨론에 끌려간 포로들도, 그곳에 가져간 성전기구들도 2년 안에 다 돌아온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이다(2, 11절). 그리고 예레미야의 목에서 나라가 망하고, 모두가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는 상징적인 멍에를 빼앗아 꺽어버린다(10).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냐의 말에 속아서 치는 박수와 환호가 들리는 듯 하다. 저들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믿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역사는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유다는 닥쳐온 멸망의 길로 나아가고 있을 뿐이다. 하나냐 또한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그 해를 못넘기고 죽고만다(17).


하나냐가 사람들을 속이려고 자기가 잘못인 것을 알고도 말하는 거짓 예언이었을까? 거짓이라기보다 자기 나름대로 판단한 착각에 가까운 것이라 여겨진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도 이런 착각 속에서 자극적인 말에 끌리거나, 그저 괜찮겠지하며 안주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죄와 회개를 소흘히 여기면 하나님의 계획과 길을 깨닫지 못하는 스스로의 둔감함에 빠지기 때문이다. 괜찮겠지라는 자기 희망사항을 하나님의 뜻과 혼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회개와 용서와 변화된 삶으로 거룩한 길을 가야 한다.

하나님이 뜻보다 사람들의 요구를 맞추기에 익숙하다 보면 어느 사이에 사람들의 요구와 인본주의에 막혀 하나님과 자신과의 사이에 교제는 끊어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사람을 위로하고 위로받는 일에만 얽매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부지런히 찾고, 끊임없이 순종하며 살아가자.

또 하나님의 계속적인 계시를 못 받고, 우리는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선택되고, 사랑받는, 결코 버림받을 수 없는 백성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착각의 죄가 망국의 길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은혜안에 거하는 것도 일평생 내 몸을 치며, 죄를 물리치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영적 싸움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것을 상기하며 죄를 물리치며 회개로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의 연단과 절망의 때를 지나가도, 끝까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때를 향해 따라가자.

지금 그대는 누구의 음성을 들을건가? 2년 안에 이 세상이 주는 온갖 평화가 저절로 온다는 거짓 위로인가? 반드시 죄를 회개하고, 연단을 기꺼이 받으며, 믿음을 견고히 하고, 성령을 따라, 하나님이 주시는 때까지 견디겠다는 결단인가?

바벨론 느브갓네살의 멍에라니요!

2020-09-03

성경묵상의 나눔: 예레미야 27:1-11

이스라엘이 타락과 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자, 하나님은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왕을 통해 이스라엘을 포로생활이라는 연단의 풀무불로 집어넣으신다.
백성들에게는 이전부터 마음이라도 좀 가까웠던 애굽도 아닌 바벨론의 멍에를 메게 되리라(11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전하는 예언자 예레미야도 이해가 안되는 미운 인간이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5절)과 피조물의 눈은 미래를 보는 눈이 다르다. “지금 싫다, 맘에 않든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따지는 인생들이지만, 하나님은 바벨론을 통해 열국을 뒤흔들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70년의 연단의 기간을 준비하셨고, 그 이후 이스라엘을 뛰어넘는 수천년의 계획을 거침없이 진행해 가신다.

그러므로 이해되지 않아도 따르고 순종해야 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 그 자녀들에게는 있다. 너무도 싫은 이방나라 왕 느부갓네살이며, 고통스러운 포로신세이지만, 통과해야지 피할 길이 결코 아니었다. 하나님의 길고, 깊고, 넓으신 뜻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결국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의 오심은 어떠하였나? 그 분의 오심과 사심이 이해되지 않아도 믿고 따라야 사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목수인 젊은이, 십자가 사형수인 죄인이 하나님의 아들, 어린양이시라니 쉽게 이해되겠는가? 믿으라니 마음이 열리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싫다고 거부해도, 그 분만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시다. 그 분을 통해야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지금 내가 상종하기 싫고 사람, 인정하기 싫은 문제들, 내게 닥친 어이없는 일이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바벨론 연단이라 생각하라. 이해가 않되어 답답하고, 힘들어도 그 속에서 주님의 깊으신 손길을 붙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어두웠던 주위를 갑자기 밝은 햇살이 밀어내고 온 세상을 새롭게 하듯이, 주의 영이 임하여 눈과 마음이 열리고, 70년 포로같은 지금의 답답함이 소망으로 바뀌어지길 바란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7절), 내 인생에 보내주신 예수 안에서의 새로운 삶의 감격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자.

하나되도록 붙여가는 삶

2020-08-27

성경묵상의 나눔: 로마서 15:1-13

어릴 때 신발수선하는 분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기억에 남은 모습은 구두 양쪽에 풀칠을 하고는 거의 마를 때까지 붙이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함께 붙이고 망치로 힘있게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래야 잘 붙는가 보다. 너무 풀칠을 많이해도 효과가 없다나? 신발 고칠 일도 없는 시대이지만 참고하길 바란다 ^^.

떨어져 나갈 우리를 예수님을 통해 보혈이라는 사랑의 접착제로 발라주시고, 결코 떨어지지 않는 하나님과, 영생에 붙여주신 것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이다.
오늘 바울을 그런 우리가 “한 마음, 한 입이 되고(5), 너희도 서로 받으라(7)”고 한다. 마귀는 흩어서 떨어뜨리려 하지만, 우리가 따르는 성령님은 오늘도 우리를 사랑으로 하나되게 매어(붙여) 주신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붙어있는 자들이다. 예수님이 대신 비방을 받으시고(3), 본받게 하시고(5), 할례받은 유대인의 종(몸)이 되셨다(8). 우리는 그 분이 징계받음으로 평화를, 그 분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나음을 입었다. 이제는 그 분과 떨어지지 말자.

우리의 손에서 떼놓고 살지 말라고 교훈과 위로의 성경을 붙여주셨다(4). 내 삶의 어느 곳에든지 성경구절들을 삶 속에 붙여가라.

함께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하며 붙어서 살아야 험한 세상을 이긴다고 “한마음, 한 입(6)”이라는 교제의 풀을 주셨다. 요즘같이 떨어져 사는 시대에도 우리는 서로 간의 한마음 한입 영성을 잊어서는 안된다.

약한 믿음의 성도(1)가 있다면 내가 먼저 긍휼과 덕의 풀로 붙여 함께 이겨나가라고 하신다. 언젠가는 내가 약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나와 너, 그리고 주님과 삼겹줄로 든든히 붙이자.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12). 열방의 78억의 조각도 붙여져야 한다. 3000조각이나 되는 풍경화 종이퍼즐을 본 적이 있다. 흩어져 있는 그 퍼즐을 한 개들고 몇 분을 헤매다가 내려놓은 적이 있다.

이 세상은 하나가 되어야 할 퍼즐조각들이다. 우리 모두가 하나되어 열방이 돌아와 하나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이루고자 구원의 퍼즐을 붙이며 사는 것이다(9-12). 한 영혼이라도 더 주님의 구원의 공동체인 교회와 목장에 붙여지도록, 땅끝까지 복음전파의 퍼즐만은 내려놓지 말고 끝까지 동참하자.

본질적인 것에 생명을 걸고 있는가?

2020-08-25

성경묵상의 나눔: 로마서 14:1-12

사람이 판단하며 사는 것은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표시이다. 눈에 보이고, 마음에 떠오르고, 생각에 올라오는 일들의 판단을 어찌 막을 수가 있겠는가! 다만 건강하게 판단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약한 믿음에서 나오는 미숙한 의견, 무엇을 먹느냐는 다양한 차이, 어떤 절기가 더 중요하냐는 사람들의 차이에 몰두하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주의 뜻을 따라, 주를 위해 살며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교회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먹는 자도 주를 위해 먹고,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해 먹지 않는다(6절)”면 다 포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본질이 무엇인지를 놓치않고 살아간다면 비본질적인 것이 목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본질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것이다(8절).” 매 순간 주의 것임을 선포하며 그 고백 속에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제일 처음 탄 비행기는 꽤 나이 들어서 탄 서울에서 제주행 비행기였다. 첫 비행기 여정, 그 제주여행이 얼마나 추억꺼리였을까! 그러나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비행기 안에서 본 하늘이다. 잔뜩 흐린 날 비행기가 이륙하니 내 마음에는 막연히 그냥 이렇게 구름 속으로 제주도까지 가나 했다. 그러나 곧 비행기가 높이 뜨고 비를 품은 검은 구름대를 지나니, 아래도 깔려있는 흰 구름, 검은 구름 융단과 한없이 열려있는 파란 하늘이 너무도 놀라웠다! 아! 어떤 구름과 관계없이 하늘은 그 위에 올라가면 언제나 파랗구나!

변함없는, 높은 하늘같은 변치않는, 생명을 걸어야 할 우리의 본질을 오늘 성경이 말씀한다.
모두를 사랑으로 대하라.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3)”
사람의 변화를 주님께, 성령께 맡기라.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다(4)”
주의 것으로, 주를 위해 살라.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8)”
말씀을 타협하지 말고 끝까지 순종하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11)”
말세의 시대 속에 주 앞에 설 날을 준비하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10), 직고하게 되리라(12)”

우리 모두 본질을 흐리고자 하고, 뒤집고자 하는 구름 덮힌 이 세태 속에서 주의 뜻을 따라 꿋꿋하게 걸어가자. 광명한 주의 때는 결코 멀지 않은 것이다.

먼저하는 것이 신앙의 능력이다

2020-08-21

성경묵상의 나눔: 로마서 12: 9-14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신앙생활의 여러가지 덕목을 권하고 명령하고 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고, 형제자매 사랑하고 존경하고, 열심히 주를 섬기고, 소망, 환난 중 인내, 기도에 힘쓰고, 성도들을 대접하고 섬기고, 심지어 박해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

이런 실천들은 너무나 중요한 성도생활의 핵심이고, 언제고 돌아보고 자신을 점검해야 할 내용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하나있다. 그것은 “먼저”하는 것이다. 신앙의 실천사항들을 알아서만도 안되고, 남을 판단하기만 해서도 안되고, 오늘도 내가 먼저 이 말씀을 순종하고, 행할 일을 실천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앙은 관계성이고, 신앙의 능력은 다른 이들을 품고, 사랑하고, 섬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서 먼저 행해야 하고,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고, 먼저 결단해야 한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롬 12장 9절),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14절)” - 악을 물리치는 것도 먼저해야 한다. 누가 물리쳐 주는 것 아니다. 다른 때가 오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 속의 분노, 때로는 유혹 앞에, 내가 오늘 용단을 내리고 악을 물리치고 기꺼이 선한 일을 결단하라.

“형제 사랑, 우애, 존경하기를 먼저하라(10)” - 사랑을 먼저 표현하고, 우애를 위해 먼저 희생하고, 존중해 주는 따뜻함을 먼저 표현하자.

“환난 중에 참고, 기도에 항상 힘쓰며(12)” - 우리에게 다가온 고난과 문제들을 먼저 감사하자. 마지못해, 치여서 감사해보려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의 자리, 문제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먼저 감사하며 대면해 나가자.

“성도들에게 공급해주고, 손대접하기를 힘쓰라(13)” - 오늘 누구를 섬길까? 주고 받으려는 심사 속에는 별로 많지 않은데, 대가없이 먼저 섬기려니 섬길 분들이 너무 많다! 기꺼이 오늘 한 사람이라도 먼저 섬겨보지 않겠는가?

내가 믿는 신앙, 내가 따르는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먼저)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먼저) 보여주셨다(롬5:8)”
오늘도 내가 먼저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소중한 오늘의 덕목들도 보기만, 말하기만 좋을 뿐이다.

그리 굵지않은 외나무 다리에서 산양 두마리가 가운데서 마주보게 되었다. 싸워서 건너가야 하나? 뒤로 돌아 가기도 불가능한데? 그 때 한마리가 먼저 납작 엎드렸다. 그러자 다른 한마리가 그 위를 밟고 먼저 건너갔다.

나는 진정 먼저 납작 엎드려 길이 되어준 산양이 되기를 원하는가? 주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다. 먼저 내 속에서 이겨내고, 먼저 사랑하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섬기는 것... 이것이 신앙의 능력이다.

산 제사, 삶으로 드리는 제사

2020-08-20

성경묵상의 나눔: 로마서 12:1-8

구약의 제사는 산 제물을 죽여서 드리는 것이었다. 이제 바울사도도 제사를 이야기한다. 12장에서부터 신자의 생활을 다루는 것이기에 본문의 산제사는 살아서 드리는 삶의 제사이다. 그러면 죽음과는 관계가 없나? 아니다. 어느 누구가 아닌, 바로 내가 죽고 이제는 내 안에, 내 삶 속에 예수가 살아계신 새로운 삶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변화를 받아(2절)” - 나를 산제사로 드림은 이제는 예수를 믿고 옛것이 죽고 변화되어 주를 위해 살아가는 삶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라(2b)” - 나를 산제사로 드림은 이미 내가 죽었으나, 여전히 솟아나려는 옛 자아를 주님의 선한 은혜 앞에, 기뻐하시는 말씀 앞에, 성령의 뜻 앞에서 죽이는 삶이다.

“각 사람에게...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3)” - 사람마다 믿음의 양이 다른가? 아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신뢰는 같을 뿐이고 그 분량의 역사와 결과는 주님이 주관하신다. 나를 산제사로 드림은 믿고 맡기고 하루 하루를 살며 응답을 체험하는 나의 삶이다.

“예수 안에 한 몸이요 서로 지체가 되었다(5)” - 산 제사로 드림은 머리인 줄 알고 제멋대로 살았던 내 삶을 예수님의 지체로 드린 것이다. 거친 발바닥의 역할이라도 기꺼이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다르니...예언...섬김, 가르침...위로... 구제...(6-8)” - 나를 산 제사로 드림은 나의 은사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의 내 은사가 더 깊고 넓고 풍성하게 드려져야 한다. 새로운 환경에 주의 뜻에 따라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산제사로 드리는 우리에게 “지금 이대로, 그럭저럭, 되는 대로” 사는 인생관은 바르지 않다. 나이 탓, 환경탓, 신세타령을 하지말자. 끊임없는 도전으로 주를 뜻을 이루어 드리는 나의 삶, 그것이 산제사로 드려진 우리의 남은 생애이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합니다

2020-08-12


성경묵상의 나눔: 로마서 9:1-13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사망도 생명...”도 어떤 것도 자신을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 9장에서는 동족의 구원, 예수에게로 나아온다면, 자신은 그리스도에게 끊어질지라도 원한다고 한다(3절). 다시말하면 생명을 내놓고 동족의 구원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유대민족이 가지고 있는, 복음 앞에서의 강퍅함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큰 근심과 고통이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1-2절).

모세 또한 이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출32장),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이처럼 동족과 온 세상의 영혼들을 향한 영적 큰 근심과 상한 심령으로, 생명을 걸고 영혼을 살리는 일에 나서지 않는다면 세상에 소망은 없는 것이다.
바울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라는 그 간절한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내 안에서 되살리자.

# 살아계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5절)”
바울은 자기 의에 빠져 살다가 복음이신 예수를 만났다. 죄인의 괴수였던 자신을 보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구원을 체험하였다. 살아계신 그리스도 외에 모든 것이 배설물같이 여기는 변화와, 복음의 영광을 본 사람의 감격과 불신자가 맞을 지옥의 처참함을 아는 안타까움이 그의 큰 근심과 고통이 되어 마음 속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마음 이전에 예수의 마음이다. 주여 이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내게 주소서!

# 동족애와 선택의 축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스라엘)에게는 양자됨, 영광, 언약, 율법, 성전예배, 약속들이 있고, 예수가 그들에게서 나셨다(4, 5절)”
마라토너가 피니쉬 라인 몇 미터 전에서 쓰러져 통과못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님을 온 세상에 전하여줄 가장 귀한 특권을 받은 동족들이 율법 앞까지만 와서 스스로 주저앉은 것을 보는 동족애와 그들을 일으켜 복음으로 인도하려는 안타까움이 거기에 있다. 주여, 지금도 주저앉아있는 영혼들에게 내가 찾아가게 하소서!

# 약속하신 말씀의 성취인 복음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김을 받으니라(8절),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9)”
바울은 예수 안에서 복음의 열쇠로 율법의 최종비밀을 열게 되었다.

주님의 뜻대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약속의 말씀을 주셨고, 주님의 뜻대로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선택하여 약속의 말씀을 주셨고, 주님의 뜻대로 에서가 아닌 야곱을 선택하여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요셉과 마리아를 선택하여 약속의 말씀 자체인 예수를 주셨다.

“그(예수)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다(5절).” 그 예수와 복음만이 유일한 의로움과 구원의 길이요,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길인 것이다.

주여, 오늘 하루도 내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죄된 세상으로 빗나가는 수없는 세상영혼, VIP들이 결국 눈을 열어 살아계신 예수와 그 복음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같이 주의 선택을 확증하게 하소서. 이것이 내 생명이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것이옵니다! 아멘 아멘!

진정 성령님이 도와주시길 바라는가?

2020-08-10


성경묵상의 나눔: 로마서 8:26-30

집의 소파를 옮길 때가 있었다. 혼자 애쓰니 아내가 도와주겠다고 한다. 힘없으니 오히려 짐된다고 그만두라고 했지만 아내가 한사코 나서서 함께 옮기게 되었다. 혼자서는 참 힘든 일을 수월하게 마칠 수가 있었다.

힘이 문제가 아니다. 실력이 문제가 아니다. 함께 한다는 것이 실력이요, 함께 할 때 힘이 되는 것이다. 하물며 성령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내가 널 도와줄께”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한다(26절).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도록 요청하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 성령이 지금도 역사하심을 인정할 때 도우신다.
창세기 1:2절 시작에 하나님의 영이 계신다. 예수님과 함께 항상 성령이 계셨다. 계시록 마지막 22장 끝부분, 17절에 성령과 신부되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있는 로마서 8장에는 성령, 영이라는 단어가 19번 이상이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과 친숙해야 한다. 실질적인 교제가 있어야 한다. 지금도 그 분을 내 지식에, 내 느낌에, 내 삶에 인정해야 한다. 그런 삶에 성령이 도우신다.

# 성령께 내 약함을 내놓을 때 도우신다. 바울의 육체의 질병을 세번기도할 때 받은 응답은 “내가 약할 때 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는 것이었다(고후12). 오늘 본문에서도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26절)”라고 한다. 약함을 감추지말고 기꺼이 성령께 내놓으라. 공동체 속에 역사하는 성령이시기에 서로의 건전한 중보기도가 가능한 분들과 함께 성령 앞에 기꺼이 내어놓으라. 그 때 “주의 영이 탄식하실 정도”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도우신다.

# 성령을 의지하고 기도할 때 도우신다. “하나님이 성도의 마음을 담아 기도하는 성령의 생각을 다 아신다(27절)”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되심은 빛이상의 속도요, 동시간이시다. 성령이 내 기도를 접수하시면 하나님에게 상달됨은 같은 시간이다. 기도의 응답을 원하는가?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의 감동 속에 기도하라.

# 성령의 힘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를 따를 때 도우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합력해서 선을 이룬다(28절),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29절)” - 우리 힘으로 예수를 믿을 수 없고, 본받을 수 없고, 우리 노력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성령이 나를 주장하시고, 나를 변화시킬 때에 어느덧 예수를 닮으며 하나님 사랑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만이 “나를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화의 길을 가게 하심(30절)”을 생생하게 오늘도 깨닫게 하시고, 고난 중에라도 감사하며 이 길을 가게 하시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합력함은(28절) 곧 성령과의 합력이다. 우리 모두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구하고, 의지하며, 그 분의 도우심을 구하고 응답받고, 늘 새힘을 얻으며 선한 주의 길을 걸어가자.

죄는 죽여야 하고, 죄의 몸은 죽어야 한다

2020-08-05


성경묵상의 나눔: 로마서 7:1-6

아내가 틈틈이 뽑다 뽑다 손을 들고 포기한 것이 집의 앞마당과 넓은 진입로의 잡초이다. 할 수 없이 마음먹고 제초제를 몇번 뿌리고 나서야 겨우 정리가 되었다.

끝없는 잡초처럼 솟아나고 우리 마음을 들어와 병들게 하고 결국 아프게 하는 것이 죄이다.
주님을 모를 때는 양심이 나의 죄를 지적하며 때때로 절망하게 하였고, 아프게 하였고,
주님을 알게 된 후로부터는 말씀(율법)이 나를 드러내며 죄를 인해 부끄럽게 하였고, 더 아프게 하였다. 그러기에 그 죄는 맞장뜨고 해결을 보아야만 하는 녀석이었다.

어느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진정 마음을 여는 순간, 나의 죄를 그 분의 보혈이 잡풀을 죽이듯, 죽여서 깨끗케 하셨다.
그리고 성령을 내 가슴에 만나는 순간, 내 죄악된 몸은 죽고 깨끗한 앞마당같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고대사회 속에 남편의 법(2-3절) 아래서 많은 여인들이 사랑받고 보호받기보다, 어쩌면 핍박받던 일도 많았을 것이나, 그 남편의 죽음으로 일단 삶이 선택이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이제 남편의 핍박에서, 아내의 핍박에서 자유이냐 보다 집중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영원한 남편이신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내게 주신 묶여있는 죄로부터의 자유이다(5절).

그러므로 지금 내가 묶인 죄의 참담함을 안다면 여전히 유효한 예수와 그 복음 앞에 나아와 부르짖으라. 예수복음(4b)이 죄에 대한 유일한 해결사이다.
그래야 율법이 드러낸 나의 죄는 죽고, 신랑되신 예수와의 새로운 관계속에 참 자유가 시작된다.

그러나 그 자유가 저절로 유지되고 오래가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죄의 잡초가 내 생각과 몸에 솟아나 놀라지는 않는가? 그러기에 우리의 삶에 새로움으로 채워지고 유지되어야 하고, 성령의 임재를 내 안에 채우고(6절)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복음, 예수 보혈로 죄를 죽이고, 죄의 몸은 죽어서 사는 새로운 피조물의 삶인 것이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진정 죄에 죽었는가?

2020-08-03


성경묵상의 나눔: 로마서 6:1-11

오래 전에 고향에서 닭잡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무서운 칼날 앞에 죽음의 살기를 느낀 닭이 결정적 순간에 힘을 다해 퍼득이며 도망을 쳤다. 닭은 피흘리며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다니고, 사람들은 잡으려고 정신없고...한마디로 혼란 속의 난장판이었다.

우리가 제대로 예수 안에서 죽지 않으면 삶이 난장판이 된다. 죄의 공격과 넘어짐에 피흘리고, 사람에게 이리 저리 치이고, 내 안과 밖의 염려, 두려움, 분노가 섞여 난장판이 된다. 평안과 안식은 말뿐이지 삶은 고초가 된다.
그러므로 이것을 묻고 답을 붙들어야 한다. “나는 정말 죄에 대해 죽었는가?”

# 진정 예수를 영접했다면 죄에 대하여 죽게 된다.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6절)”
신앙은 예수와 십자가에서 내가 죽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고, 예수에 대해 사는 것이다. 세상 유혹과 욕심과 죄가 나를 지금도 괴롭히는가? 죄에 대해 죽기 위해 예수를 영접하고 회개하며, 복음의 능력을 가지라. 나의 죽음과 새삶을 맛보게 될 것이다.

# 내 모든 생활을 예수와 함께 세례 속에 담그었다면 죄된 생활이 죽게 된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4절)”
물세례는 물속에서의 옛사람인 죄악된 생활의 죽음과 물밖에서의 새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쉽게 우리의 세례가 퇴색하는가!

그러므로 실상 세례는 예수의 피에 나의 평생의 삶에 적용하여, 내 자아를 담갔다가 꺼내는 삶을 살아가는 피의 세례가 되야 한다. 그대가 다시 죄에 빠지는 것은 정상이 아닌 것이다!(2절) 그래서 이 험한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내 자아와 내 판단과 내 고집은 죽었다는 처철한 피흘림의 영적 싸움을 하면서, 예수의 마음, 예수의 말씀, 예수의 임재 속에 세례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 지금 예수와 함께 부활을 체험하는 새생명이 확실하다면 죄에 대해 죽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의 부활과 연합한 자(5절,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8절), 예수 안에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11절)”
죄가 틈타지 않도록, 심지어 다가오지 않도록 나의 삶 속에 예수의 부활이 살아있게 하라. 찬송에 예수의 영광과 감동이 있게 하고, 말씀 속에 예수를 수시로 만나고, 기도 속에 살아계신 예수와 호흡을 맞추고, 예배 속에 예수의 오심, 죽으심, 부활하심, 다시오심을 경배하라.

그래서 나의 옛 자아, 죄악된 삶이 다시는 깊은 바다 속에서 떠오르지 못하게 하고, 예수와 동행하는 삶을 살며 마귀가 아예 접근 못하게 하고(9절), 더 나아가 죄악된 어둔 세상을 나의 변화의 빛으로 밝히며, 죄악에 둔해지고 죄로 인해 망해가는 뭇영혼들에게 생명의 참길을 보여주자.

아브라함 선교사처럼 우리도 지역 선교사이다

2020-07-30


성경묵상의 나눔: 로마서 4:9-17

본문은 유대인들의 할례와 무할례자인 이방인 모두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임(16절) 바울은 일깨운다. 모세가 받은 율법 이전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의로운 자가 여김을 받았고 하나님을 그의 믿음처럼 예수를 믿음을 통해 열국을 구원하시길 계획하셨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예수를 모신다면 그 지역의 선교사가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선교사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름을 주실 때에 “열국의 아비”라 주신 그 의도를 평생 잊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 안에서의 열국의 종”이란 의미로서의 그리스도인도 다를 바가 없다.

그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 모든 민족이 그로 말미암아, 그처럼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선교사의 마음을 가진 아브라함의 소원이었다. 우리의 눈과 마음도 열방, 열국을 향해 점점 열려지고 넓어져야 한다. 점점 닫혀지는 것은 무슨 핑게를 대더라도 지역 선교사로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이제 그의 민족에게 할례를 행하면서 선택받은 민족들이 되었다. 열국을 향해 쓰임받을 제자들이 일어날 것을 생각하며 아브라함 선교사는 얼마나 기뻤을까! 선교사의 평생소원은 나보다 나은 현지인 제자들의 배출이 아닌가! 그러나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의 표시가 아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유대식 표시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성령께서 구원받은 자로서 인치신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성령의 임재로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사는 영적 할례를 받기를 소원하는 지역 선교사가 되자.

아브라함은 유대인, 이방인, 가족과 종들이 모두 한가족으로 품은 선교사이었다. 하란으로 가나안으로 향해 가는 길에 모두가 함께 생활하며 살아가는 한 가족이었다. 선교사의 위대함은 수많은 영혼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많던 적던 주님이 하시는 일이다. 선교사는 그곳 사람들을 가족으로 삼아 예수의 마음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16b).” 우리 모두 사람때문에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포기않는 아버지같은, 어머니같은 지역 선교사로 살아가자.

그 순간만은 나는 여전히 죄인이다

2020-07-28


성경묵상의 나눔: 로마서 3:9-20

코로나 바이러스에 희생된 수없는 영혼들의 숫자 앞에 예수를 모르고 죽은 영혼들이 안타깝지 않은가!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것이 우리의 죄이다. 그리고 백신보다 더 사모해야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오늘 말씀은 시작이 “모두가 다 죄아래 있고(9)”이고, 마치는 구절은 “율법의 행위로 그 앞에 의롭다 할 육체가 없다(20)”이다. 모든 인생이 율법 아래서는 죄인일 뿐이고, 그러기에 반드시 예수 앞으로 나아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야 함을 증거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 모두 죄인됨과 그 비참함을 뼈저리게 깨닫고, 그 죄의 용서를 체험한 자로 살아가야 한다. 정말 나는 여전히 죄인임을 철저하게 깨닫고 사는가?

나는 죄인이다. 지난 날에 빠져 살았던 추하고 더러운 죄를 용서받았지만, 그 허송세월을 생각하며 다시는 죄에 빠져 살지 않기로 기도하며 결단하는 그 순간만은 나는 여전히 죄인이다.

나는 죄인이다. 죄로 인해 비참한 죽음과 멸망으로 던져질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감사하면서, 이제는 죄를 이기며 사는 변화된 자로 간증하는 그 순간만은 나는 여전히 죄인이다.

나는 죄인이다. 모든 인생들이 죄인이기에 저들이 처할 죽음과 영원한 멸망 앞에서, 나도 갈 수 있었던 그 지옥의 처참함을, 그 길에서 건져주시는 오직 예수를 전하는 그 순간만은 나는 여전히 죄인이다.

나는 죄인이다. 천국에서 주님 앞에 엎드릴 때, 그 심판대 앞에서 너무도 죄에 추한 내게 떨고 있을 때에, 내 손을 잡아주시는 예수의 손을 잡고 천국에 입성하기 위해 일어서는 그 순간만은 나는 여전히 죄인이다.

그러나 죄인되었던 순간순간의 회상마다 구원의 은혜와 그 감격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구속, 성령님의 인치심을 오늘도 힘을 다해 감사찬양하자.

나의 똑똑하다는 판단이 죄가 될 수 있다

2020-07-23

성경묵상의 나눔: 로마서 2:1-11

나이가 많이 드신 할아버지와 대화를 잠깐하는데, 요즘 시대적 상황에 해박하시고 모르는게 없으셔서 놀랬다. 그러나 잠깐의 대화 속에 정보가 판단의 칼이 되어 분노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면서 나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가 아는게 병이 될 수 있고, 잘 안다는게 고집과 교만이 될 수 있고 정작 진리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할 수 있기에 두려운 일이다.

본문이 그렇다. 회개없는 고집(5절)이 말씀의 진리를 잃고, 얕고 잡다한 판단(1절)이 사랑의 깊은 포용을 잃게 한다. 결국은 당을 짓듯(8) 악한 자를 만나면 집단이 되어 말로든, 행위로든 핍박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본문은 율법과 유대인을 지적하나, 바로 우리에게 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우리 나 자신의 오늘을 강하게 돌아보자.
내가 자기 회개없이 남이야기하고 있지 않은지...
내가 복음이 담긴 말씀의 경청과 묵상없이 자기 고집으로 남 판단만 하고 있지 않은지...
당이라는 큰 단체에 섞여 진리에서 멀어지지 않았는지...

우리 모두 세상 판단 속에 살지만 사랑과 끈기(7)를 놓치지 말자.
하나님의 심판을(2) 내 앞에 항상 두고, 그 너머의 천국에 늘 삶을 깊이 담그자.
어떤 사람이라도 악한 사람이라기보다, 약하기 때문임을 알고 차별하지 말자.
하나님이 차별없이 대하심(11절)에 내가 오늘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가진 지식과 판단은 내가 살아있다는 표시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속에 담긴 포용과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며 살 때, 우리는 생존을 넘어서서 건강한 삶을 사는 것이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할 영생을 주신 예수중심의 삶만이 모든 이에게 주시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다(10). 우리 모두 예수 안에 똑똑하게 살아가자.

복음을 위해 살기로 했네

2020-07-20

성경묵상의 나눔: 로마서1:1-17

바울은 오늘 로마서에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복음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1)고 한다. 어디 바울뿐이랴 구원받은 성도, 우리라면 우리 모두는 복음을 위해 존재하고 사는 것이다. 복음은 단지 좋은 소식이 아니다. 내가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모든 세상영혼들에게 반드시 전해져야 하는 최고의 좋은 소식이다.

최고의 좋은 것이 있으면 다른 것은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우리 모두가 내 질그릇같은 몸에 예수보배를 진정가지고 있기를 축복하며, 이제는 그 복음을 위해 나의 남은 삶이 한가지씩, 남은 시간이 한 시간씩, 남은 물질과 재능이 한웅쿰씩 끊임없이 나누며 살아가자. 복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며 견고히 붙들고 살자.

오직 예수가 복음의 핵심이옵니다. -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포되신 예수 그리스도(4절), 이 복음은 모든 믿은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16)”

믿음으로 나의 복음이 되었습니다.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7)

성령의 은사로 복음을 담대히 전하겠습니다. -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11)”

기도의 끈기로 복음을 포기않고 말하겠습니다. - “항상 내 기도에 쉬지않고 너희를 말하며(9)”

제가 귀한 복음의 통로입니다. - “헬라인, 야만인, 지혜자, 어리석은 자, 모두에게 복음의 빚을 진 자라(14)”, 제가 기필코 갚겠습니다.

이 복음을 들고 제가 가야 할 방향은 온 세상 끝까지이옵니다. “이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8), “모든 믿음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16)”

지금 제가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할 곳이 어디입니까? -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5)”

19 세기 중반, 동북 인도의 메갈라야에 사는 ‘가로 종족’의 녹셍 (Nokseng) 이라는 사람과 그의 가족은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을 받아 들였는데 그 마을의 추장이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을 하자 담대하게 “나는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라고 외쳤고 그의 믿음 때문에 그의 두 자녀와 아내가 살해를 당했지만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나는 세상을 뒤로 하고 내 앞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라고 외치다가 죽음을 당했다.

그런데 녹셍과 그의 가족의 죽음 이후 마을 추장을 비롯한 온 마을 사람들과 이웃 마을 사람들까지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일이 일어 났다. 이것이 ‘가로 종족’이 복음을 받아 들이게 된 역사이며 “나는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라는 녹셍의 고백은 오늘 우리에게도 친숙한 ‘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라는 찬송이다.

오늘 이후로의 우리의 삶이 “주님 뜻대로 살고, 죽을 수 있는”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고 받자. 그리고 “복음을 위해 살기로 했네” 찬송하며, 선포하며 마지막까지 살아가자.

입에는 찬양을, 손에는 두 날가진 칼을 들자

2020-07-17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 149편 1-9절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만 온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해 부르는 찬양은 부르는 자의 능력이 된다.
그러니 노래못한다, 기분이 안 난다, 식상한 찬송이다 하지말고 찬양이 그대의 능력이 되게 하라.

오늘 149편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시이다. 그 말씀 속에서 “그들의 (성도)입에는 찬양,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는 말씀이 좀 더 묵상이 되었다. 찬양하며 장애물과 한계를 이기며 나아가는 능력있는 성도의 삶을 내게 말씀해 주신다. 우리도 찬양을 능력의 선물로 받아 누리자.

# 염려와 두려움 속에 나의 간구가 기도로 찬양 속에 실어지면 그것이 능력있는 찬송이 된다.

# 세상의 미혹 속에서 주의 말씀을 담아부르는 찬양들을 선포하면 그것이 능력있는 찬송이 된다.

# 온갖 시련과 아픔에도 불구하고 겸손과 감사(4)의 고백이 담기면 그것이 능력있는 찬송이 된다.

# 메마른 영성을 덮고자 소고, 수금...온갖 악기와 함께(3), 우리가 함께 합창하면 그것이 능력있는 찬송이 된다.

# 그래서 어느덧 인간적 불신이 걷히고, 세속적인 희노애락의 혼란스러움이 사라지고, 찬양이 신령한 노래가 되면 하나님이 열납하시고, 주님께서 주의 보좌에서 일어나시고 우리를 향하신다. 그 찬양이 두 날가진, 무엇이든 견디어내고, 감당해내고, 이기게 하는 찬양의 검이 되는 것이다.

찬양의 능력을 빼앗기지 않고, 찬송으로 오늘 하루, 우리 모두의 마음과 삶의 환경을 가득 채우며 살아가자.

말씀이 속히 달려간다

2020-07-15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 147:12-20

예전에 캐나다 해변에서 107년된 편지가 담긴 유리병이 발견되어서 기사화된 것을 보았다. 한세기를 바다를 떠다니다가 발견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여러분도 그 속의 내용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할 것이다.

바다처럼 수도 없는 성경책들, 수도 없는 설교들... 그런데 그 속의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닿고, 이제 내가 듣고 보고 있는 것에 대해서 놀라움과 감사가 있는가? 오늘도 내게 주시는 그 메세지가 궁금하지 않은가?

# 말씀이 달려간다.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15)” - 하나님의 명하시고, 그 말씀이 속히 달림은 말씀의 권능이요 살아있음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만물이 이루어졌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물도 포도주로, 때때로 얌전한 바다로 바뀌어진다.

말씀은 향방없이 달리는 것이 아니다. 목적지는 당신의 마음이다. 그러니 오늘도 말씀이 내 삶의 현장 속을 달리게 하며 깊은 체험이 되게 하자.

# 말씀을 보내신다.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며(18)” - 눈도, 서리도, 우박도, 녹이는 바람도 말씀을 보내사 행하신다고 하신다. 주님은 직접하시는 일도 많으시지만, 우리와 함께 일하심을 언제나 기뻐하신다. 그렇게 작정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주님은 예수의 복음도 보내시는데, 그 전달할 소중한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아주 가끔이지만 신참 우체부인지 다른 주소를 자꾸 내 집의 우편함에 넣어둔다. 몇 번은 이웃 집으로 내가 배달도 하였다(^^).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말씀을 보내신다. 그러니 오늘도 말씀을 잘 가슴에 담아 비어있는 이웃들을 마음에 제대로 전달해 주자.

# 말씀을 보여주신다. “말씀을, 율례와 규례를... 보이시며(19)” - 보여주시는 것은 받아 듣고 읽으라는 것이다. 107년이 아니라, 천년이 아니라, 수천년 그 이전부터 주님은 말씀을 책에 담아 나에게 주시고 오늘도 말씀하신다. “드디어 네 눈에 이 성경책이 보이냐, 들어 읽거라.”

오늘 말씀의 한구절이라도 눈에 담아 마음에 새겨지도록 하자. 귀에 들려 가슴이 울리게 하자. 생각에 채워 내 입과 행동에서 흘러 나오게 하자.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는 말씀은 우리가 말씀을 신실하게 듣고 읽고 묵상하며 살아갈 때, 우리 모습을 보시며 기뻐하시고 흥분하시는 주님의 마음임을 오늘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내 손으로 꽉 잡아야 할 것

2020-07-10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 144:1-15

내 손가락을 쥐는 어린아기의 손힘이 너무 세서 놀란 적이 있다. 노인의 마지막 임종 앞에서도 무엇인가라도 붙들려고 애쓰는 경우를 보기도 하였다.

사람은 그 손으로 평생 무엇인가를 잡으며 살아간다. 손을 펼치기 보다 손가락을 구부려 쥐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본성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평생을 더 안정된 것, 더 좋은 것, 더 재미있는 것, 더 편리한 것, 더 높은 것들을 잡으려고 노력하며 살아간다.
내 손을 한번 자세히 보라, 뒤집어 보기도 하자. 나는 이 손으로 무엇을 잡으려고 지금 살고 있을까?

손은 도구를 사용하는 신체이기도 하지만, 무엇인가 견고한 것을 의지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잘못된 것을 붙들면 허망한 인생으로 끌려가고, 바른 것을 붙들면 복된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이방의 악한 손이 있음을 다윗은 말한다. “그들 (이방)의 오른 손은 거짓의 오른 손이니이다(8, 11절)”
오른손은 보장과 안전을 의미한다. 지금도 이방 세상에서 이것을 붙들라고 온갖 것으로 우리를 미혹한다. 그러나 안전할 것 같은, 복된 미래가 될 것 같은 이방의 오른 손은 헛된 것이요, 거짓의 오른 손이라고 한다. 이방의 거짓된 오른 손이 무엇일까? 사람중심의 돈과 물질, 과학, 권력이 그 자만과 거짓의 오른 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없는, 하나님을 잊거나 멀리하는 손이 바로 거짓된 오른 손이다. “사람은 헛것같고... 그림자 같고(4)” 지금 그 손을 잡고 만족해 하며 영원하리라 착각해서는 안된다.

다윗의 손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보라. “여호와께서 내 손을, 내 손가락을 가르쳐 싸우게 하신다(1), 위에서부터 주의 손을 펴사...구원하소서(7).” “아들 딸들을 세우시고, 곳간의 곡식과 양과 소를 채우시고, 안전을 지키시는 하나님, 그분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백성”이 복이 있다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오직 한가지 이유, 주의 오른손이 붙잡아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팔을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들고 찬양하는 사람들이다. 언제나 그 손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다.

거짓된 것이 더 아름답고, 크고 든든해 보이고, 영원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악한 이방의 자만과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은 오래갈 수가 없는 것이다. 행여 거짓된 손을 잡으려 하고 있다면 놓아버리라. 그리고 오늘도 우리 모두 “의로우신 주님의 오른손”만 붙들고 주만 따라가는 삶이 되게 하자.

굴 속같은 캄캄한 절망이 다가올지라도

2020-07-08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 1423:1-7

다윗에게 지금 굴 속의 경험은 쫓기는 자의 막다른 골목같은 절망이다.
3천의 군사를 이끌고 자기를 잡아 죽이려고 추격하는 사울왕의 광기어린 집념을 생각할 때마다 긴장되고, 작은 소리에도 놀라는 그의 상황이다.
이제 메마른 광야와 산중에서 피할 곳이란 굴 밖에 없었다. 준비도 없이 피해 들어간 굴이 얼마나 어둡고 답답했겠는가!

이스라엘의 주변들을 가보면, 곳곳에 크고 작은 자연굴과, 길게, 또는 미로처럼 파놓은 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굴이든지 다시 빠져 나갈 곳은 한 곳이나 두 곳밖에 없다. 그 안에서 적을 만난다면 누군가가 죽어야할 상황이다. 다른 길은 없는 것이다. 그곳에서의 다윗이 대면하는 마음의 고통과 강력한 적들 앞에서 예상하는 죽음의 고통은 어둠보다 더 답답했을 것이다.

우리라면 그곳에서 무엇을 생각할까? 우리라면 그런 절망의 순간에 무엇을 하려할까?
그러나 다윗의 절망의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법인, 위로부터 주어지는 길을 찾는다. 그것은 기도의 부르짖음이요 도우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 속에서 부르짖고 토로한다는 고백이 5번 이상이 나온다. (1, 2, 2, 5, 6). 극심한 절망을 기도로 바꿀 때 순전하고 강력한 기도가 하나님께 올려지게 된다. 굴속에서 울려퍼지는 기도는 증폭되고 메아리되어 주님의 마음에 반향되었으리라.

우리도 절망 속에 맥놓지 말고, 사람의 방법을 의지하지 않고 “소리내어 부르짖고, 소리내어 간구(1)”하자. 그렇다! 나의 지금의 작은 좌절과 큰 절망은 강력한 기도의 소재요, 하나님이 응답으로 빚어내실 정금같은 열매이다.

다윗의 주위는 더 이상 어둠의 자리가 아니었다. 그 속에서도 영원한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 나의 분깃이시라(5)”
하나님의 지금의 고통보다 더 크신 계획을 보았기 때문이다. “주께서 나에게 갚아주시리니(7절)”

삼상 24장을 보면 지금 절망의 뿌리인 사울왕이 자신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뒤를 보고 있은 상태라도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받는 자를 내 손으로 치지 않겠다”
하나님이 주시는 길과 응답을 보고 믿는 자가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하나님의 그의 부르짖는 기도를 응답하셨다. 미래의 결과과 축복은 다윗의 것이었다.

오늘 내게 닥치는 굴 속같은 답답함이 무엇인가? 질병인가? 재정적 압박인가? 갈등인가? 다윗처럼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와 믿음으로 내 앞의 응답과 미래의 축복을 얻어내기 바란다.

악인 처치법

2020-07-06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 140편 1-13절

139편, 140, 141... 다윗의 시 속에는 계속 악인과 그에 대한 탄원이 많이 등장한다.
어떤 특정된 사람이나 일인지는 나타나지 않으나, 본문만 해도 “포악, 독사의 독, 올무 함정”등의 그의 표현을 보면 그에게 큰 고통을 주었던 일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오늘 나에게는 ‘악인’이라는 표현이 관계가 없는 듯 싶으나, 없기를 바라지만, 아닐 것이다. 과거에 그런 사람이 있었고, 지금도, 앞으로도 “악인”이라 여기기에 합당한 사람, 일, 관계는 충분이 있을 수 있다. 그러기에 아예 악인을 다루는 법을 대비하자. "악인 처치법"을 생각해 본다.

# 무기력케 함으로 악인을 처치하는 것이다. “여호와여!(1)” - 먼저 격동시켜려는 악인의 온갖 술수를 그냥 평안하게 바라보는 눈과 마음을 갖자. 죽고 사는 것도 아닌데, 설령 죽이려해도 내 목숨이 저들에게 있나 주님 손에 있는거지... 마음의 문고리부터 주님께 드려버리면 흥분보다 놀라운 평정을 가질 것이다.

# 제대로 분별함으로 악인을 처치하는 것이다. “저들이 악을 꾀하고(2), 혀를 날카롭게 하고(3),나의 걸음을 밀치고(4)” 저들의 궤계를 분별하기는 해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지, 믿음의 형제자매의 충고인지, 아니면 달콤 혹은 분노케 하는 악한 자의 술수인지는 분별해야 한다. 성령께 더욱 매달려 영적 눈과 마음을 가동시키라.

# 당연히 기도로 악인을 처치해야 한다.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6)” -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우리들이 탄원하면 “악인들”을 다루시고자 기다리시는 분이다. 뜻밖의 일들에 패닉상태에 빠지지 말고 기도로 보고하고, 기도로 맡기고, 기도로 편안하고, 기도로 넘어가 버리자.

# 사랑의 포용으로 악인을 처치해야 한다. “뜨거운 숯불이 그들 위에 떨어지게 하시며(10)” 이 말은 태워 없애달라는 탄원이지만, 다윗도 그 말 후에 정신을 차리고 한 말의 결론은 사랑으로 품겠다는 고백이었을 것이다. 사울 왕이나 자식 압살롬을 대하는 마음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고, 우리가 잠언 25:21, 롬12:20에서 그 마음을 찾게 된다. “먹이고 마시우게 해서 그 머리에 숯불을 쌓게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나도 죄인으로서 예수님의 사랑의 십자가를 만나니, 곤고한 영혼으로서 성령님을 만나니 한마디로 내 머리에 숯불이 부어졌다.

# 여전히 감사와 기쁨,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악인을 처치해야 한다. “여호와는 고난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고,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12),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면(13)” - 감사하는 마음에 마귀가 틈탈 여지가 없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의 자족과 감사고백은 악인을 맥빠지게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오늘도 , 내일도 예수 안에서, 믿음 안에서, 사랑 안에서 아주 행복하게, 기쁘게 살아가자. 결국 악인이, 악한 일이 힘이 빠져 일곱 길로 스스르 빠져 나갈 것이다.

예배 리스트 (Worship List)

2020-07-03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 138:1-8

배고플 때 식품점에 가서 뭘 사지말라는 말을 들을 적이 있다. 배고프면 눈에 보이는데로 마구 집어 카트에 집어넣기 때문이란다.
어떤 사람은 식품점에서 물건을 살 때 눈으로 보면서 생각나는 것을 고르는 경우가 있고, 어떤 이는 리스트에 적어 둔 것을 하나하나 찾아 집어넣는 경우도 있다. 난 간혹 아내의 부탁에 머리 속으로 리스트를 중얼거리며 간다. 그리고 집으로 다시 확인전화를 한다. 리스트가 없으면 어느 순간에 멍해지거나,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다.

예배에도 리스트(Worship List)가 있다. 제대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할 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10가지를 전해주고 있다. 부디 한번의 흘낏으로 끝나지 않고 열 손가락을 꼽으면 예배때마다 점검하는 리스트가 되어, 성도의 최고 본분인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자가 되기를 바란다.

1. 복음: 오늘 복음을 가슴에 담고 예배하리라. “내가 (다윗) 주께 감사하며(1)” - 다윗조차 12번 이상 주님이라 고백한 그 분이 예수이시다. 예수를 구주로 믿음이 예배의 반석이다.

2. 회개: 오늘 죄를 회개하고 겸손으로 은혜를 붙들고자 합니다! “주의 인자를 의지하며, 낮은 자를 굽어 살피시며(2, 6)” - 오늘 예배 속에 깊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여부는 겸손과 회개하는 심령에 달려 있다.

3. 찬양: 오늘 가장 깊은 사모함으로 하나님께 경배찬양하게 하소서 “전심으로 주께 ...찬송하며, 노래 할 것은( 1, 5)”

4. 감사: 불평많은 삶이었지만, 이제는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감사합니다. “주께 감사하고, 주이름으로 감사하고 (1, 2, 4)”

5. 기도: 기도로 예배를 준비하고, 기도하면서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하면서 삶의 현장에서 예배하겠습니다. “ 내가 간구하는 날에 응답하시고(3)”

6. 설교말씀: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붙들게 하소서 “주의 말씀을 높게 하셨고, 들음이오며(2,4)”

7. 갈등과 사랑: 주님 예수님의 마음으로 내 마음에 분노를 막고 그 사람을 사랑해 보려하니 힘주소서.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7)”

8. 전도: 내 인생 영역의 모든 부분에 있는 영혼들을 끝까지 구원하게 하소서 “모든 왕들이 주께 감사할 것은(4)”

9. 섬김: 오늘도 교회와 세상 속에서 섬기며 천국의 상급되게 하소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리리이다(8절)”

10. 성령: 성령이여 이 예배중에 내 마음에 임재하소서.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3)”

136편에서 보물: 구절마다 담긴 세가지 보배

2020-07-01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 136:1-26

올해는 야외예배도 없이 (교회에서 간단히 고기파티로 치루고), 7월을 맞이하게 된다.
야외예배 때마다 보물찾기 순서가 2부로 있곤 한다.

보물찾는 모습들이 다양하다.
쏜살같이 달려가는 사람, 점잖게 걸어가는 사람, 벌써 몇개 찾고 웃고만 있는 사람, 남이 찾아간 곳만 뒤늦게 찾아와 뒤적이는 사람, 그곳에는 없다는 데도 자꾸만 멀리가는 사람, 그리고 몇개 찾아 혹 없는 사람 슬그머니 나눠주는 차목사 ^^;

시편 후반부 말씀 중에서는 꽤 긴 구절이 담긴 장의 말씀이 136편이다.
그 27절까지 절마다 빠지지 않고 들어있는 말씀의 보배가 있다. 꼭 받아 챙기라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는 것일 것이다.

# 하나님이 보배이시다. “여호와께, 하나님께, 지으신 이, 인도하신 이, 통과하게 하신 이...” - 온갖 창조물, 인생의 사건들 속에서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다. 그렇다 우리의 인생의 과거, 현재, 미래시제의 중심은 주님이셔야 한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겁니다”

# 변함없이 베풀어주시는 인자가 보배이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나님의 인자 - 긍휼과 사랑, 용서, 돌보심- 없이 우리가 어찌 살 수 있는가? 지금까지도 그 분의 은혜와 긍휼로 살아온 우리이다. 그 인자하심을 늘 품고 산다면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올 한없이 교만하고, 강퍅하고, 자꾸 생겨나는 염려를 물리치며 살 것이다. 나같은 죄인을 살려주시고 새사람되게 하신 그 인자하심이 여러분의 성품이 되게 하라. 이웃들에게 인자를 베풀라.

# 감사하며 사는 내 인생이 보배이다. “감사하라. 감사하라 감사하라...” - 성도에게 오늘을 감사하는 것이 능력이요 보배이다. 주님을 바라보노라면, 이 험한 세상에서도 살만한 기쁨과 행복을 찾으며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생각하노라면 고통도, 문제도, 아픔 속에서도 함께 해주시는 주님을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불평하는 사람 옆에서는 고통지수가 높아가고, 감사하는 사람 옆에서는 행복지수가 높아가는 것이다.

이 보물들을 찾아 마음에들 담으셨는지? 여기서 매일 매순간 누리다가 천국까지 가지고 갈 보배임을 한시도 잊지 마시기를! 우리가 이 후반기에 채워야할 보배들로 사모하시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리로다”

하나님의 밑그림까지 바라보자

2020-06-26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130:1-131:3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에는 스케치를 비롯한 밑그림이 있고, 그 위에 그리는 덧그림이 있다. 잘 보이지 않는 그 밑그림이 그림에 생명력을 주고 생동감느끼게 하고 복사판과는 전혀 다른 가치를 주는 것이다.

신앙생활도 밑그림까지 바라보는 것이다. 현재의 겪는 일과 문제들, 시련과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밑그림, 그 계획과 인도하심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한 사람의 신앙은 시련 속에서 그 진정성이 나타나게 된다.

시련을 거뜬하게 이겨내는 엄청난 능력은 아니라도, 끝까지 끈질기게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살아있는 신앙이다. 믿음의 삶에서 흔들리는 그대들이여, 내가 주를 바라보는 영적 시력이 닫히면 죽은 신앙이 될 수 있음을 스스로 경계하자!

본문에서 여러번 ‘바라본다’는 표현이 나온다. 성경의 바라봄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주를 끝까지 신뢰함을 말한다.

# “내가 주께 부르짖습니다(1, 2)” - 기도는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며 주와 대화 속에 더욱 주를 바라보는 도구이다.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5)”- 말씀은 오늘도 손에 들고, 입으로 묵상하며, 닥친 문제들 속에 주의 약속을 선포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도구이다.

# “여호와의 인자와 풍성한 용서를 바랄지어다(4, 7, 8)” - 주의 속량, 용서는 빗나가는 나의 삶의 방향을 바로잡게 해주시고, 바르게 바라보게 하시는, 때로는 야단치시고, 때로는쓰다듬어 주시는 사랑의 다루어주심이다.

# “지금부터 영원까지 주를 바랄지어다(131:3)” - 영원을 바라봄은 미래의 승리자, 결과의 주관자이신 주님편에 서서 오늘을 기다릴줄 알고, 참아낼 줄 아는 소망이라는 능력이다.

잠깐의 바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바람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신 선물이다. 믿음은 바라봄의 실상이니 오늘도 제대로 하나님의 밑그림까지 믿음으로 보고 말하며 살아가자.

주님만이 나의 안전이시다

2020-06-23

성경묵상의 나눔: 시편 127:1-5

예전에 교우 한사람이 집을 스스로 지었다. 기본적인 것만 맡기고 나머지는 거의 본인이 지어갔는데 경험없이 이 사람 저사람과 일을 하다보니 시일도 오래 걸렸고 짓고 나서도 모양도 깨끗하지 않고 하자가 많았다. 그 분이 하는 말이 “집을 짓는 것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예전에 우리 가정에 세째 아이까지 생기고 아이들을 위한 이층침대가 필요하였다. 한번 만들어보자고 몇 주를 일을 마친 후에 저녁마다 씨름하면서 절대로 무너지지도, 부러지지도 않을 튼튼한 이층침대를 만들었다. 칠을 하는 분이 하얗게 칠을 두텁게 발라주고 광을 내어서 아주 멋진 침대가 되었다. 얼마나 자랑스러웠던지!

문제는 이사갈 때였다. 방안에서 만든 침대가 너무 커서 나갈 수가 없었다. 견고하니 움직이기 너무 무겁고, 분리하자니 칠을 해서 못자국을 찾기도 어려웠다. 눈물을 머금고 중간 네 다리를 잘라야만 했다. 둘로 나눠지고 다 망가진 침대를 보면서 나의 우둔함을 탓했다. “물건 하나 만드는 것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님을 그 때 알았다.”

우리는 집과 성을 세우며 살아가는 중이다. 집은 가족의 울타리요, 성은 마을과 도시 전체의 울타리이다. 든든한 집과 견고한 성벽은 안전을 보장하는 것 같지만, 의외로 허약하고 하자가 많은 것이 가족과 집이요, 언제까지나 보장이 못 되는 것이 이 사회요 성벽이다.
든든한 성벽은 교만과 함께 오히려 꼼짝못할 올가미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워도, 수고의 떡으로 버티고 세워보려해도(2)” 헛될 때가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붙들어야 할 안전울타리이다. “여호와께서 세우도록 해드려야만 집과 가정이 헛되지 않고, 여호와께서 지키시도록 맡겨드려야만 성의 안전은 보장이 되는 것이다(1절).”
“주님도 별수 없던데요”라고 생각하지말라. 주님은 우리의 집과 성벽을 온 세상과 영원의 역사로 지어져 가시기에 우리는 깨닫지 못해도 전혀 착오가 없으시다.

우리에게 잠을 자는 때는 가장 필요한 시간이면서 가장 취약한 때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잠을 주신다(2절)고 하신다.
잠자도록 내버려 두신다는 것이 아니다. 잠을 통해 회복과 건강을 위해 만져주시고, 잠잘 때조차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마음의 집과 생각의 성은 주님이 지키심을 믿고 맡길 때에 건강하고 튼튼해지는 것이다.

이제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을 안식의 집으로 삼고, 예수를 반석으로 지은 성으로 삼아, 그 안에서 믿음으로 안식함으로, 이제부터 주님 앞까지는 두려움없는 안전과 평안의 여정이기를 바란다.

하나님도 마스크를 하고 싶어 하실 때

2020-06-18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32:15-36

사람이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울 때 얼굴이 빨개지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운다. 요즘같은 시기에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우기에 웃는 건지, 부끄러운 건지 구분이 안된다. 속히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때가 오기를 소망한다.

오늘 본문 중에서 하나님도 마스크를 하고 싶으시다는 표현을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역한 삶을 살아간다면)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20)”

사실 하나님이 마스크를 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은 좀 지나친 표현일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오직 우리 인생들 편에 있을 뿐이다. 우리 눈이 이생의 욕심과 교만으로 희미해져서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시다가도 결국 다시 보여주시는(36절) 긍휼하신 얼굴조차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시고자 하시는 마음 앞에 우리의 신앙태도는 무엇인가? “내가 네 앞에서 내 얼굴을 숨기고 싶구나”하실 때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얼굴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를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안에 우리가 있어도 “내 얼굴을 숨기고 싶구나”라는 주의 음성은 여전히 우리 앞에 들려올 수 있다.

“너희가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시27:8)” - 숨기시는 주님의 얼굴 앞에 우리는 주님과의 깊고 친밀한 영적관계를 회복해야 함이 지금 우선임을 알아야 한다.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어서(사59:2)” - 숨기시는 주님의 얼굴 앞에 우리는 주님이 숨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가 주님 앞을 가리울 뿐임을 알고 회개해야 하다.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대하 7:14)” - 숨기시는 주님의 얼굴 앞에 우리는 간절한 기도로 그 분께 피하고 그 분의 얼굴을 다시 구해야 한다.

“그 얼굴을 내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민6:24)”- 숨기시는 주님의 얼굴 앞에 우리는 “약속하신 은혜와 축복”을 끝까지 믿음으로 붙들어야 한다. 때로는 그 얼굴이 숨기신 것 같아도, 보이시지 않아도.

찬양을 잃으면 은혜가 반쪽납니다

2020-06-15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31:19-29

처음 예수를 믿을 때부터 지금까지 찬송이 언제나 은혜가 되어 주를 향하게 만들어 준다.
처음 믿을 때에, 전도하던 형이 바이올린을 가져와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를 연주할 때 찬송에 꽂혔고, 신앙에 마음이 열렸다.

유행가처럼 제멋대로 부르는 성가대원 입문 시절, 앞의 권사님이 듣다 못해 (^^) 지적하신 한마디가 지금도 부끄럽다 (나야 첫사랑에 충만해서 열심히 불렀지만).

목회하면서 예배 때 부르는 찬양과 홀로 부르는 찬양에서 주님을 기억하고 새 힘을 얻곤 한다. 찬양이 좋으니 어깨너머로 기타도 배우고, 피아노도 홀로 만져보고, 요즘은 내 눈과 손가락이 우크렐라와 악보 사이를 헤맨다. 찬양이 없다면, 찬송가가 없다면 주님과의 교제가 신앙생활이 얼마나 삭막할까!

오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후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그 결과로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기억하도록(19, 21) 노래를 가르치라 하신다. 비록 노래가 도구이지만 말씀이 담긴 찬양은 말씀의 반쪽이라 깨달아진다. 그러므로 찬송, 찬양의 생활을 잃어버리면 은혜의 생활을 반쪽만 누리는 것이다.

노래와 찬양은 하나님의 것이지만, 곡조와 리듬이 있는, 강한 교육적 효과가 있는 말씀이다. 어느 사이에 노래 속에 말씀이 내 안에 채워지게 하며, 어릴 때에 부른 찬송이나 동요가 평생 가슴에 남아있게 된다.

주님은 우리의 지으신 목적이 “이 백성은 나를 위해, 내게 찬송을 부르게 지었다(사43:21)”고 하셨다.

우리 일반인의 찬양의 수준은 성악가의 수준과 전혀 다르다. 우리의 수준은 주님사랑과 성령의 만져주심 속에서 곡조있는 말씀, 리듬있는 기도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면 충분한 것이다. 아기의 불분명한 목소리조차 들으며 기뻐하는 부모처럼 주님은 분명 기뻐하시며 들으신다.

성경말씀은 묵상과 암송 속에서 의지적인 부분이 많이 강조되고, 찬송, 찬양은 고백가운데 감성적인 부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건강하려면 말씀과 찬양, 양쪽 모두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책을 펼쳐 읽고 찬송가를 부르고 사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경을, 찬송가를 책으로든, 프로그램으로든 결코 내 손에서 잃어버리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노래, 찬양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도구이다. 오늘도 우리 모두가 비록 흥얼거리는 수준의 찬양이 있고, 흘려듣는 차 안에서의 찬양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배드림 속의 힘찬 찬양도 있다. 당신의 그 찬송함이 휘청이는 자신의 영혼을 이끌어주고, 세속에 혼탁해지는 내 영혼을 정결케 해주는 체험이 되기를 바란다. 반쪽의 은혜, 찬양이 살아나 주님과의 더 깊은 교제의 생활이 되기를 바란다.

주께서 화내심이 당연하다

2020-06-11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29:22-29

본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우상숭배에 빠지면, 하나님이 진노와 격분으로, 크고 맹렬한 노하심으로(23, 24, 28) 이스라엘을 징계하실 것을 말씀한다.

크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우리의 일에, 실수와 죄악에 진노하시는 것일까? 광대한 그 분의 섭리 속에 우리의 인생은 너무도 작은 것일텐데...

진노와 격분과 통한하심(28)은 우리를 향한 그 분의 관심이시다. 사랑하는 자가 가는 그 어리석은 길이 속상하시고 배신감을 느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화내심이 당연하다. 그리고 그 분의 그 마음을 깨닫는다면 그 길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마치 아버지를 향한 탕자의 배반과 돌이킴처럼...

우리가 생명을 얻는 살 길을 저버리고 죽을 죄의 전염병에 빠지는 것(22)이기에 주님은 화가 나신다.

너무도 쉽게, 허무하기 짝이 없는, 다른 거짓신들에게 빠지는 것이 주님은 화가 나신다(26).

무엇보다도 복의 통로로 주신 아주 가까이 있는 당신의 명령, 말씀을 놓치고 사는 것(25)이 주님은 화가 나신다.

그러나 주님의 진노와 격분과 통한하심의 뒤에는 용서와 회복이라는 은혜가 남아있다. 그렇지 않다면 주께서 노하실 일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뭣이라고...

그러니 우리 모두 괜히 교만스레 역정내지 말고, 버티지말고, 주의 진노의 언저리라도 느끼면 예수 안으로 들어가라. 진정한 회개와 믿음의 회복으로 진노보다 크신 사랑으로 다시 들어가라. 지금이 그렇게 결심할 때이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30)”

자유의지도, 자유회개도 주셨다

2020-06-08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28:58-68

휴...하는 안도의 마음이랄까? 오늘 묵상말씀은 명령에 불순종하는 자에게 하실 저주의 마지막 부분이다. 순종과 복이 14절까지인데, 불순종과 저주는 68절까지 무려 54절이나 되는 긴 구절이다.

우리가 받아야할 저주까지 예수님이 대신 받으시고, 주 안에 자유함을 얻었지만, 불순종과 그 징계, 저주와 그 비참함, 특히 전쟁 속의 비극과 온갖 질병에 대한 내용들을 대하는 마음은 한없이 무겁다. “제발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지 말라”는 주님의 긴 경고이시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은 불순종하고, 겪게 되는 전쟁과 질병이라는 저주의 징계는 재현되는 교만한 인간들의 흑역사요, 선량한 사람들의 희생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불순종은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의 남용이요, 타락으로 인해서이다. 본문의 길고 다양한 불순종과 징계의 내용은 무슨 일이건 벌일 타락한 인생들의 교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율법의 조항들이 많아진 긍정적 이유를 여기서 보기도 한다. 혹자는 말하길, “오늘날 십계명을 따르기 위해 35,000개의 법조항이 생겨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에는 자유회개도 있다. 하나님은 나를 내 뜻대로 살아가도록 허락하셨지만, 세상에 만연한 아픔을 보면서 내가 저지른 것은 아니라도, 내 문제로 받아 들이고, 내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자유함을 주셨다. 주님이 억지로 우리를 회개하게 하시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신명기 28장처럼 긴 징계와 저주의 경고를 주신 이유가 아닐까?
그것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그 저주를 푸시고 나를 바라 보시는 이유가 아닐까?

복과 저주, 예수 안의 복으로 바꾼 저주”는 너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시대의 아픔으로 보면서,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스스로 흘러나오는 자유회개, 자기정화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지금도 주님은 힘껏 인간의 흑역사만큼 긴 저주를 밟으시고, 부어주실 복을 들고 계신다. 그리고 나의 그 자유회개를 여전히 기다리며 "내게 오라" 부르신다.

청종하여 복을 받는 법

2020-06-03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28:1-6

“했소? 했어요?”
"뭘? “
“하라고 했잖아요. 부탁했잖아!”
“그런 말을 했어요? 못 들었는데”
“말할 때 제대로 안 듣잖아요! 항상 건성으로 듣잖아!”
요즘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부부들 사이에서, 가족들 사이에서 들리는 말이다.
제대로 듣는게 가정의 평화를 이루어 가는 길이다. 오늘 말씀이야말로 들어야 살고 복이 된다고 하신다. 듣고 행하는, 청종의 삶을 생각해 보자.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명령을 지켜 행하면 온갖 축복(1절-14절)을 주신다고 약속하신다. “일터의 복(성읍, 들, 양떼, 소떼), 자녀의 복, 건강의 복(광주리, 떡그릇), 대인관계의 복(들어와도 나가도)...그러나 순종하여 듣지않고 행하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은 저주가 된다 하신다(15절 이하).

모두가 지켜 행해 축복을 받기를 원하지 저주 받기를 누가 원하겠는가?
“듣고 지켜 행하여 복되어라”, 주의 명령에 청종하는 법을 돌아보자.

# 말씀을 가까이 해야 청종이 된다 - “삼가 듣고 지켜 행하면(1절)...” 복이 있는 자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시1)이다. 말씀은 힘이 있어서 가까이 하면 행동으로 이어진다.

# 말씀순종이 복임을 믿어야 청종이 된다 -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임하며(2)” 다른 것을 섞지말고, 청종하는 일을 미루지도 말고 행해 나가자. 믿고 행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히11).

# 작은 청종이 온전한 청종으로 나가는 길이 된다. - “자녀의 일, 농사와 목축의 일, 먹고사는 일들 속에서 말씀의 청종이 우선할 때, 들어와도 나가도 복이 되고, 대적을 물리침, 모든 민족 앞에(12)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다.

# 자유와 해방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법(말씀)을 따라야 청종이 된다. 우리 약한 인생들에게 축복의 은혜는 머지않아 저주받을 불순종으로 오염되기 쉽다. 한번 저주의 늪에 빠지면 헤쳐나오기 어렵다. - “생명의 성령의 법(말씀)이 죄와 사망의 법(롬8)”을 이기게 하신 예수와 그 영을 따름이 진정한 축복을 받고 누리게 하신다.

우리에게는 축복이냐 저주냐가 우선이 아니다. 먼저 예수를 내 안에 모시고 믿음의 그릇을 준비하고, 약속하신 말씀을 복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풀어내어, 끈기있게 붙드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축복을 흘러 채워주시는 것이다.

6월 첫 주, 첫 날 앞에서!

2020-06-01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27:1-10

오늘은 6월 첫날, 월요일, 1일이다.
새로운 달, 새로운 날을 맞아 희망 속에 하루를 출발해야 하나, 마음이 무척 무겁다. 아직도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힘든 환경속에서, George Floyd 죽음과 항의하는 데모대와 경찰, 그리고 폭력사태속에서 교우들의 생업조차 어려움을 당하고 있어서이다. 새벽의 부르짖는 기도에도 마음에 무거운 것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오늘 말씀의 묵상을 붙든다. 60여년간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희노애락을 넘어오지 않았던가! 말씀은 살아계셔서 오늘의 삶을 인도해주심을 믿는다.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명령을 다 지킬지니라(1절)”- 몽땅 다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6월을 시작하는 오늘도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야 한다. 아무리 힘든 환경이라도 말씀이 나를 주장하시도록 해야 한다. 천지는 없어져도 남아 역사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 말씀에서부터 소망이 시작되고,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2, 3, 4)” - 요단을 건넘”은 죄에서 구원받은 삶의 자리이다. 영 죽을 죄에서 내가 구원받고 이 땅의 승리와 천국백성이 된 것 보다 귀한 것이 무엇인가? 일시적인 세상의 것을 잃을지라도 내 구원의 기쁨은 빼앗기 말자.

“큰 돌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2)”- 단단한 돌같은 마음이 아닌 석회같이 회개와 순종의 부드러운 마음으로 여전히 말씀을 내 마음에 새겨 나가자.

“쇠연장을 대지말며,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쌓으라(5,6)”- 하나님이 말씀 앞에 온갖 세상과학과 사상, 문화와 거짓종교의 쇠연장을 들이대지말고, 다듬지 않은 주신 말씀만 순종하자.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서 먹으며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라(7)” - 화목을 지향함이 최고의 치료제요 결국 축복이다. 하나님이 죄악된 우리와 화목하시고자 예수를 보내시고 죽이사 제물되게 하시고 부활의 소망을 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세상을 화목케 하는 사역을 주셨다.
경찰이건, 범죄자이건, 온갖 폭력이 난무하고, 벌건 대낮에 상점을 부수고 물건들을 들고 달아나도, 저들의 집단적인 행태가 한없이 괘씸해도, 저들의 죄악된 삶이 불쌍해서, 안타까워서 예수의 눈물을 내 눈에 담아내는 내 영혼의 아픔이 예수를 따라가는 십자가의 길인 것이다.

잊지말자. 나의 화목제에는 이런 기도가 꼭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괘씸해서 도저히 용서 못해요! 잊을 수 없어요!”라는 마음이 들어도, 그 마음의 분노를 결국 이겨내고 “예수님, 이런 황당한 일들 속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해나가야할 일이 무엇인가 알게 해주세요. 용서가 너무 힘들어도 순종하렵니다”라는 기도가 내 아픔을 치료하는 시작이요, 진정한 내 몸과 영혼 사이의 화목이요, 나와 가족 사이의 화목이요, 이 세상 속에서 화목의 사역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 오늘 성도들의 아픔을 붙들고 주님께 기도하면서-

저울추와 됫박

2020-05-29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25:11-19

됫박하면 생각나는 것이 어릴 때 쌀사러가는 쌀집, 싸전이다. 수북히 쌓아놓은 쌀 위에 올려있는 것이 원통형 한 말짜리 말박과 사각형 한 되짜리 됫박이다.
당시 쌀보리가 주식인지라, 한 두 말씩 사서 메고 올 때는 벌써 배가 부른 기분이었고, 어쩌다 한가마의 쌀이 집에 들어오면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당시에 계량기를 속이는 일이 신문에 가끔씩 올라와, 싸전을 지나노라면 됫박이 조금 작은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이런 추억이 있어서인지 어느날 주유소에서 차에 개스를 넣다가 “양을 조금씩 줄여서 넣어주는 것은 아니겠지?” 생각을 해 본적도 있다. 의심이 너무 많나? 남 생각할 때인가?

쌀장사꾼, 기름장사꾼을 돌아보기 전에 지금은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이다. 본문에서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와 되를 두어야 하나님이 이 땅에서 오래도록 축복하시리라(15절)하며, 호주머니에 큰 저울추 작은 저울추를 두지 말고(13), 집에 큰 되, 작은 되를 두지 말라(14) 하신다.

그러나 우리 삶을 생각하면 크고 작은 저울추와 됫박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 마음의 호주머니에 남을 판단하는 작은 저울추를 가지고, 자기연단의 큰 저울추를 가지고 살아가자.

우리 삶의 호주머니에 나를 위해서는 절약이라는 작은 저울추를 가지고, 남을 위해서는 힘껏 돕는 큰 저울추를 가지고 살자.

우리 마음의 집이 큰 됫박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 예수의 사랑으로 채워지게 하고, 의심과 불신의 작은 됫박조차 없어지게 하자.

우리의 삶의 집에는 내 이웃들과 더불어 진실과 정직으로 채워지는 큰 됫박이 되게 하고, 욕심과 부정직의 아주 작은 됫박조차 점점 작아지게 하자.

언제나 기억하자. 주님이 언제나 당신의 수평저울로 우리를 달아보신다. 그러나 지레 두려워하지는 말자. 한쪽에 내가 달리고, 또 한쪽에 내가 믿는 예수가 달리신다면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말씀하실 것이다. “내 사랑과 내 축복을 받기에 너는 충분하다! 합격이다!”

남겨드리는 배려와 관심

2020-05-27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24:14-22

예전에 작은 음식점을 하는 어떤 교우가 이런 말을 했다. “경기가 안 좋아요, 장사는 않돼고, 그저 우리가 먹는게 남는 거지요”

그리스도인으로써 우리 삶에서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섬기고 베푸는 것이다. 어제를 베풀고 섬기고 살았는가? 하나님과 이웃 앞에 남는 일을 한 것이다. 오늘 섬기고 베풀려 살려고 하는가 ? 오늘 하루가 보람으로 남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오늘 제목을 “남겨두는”보다 “남겨드리는”이라는 경어로 표현했다. 왜냐하면 어려운 이웃을 섬김은 곧 주님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남겨두는 삶을 살라고 하신다. 가난한 품꾼에게는 미루지말고, 해지기 전에 주머니에 품삯을 넣어 남겨 주라고 한다(15).
객이나 고아와 과부가 앞에 있는가? 송사이든, 판단할 일이든, 그들의 형편과 처지에 우리의 존중과 관심과 배려가 힘이 되도록 남겨두라 한다(17).
밭에서 곡식을 추수할 때, 올리브나 포도를 추수할 때, 가난한 자들을 소망과 용기를 가지고 밭에 찾아 오도록 열매들을 밭에 나무에 남겨두라 한다(19-21).

관심이란 말은 사전적으로 “어떤 것에, 일이나 사람에 마음이 끌려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품꾼이나 객이나 고아나 과부”와 그 같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아직도 따뜻한 마음들이 남아있음을 알려주고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남은 사역이다.

농사를 짓는 농부의 마음에는 추수하다 흘리는 쌀 한톨, 열매 한개도 아까운 법이다. 또 당연히 그런 정성과 돌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아까워도 우리의 추수, 모든 소득 속에는 이웃에게 나누어야 할 몫이 이미 들어있다. 우리가 살다 남으면 돕는 것이 아니다. 이웃과의 나눔이 먼저 실천될 때에야 우리의 한 주, 한 달, 한 해의 소득과 추수는 선한 결과로 종결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사노라면 뻔뻔한 약자를 만날 때가 있다. 도움을 받는 겸손도 없다. 그러기에 ‘누가 도움을 받는 사람인가 모르겠다, 혹은 내가 뭐하러 돕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는 애굽에서 노예가 되었던 일과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일을 잊지말라(18, 22절)” 그렇다 오늘의 삶은 약한 자들을 섬기며 살라고 하나님이 주신 여분의 삶이다. 내 남은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요, 나는 그저 말씀따라 살아가는 종이요 청지기일 뿐이다. 우리의 기쁨은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기쁨은, 주님이 약한 사람들을 돌보시며 기뻐하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덩달아 흐뭇해 하는 것이다.
그 분이 오늘도 내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 마음에 오직 기억될 것은 네가 베푼 배려와 관심이다. 저들에게 너의 소중한 소득을 먼저 떼어(남겨) 베푸는 삶을 살아가거라.”

희생까지는 아니어도 부담은 기꺼이 지자

2020-05-25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23:15-25

살아가면서 가족을 위해서는 자주, 그리고 뜻밖의 일들 앞에서는 간혹 희생을 해야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희생을 자주 겪는 것이 일상적인 생활이라고는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부담은 어떨까? “부담되는데... 부담주지 마세요” 이런 말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내가 가끔 경험하는 일일 것이다. 부담스럽다는 말은 무슨 일을 한다든지, 결정할 때에 선뜻 내키지는 않거나, 나 자신에게 어느 정도 영향이 가는 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결정적인 순간들, 주를 위해서라면 희생을 각오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를 부정하는 삶이고, 태워지고 녹아져 빛이 되고, 소금되는 삶이다.

그러나 매일의 삶 속에서는 오히려 부담되는 일을 기꺼이 짊어지는 것이 더 깊은 그리스도인의 향기라 생각을 하게 된다. 본문의 말씀이다.

내 앞에 닥친 일들 앞에서 “왜 내게 이런 귀찮은 일이 생기나” 하지않고, 고난을 피해 도망온 종과 같은 이들의 아픔을 품어주고 돌봐주는 일 (15절), 재정적 어려움에 빠진 이들에게 어느 정도는 이자를 받지 않고 꾸어주고, 도와주는 일(19), 굶주린 사람들이 밭에서 포도를 따먹는 사람, 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보고 용인해 주는 일(24, 25), 심지어 하나님께 서원한 일(성경 속의 명령이 모두 우리에게 이미 서원이지만)을 실행하는 일(21-23), 이런 일들은 생명을 걸고 하는 희생은 아니더라도 매일의 생활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부담과 관용의 기회라 여겨진다.

엄청난 희생에는 고민과 변명, 거절과 혹은 큰 결단도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부담정도가 되는 일이라면,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될 일이라면, 기꺼움으로, 자원함으로, 작은 희생쪽으로 결정하는 것이 부담을 지는 일일 것이다.

목회를 하면서 엄청난 희생도 주님이 요구하실 때가 있지만, 많은 경우가 부담스럽지만, 주님을 생각하고 즐거움으로 바꾸며 사는 일이 더 많은 것 같다. 나나 여러분들의 오늘 하루도, 내일도, 부담스러운 일이 다가온다. 그 때마다 주님을 생각하며 배려와 관용, 섬김과 도와줌 속에서, 우리의 부담스러움을 이기는 실천이 우리 주님과 곤고한 이웃들을 미소짓게 해 드리자.

나의 일인 체, 오지랖을 넓히자!

2020-05-22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22:1-12

사람이 무엇인가 잘못된 일을 직접 가하면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만, 모르는 체, 못 본 체 외면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서 그리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시고, 우리 그리스도인이 주위의 어려움을, 도움을 줄 일에 못 본 체하면, 삶의 의미가 절반이 잘려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못 본 체”의 반대말이 무엇일까? 그것은 ”본 체“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인 체하는 것“이다. 분명 내 일은 아니지만, 내가 기꺼이 그 궂은 일에 끼어들어, 한마디로 오지랖을 넗히는 것이다(오지랖을 떠는 것이 아니라 ^^).

왜 우리가 못 본 체하며 살아갈 때가 있을까? 그 원인에는 귀찮아서일 것이고, 끼어들다 어려운 일 생길까 두려워서이고, 그 일이나 사람을 무시해서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와 동행하며 살고 있다면, 귀찮음은 관심으로 바뀌는 것이고, 두려움은 희생으로 바뀌고, 무시함은 존중함으로 바뀌는 것이다.

오늘 성경묵상에서 주님은, ”반드시 못 본 체 하지말고 (1절, 3절, 4절)” 이웃 형제가 잃어버린 가축이나 물건을 발견하면(2-3절) 끌어다 돌려주고, 멀거나 모르는 사람의 것이며 잘 두었다가 돌려주고, 형제가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는걸 보면 그 형제를 기꺼이 도와주라(4절) 하신다. 이 말씀은 주 안에서 오지랖을 기꺼이 넓히라는 것이다.

내 일도 바쁘고 힘든데, 요즘처럼 질병으로 인심이 흉흉한데, 언제 남의 물건가져다 주고, 챙겨두었다 주고, 나서서 도와주겠는가! 그럼에도 이 일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나의 일인 체 하는 것”, 이것은 단순한 이웃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나 목장, 사회, 선교지, 나라와 온 세상을 위한 첫걸음인 것이다.

그렇게 내 일처럼 도우려 하다고 칭찬만 듣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도우려 하면 의외의 소리를 외부로부터, 내 마음 속에서부터 들을 수가 있다. “왜 사서 고생이니? 왜 오지랖을 떨고 있니! 푼수가 아냐?”그러나 우리는 분명 예수 안에서 오지랖쟁이요, 푼수쟁이다.

독하고도 독한 이 세상 인생들과, 천하디 천한 나를 위해 이 세상에 육신의 몸으로 오시고 십자가에 죄짐을 대신 져주시고 부활하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만큼 오지랖이 넓으신 분이 어디있을까!

잃은 소양같은 우리들을 찾고 찾아 하늘 아버지께로 돌려주신 예수님의 삶과 은혜를 체험했다면 오늘 말씀은 그저 아멘이다. “제 일입니다. 내가 할께요. 내가 수고하고, 희생하고, 기꺼이 동참하겠습니다.” 그리고 푼수처럼 이 말로 언제나 마무리하게 될 것이다. “주님 때문에 이 일을 하니 제가 오히려 감사하죠”

고독사가 멀리 있는 일이 아니다

2020-05-20

성경묵상의 나눔: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21:1-14

이제는 흔해서 더 이상 기사거리도 안되는, 고독사나 무연고 사망은 참 가슴아픈 일이다. 어떻게든 해결되고, 없어져야 할 문제임에도 나라마다 상황은 증가하는 추세이지 줄어들지는 않는다. 무자녀, 개인주의, 독신자, 사회적 고립, 복지의 한계, 자괴감... 이런 것들이 원인의 일부라 여겨진다. 이 모든 요인들은 우리 주위에서도 느껴지기에, 내 마지막도 그런 고독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한번쯤은 생각을 해 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오늘 신명기 21장에서도 “고독사”가 나온다. 피살되어 들에 엎드러진 사람(1절)이다. 죽음의 원인도, 살인자도 알 수 없지만, 죽어가는 그 사람은 고통속에서도 돌봐주는 사람없이 죽어간 한 고독사의 영혼이다. 주님은 그 죽은 시신을 절차에 따라 잘 거두어주도록 명하신다. 말씀을 따라 더 나아가서, 적어도 고독하게 숨을 거두는 일이 우리 주위에서는 없게 하자.

# “원근을 재서 가장 가까운 성읍(3절)의 장로들과 사람들이 시신을 돌보라.”
오늘날의 원근은 자로 잴 수 없다. 전화 한통, 메세지 하나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실시간 가능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다. 저들의 고통과 외로움을 내 문제로 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내 부모, 내 가족을 넘어서서 온 교인, 온 이웃들에게 대한 거리를 좁혀야 한다.
요즘 6피트 거리를 두지만, 혹 600피트 거리보다 먼 거리로 살고 있지나 않은지 돌아보라. 저들에게 내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요 내가 저들을 돌볼 사람이라는 영혼사랑을 새롭게 하자.

# “레위 제사장들도 그리로 갈지니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택하사 섬기게 한 자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고, 모든 소송을 판결할 자이다(5절)”
영적 제사장인 우리들은 산자이든, 죽어가는 자이든, 죽은 자이든 누구든지 섬겨야 한다. 밉고 답답한 인생이라도 축복해야 하고, 온갖 궂은 인생 실타래를 풀어주는 동반자로 살아야 한다. 오늘 섬겨야할 고독한 영혼이 그대에게 누구인가? 적어도 진솔한 위로와 기쁨을 그들과 나누자.

# “무죄한 자의 피흘린 죄를 너희 중에 제하라(6-9절)”
‘내가 죽였는가? 왜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나?’하지 않고, 우리의 아픔으로, 우리의 죄로 고백하라 하신다. 공동체의 고난과 아픔으로 함께 끌어안고 살아가라 하시는 것이다. 내 부모, 자녀, 가족, 내 일이라 여기는 것이 예수의 마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 “암송아지의 목을 꺾고(4절)”
우리 죄를 사하고, 천국의 안식을 열어주신 예수, 그 분이 “목을 꺾으신 어린 암송아지(4절)”이시다.
아무리 화려하게, 많은 사람 사이에서 죽을 지라도 예수가 함께 하지 못하는 죽음이라면 고독사이다.
아무리 홀로, 혹은 조촐하게 죽음을 맞이해도, 예수와 함께 하면 그의 영혼은 천사들과 함께 나아가는 설레임의 새출발이다.

육신으로나 영혼으로나, 살아있다하나 거반 고독사한 이웃들이 우리 주위에도 있다. 심지어 가족, 친지들에게도 있다. 당신의 작은 사랑의 섬김이 그들의 남은 삶에 그리스도의 양식이요, 삶이 되어주어 예수님의 가신 길을 따라가기를 축복한다.

하나님이 싸움에 끼워주는 사람

2020-05-18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20:1-9

초등학교 때에 제일 부러운 애 중의 하나가 축구공이 있는 아이였다. 방과 후에 작은 운동장에 모여서 공을 찰 때에 모두가 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팀도 정하기 전에 정원숫자에 끼워주어 들어가야 하는데 그걸 정하는 애가 축구공 주인이었다. 모두가 긴장하며 끼워주기를 기다리곤 하였다. 난 다행히 잘 뛰고 발재간이 있어서 탈락될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 ^^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이 제사장을 통해서 “자신감”을 보여주신다. 전쟁의 대열에 아무나 끼워주지 않겠다고 하신다.
“이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두려워 말라. 내가 함께 하여 이기게 하겠다.

그러나 새집 짓고 아직 집들이 못했는데 죽을 것 같은 자 있느냐 지금 돌아갈테면 가라, 포도원을 짓고 과실을 못먹어보고 죽을 것 같아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라, 약혼하고 결혼도 못하고 죽을 것 같으냐!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라. 죽을까 무서워서, 전쟁에 질까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해 돌아가려하면 지금 돌아가라(3-8절). 진정 남은 자들이여 나의 싸움에 함께 하라!”

하나님이 자신감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냥 뜻대로 하시면 되니까. 어차피 이 전쟁은 하나님이 이기시는 것이니까.
하나님의 자신감은 우리를 위해서 표현하시는 것이다. 우리와 함께 싸움을 이기길 원하시기에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영광된 승리의 싸움에 끼워주는 사람이 누구인가?

# 자발적인 사람을 끼워 주신다. 새집같이 가진 것이 많아도, 포도원같이 할 일이 많아도, 약혼녀같이 그리운 사람이 많아도, 기꺼이 주의 나라를 위해서 싸우겠다고,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는 자원하는 사람을 끼워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누가 강제적으로 붙들어서가 아닌 내 마음으로 정해 자발적으로 주를 따라 가는 사람들이다.

# 믿음의 사람을 끼워 주신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한다(1), 너희와 함께 행하신다(4)”하신다. 안 죽는다 하신다. 이 전쟁은 어차피 숫자로 이기는 싸움이 아니다. 믿음으로 앞서 싸우시는 주님을 보며, 솟아나는 담대함으로 주께 순종하는 싸움이다.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하나님(1)”-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여기까지 한 일이 무엇인가? 믿고 순종하여 따라온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예를 보라. 기도온의 32,000용사를 1%도 안되는 300명으로 줄이시더니, 450배나 많은 135,000명의 미디안을 물리치게 하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숫자로 싸우려 말고, 숫자에 매여 살지말라 하신다. 사람의 숫자, 돈의 숫자, 나이의 숫자, 소유한 것의 숫자, ... 지금 내가 이것들에 너무 연연하며 잘못 살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라. 믿음을 놓치지 않았나 돌아보라.
그리고 자발적인 결단과, 담대한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영적 싸움에 당당하게 끼어 이겨가는 우리가 되자.

레위인과 무속인과 세속인

2020-05-14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18:1-14

봄이 되고 여러 종류의 싹이 올라온다. 지금보면 다 초록색이고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얼마 후에는 어떤 것들은 강한 잡초가 되어 모든 것을 덮고, 어떤 것들은 여린 채소가 되어 잡초에 가려 질식해 간다. 적당한 때를 놓치지말고 잡초를 뽑아주어야 밥상에 몇 젖가락이라도 올라올 수가 있는 것이다.

본문에 8절까지는 레위인에 대해서 나오는데 신령한 레위인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 이해할 수 있다. 9절부터는 점쟁이와 무당등 미신 무속인들이 나타나고, 그 이면에는 세상의 온갖 혼잡한 영에 붙들려 사는 수많은 세속 문화와 사람들의 미혹이 있다. 무엇을 뽑아내야 할지 분명한 분별이 필요하다.

레위인이나 무속인은 다같은 영적 세계를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성령님과 잡신들은 전혀 다르다. 그런데, 사람은 영적 존재라서 어딘가에 속하거나 영향을 받게 되어 있기에 우리 모두가 자신을 돌아봐야 할 문제이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들 함께 예배하고 먹고 마심을(3절) 기뻐하는 레위인인가, 혼자 거짓 미래 점을 쳐주고 온갖 복채를 챙기고 살고 싶어하는 나홀로 무속인인가?

나는 새생명을 받고, 그 생명의 복음을 나누는 영적 레위인인가, 헛된 위로와 끊임없는 두려움을 주는 가짜복을 파는 무속인인가?

나는 임마누엘과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을 예언해주는 영적 레위인인가, 이생의 길흉(10절)이나 다루어주는 무속인인가?

나는 하나님과 그 분의 일에만 관심을 갖는 영적 레위인인가? 아니면 세상 온갖 잡신이 가득한 영화, 드라마, 이야기 속의 타락한 문화에 영향을 받고 사는 세속인인가?

나는 오직 성령에 사로잡혀 사는 영적 레위인인가, 아니면 성령을 무시하고 혼잡한 세상 정욕들에 끌려사는 세속인인가?

나는 말씀에만 관심과 집중을 하는 영적 레위인인가, 아니면 운세. 정세, 날씨와 감정에 좌우되는 세속인인가?

세속인이, 무속인이 영적 레위인이 되는 길은 오직 한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이제는 현재나 미래나 되어질 일들을 예수만 붙들고 사는 일이다.

우리 모두 잊지말 것은 이것을 알려주라고, 영적 레위인으로 우리를 주님이 먼저 불러 주셨다.
“연합”이라는 뜻을 가진 ’레위’처럼 우리 모두 하나님과 세상 영혼들 사이에서 예수를 전해줌으로써 진정한 영적 연합을 예언해 주는 영적 레위인이 되자.

늘 새롭게해야할 세가지 성품

2020-05-11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16:13-22

생각은 행동이 되고 행동은 습관을 만들고, 습관은 성품을 만들고 그리고 그 성품은 인생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내 마음 생각에서부터 시작되는 인생의 변화, 끊임없는 자기 변화와 성숙을 강조하는 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음을 변화시키는 시작은 성령이 하시는 일임을 알고, 믿고, 의지하지만, 우리들의 끊임없는 자기 훈련과 실천은 또한 우리의 몫이다.

오늘 본문에서 항상 돌아보고, 새롭게 해야 할 세가지의 삶의 성품을 깨닫게 된다.

# 감사의 실천: “주어진 나의 삶을 더욱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리라”
무교절과 칠칠절, 장막절은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과 돌보심과 축복하심에 대한 감사하는 절기이다. “자녀, 노비, 객, 고아, 과부(14)” 모여서 “모두가 함께 즐거워하는(14, 15)” 자리의 기본이 무엇일까? 제물드려 예배(16)하는 근본이 무엇일까? “감사”하는 것이다.
마귀가 결국 침투하지 못하는 곳이 감사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고난을 결국 이겨내는 곳이 감사하는 자리이다. 삶을 새롭게 하고 부요하게 만드는 기적이 감사하는 것이다. 더욱 감사하며 오늘을 살자.

# 성실의 실천: “주어진 나의 삶을 더욱 성실하게만 살아가리라”
재판장과 지도자의 삶은 공의이다(20). 공의는 하나님 앞에서의 성실이요, 사람들 앞에서의 법과 규례에 대한 성실이다.
예수를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재판장이요 본을 보일 지도자이다. 무슨일이든, “굽게 말며-자기의 감정때문에 빗나가지 말고(19), 외모로 판단말고-빈부귀천따라 차별하지말고 (19), 뇌물을 받지 말고-돈과 욕심에 지배받지 말며(19)” 더욱 하나님 앞과 삶의 규범에 성실하자.

# 겸손의 실천: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는 자로 겸손하게 살아가리라”
“여호와의 제단 곁에, 자기를 위하여 세우는 주상과 아세라 상(21-22)을 세우지 말라” - 하나님의 위해 살아가는 삶의 제단 옆에, 주위 사람들에게 자기를 보여주려는(22) ‘자기 의’가 누구에게나 고개를 들려한다. 자기 의라는 교만이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고, 말씀의 통로를 막아버리고, 세상 속에 열매없는 헛된 삶을 살아가게 만든다.

겸손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예수님의 가신 길을 따라가고, 성령의 부어주심을 받을 수 있는 도구이다. 오늘도, 내일도, 어느 곳에 있든지, 더욱 하나님 앞에도, 사람 앞에도 겸손함으로 귀를 기울이고, 순종함으로 살아가자.

요즘 먹고 살기 힘들어요

2020-05-06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14:1-21

요즘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만나지는 못해도 묻고 싶은 말 중에 하나가 “요즘 먹고나 삽니까?” 아닐까 싶다. 대답도 “먹고 살기가 쉽지 않네요”일 것이고.

사람이 배고프면 먹을 것 밖에 생각이 나지 않고, 목이 너무 마르면 물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다. 식탁 예절이 있고, 차를 마시는 예절도 있지만, 굶주릴 때, 목이 탈 때 입에 집어 넣어야 하는 것은 예절보다 앞서는 것이다.

그러나 먹고 살기 힘들어도, 그래서 먹고 마시는 것이 절실해도, 무엇을 위해 먹고 마시는가를 묻고, 먹는 것보다 내게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는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본문에서 “먹을 것, 먹지 말 것”을 말씀해 주신다. 이제 식물, 음식이야 예수 안에 자유하며 가릴 것 없이 먹는다지만, 본문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이 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성민이다(2, 21)” - “이것 저것 가리면 뭘 먹고 살지”가 아니다. 먹고 사는 것, 일용할 양식조차 하나님께 맡긴 우리들이고 그 분에 우리를 “만나”처럼 매일 채워주시기에 오늘까지 살아왔다. 성민의 매일의 양식은 성도의 믿음이다. 그 믿음과 절제를, 정신없이 없고 마시고 사는 세상사람에게, 보여주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먹지 말아야할 가증한 것은...먹을 만한 짐승은(3,4)” - 음식 이전에 말씀을 먼저 먹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뭘 먹고 살지”가 우선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이것을 먹어야 할 때구나, 절제할 때이구나” 하며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먹을 때마다 말씀의 냄새를 먼저 취하고, 말씀이 에피타이저요 디저트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먹을 만한 짐승은 이러하니 소, 양, 염소, 사슴 흰노루..정한 새(3-20)...” -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먹을 생물들도, 먹지말아아 할 생물들도 내가 만날 일이 별로 없겠구나, 그래도 소고기나 양고기와 생선 품목은 보이는구나” 한 두가지 고기종류로, 어쩌다 그것을 대하여도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한 마음이 든다.

“왜 선악과를 두셔서...왜 금지식물을 두셔서 힘들게 하나”가 아니다. 많은 것을 먹을 수 있도록 풍성함으로 채워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금지 품목은 불평이고, 우리의 필수 식용품목은 감사, 감사, 감사이다.

진멸하라고 하시는 주님의 마음

2020-05-05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13:12-18

어떤 사람은 심각하게 아프지도 않았는데 검사 후에 수술을 하게 되고, 수술실에 들어 가보니 너무 암세포가 광범위하게, 깊히 퍼져있어서 수술을 못하고 다시 덮을 수 밖에 없었던 분을 보았다. 이처럼 작은 일인 줄 알았던 일이 실상은 그 안에는 큰 문제를 품고 있는 일들이 있다.

오늘 말씀에는 “가나안의 어느 성읍이 우상숭배에 빠지면, 칼날로 죽이고, 탈취물을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15-16)”라는 구절이 있다. 거의 50회나 신명기에 나타나는 “ 진멸하라”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은 무엇일까?

가나안 지역의 문제는 결코 가나안 토착민 자신들에게도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동안 악은 점점 심해졌고, 하나님이 주신 회개할 기회를 주셨으나 두고 두고 그 기회를 놓친 민족들이었다. 그럼에도 가나안 족속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여전히 회개할 수 있는 남은 기회가 있음을 사사기 속에서 보게 된다. (삿3:5)

그들이 섬기는 바알과 다른 신들은 결코 작은 못된 풍속이 아니었다. 그 우상숭배들 속에는 음란한 성전 문화가 있고, 인간제물 바침, 전염병과 온갖 패역한 일들로 가득한 일이었고, 그곳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이루어 가실 하나님 한 분의 공의와 구원을 가로막고 오염시키는 엄청난 장애물이었다. 결국 가나안 족속들이 죄를 진멸하지 못함으로 죄가 자신들을 진멸되도록 자처한 것이었다.

어디 가나안 족속만일까! 이스라엘도, 우리 조차도 타락하고 패역한 백성이 될 때에, 하나님의 경고에 회개하지 않은 때에, 결국 심판받고 진멸되어야 할 인생으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노라니, 눈의 유혹에 빠진 아담과 하와, 욕심에 붙들린 아간과 아나니아 삽비라, 사람 눈치보던 사울왕등...틈을 보이다가 실패한 경우들이 떠오른다. 진멸하라는 말씀에는 우리가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써 결코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시는 주님의 간곡한 교훈과 경고가 담겨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그 뜻을 우리가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오늘의 진멸하라는 명령은 심판과 영원한 삶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보아야 하며, 지금도 앞장 서서 싸우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다스림이기도 하다.
그리고 온갖 유혹과 우상들이 치고 들어오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 모두가 “손도 대지 말라(17)” 시면, 그 말씀대로 유혹을 물리치고 주님만 따르는 것이 지금 내가 사는 길임을 깨닫게 해 주신다.

가정예배로 신앙을 세워야할 때이다

2020-05-01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12:1-7

교우들의 가정을 방문할 때, 가구나 주위를 잘 둘러보는 편은 아니지만 언젠가 성도의 가정을 방문해서 유난히 내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거실 벽에 놓아둔 커다란 사이드 테이블인데, 주의해 보면 다리마다 인도의 여신상을 새겨놓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 집의 교우에게 잘 설명하면서 예수를 믿는 집인데, 가구도 많은데 이런 것을 집 거실에 놓아두는 것이 가족이나 손님들에게 덕이 되지 않을 것이라 권면을 하였다.

우리의 가정에는 무엇이 놓여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집의 곳곳마다 온전히 배어있는 가정인가?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은 이 때에 온갖 소문과 염려에만 매여있는지...혹 드라마에 빠져 살고 있지나 않은지...

지금은 가정예배가 회복될 때이다. 가정의 영성이 살아나야 할 때이다. 가정이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할 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건강한 신앙으로 가정을 이끌어가야 한다.

오늘 주님의 주시는 신명기 본문말씀은 민족이 함께 차지할 땅에서부터(1절) 시작해, 그 가족이 함께 즐거워 할 가정(7절)에서 끝이 난다. 이스라엘 한 나라 전체가 가나안을 진입하지만, 결국은 한 가정 가정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 가정이 건강해야 나라가 건강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가정을 영의 눈을 뜨고 그 영적 상태를 한 번 제대로 살펴보라!

각 방과 거실, 장소마다 믿음의 장애물을 없는가? “그들이 섬기는 곳은 높은 곳이든지..낮은 곳, 나무 아래, 모든 곳을 파멸하라(2)”
- 우리 집의 위층, 아래층, 방과 장소들마다, 그리고 아내 남편 아이들의 신앙형편을 돌아보라. 영적 장애물을 제거하고, 그리스도인으로써 단순함과 따뜻한 사랑을 되찾도록 결단하라.

우리 집에, 내 서랍과 창고와 장식물 중에 우상과 타락의 빌미가 될 것들은 없는가?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고 아세라상을 불사르고,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 ...멸하라(3)”
- 헐어야 할 나의 제단은 지나치게 탐닉하는 나의 쾌락과 습관이다. 깨뜨려야 할 돌로 된 주상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내세우고 사는 단단하고 교만한 내 자신이다. 불살라야 할 아세라는 하나님 말씀보다 세상의 뉴스나 정보를 붙들고 사는 세상 문화에 몰두하는 가족들의 삶의 일부분이다. 찍어버릴 조각한 신상들은 온갖 세상 유행따라 흔들리는 나의 변질된 나의 마음이다. 이 버려야 할 모두 것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 한다(요일2:16).

하나님을 예배하며 기도하는 한 곳을 가정에 두라.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그곳으로 찾아 나아와서(5)” -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왜 들어가는가? 예배드리고자 들어가는 것이다. 왜 우리 가정이 존재하는가?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는 예배하는 자리인 것이다.
가정에 지성소와 제단부터 준비하고 거기서부터 모든 삶의 즐거움을 일구어 가라. “여호와 앞에서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7)”

신앙의 우선순위를 가정에 세워가라. “너희의 제물과 십일조와 ...처음 난 것들을 가져다가 드리고(6)”
십일조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십분의 일을 주님이 우선임을 고백하며 먼저 드리는 것이다. 처음 난 것들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첫 소산, 첫 소생의 소중함을 담아 주님이 우선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대가 가정의 제사장으로써 하나님 우선순위, 신앙의 우선순위를 세워 산다면, 자녀와 후손들의 신앙이 건강하게 세워져 갈 것이다.

우리 모두의 가정이 주님의 축복처럼 “하나님 앞에서 먹고, 하나님이 우리의 수고하는 일들에 복주시고, 온 가족이 즐거워하는(7절)” 작은 교회, 작은 천국을 세워가자.

자연 위에 쓰시는 하나님의 글씨

2020-04-29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11:13-21

세상에서 가장 큰 북은? “동서남북”
세상에서 가장 큰 콩은? “홍콩”
한국사람이 함께 쓰는 가장 큰 가위는? “한가위”
세상사람이 함께 보는 가장 큰 칠판은 ? “하나님이 쓰시는 자연이라는 칠판”

본문에서 하나님은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면, “이른 비, 늦은 비, 씨의 파종부터 곡식, 포도주, 기름의 추수(14), 초목과 가축의 번성, 배부름의 넉넉한 축복(15)을 주시리라 하신다. 자연을 통해서 축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을 섬기고 절하면 자연의 가뭄과 땅의 소산의 그침으로, 모든 것을 닫아버리시겠다 하신다. 자연을 통해 스스로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이다. 곡식을 찾을 길 없는 굶주림의 재앙은 코로나 바이러스보다도 무서운 모든 인류에게 가장 큰 재앙이 된다.

오늘의 내 눈 앞에 보여지는 자연위 상태와 변화는 하나님의 칠판글씨이시다. 작은 풀한 포기, 들꽃 한 송이부터 광대한 우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뜻과 계획을 적으신다. 그 앞에서 보이지 않는다, 몰랐다 할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성과 평안, 배부름과 안락함의 축복이라는 자연 앞에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하고,
온갖 재해 속에 당하는 고통과 시련이라는 자연 앞에 하나님 앞에 우리의 잘못을 뉘우칠 줄 알아야 한다.

답답한 이겨내는 3월, 4월을 지나가며, 그럼에도 눈부신 봄날의 하늘과 화사한 이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칠판에 쓰신 글씨가 보인다.
“이 백성이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 것이다(대하7:14),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다, 미래와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렘29:11).”

세상에서 제일 큰 코는? “멕시코”
세상에서 제일 쉬운 숫자는? “19만” ^^

주님과 함께, 이 자연 속의 주님이 사랑으로 날 만져주심을 느끼며 주와 함께 웃음이 늘 흘러 나오기를 ...

어디를 가던 이것만 있으면 하나님도 걱정 안 하신다

2020-04-28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11:1-12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가나안의 여정 속에서 여린 마음, 끈질기지 못함에 마음을 많이 쓰신다. 신명기 각 장마다 반복되어 하시는 “말씀을 기억하라, 지키라, 잊지말라”는 말씀에서 그것을 깊이 느끼게 된다.
가나안까지만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가는 길도 주님은 마음을 많이 쓰신다. 왜냐하면 우리도 여리고, 조급하고, 믿음에 끈질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를 향해 지금가고 있던 극복해 낼 수 있는, 꼭 필요한 신앙의 아이템들이 있다. 어디를 가든지 이것만 있으면 걱정할 것이 없다. 주님도 마음을 턱 놓으신다.

#하나님이 주신 성경말씀에 내가 푹 젖어 있기만 한다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며... 명령을 지키라(1)” - 단순히 기억하는 정도면 안된다. 암송만 해도 안된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대하면서 하나님의 날 사랑하심과 깊으신 뜻을 꺼내 내 생각에, 내 말에, 내 판단에, 다른 이와 대화 속에 젖어들게 해야 한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한다면 걱정할 것이 없는 사람이다.

# 하나님의 능력이 내 체험이 되기만 하면!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교훈과 위엄, 강한 손, 펴신 팔, 애굽재앙, 홍애를 가름과 합치심, 광야에서 너희에게 행한 것들(3-5)” - 작은 일이라도 좋다. 하나님은 잔물결처럼 우리 삶을 만지시며 우리와의 체험과 관계를 넓혀 가신다. 그 손길, 그 작은 경험들이 나의 신앙의 체험으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라. 그렇게 체험 속에 산다면 어디에 있든지 걱정할 것이 없다.

# 신앙공동체 안에서, 겸손으로 행하고 교만을 물리친다면!
“하나님이 다단과 (고라와) 아비람에게 하신 일, 곧 땅이 입을 벌려..삼키게 하신 일(6, 민16)” -교회가 하는 일, 목사나 지도자가 하는 일을 사람의 눈으로만 보면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가기 쉽고, 신앙을 잃기 쉽고, 미혹하는 자가 꼭 틈타게 된다.

평범의 연속이라도 신앙공동체를 떠나지 말고, 내 상식과 판단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낮은 기도의 무릎으로 찾아보는 겸손을 가지라.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은혜 한가지라도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교회 안에 머물 이유가 충분한 것이다! 그저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안다면 교만이 깃들 여지가 없고 이런 공동체 속에 살아가고 있다면 그 앞날에 어떤 일이 닥쳐도 걱정할 것이 없다.

#이 땅에 남은 할일과 받을 축복과 천국의 그림들이 언제나 분명하다면!
“후손에게 주리라 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산과 골짜기...비를 흡수하는 땅, 하나님이 돌보시는 땅 (9-12)” - 애굽 때가 좋았다고 착각하지 말고, 광야에서 살다가 죽는거야 방종하지 말고, 가나안 땅의 그림이 눈에 선명하게 보여야 한다.

여기서 살고 있지만 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계획이 사명의 그림으로 보이고, 하나님의 축복이 상위에 베푸신 그림으로 보여지고, 천국의 예비되어있음이 상급으로 선명하게 보여진다면 어디에 있던 무엇이 문제인가!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도 걱정 안하신다.

내가 죄와 유혹에 흔들릴 때...

2020-04-24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9:9-21

본문은 모세가 산에서 십계명의 두 돌판을 받아오는 내용과 아론과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우상숭배하는 참담한 사건이 담겨있다.
이 말씀을 읽노라니 먼저 베드로의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던 일이 생각났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주어지고 순간, 말씀이 성취되는 중요한 순간들에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이 인생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실수와 실패도 지금까지도 많았고, 앞으로도 그 여지는 정말 많다. 오늘도, 그 때에도 이 말씀이 떠오르고 이겨낼 수 있기를 기도한다.

내가 죄악에 빠지려 할 때에 모세같이 기도하고 금식하는(9), 또 여전히 빗나가도 여전히 기도하고 있는 (18) 어머니, 아버지, 가족의 기도가 부디 생각나기를!

내가 죄악에 빠져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의 유혹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금송아지(16)같은 견고한 진이 자리잡으려 할 때에, 깨어진 두 둘(17)같이 깨어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마음과 그 아픔이 확실하게 보여지기를!

내가 아론처럼(20), 백성들처럼 죄악에 지고, 절망하고 가망없다 포기할 때에, “그 때에도, 그 때에도 기도하며(19, 20절)” 중보기도로 함께 있어주는 성령님과 믿음의 교인들의 음성이 들려지기를!

죄의 유혹이 너무 강해서 아무 생각도 안나고 그냥 끌려갈 때에, 옛습관과 유혹과 죄악의 금송아지를 불살라, 깨뜨려, 가루 만들어(21) 급물살 속에 흘려보내 다시는 틈타지 못하게 할 능력의 이름, “예수 그 이름”만은 부를 수 있기를! 기도한다. 나도 계속 기도하련다.

네 힘이 아니라 내 힘이다

2020-04-23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9:1-8

예전에 아이를 데리고 공원 호수에서 낚시를 한 적이 있다. 물가에 던져놓은 아이의 낚시대에 물고기가 입질도 전혀 안하자 지루했는지 별로 들고 있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내가 들고 깊은 곳에 던지고 잠시 있으니 물고기가 미끼를 덥썩 물었다. 모른체 하고 아이에게 주면서 계속 해보라고 하자 작은 손에 갑자가 낚시대가 요동을 한다. 나의 놀라는 체함과 아이의 진정한 놀람과 흥분 속에 손바닥만한 물고기를 꺼내 들어올렸다. 아이의 놀람과 흥분이 비명에 가까왔다. “내 잡았어, 내가!” 함께 경험하고 기뻐하자는 것이었지만, 스쳐가는 내 마음의 질문과 대답은 ... “네가 잡은 거니? 내가 잡은거지”

무엇가 큰 일을 해냈는데, 누군가가 “내 힘이었다” 하면, “내 힘”이라는건지 “네 힘”이라는건지 혼동될 때가 있다. 예전이 영어가 더 익숙한 아이에게 “네 힘, 내 힘”이라는 말을 읽어주며 다르게 알아들을 수 있는지 물어보니 전혀 같게 들리고 구별이 안된다고 한다.

단어의 발음만이 아니다. 삶 속에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이 “내 힘이다” 하심을, 수도 없이 “그래 네힘이라 하신다”라고 하며 자기 착각속에 동문서답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오늘 본문도 그렇다. “ 네 공의가 아니다 (4a, 5a), 내 그 땅의 백성의 악함(4b, 5b)과 내 힘으로 쫓아내 주었다” “네 앞에서 내가 앞장서서(3) 너에게 안겨준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부르짖고 기도하다가도 응답받고, 위기의 순간이 지나면, 너무 재빠르게 “하나님이 하신 것을, 내가 한 것, 나의 공로로 바꾸어 버린다.

가나안 토착민은 악하고, 이스라엘은 목이 곧은 백성(6)이라 틈만 나면 자기를 내세웠지만, 우리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때문에 내가 있음을 아는 그저 "나의 나됨이 은혜"인 백성이어야 한다.

우리 앞의 삶의 장애물이 여리고성과 같이 크고 강하다 할지라도, 장대하고 많은 아낙사람(2)들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할 일은 한가지이다. 하나님이 하시도록 말씀을 앞세우고 기도하면서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나 여호와 , 네 아버지인 내가 해 주리라. 내가 앞장 서 주리라” 그리고 기도하는 것이다. “주여 지금도 제가 믿고 순종하겠습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고 고백합니다.”

내 힘으로 했다는, 해내겠다는 착각은 금물이다. 광야같은 힘든 세상에서, 강한 가나안 앞과 같은 불가능과 절망 앞에서 말씀과 기도, 믿음으로 주의 등 뒤에 업히고 매달려 주의 힘으로 살아가자.

필히 가져야할 것과 버려야 할 것

2020-04-20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7:12-26

아이들이 어릴 때에 우리 부부가 지방을 다녀와 한밤중에 현관문을 열려니 키가 없었다. 어린아이들이야 세상모르고 자고 있으니 깨울 재간이 없었다. 부르고 두드리고 애쓰다가 결국에는 창문을 열고 들어갔다. 도둑은 아니다, 내 집에 들어간 것이니까. 가져야 할 것이 필요할 때 없으면 낭패를 당한다.

방에 좋지않은 냄새가 어디선가 자꾸 난다. 쓰레기통에 담긴 바나나 껍질이 썩는 냄새이다. 삶에서, 마음 속에서 버려야 할 것을 제 때에 버리지 않으면 결국 썩는 냄새가 나고 향기를 아는 영혼의 감각이 마비가 될 것이다.

본문에서 주님은 말씀의 언약을 지키면 조상에게 베푼 인애(12)와 함께 자녀와 땅과 소산들, 소와 양을 풍성하게 해주리라 약속하신다(13).
말씀은 달랑 새겨진 돌판이 아니다. 그 말씀 속에 주신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이 가져야 할 것은 그 약속대로 능히 이루실 하나님의 능하심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행여 “심중에라도 (17)” 대적과 장애물이 엄청나도 거기에 눌리거나 부정적이 되지 말고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기억하라(18)라 하신다. 19절에 그 분은 끝까지 챙겨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큰 시험”-열재앙을 통해서라도 자기 챙겨주시는 하나님/ “이적(signs)”-만나를 끝까지 먹이셔서 챙겨주시는 하나님/ “기사(wonders)”-홍해를 가르고 덮어서 챙겨주시는 하나님/ “강한 손”-여리고를 무너뜨리시고 챙겨 안겨주시는 하나님/ “펴신 팔”-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하며 안식처를 챙겨주시는 하나님...”

우리도 필히 가져야할 것은 오늘같은 질병에, 오늘날같은 환경의 변화와 불안에 눌리지말고 부정적이 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사는 생할이어야 한다. 그 분은 다 챙겨주신다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한편 가나안 족속들과 왕, 그 신들을 천하에서 제하여 버리라(16, 24, 26) 하신다.
아까와하지 말고(16), 탐심을 마음에 들이지 말고(25), 집에도 들이지 말라(26) 하신다. 왜 하나님이 이토록 진멸을 강조하시나 ! 탐심과 유혹, 보이는 것이 파고드는 신앙의 변절이 얼마나 강력하고 집요한지 안다면 이해할 것이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마음 속에 우리들을 향한 보호와 사랑을 알 것이다.
왜 진멸을...이라는 질문보다, 내가 버려야하지만 못 버리고 있는 그 집요한 것을 필히 버려야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부디 우리 모두가 버려야 할 것을 붙들고 살고, 가져야 할 것을 버리는 어리석은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알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필히 가져야할 믿음을 붙들고, 필히 버려야 할 세상 것들을 단호하게 내어버리고, 끊고, 거절하며 마음의 가나안에서부터 천국 가나안까지 축복을 체험하며 살아가자.

예수의 십자가는 닫혔던 문을 여는 열쇠다

2020-04-10

성경묵상의 나눔: 마태복음 27:45-56

중요한 건물이나 집일 수록 문이 견고하다. 그 문이 육중하고 견고하고 단단할 수록 그 안에는 섣불리 들어가면 않되는 곳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아무리 크고 견고해도 내게 열쇠가 주어졌다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은 간단하다. 열쇠를 넣어 돌리고 밀고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문이라 하셨는데, 본문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는 이제 무덤 문에 당신이 갇힐 패배의 끝이 아니라 문들을 여는 열쇠로 깨닫게 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성전 휘장 문(51)”- 죄와 성결의 단절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우리 모두가, 누구라도 십자가의 제물되신 예수를 통해 찢어진 성전휘장 사이를 열고 들어가 모든 죄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구원과 용서와 사랑을 받는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죽음이라는 두려움의 “무덤 문을 열고”(52) 확실한 소망을 주는 열쇠이다. 예수님이 죽자, 무덤이 열리고 죽은 사람들이 일어났다.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살아났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우리들이 부활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기에, 그것을 믿기에 우리가 부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제 죽음에 갇힐 까봐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나의 죽음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열고 가져가 버리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많은 여인들을(55-56) 견고한 믿음으로 들어가게 하는 열쇠이다. 여기까지 예수를 따르는 충성된 여인들의 모습이나, 그들의 충성은 장례까지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들에게 이것은 예수의 장례식이 되겠으나, 이것은 예수의 약속된 모든 말씀의 장례식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십자가는 오히려 저들의 영의 눈을 열어 천국의 약속까지 붙들고 사는 충성된 믿음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지금 제자들의 충성은 어디있는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56절)” 어머니라는 단어 한마디면 되지 않을까? 어머니의 믿음이 평생 자녀들의 믿음의 문으로 들어가는 열쇠이리라!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이방 백부장(54)과 이방인들이 ..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외치게 하듯이, 모든 열방의 영혼이 갈 수 있는 지옥문을 닫고 천국문을 여는 열쇠이다.

십자가의 은혜는 그 누구라 하기 이전에 나에게 주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열쇠를 우리에게 꼭 쥐어 주셨다. 이제 우리 모두 예수의 십자가가 죄로부터의 날 구원했음을, 내 앞에 닥치는 죽음조차 이기게 하심을 선포하자. 그리고 영원한 말씀 속에 이루어질 재림과 천국까지 믿으며 사는 충성과 열방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하자.

십자가 앞에서, 어느 길을 갈 것인가?

2020-04-09

성경묵상의 나눔: 마가복음15:1-15

요즘같이 하루하루가 생존으로 각박한 세상에서, 이 세상에서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철학자의 심성일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삶을 살고, 그 분 앞에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성도로서 구도자의 자세이다.

본문에서 이제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시는 예수님은 공회에서의 불의한 재판을 받고, 빌라도 앞에 서게 된다.
그 분은 이미 예상하셨지만, 불법의 재판과 모함, 선동과 광기 속에서, 예수님은 마음부터 벌써 못이 박히고 있으시다. 저들이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아는 우리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흔들리는 군중으로?
하나님의 음성은 들어보지 못하고, 공회에서 의논하고(1) 결정한 것이니 옳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13, 14) 외치는 집단주의처럼, 우리도 세상법과 정보, 과학상식, 문화유행따라 민족끼리만 와치며 살아갈 것인가?

율법에 안주하는 대제사장처럼?
내가 결정하고 내가 끝장을 내야한다는, 고발하고 충동하는(3, 11) 대제사장들처럼, 우리도 자기가 주인인양 착각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회개를 잃어버린 인생으로 나도, 가족도, 이 사회도 고집스레 파멸로 끌고 갈 것인가?

양다리 걸친 빌라도처럼?
뭔가 잘못된 것을 알아도, 죄가 없는 예수를 보아도, 무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15) 예수를 죽음에 내어주는 빌라도처럼, 우리도 몸사리고 “안전 안전”외치며, 주님사랑을 따르기 위한 도전과 위기를 회피만 할 것인가?

복수의 칼을 가는 바라바처럼?
이제 풀려나 더욱 힘주어 “민란 밖에 해결이 없다!” 더욱 외치고, 증오의 칼로 로마 병사의 옆구리를 찌를 바라바(15)처럼, 증오의 마음으로 힘을 키운 복수만이 해결이라 외치며 살 것인가?

그런데 예수는 “내가 왕이다(2). 내 나라는 이 땅이 아닌 아버지의 나라 천국이다” 라고 한마디만 하시고, 침묵으로(5) 이 길을 가신다. 십자가의 길, 부활의 길, 영생의 길을 사랑으로 끝까지 가시며 우리에게 영생구원의 길을 남기실 것이다.

이 시간 마음에 주의 음성을 듣는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대는 누구인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군중인가, 율법에 안주한 제사장인가? 양다리걸친 빌라도인가? 복수의 칼을 가는 바라바인가?

아니면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줄 예수사랑, 십자가의 길의 Follower인가? 가장 약해 보여도, 가장 무기력해 보여도, 가장 강력하고 영원한 것이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의 사랑이다. 그것만이 우리의 길이요 소망이다.
이 고난 주간에 어느 길도 아닌, 오직 예수님의 가신 그 길을 베푸신 구원의 사랑을 감복하며 우리 모두 따라가자. 험한 세상 속으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 만사를 기도하는 성도

2020-04-06

성경묵상의 나눔: 마가복음 11:15-25

예루살렘을 입성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성전에 들어가신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는 매매상, 환전상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의 상들을 둘러 엎으신다. “만민이 기도할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17)”하시며 분노하시며 안타까와 하신다.

매매상, 환전상들도 신앙이 있다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세상과 신앙을 오락가락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기보다, 판매수익의 돈액수가 저들에게는 우선이었다.
정도차이는 있지만 혹 나의 모습이 그런 모습이 아닐까 ? 우리 모두 내 삶의 장소마다 진정 기도하는 집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회개의 기도로 나 자신을 둘러 엎자! “예수께서... 둘러 엎으시며(15)” - 내 형식적 신앙, 이기적 욕심들을 둘러 엎는 회개의 기도가 절실할 때이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선포에 복음은 믿으며 회개는 까먹어서는 안된다. 회개와 구원은 끝까지 함께 가는 것이다.

예배속의 기도로 주를 경배하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17)” - 기도와 예배는 같은 어원이다. 나의 기도로 주님을 예배하는 교회의 지체가 되어야 한다. 함께 빌기를 다할 때에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믿음의 기도로 문제를 향해 선포하자! “믿음으로 기도하며, 불가능해 보이는 산조차 옮겨가라(23)” 선포하라. 산을 옮기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우리의 기도는 초점은 주님의 긍휼을 움직이는 것이지 산을 움직이기는 것이 우선이 아니다. 내 마음, 입의 선포 자체가 믿음이며 주님이 주목하신다.

믿음의 연속기도로 삶을 끝까지 헤쳐나가자! “기도하고, 의심치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24)” 예수님도 세번 기도하셨다. 바울도 질병의 고통을 세번 기도하였다.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하는 것은 불신이 아니다. 믿음을 다져가는 것이다. 성도인 우리에게 제일 큰 안타까움은 기도를 않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기도하지 않는 것이다.

중보기도로 사명의 꽃을 피우자! “기도할 때에 ...용서하라(25)” 예수님이 제일 많이 기도하신 것이 무엇일까? 중보기도이다. 제자들에게 제일 원하셨던 기도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기도하라”는 중보기도였다.

우리의 용서함과 용서받음도, 섬김도, 구제도, 전도도, 사랑조차 중보기도의 영역 안에 다 들어있다. 적어도 매일 가족 한사람, 교우 한 사람, 전도대상자 한사람, 목회자와 선교사를 중보기도에 깨어있으라.

내 신앙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성전과 함께, 내 마음 속과 삶이 만사를 기도하는 장소가 되도록 영적 영역을 넓혀가자.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러나

2020-04-03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4:25-31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실망스런 결과를 볼 때 하는 말이다. 혹시 지금 내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시는지...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갈 가나안에서 우상숭배(25)를 절대 금하신다. 만약 불순종하면 그 땅에서 날이 길지 못할 것이고(26), 여러 민족들 사이로 흩어질 것이라(27) 하신다. 이보다 더 엄한 경고가 어디있겠는가?

이스라엘이 깨닫고 바르게 하나님을 따르고 섬겼을까? 혹시나 했을지 모르지만 역시나 실망이다. 후에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고 고난의 디아스포라의 길까지 가게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고난에서도 끈질기에 버티며 이어가지만, 기회속에서도 끈질기에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고, 우상문화에 빠져들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만 탓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앞에서의 불순종과 배반의 삶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나 했을 인간이 만들어가는 과학과 자만의 삶을 돌아보라. 하나님을 멀리한 세상은 고난이 끝이 없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우리들에게도 연단의 연속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실패보다 더 무서운 것은 완전한 포기, 절망이다. 그러니 절망, 자기연민, 우울함 속에서, “우리가 혹시나 노력해보았고, 다시 일어서 보았지만, 역시나 난 안돼”라고 완전히 쳐져서 말하지 말라.

“혹시나 해도 역시나” 실수투성이인 우리들이고 그래서 이제 다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지만, “그러나” 주님도 그것조차 이미 아시고 계신다.
“내가 너의 약함을 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은혜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요 바로 복음이 아닌가!

그러므로 너무 너무 내가 약할 때에 , “인생이 끝장난 날 같을 때에(30), “마음과 뜻을 다해 주를 찾는(29)” 회개라는 마지막 카드를 사용하라. 주님은 내가 회개의 눈물로 찾아옴을 한시도 잊지 않으시고 지금도 정확하게 기다리신다. 그리고 거기에 새로운 변화와 기적이 있다.

그것이 “거기서도 네 하나님을 찾게 되리니...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29)”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역시나”하며 한숨을 토하고 힘들어하는 우리들의 삶의 현장, 거기에도 하나님은 먼저 와 계시다는 것이다.

오늘 환경을 바라보며, 또 자신을 바라보며, 여러분의 가슴 속에서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는 깊은 한숨의 고백이 아니라, “그러나” 여전히 내 기도, 내 회개를 받아주시고 함께 이기게 하시는 하니님의 자비와 언약(31)을 꼭 붙들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약속의 땅은, 땅보다 약속이 중요하다

2020-03-30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3:12-22

봄이다. 일구어야할 잡초투성이의 작은 텃밭이 자꾸 눈에 띈다. 오늘이라도 갈아엎어야 하겠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흙의 소중함, 땅의 소중함을 갈수록 느끼게 된다. 그러나 사실 ‘땅을 소유’하는 소중함은 잘 모르고 살아왔다. 땅을 내 소유로 가져본 적이 없어서가 아닐까? 한국이나 미국에 돈이 될만한 땅이라도 있으면 마음이 달라지지 않을까?

신명기 본문에서 드디어 이스라엘은 요단 동쪽부터 땅을 정복하는 일들이 시작이 된다. 그리고 르으벤, 갓, 므낫세 지파는 비옥한 동쪽 지역에서 정착하기를 원한다. 그 때 모세와 이스라엘 모든 지파는 그들이 먼저 함께 싸운 후에 차지하기를 명령하고 이에 따르게 된다. 자칫 그르치면 가나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분열될 위기를 넘기게 된다. 그리고 요단 서쪽의 가나안땅의 정복을 위해 계속 전진한다.

땅, 가나안 땅, 모세와 모든 백성이 꿈에도 그리던 그 약속의 땅이다. 목축을 주로 하는 그들에게 땅은 더욱 소중하였으리라!
그러나, 그럼에도 땅보다 더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 약속이다. 약속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한 모델하우스들을 지은 샘플 단지일 뿐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예루살렘 지역의 성전은 예배의 기초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땅이 아니라, 그 땅을 믿음의 출발이라 정해주시고, 나와 함께 하자 허락하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이 과연 조그만 가나안 땅덩어리에만 마음을 두셨을까?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그 지역에서부터 참된 율법, 복음이 생명수가 되어 흘러나고, 온 세상에 넘쳐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미국사람에게는 총소리가 “Bang Bang” 하고 들리지만, 우리 한국사람은 “땅땅”하고 듣는다. 땅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인가?

잊지말자. 온 세상 땅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예수 한 분이시다.
진정한 약속의 가나안 땅은 우리가 예수와 함께 살고 있는 지금의 현장이요, 아직 예수를 모르는 모든 영혼들의 마음 속이다. 우리에게도 아직도 정복해야할 약속의 땅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좁은 땅 소유의 욕심에 멈추거나 갇혀서는 안된다. 그 지역과 그 땅에만 목메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땅보다 소중한 것이 약속의 말씀이다. 지금 이스라엘이 공동체를 강조하듯이 열방을 공동체로 삼아 그대가 한 지체가 되기를 바란다.

왕고집과 믿음의 고집

2020-03-25

성경묵상의 나눔: 신명기 1: 34-46

세상에서 제일 고집이 센 성이 “내”가 라고 한다. 우리가 내가를 얼마나 붙들고 살았는지! “내가 이래 봬도..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내가 한 일이야...”
그 고집은 좌절하고 상처를 받아도 다를 바 없다. “내가 뭘 하겠어... 내가 이것밖에 않되나... 내게 왜 이런 일만...”
사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우리 성이 본래는 “내”씨로 바뀌었다 생각해 본다. 성에는 본이 다 있는데, 그 후 우리 가문의 본은 “왕고집 ”일 것이고...

오늘 말씀에는 불신앙으로 하나님께 책망과 징계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뉘우친다며 나가 고집스레 싸움을 시작한다. 이제 지금 싸움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모세의 만류에도 나가 싸운다(43). 물론 결과는 패배와 통곡(45)이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이제 잘해보자는 마음도 자기 고집일 때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
지금 내 삶이 성공이라 생각하나, 또는 실패라 생각하나? 하나님의 뜻에서부터 돌아보라. 내 생각과 전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일들이 고통스럽고 지루하게 여기고 있는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느껴보라. 내 판단과 전혀 다르게 내 마음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책망과 징계가 속이 상하고 왜?라는 원망이 생기는가? 하나님의 손길로 체험해보라. 내 판단과 다른, 전혀 새롭게 대면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 범죄하였습니다(41)”라고 고백하였는데, 더 나아가 이제는 자기들의 판단을 내려놓았다면, 깊은 영적 회개와 온전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만을 따랐다면 전혀 다른 결과를 허락하지 않으셨을까? 어떤 결과일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분명 그들에게 축복이었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 갈렙과 여호수아가 등장한다. 가나안 땅을 밟을 유일한 출애굽 1세대들이다. 그들도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도 우리들처럼 나름 고집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에서 왕고집이 아닌 믿음의 고집, 온전한 순종을 본다.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한(35)”한 갈렙, 그가 행한 것은 그저 우직하게 하나님이 약속만을 붙들은 것이다. 우리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담대하게 해주어 백성을 이끌고 갈 여호수아(38).” 그가 행한 것은 주인이신 모세를 그저 충실하게 따르며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든 것이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크고 비밀한, 풍성한 젖과 감사.기쁨의 꿀이 넘치는 가나안의 축복”은 우리에게도 주셨다. 오직 믿음의 고집으로 우리 다 함께 주의 손에 이끌려 그곳까지 나아가자.

그런 10명의 위험한 정탐꾼은 아예 내보내지 말자

2020-03-24

성경묵상의 나눔:신명기1:19-33

광야생활을 거의 40년을 통과하고 드디어 약속의 땅 앞에 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모세가 감격 속에 선포한다. “하나님이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말라 주저말라(21)”

그러나 하나같이 모든 백성(22)이 내놓은 것은 “사람을 보내어 먼저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 어느 성읍으로 갈지 알아보게 하자(22)”는 것이었다. 얼마나 적절한 생각으로 보이는가!
그러나 그것은 광야를 들어갈 때부터, 이제 광야를 벗어날 때까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자는 사람의 생각일 뿐이요, 깊은 마음 속에 남아있는 언젠가는 터질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12명 정탐꾼의 귀환 때에 그 두려움은 터지고 만다. 대다수의 보고가, 들어가야 할 가나안이 하늘을 닿을 크고 견고한 성읍, 장대한 성읍 군사들, 거인 아낙자손(28)들이라니! “메뚜기같은 우리가 무엇할 수 있겠나!”(민13) .. 실망, 절망, 원망(27)이 얼마나 빨리 번지는지도 모두가 알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와 함께 저들은 광야의 길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40절) 그리고 가나안의 정복은 자녀들에게 맡겨지게 되고, 그 광야가 출애굽 1세대의 무덤이 되고 만다. 저 가나안을 앞두고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힘든 여정에서 여기까지 믿음으로 살아왔는데! 이 때에 내가 그런 위험한 정탐꾼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정탐꾼을 내보내서도 안된다!

지금 우리의 10명의 정탐꾼, 결코 내 마음 속에서조차 내 보내지 막아야 할 위험한 정탐꾼은 무엇일까?
1. 약속한 말씀을 멀리하고 그 성취를 믿지않는(19, 26) 내 생활이다.
2. 출애굽 과정의 엄청난 기적과 은혜들을 잃고(19, 32) 보는 것이 전부라는 세상문화이다.
3. 모든 사람(22)의 뜻이라고 그저 따르는 영적체험을 모르는 형식적 신앙이다.
4. 영적 지도자의 권면(21,32)을 무시하는 무감각해진 성도의 오만함이다.
5. 백성의 어리석은 강청(22)에 끌려 바른 길을 왜곡하는 지도자의 무책임이다.
6. 자기를 메뚜기(민13)라 여기는 연민을, 아직도 강한 예수님, 성령님과 바꾸지 못한 사람이다.
7. 전능자 하나님의 변함없는 자녀사랑(31)을 망각하고 혼자라 외로워하는 인생들이다.
8. 내 인생을 불로, 구름으로(33) 보호하심이, 어제 오늘, 영원히 계속됨을 모르는 사람이다.
9.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아, 평안이 없기에 염려, 걱정의 정탐꾼을 자꾸 내보내는 사람이다.
10. 하나님의 음성과 약속은 멀리하, 그저 휴대폰과 유투부와 뉴스의 소식이 진리라 여기며, 그 곳에서 위험한 정탐꾼이 물어다주는 것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잊지말자. 우리에게는 약속의 말씀이,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성령의 인도하심이 우리의 정탐꾼이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과 행동으로 옮기며, 기도로 끊임없이 그 분과 교통하며 지시를 받고, 내 문제 앞에서 용감히 전진하자. “애굽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다(30)” 아멘.

날 사랑하느냐 거듭 물으심은

2020-03-18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 21:15-25(요한복음 끝) 예수님이 베드로를 앞에 두고 마지막 질문을 하신다. 우리 모두도 그 자리, 그 분 앞에 서있다. 두번이나 날 사랑하느냐 물으실 때마다 주를 사랑한다 고백하지만, 마지막 세번째에 가서는 베드로의 마음은 근심과 아픔으로 가득 찼다. 죽기까지 따르겠다 말하고 다짐했지만(13:37) 세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예수님을 버린 자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한,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 자신이 아닌가! 그러나 예수은 베드로의, 우리의 이전의 실패를 끄집어 내고, 꼬집는 얄팍한 지적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날 사랑하느냐 물으심은, 너의 눈물도 알고, 너의 깊은 영혼의 회개도 알고, 그러기에 이미 널 용서하였다는 대답을 가지시고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이다. 이들보다 더 날 사랑하느냐 물으심(15)은, 진정 어느 제자보다 네가 약함을 이제 알았다면, 계속해서 “주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회개와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후7:10)”는 예수님의 진정 낮아짐의 일깨우심이다. 날 사랑하느냐 물으심은, 너를 통해 여전히 내 일을 하겠다는, 양들을 섬김에 (15, 16, 17) 귀하게 쓰시려는 주님의 계획을 말씀하시려는 것이다. 날 사랑하느냐 물으심은, 내가 가는 길의 고난도 네가 함께 통과하게 될 것이고 (18, 19), 그럼에도 내가 널 사랑하고, 네가 날 사랑하면 어떤 것도 그 사랑을 끊을 수 없고, 어떤 일도 감당해낼 수 있다는 (롬8:37-39) 가장 큰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니?” 하시는 예수님께, 이제 우리가 대답을 드릴 차례이다. 아니 매일 드려야할 기도를 고백할 때이다. “주님 제가 약한 것 아시잖아요. 그러기에 내가 자신있다, 자신없다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그저 주님을 의지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늘 품고 살겠습니다. 주를 위해 당하는 고난의 자리에게 세번, 삼백번, 삼천번 용서하신 그 사랑을 붙들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지금도 순종하며 도우심의 근거가 되는, “날 사랑하느냐”에 담긴 사랑의 십자가, 사랑의 부활생명, 사랑의 성령님을 의지하고 따라갑니다. 오늘도 도와주십시오. 지금도 살아계신, 날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달라지신 것이 없다!

2020-03-17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 21:1-14 사형수가 마지막 사형대로 가면서 계단에서 휘청 넘어질 뻔 했다. 그 때 한 말이 “어이쿠! 하마터면 죽을 뻔 했네!”였다나... 제자들이나 사람들은 죽음이 끝인 줄 알고 살아있는 동안에 이기심과 공명심에 붙들리기도 하고, 예수님의 죽으심 후에는 결국 모든 것이 끝인 줄 알고 두려워했고, 다시 고기잡으로 베드로와 함께 디베랴호수에서 배를 탄다(3). 그러나 작은 잡어 한마리는 커녕 아무 것도 잡지 못한 밤이 되었고, 서로들 “그렇지,뭐 되는 일이 있겠어. 다 변해버렸는데...”하며 깊은 한숨들을 꿀꺽 속으로 삼켰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하시고, 부활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에게는 달라지신 것이 없다. 제자들이 멀어져도 여전히 찾아오시고(1) “얘들아!” 부르시는(4) 예수님의 사랑과 열정이 있으시고,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게 하시고, 찢어지기 직전의 기적을 회상(눅5장)케 하시면서, 153배(11)의 축복을 여전히 경험하게 하신다. 이제 흘렸던 눈물이 호숫물이 되어 예수께로 첨벙첨벙 다가가는 베드로(7)를 맞이하는 예수님은, 베드로는 풍랑 속에 빠져가는(마14장) 자신을 손잡아주시던 그 예수님이시다. 조반을 먹으라(12)시면 떡과 생선을 떼어주시는 예수님의 손길은 여전히 5병2어의 기적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돌보아 주시는 그 손길이시다. 나의 주,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도, 부활의 발걸음에서도 달라지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우리가 세상호수로 사명을 버리고 가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주님의 은혜의 바다로 이끌려고만 한다면, 내가, 우리가 고기잡듯 세상 일만이 만사 우선이 되지 않고, 사람낚는 어부의 사명을 위해 모든 삶의 패턴을 복종시킬 수 있으면, 예수님은 여전히 살아계셔서 나와, 우리와 함께 하시며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게 하실 것이다. 지금도 당신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달라지신 것이 없는, 나와 함께 해주시는 예수님을 고백할 수 있겠는가? 난 아멘이다.

또 골고다인가? 내 마음 속인가?

2020-03-10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 19:1-16 필경 죄된 인생들에게서 시작한 변종바이러스가 모두를 두렵게 하고 삶의 모습을 바꾸어 놓고 있다. 그러나 예수 십자가의 복음을 바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은 우리가 예수의 고난에의 동참과 부활의 치유와 새생명의 능력을 구하는 사순절기이다. 오늘 19장 말씀 속에 예수님은 온갖 멸시와 조롱과 채찍질 속에서, 저들 죄의 바이러스의 유일한 백신으로 어린양의 제물이 되신다. 우리가 또 다시 그 분을 골고다로 내몰겠는가? 내가 저지른 멸시와 조롱과 채찍질로 죽으신 예수이시다. 이제는 회개로 나 자신의 불치병자됨을 시인하고, 예수의 피뭍은 십자가의 구원과 기적의 치유를 받자! 더 이상 골고다가 아닌, 내 마음 속으로 그 분을 모시자. 유대지도자의 계략과 선동(6)처럼, 지도자인 내가 사랑과 희생없이 형제 자매를 대하고, 너무 쉽게 판단의 잣대를 대곤 했던 것을 회개하자. 백성들처럼, 분위기에 휩싸이며 소문이 진리인양 퍼뜨리며 분별없이 저지른 칼같은 언어(15)와 던진 돌들을 회개하자. 군인들처럼, 명령이니, 그냥 따를 뿐이니 하며 함께 섞여 저지른 우리의 집단적인 죄(2)들을 회개하자. 빌라도처럼, 죄없는 줄 알면서 양심의 소리를 들으면서도(4), 내 희생으로 품을 자리를 발뺌하는 나의 이기적인 행동들을 회개하자. 제자들처럼, 지금 가장 힘들고 어려운 때에 예수님을 피해 숨어버린 나의 약함을 회개하자. 그래서 코로나 바이러스로 연단하시는 이 때에, 더 이상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지 말자. 우리의 회개와 십자가를 붙든 John19장의 믿음으로 Convid19의 근원을 소멸시키고, 예수와 동행하며, 정금같이 전진하자. 글로리아 코로나, 면류관의 주인공이 되자.

이미 죽었음을 선포하자

2020-03-09

성경묵상의 나눔: 18:28-40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이제 시작되었다. 유대 지도자들을 계획 속에 예수님을 한밤에 잡아 안나스의 집으로, 가야바 앞으로 끌어가 심문하고, 새벽에 관정의 빌라도에게로 끌고가 밀어넣는다. 예수님을 “행악자”라(30)하며, “죽어야할 대상(31)”이라 한다. “강도 바라바(40)”만도 못하다며 십자가에 죽어야할 자라고 소리친다. 지도자들은 계략이 집요했고, 사람들은 온갖 증오를 예수님에게 몰아갔고, 제자들에게는 온갖 두려움이 터져 본능적으로 움츠려 숨을 곳을 찾았다. 예수님 앞에 서있는 빌라도조차 긴장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은 놀랍게도 담담하시고 평온하시다. 고통의 감람산 정원의 기도시간은 있었지만 “이제는 가자”며 제자들을 이끄셨고, 이제는 고난을 기꺼이 받으실 준비가 되셨다. 그런 평안이 어디서 오는가? “자신이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32)”을 아신 주님은 이미 자신을 어린양으로, 제물로 내놓으신 것이다. 십자가 이전에 이미 죽으신 것이다. 이제 십자가 앞에서 세상이 요란할 지언정 그 분은 묵묵히 그 길을 가실 것이다. 그렇다. 내가 죽으면 평안이 온다. 육신의 숨을 스스로 끊는다면 죄가 되겠으나, 내가 예수 안에 영적으로 죽으면 평안이 다가온다. 새삶이 임한다. 문제가 해결된다. 문제가 아예 없어진다. 제자들도 십자가, 부활의 예수님 안에서 자신들이 죽을 때 비로서 평안과 담대함이 왔다. 주위에서 여러가지로, 심지어 바이러스까지 조여오는 환경 속에서, 오늘 믿는 자로서 우리에게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겠는가! 우리도 동일하다. 예수 안에 이제는 내가 죽었고, 내 안에 예수가 사심이 선포되어져야 한다. “이제는 내가 산것 아닙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실 뿐입니다!” 이것이 앞선 가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이고, 오늘의 요란한 세상 속에 나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시다.

내 근심이 기쁨이 되려면

2020-03-02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 16:16-24 근심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잠시 잊었는지는 몰라도 근심은 앙금처럼 가라앉았다가 기회만 되면 떠오른다. 십자가와 부활을 생각지도 못하는 제자들의 속내에도 근심이 가득 가라앉아있었다. 그런 제자들에게, 그리고 그처럼 근심하는 나에게,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20b)” 그렇다. 나의 다가온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될 수 있다면 근심이 나를 주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 모두 근심을 기쁨을 바꾸도록 기도하자. 주님, “지금(22, 24)과 그날(23)”을 저는 분명히 압니다. 예수님, 당신은 십자가 앞의 지금과 부활승리의 그 날을 이루셨습니다. 내 인생은 십자가같은 시련과 어려움이 닥치는 지금도 있지만, 부활의 생명처럼 시련과 어려움을 밟고 쑥쑥 나아가는 그날도 반드시 있음을 압니다. 저의 눈을 지금에서 그 날까지를 보며 근심을 기쁨으로 이겨내게 하소서. 조금 있으면(16, 17, 18, 19)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은 이 일들이 어떻게 되어갈지 몰라도, 또 주님은 침묵만 하시는 것 같아도, 내가 과연 끝까지 견디어낼 수 있을까 하는 순간에도 잊지 않게 하소서. “조금 있으면...” 당신의 수많은 약속은 모두 나를 향하여 진행 중이시고, 이루심이 결코 그리 길지 않음을 압니다. 바울이 마치 “내게 잠시받는 환난의 가벼운 것 후에 영광의 엄청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 것처럼.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순간순간 주를 의지하며 기쁨으로 그 “조금 있으면“의 때를 기대하고 기다리게 하소서. 이제는 “내 이름으로 구하라 받으리라.(23, 24)”는 보장의 말씀을 주시다니요! 어떤 내 근심보다 크신 주의 능력을 믿기에, 주님의 기도의 허락과 그 응답 앞에 정말 부족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의 부족 속에서도, 주님과 저 사이의 조근조근하는 기도와 차근차근 채워주시는 주의 손길 속에서 순간순간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며 살아가렵니다. 십자가를 지나 부활의 영광 가운데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제 예수 안에서만 평생 사는 겁니다

2020-02-27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 15:1-8 한 아이가 자전거를 타는 것을 보고 이웃집 아저씨가 물었다. “너 왜 화가 그렇게 났니?” 그러자 아이는, “엄마가 야단쳤어요! 나만 미워하나 봐요!” 다시 묻는다. “그런데 다른 데는 안가고, 왜 여기만 빙빙 돌고 있니?” 아이가 말한다. “엄마가 전에 여기에서만 놀라고 했거든요” 그렇다. 놀아도, 쉬어도, 난리를 쳐도 주 안에서, 예수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우리 신자의 삶이다. 오늘 15장의 8절까지의 말씀 속에서 “안에 있으라, 안에 있지 않으면”라는 말이 8번 이상이 나온다. 예수 안에 있어야, 그것만이 살고, 이기고, 축복받는 길이라는 것을 주님은 제자들에게 전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우리 모두 주 안으로 ‘들어가자’ - 믿고자 하는 자, 영접하고자 하는 자마다 가지로 삼으셔서 주님은 당신의 원 포도나무 몸통에 가지로 꽂아 생명을 주신다. 주 안에서 ‘머물자’ - 안에 “거하라”는 말씀이 6번 이상 나온다. 내 마음에 온갖 생각과 유혹이 세상으로 나를 불러내려 해도 이제는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다. 특히 다가오는 이 봄날 앞에서. 주안에서 ‘버티자’ -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버려지나니(6)” 세상살이 험한 바람, 뭇 인생들 서리같은 갉아먹는 비방, 춘하추동 내 몸의 변동속에서도 버티면서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주 안에서 ‘소통하자’ - “내 안에 거하고 원하는 대로 구하라(기도하라)(7)” 한 포도나무에서 30미터까지 가지가 뻗히고, 3000송이의 포도가 열린 나무를 보았다. 양분과 수분과 정성의 소통이 그 비결이란다. 기도로 주님 안에서 친밀하게 소통하자. 주 안에서 ‘열매를 맺자’ -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어 자기가 먹는 법이 없다. 나같으면 속상해서 다음해는 열매를 아니맺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법이 없다. 열매나, 나의 은사, 소득은 ‘이웃’을 위해 존재한다. “아니 남을 위해서라면 그러면 나는 뭡니까?”하는 마음이 있는가? “나”도 주님이 보실 때 “이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의미이다. 그저 예수 안에 들어가, 머물고, 버티고, 소통하고, 열매맺어 “내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시는 제자(8)”로 살아가자. 아멘.

하루도 편할 날이 ............ 있다

2020-02-26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14:25-31 주님이 오늘 본문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27)”고 하신다. 과연 우리가 근심하지 않는다고 마음먹으면 근심이 없는가? 두려울 것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오늘도 가까이 다가오는 근심과 감추어진 한숨과 두려움을 누르다가언젠가 폭발할 휴화산과 같은 나의 모습이 아닐까? 이 문제, 그리고 저 문제...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우리 인생이 아닌가! 그런 우리에게 오늘 주님은 터질 것 같은 내 마음을 뒤바꿀 진정한 평안을 말씀하신다. “나의 평안”을 주시겠다 하신다(27a). 이 예수의 평안은 내가, 누구든지 믿음으로 받아 누리면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내 마음이 격동될 때: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 주님의 평안은, 예수를 믿음과 성령의 위로를 함께 받는 자의 “마음”에 임하는 것이다. 격동하는 그대 마음에도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인정하고, 그래도 내 귀에 들려주시는 성령님의 위로를 마음에 받으며 평안을 되찾자. 예수를 마음에 영접하여 모시라. 세상이 불안하기만 할 때: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 주님의 평안은, 예수가 말씀하신 것은 이루시고 약속은 꼭 지키시는 분임을 깨닫는 자에게 임하는 것이다. 말씀이 내 마음과 영혼의 닻이다. 성경을 열어 예수님에 관한 말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예수님의 제자들이 고백한 말씀들을 의지하고 한없이 떠내려가고 흔들리는 마음을 평안으로 고정하자. 혹 힘들게 하는 일이 닥칠 때 : “성령 그가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 내 마음의 평안을 계속 휘저어 놓는 사람은 어쩔건가? 벌어지는 예상못한 일은 어쩔 것인가? 주님의 평안은, 순간순간 삶의 지혜와 적용을 겸손히 요청하는 자의 마음에 가르쳐 주시려고 작정하셨다. 이것이 예수의 영이 하시는 일이고, 예수는 떠나셔도 우리 안에 더 큰일을 행하게 하시는(12)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축복은 자유함과 평안함이라 생각한다. 세상이 온갖 풍파로 흔들려 해도, “하루 하루가 편할 날이.........예수 안에 나의 삶”인 것을 평안히 누리며 감사하자.

하나님만큼, 예수님만큼, 성령님도 사모하라

2020-02-25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 14:15-24 하나님은 우리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시해 주셨다. 우리의 신앙고백과 믿음은 삼위일체 하나님 - 성부하나님, 성령하나님, 성령하나님-위에 세워졌다. 삼위의 어느 한 분의 임재나 활동이라도 외면하고 있다면 나의 신앙과 삶은 주님의 뜻과 사랑과 능력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만큼 성령님을 높이고 사모하는지... 우리가 예수님만큼 성령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부르는지... 우리가 성탄절, 부활절만큼 성령강림절을 마음에 새기고 기다리고, 준비하고, 즐거워하는지... 성령님은 내가 사모한다면,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킨다(16, 21, 23, 26).” 말씀을 신령하게 살아있게 하시는 영이시다(16, 21, 23, 26). 오늘도 주의 성령으로 채워 주소서! 성령님은 내가 사모한다면, “보혜사, 진리의 영이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는다(16, 17, 18).” 어느 곳에서든지 내게 오셔서 나와 동행하시는 분이시다. 오늘도 함께 하시는 주의 성령으로 담대하게 하소서! 성령님은 내가 사모한다면,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게 된다(20).” 하나님의 깊은 뜻까지 통달하게 하시고, 비로서 나의 신앙을 삼각형처럼 안정되게 하신다. 오늘도 빗나가지 아니하고, 주의 성령으로 주의 뜻을 이루며 살게 하소서! 성령님은 내가 사모한다면,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27).” 그 분이 내 마음을 평안하게 하시고, 내적으로 평안한 자가 누리는 담대함과 자유함을 주시는 분이시다. 주여, 오늘도 내 마음에 치고 들어오는 염려, 걱정, 두려움의 발톱들을 성령하나님의 임재로 물리치게 하소서. 성령님이 다루시는 은사속에 오히려 내게 기쁨과 능력이 되게 하소서. 성령님이 인쳐주시는 예수복음의 자유함으로 땅끝까지 나를 증인되게 하소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나도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

2020-02-18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12:20-36 이제 주님은 십자가 수난과 구원의 성취를 앞두시고 그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신다. 한 알의 밀이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고(24)...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희를 위한 것이다(30)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심, 죽으심은 우리를, 나를 위한 것이다. 아멘하자. “십자가의 유일한 구원”을 믿으라 -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 한 알의 밀처럼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다. 이제 내가 또 죽을 필요는 없지만 그 사실을 믿어, 예수의 생명이 담긴 많은 열매의 하나가 되라.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따르라”-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27)” 주님이 속죄양으로 지고 가시는 십자가의 길이 너무 무거우시다. “인자(32, 34)”라는 예수님의 고백속에 “모든 인생의 죄와 아픔”을 모두 담고 계신다.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주를 따라가며 겪는 시련과 고통은 그 십자가로 덮을 작은 그림자들이다. “십자가의 영광”을 수시로 보라.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28)”- 거칠고 참혹한 십자가이나 그것이 내 죄의 모습이고, 그 십자가를 묵상할수록 하나님의 사랑과 새나라와 새생명의 회복이라는 주의 영광을 반드시 보게 된다. “십자가의 승리자로 끝까지 나아가라”-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31)” 십자가의 예수가 구원이라는 진리가 멸망받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여기는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고전1:18) 마지막의 승리이다. “부활의 광채로 십자가의 길을 밝히라” - “다시 들려야 하리니(32), 빛을 믿으라(36)” 십자가 없이 구원이 없고, 부활도 없다. 그대가 예수의 십자가에 자신의 죄를 내려놓고 광명을 찾았다면, 지금도 살고 영원히 사는 부활의 걷고 있는 것이다. 사순절기 시작을 한 주 앞두고 있는 때이다. 우리 모두가 예수가 지신 십자가에 기꺼이 매달려 그 영광을 하늘로부터 듣고, 우리의 고백 속에서 들려지는 계절이 되자.

작은 나귀 위에 올라타라

2020-02-17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12:12-19 언젠가 중동지역을 방문할 때에 나귀와 그 나귀를 타는 청년을 자세히 본 적이 있었다. 작은 동물에 큰 사람이 타니 쓰러질까 위태해 보였다. 그러나 가파른 비탈길도, 울퉁불퉁 바위길도 장정을 태우고 거뜬히 지나는 모습에 뚝심있는 동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 생각난 것이 예수님의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이었다. 나귀새끼에 예수님이 타셨다면 나귀의 크기보다 사람의 크기가 더 컷을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해 보라. 누가 보아도 정치적 메시야의 행진이 아니었다. 그냥 시골청년이 장난스레 새끼 나귀를 올라탄 모습일 것이다. 오히려 호산나 외치는 분위기를 잠재우는 평범한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이었다. 그러나 나귀의 의미에는 십자가를 향해 가시며, “나를 따르라”는 평화의 왕(슥9)의 분명한 의지와 사랑과 구원의 포용이 담겨있다. 우리도 그 작은 나귀를 올라타고 주님을 따르자. 나귀 위로 올라타 주인 뜻만 따르자. “큰 무리가...호산나 (12, 13)”- 사람의 헛된 칭찬과 인정을 구하지 말고 주를 보고, 주의 구원의 계획을 따르라 하신다. 나귀 위에 올라타 억척스레 섬기자. “어린 나귀 (14)”- 겸손의 왕으로서 섬기며 사셨던 예수를 따라가는 길이다. 나귀 위에 올라타고 그저 말씀이면 순종하자. “기록된 바(15)”- 말씀이 기록된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고 죽으라 하신다. 나귀 위에 올라타 십자가와 부활과 영생을 길로 들어가자. “예수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16)” 십자가 부활의 영광과 천국까지 가야 한다. 착각하지 말자. 예루살렘이 목적지가 아니다. 나귀 위에 올라, 불말과 불병거의 권세를 받자.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17)” 창조주께서 나귀를 성령의 능력으로 불말이 되게 하신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행1:8), 어린 나귀같은 약한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심으로 세상을 바꿀 권세를 주셨다. 지금 나귀를 타시고 십자가와 부활과 영생을 향해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보이는가? “나를 따르라. 나처럼 나귀새끼를 기꺼이 올라타라”하시는 예수님의 초청에 우리 모두 기꺼이 따라가자.

내쫓는 공동체

2020-02-06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 9:13-34 한번 생각해 보자. 내 삶이, 내가 참여하는 모임이, 나의 교회가 우리끼리만 좋아서, 찾아오는 불편한 사람은 “내쫓는 공동체”가 아닌가를.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이 붙들고 있는 나름대로 정돈된 율법을 자꾸 건드리는 예수가 싫었다. 자기들의 영역에 두고있는 하나님을 자꾸 건드리는 예수가 너무 불편하기만 했다. 사람들이, 심지어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자꾸 예수의 표적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일 수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16) 위기의식과 적대감으로 그가 미웠고 죽여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가 메시야라고 말만 하면 출교(22), 유대공동체에서 내 쫓기로 하였다. 맹인되었던 사람의 말과 간증에 귀를 막고 그를 내 쫓아버린다(34). 내쫓는다는 것은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우리끼리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에 대해 불쌍히 여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만 옳고, 하나님이 우리 공동체에 계신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온 인류의 하나님은 긍휼이 없는 굳어버린 율법, 제사, 종교를 원하시지 않는다. 사랑의 예수님은 요한복음 속, 곳곳에서 내쫓으시는 분이 아니라. 보시고 부르시는 분이시다. 제자들을 이곳 저곳에서 보실 때마다 부르셔서 제자 삼으시고, 환자들을 보시고 부르셔서 고쳐주시곤 하셨다. 성령님의 열정은 꼭꼭 숨었던 제자들에게 임하셔서는 그들을 쫙 뿌리셔서 세상으로 들어가게 하셨지 자기들끼리만 기뻐하게 두시지 않으셨다. 우리만 살자는 공동체는 사람을 “내쫓는 공동체”이다. 생명이 없고 있다해도 가물가물할 뿐이다. 지금 태어나서부터 눈먼 자가 광명을 얻고,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어린아이처럼 증거하고 있다(25, 31). 그 모습을 보며, 그 고백을 들으며, 눈물이 흘러 나오고, 가슴이 울컥하며 기꺼이 안아주어야 할 그 자리에, 먼저 믿는 자라는 사람들이 문닫고 내쫓는 일을 하고 있다. 지금도 예수님은 죄에 눈먼 자들을 찾아 앞서 가신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에게 보내신다. 그들을 “내쫓는” 죽은 신앙이 될 것인가? “품어지는” 산 신앙이 될 것인가? 잊지말자.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은혜, 성령님의 감동으로 채우는 사람은, 세상에서 대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자신이 죄인의 자리로 낮아지는 것이다. 우리 모두를 내쫓지 않고 불러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 열방을 품고 살아가자.

아브라함도 예수를 보고 기뻐했다면

2020-02-04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8:48-59 유대인들이 예수를 향하여 상종못할 사마리아사람,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한다(48). 영생의 말씀에는 아예 코웃음을 치고, “너희 조상의 아브라함도 나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다 보고 기뻐했다(56)”는 말씀에는 돌로 치려한다.(59) 말씀을 묵상하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같은 유대인이라도 구주이신 예수님을 보게 될 것만으로도 기뻐한 사람이 있고, 보아도 적대하는 사람들도 있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유대인들도 자기들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이신 예수를 모르고, 이해가 안되니 저러고 있지만, 아브라함같은 깨달음과 체험이 있다면 저들도 분명 예수를 보고 기뻐하겠구나!” 우리는 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고, 완전하신 하나님으로 지금도 우리 앞에 계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느 누구라도, 바로 여기에서 다 풀어지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인성은 신성의 오묘한 성육신으로 가려져있고, 예수님의 신성은 유한해 보이는 외적 인성에 가려져 있다. 아브라함이 보았던, 예수님 때문에 누렸던 기쁨이 무엇이었을까? 그 기쁨에 동참할 자 누구인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받아들였던 약속의 말씀 끝에 서신 예수를 보았기 때문이다. 기적같은 약속대로의 이삭의 출생과 그들 통한 온 세상을 구원하실 예수를 미리 보았던 것이다. 우리도 말씀의 구절구절 속에서 예수를 만나며 기뻐하자. 시간을 넘어선 삶과 죽음, 부활, 영원한 삶을 보았기 때문이다. 모리아산에서 아들 이삭의 죽음과 부활의 체험 속에 구세주가 주시는 영생을 누리며, 모세와 엘리야만 아니라, 아브라함도 살아서 예수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예수님이 지금부터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심이 기쁘지 아니한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보았고, 예수를 보았다면, 함께 하시는 성령의 임재가 거기에 있었다. 그가 성령 안에서 예수의 구원을 기뻐하는, “그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던 것이다. 성령이 눈을 열고 마음을 여시니 우리 모두가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우리도 성령안에서 예수를 구주로 만난 그 감격을 아브라함처럼 더욱 즐거워하며 기쁨을 나누자. 그리고 아무리 강퍅한 유대인같은 사람이 우리 주변에 있을지라도 언제가 믿음의 눈이 열리고, 살아계신 예수를 만나고, 성령의 만져주심이 있다면 저들도 또 하나의 아브라함이 되고, 우리의 형제자매로 함께 기뻐할 때가 올 것을 끝까지 믿고 살아가자.

저 먹으라고요?

2020-01-24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 6:52-59 오래전 들은 이야기, 게으른 아들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아버지가 아들 목에 떡들을 매달아 걸어주며 배고플 때 하나씩 먹으라고 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아들이 떼어먹기 귀찮아서 굶어 죽었단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고 하시는 것(48)은 새생명을 주시는 예수의 십자가의 구원을 (51) 내 속에 받아먹듯 믿고 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받아 먹지 못해 굶어 죽는 사람이 많다는 안타까움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믿음이 없어서 받아 먹을 기회 앞에서 “수군거리기만 하는 (43)” 말만 앞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구원의 떡으로 받아먹으면 일어날 (46)놀라운 축복의 기회에 “아버지의 초청(44)”보다는 불신의 세상 것에 매여 뒤걸음치는 사람들이 있다. 음식 창문, 쇼윈도우에 샘플 요리메뉴를 플라스틱으로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곳이 있다. 아무리 정교해도 그걸 볼 때에 음식먹고 싶은 생각이 오히려 사라질 수도 있다. 그대가 만나의 떡(49)만으로, 교회출석정도로 만족하며 플라스틱 신앙에 머물고 있다면, 이제는 예수의 생명떡을 믿음으로 받아먹고 교회를, 모임을, 가정을 살아계신 주님을 모시고, 복음의 잔치집으로 만들어 가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48),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54)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7)”

이게 왠 떡입니까!

2020-01-23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6:30-40 뜻밖의 좋은 일이나 기회가 올 때에 하는 말 중의 하나가 ‘이게 왠 떡이냐’는 표현이다. 밥을 먹어보기 힘든 세상에서 귀한 떡을 만났으니 너무 좋아하는 말이 그 시작이라 생각된다. 올해는 우리 모두가 “왠 떡이야!” 하는 좋은 일을 많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함께 나눠먹기도 하시고... 성경에서 떡이라는 한국문화에 맞춰 사용한 표현은, 지금 시대에서는 사실 빵으로 표현해야 더 이해가 될 것이다. 성경의 배경이 거의 빵문화이고, 지금 시대도 밥먹지 않고 떡만 먹고 사는 사람보다, 밥대신 빵을 먹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오병이어의 역사를 보면서 자신들의 조상이 40년간 먹은 만나를 이야기한다.(31) 그 바탕에는 예수님이 계속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빵(35)”임을 말씀해 주신다. 내 몸뚱이가 생존하려면 먹을 떡이 필요하고, 내 영도 몸도 풍성한 생을 누리려면 예수의 떡이 절대 필요하다. 떡은 매일 찾아 살벌하게 구해야 하지만, 예수의 떡은 예수 이름을 구하는 자에게 찾아오시어 배불리 먹여 주신다. 떡은 먹어도 다시 배고프고, 힘없으면 먹으려 해고 못 먹고 죽게 된다. 예수님의 떡은 우리를 결코 주리지 않게 하며(35) 믿는 자에게(35, 40) 평생공급을 약속해 주신 것이다. 그 다음의 천국은 수요 공급이 자연스레 흘러가는 주님과의 감사와 경배, 교제의 영원한 삶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우리의 매일의 떡에 무관심하시지는 않는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기도하라시는 것은 먹어야 할,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이다. “예수 믿으면 밥이 나옵니까? 떡이 나옵니까?” 라는 불신자의 비난에 “예, 예수를 믿으며 살면 먹을 밥도 주시고, 떡도 주십니다”라고 말한 어느 목사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나 자신도 예수를 믿고 살면서 먹고 살만한 인생이 된 사람들을 나를 비롯해서 수도 없이 소개할 수 있다. 오늘 점심식사로는 무엇을 먹을 계획이신지? 샌드위치 빵? 그리고 저녁은 떡같이 찰진 밥? 하루 두세번만이라도 예수님이 주신 생명의 떡, 영생의 축복을 기억하고 “이게 왠 떡입니까? 예수님!” 하며 살아가자.

예수의 극성팬과 참 제자

2020-01-22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 6:22-29 오병이어 사건 이후, 예수님을 임금삼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예수님의 광팬, 극성팬이 많아졌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강력한 요구를 물리치셨고, 지금도 제자나 그 무리를 떠나 하나님 앞과 잃은 영혼들을 홀로 대면하시고 계신다. 극성팬들이 쉽게 포기하겠는가! 가버나움, 바다 건너편에서 기어이 예수님을 만나 환호한다. 나에게는 이런 극성스런 열정이라도 있는 것인가 돌아보게 된다. 그런데 그 때 예수님의 반응이 좀 냉랭하게 느껴진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이 표적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26)”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라(27)” 배고파하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던 예수님인데, 또 배부르려는 욕구가 죄는 아닐진대 주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이 말은 언제고 배고프면, 기대할 것 없으면, 등돌릴 팬들의 모습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극성팬이 참 제자의 길로 나아가는 길은 무엇일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내가 주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27)” - 육신의 배고품과 목마름은 해결되어야 하나 거기서만 그쳐서는 안된다. 수가성의 여인에게 영생수를 말씀하듯이, 도대체 찾을 수 없는 너희 속에 영혼의 굶주림, 주와 동행하는 목마름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이다. 내가 떡이고 양식이니(27 b) 나를 영접하여 먹기위해서만 살지말고, 나 예수의 살과 피를 너희 안에 믿음으로 먹고 마셔, 영혼의 갈증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인 예수를 구주로 모시는 구원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오병이어처럼 떼고 떼도 풍성해지듯, 인자가 주신 양식(27)인 복음을 온 세상에 가득하게 전하고 또 전하라는 것이다. “나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29)”- 하나님의 일(28)을 해보려는 것도 좋고, 극성스레 나를 쫓는 것도 좋지만, 헌신적인 봉사보다 먼저인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요 참제자라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바르게 행할 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냉랭한 우리들의 마음과 영혼이라면, 복음의 감격과 흥분을 되살려 예수님의 광팬이 되자. 그러나 내 구주 예수가 내 속의 생명임을 잊지 않고, 때로는 십자가의 길을 함께 따르고, 기꺼이 세상의 불모지에 복음의 새싹들을 심고 심으며, 세상의 집단의식에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언제나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참 제자로 살아가자.

예수님에게 밥을 사드리자

2020-01-13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 4: 27-42 누군가에서 식사를 대접한다는 것은 집에서든, 밖에서든 소중한 일이다. 당연히 즐겁지만, 한편 섬기는 일이고, 때로는 희생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 예수님을 대접한다면, 밥 사드린다면 어떨까? 오늘 본문 중에서 예수님은 음식을 구해 드리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알지못하는 양식이 나에게 있다. 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과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32, 34)”라고 하신다. 여행에 고단하시고 목마른 예수님이시지만, 수가마을의 여인과 마을사람들의 믿음(41)과 예수영접에 너무 기쁘셔서(36) 그 순간에는 피로도, 배고픔도 잊으셨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원하고 기뻐하는 일을 해 드리는 것이 ㅊ히고의 대접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인 영혼 추수에 목마르시고, 배고파 하신다. 제자들의 섬김이 고맙지만, 여인과 마을 개종과 변화는 “영생의 기쁨으로 뿌리는 자, 거두는 자가 기쁨으로 가득찬(36)” 사건이셨다. 사람들이 예수께로 돌아오는 일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가 잃어버리고 버려진 수없는 영혼들을 향해 나서기만 해도 기뻐하신다, 고마워하신다. 4장 마지막 부분은 왕의 신하의 아들이 죽다가 예수님의 은총으로 살아난다. 그러나 그 치유의 은총 옆에는 “그 신하 아버지의 믿음(50)”이 있었다. 기억하라. 주님에게 밥 사드리는 것은 그대가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편안히 그 분 곁에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밥사드리려 하면, 그 분이 먼저 우리에게 성대한 만찬을 준비해 주신다. 그것이 복음이다. 지금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막다른 골목에 봉착한 것 같아도, 믿음으로 주님을 향할 때 주님은 기뻐하신다. 능히 하실 수 있는 주님의 능력을 믿어주고, 주님으로 하게 하시니까.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교회 안팍에서, 신앙에 관한 여러가지 일에 열심히 살아간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한마디 하신다. “내 양식은 아버지의 뜻, 복음을 심고, 영혼을 거두는 일이란다(34, 36).” 목말라하시고 배고파하시는 주님에게 밥사드리는 일은 꼭 해나가자. 한시라도 잊지말자.

나의 사마리아 우물가

2020-01-11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4:1-14 유대지방과 갈릴리지역의 중간 지역이 사마리아이다. 포로와 퇴거, 이주의 아픔의 역사가 담긴 곳이 사마리아이다. 편견과 차별 속에 미움과 굳은 마음들이 깊게 반목의 경계선을 그어 놓은 곳이다. 오늘날 그런 사마리아가 너무도 많다. 그러나 그곳에도 예수님의 연민과 사랑과 복음을 나누어주시려는 발걸음은 거침이 없으시다. 본문에서 그 곳 사마리아에서 예수님이 찾아가시고 우물가의 여인을 대면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을 복음으로 불러내 천국백성의 반열에 세우신다. 그럼에도 제자들의 사마리아, 이방을 향한 스승의 마음을 알기까지는 아직도 까마득하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사마리아... 그곳은 오늘 우리가 웬지 꺼려져서, 갈까 말까 하는 곳이다. 피하고 싶은 곳이다. 오늘도 안 만나면 좋을텐데 하면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종족, 민족주의와 집단 이기심에 빠져 무관심해 하는 모든 곳이 바로 우리의 사마리아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과 사랑을 가지고 나아가면, 그곳도 죄많고, 한많은 여인네가 남정네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영혼의 기쁨, 영생의 평안을 되찾는 곳이다. 저 니느웨처럼 오히려 패역한 세대 속에서, 마을 전체가 예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곳이다. 나의 사마리아를 알고, 기꺼이 나아가지 전에는 우리 모두 제대로 예수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사마리아! 우리가 우리끼리만이라는 유대를 지나 땅끝까지 증인으로 살아갈 첫 관문이자 시작점이 되는 곳이다. 사마리아는 그저 통과하는 자리가 아니라 바로 땅끝이다. 우리가 사마리아를 향해 기꺼이 나아갈 때 주님의 나라는 그 자리에 임하는 것이다. 나의 사마리아가 어디일까? 먼 곳만을 생각하지 말라. 내가 예수 사랑, 예수의 긍휼을 가지고 낮아지면 보이는 모든 곳이, 만나는 사람이, 들리는 모든 소식들이 사마리아이다. 잊지말자. 사마리아는 피해가는 곳이 아니라,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가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섬김의 실천과 행실로 빛을 비추어야 하는 곳이다. 우리 모두 주님의 길을 따라 사랑으로 기꺼이 나아가며, 겸손으로 찾아 들어가며, 믿음으로 만나는 지역의 사마리아 선교사가 되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가지고 기꺼이 섬김의 손길, 사랑의 발길로 들어가 그곳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의 복음의 꽃을 피워가기를 결단해 본다. 당신이 그 섬김의 자리가 영혼을 건져올리다가 예수님을 만나는 우물가가 되기를 축복한다.

비교의식, 열등의식에 자유하기

2020-01-10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복음 3:22-36 여러분이 남에게 무시당해서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 일이 있는가? 배우자에게 “당신은 왜 그 사람만큼 못하는거지?”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일터에서 “아니 배알도 없어? 왜 그래?”, “왜 자네는 ㅇㅇㅇ 하는 것 못하나?” 혹은 부모자녀간에 “너는 왜 ㅇㅇㅇ보다 못하니?” 이런 소리를 들으며 속상해보았는가? 그리고 지금도 스스로 자신을 보면서, “왜 난 이것밖에 안돼나?” 그런 낙심을 경험하고 있는가? 요한의 제자들이, “사람들이 모두 다 세례주는 예수에게 가잖아요!(제자들의 세례)” 질투섞인 보고를 한다. 그 때 제자들을 대하는(26) 세례요한의 삶 속에서 우리의 비교의식이나 열등의식, 그리고 자기포기의 낙심의식을 이겨내는 신앙자세를 깨닫게 해준다. “신랑친구가 되어(29)” - 내가 하는 일을 즐겨야 한다. 내 환경 속에서도 기뻐해야 한다. 그렇게 몸으로든 마음으로든 힘든 일들고 지치는 일이라도, 누가 시킨 것을 억지로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고역스러운 일이 되고, “좋아하는 일이다, 일하니 감사하다,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지금 운동하고 있다”하고 생각하는 순간 힘든 것이 행복하고 즐거워진다. 그런 자발성, 즐거움으로 바꾸기가 힘든가? 정말 사람이 긍정마인드, 행복함으로 확 바뀔 수 있는 길이 있다.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없이 주심이라(34)”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의 기쁨을 꼭 구하고 받으면서 살아가라. 그러면 내 한없이 복된 인생은 남과 비교불가이다. “(나는) 그의 (예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28)”- 내 모든 삶을 맡겨주신 분을 알고, 인정하고, 빗나가는 눈길을 오직 그 분에게 초점을 맞추면 세상에 남과 비교되고 차이나는 인생이, 내게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자유함이 된다. 성도의 자유함과 권세는 위를 바라보며 사는 것에 있다. 세례요한이 얼마나 위를 바라보는가! “하늘에서 주신 바(27), 위로부터 오시는 이(31),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31) 하나님이 보내시는 이(34), 믿는 자의 영생(36)”- 성도의 비교/열등의식으로부터 자유함과 권세는 진정 위의 것을, 위의 상급을 바라보며 사는 것에 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고(36)” - 내 마음의 소유주가 바뀌어야 한다. 아들을 영접한자, 믿는 자는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가 사시는 것이다. 그대가 예수를 영접하고 내 안에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산다면, 비교의식, 열등의식이 다 뭔가! 고약, 흉악, 강퍅, 악취나는 나를 자녀삼아 주신 그 은혜의식에 감사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망쳐야 산다

2019-12-02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 18:9-24 망쳐야 사는 사람이 있다.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다. 그러나 또 망쳐야 사는 사람이 있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본문에 나오는 세상 권세가 최고인줄 아는 왕과 정치가(9절)들과 돈과 가지가지 진귀품들과 소유가 언제나 자기 것인줄 착각하는 부자(12-13)들이다. 그들도 망쳐야 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도 일순간에, 신속히(10, 17, 19) 빠져나가버린다는 것을. 그리고 망쳐서 '사는데' 까지 나가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일순간에 망해 사라짐을(15-19) 이제라도 알아 오직 영원한 나라와 그 길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혹 부자나 권세가는 아니더라도 그대도 망쳐보았는가? 육신의 질병으로 망쳐보았다면, 물질의 곤고함으로 망쳐보았다면, 진학과 진급의 길목에서 망쳐보았다면, 인생의 갈등으로 묘하게 얽여 망쳐보았다면, 이제 세상에 망쳐서 예수 안에 사는 기회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주님은 나의 이름을 부르시며, 당신의 이름을 부르시며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속에서 망쳐진 것 같지? 완전히 망친 것은 아니다. 내게로 오너라. 망쳐서 살게 하는 것, 그것이 내가 너를 부르는 때이란다”

음녀의 술잔 속에 담긴 미혹

2019-11-29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17:1-8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던 것 같다. 좋아하셨다기보다 젊으실 때의 지방공무원직을 그만두시고, 서울로 상경하여 사업은 실패하고 할 일없이 살아가는 가운데, 의지할 것은 술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진작 예수를 아시고, 성령의 술에 취하셨으면 좋았을터인데... 평소에는 조용하시고 좋은 아버지이지만, 술이 취하면 달리지시던 모습이 너무나 이상하고 무섭기만 하였다. 그래도 아버지는 취중의 실수가 가정 안에만 머물렀지만, 오늘날의 수많은 사람들이, 술과 약의 취중에 온갖 사건과 부끄러운 일들을 벌인다. 오늘 본문의 “큰 음녀(1)와 미혹에 빠진 자들, 음행의 포도주(2), 손의 금잔(4), 핍박의 피에 젖어(6) 죄와 쾌락에 취해있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오늘날 신문에 오르내리는 범죄와 사건 들의 배경 속에서 재현되는 일들이다. 누구라도 술과 쾌락, 물질의 탐욕에 익숙해지면 실수가 가까와진다. “음행의 유혹”은 자주빛, 붉은 옷, 금과 보석 진주로, 금잔으로 아름답게 보이지만(4), 그 안에는 “가증함과 더러움(4)”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작심하지 않으면 이겨내기 어려운 일이다. 바벨론같은 세상이 종말로 다가갈 수록 많은 사람들이 분명 음란하고, 경건과 거룩을 모독하는 일들에 빠지기가 쉬운 것이다. 나는 깨끗하고 안전지대에 있다고 안심하지는 말라. 내 가족과 이웃들을 돌아보라. “예수의 증인으로 흘리는 피(6)”의 순결한 삶을 사모하며 주의 도우심을 기도하자. 연말과 연휴들, 주위의 번쩍거리는 화려함속에 음행의 포도주가 아닌, 피에 젖은 예수의 구원과 성령에 취해 사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한다. 오늘도 위태한 그대를 생각하며 기도한다.

짐승의 표가 내게도 슬그머니 나타날 수 있다

2019-11-27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 16:1-9 가끔 우체통이나 자동차 유리창, 집 문 틈으로 광고 전단지가 끼어져 있는 것을 본다. 별로 도움이 안되는 것이 많고, 심지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꽂혀있기도 한다. 원하지 않아도 내 마음에 끼어놓는 것들은 무엇일까? 오늘 말씀에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2절)”고 한다. 결국은 회개할 기회조차 잃은 (9절) 불쌍한 영혼들이 받는 것이 짐승의 표이다. 한편 지금도 우리가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이 짐승의 표이다. 그 짐승의 표는 우리 삶에, 내 마음에 그리 먼 것이 아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들어온 죄를 죽이지 못할 때, 온갖 욕정 속에 짐승의 표가 솟아나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에로의 부르심, 예수의 십자가 구원, 성령의 인치심을 거부하고, 받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 자체가 짐승의 표이다. 세상의 온갖 쾌락에 나를 맡기고 이 세상이 전부인양 끌려가는 모습들이 짐승의 표이다. 정치나, 돈이나, 문화나, 세상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미혹하고 유혹하는 악한 세력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용당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짐승의 표이다. 내 속에 그런 악한 짐승같은 표가 행여 무엇인지, 어느새 뭍어가는 짐승의 표시는 없는지... 그러나 결코 두려워 말라! 주님은 짐승의 표에는 관심이 없으시다. 그러나 짐승의 표 앞에 흔들리는 뭇 영혼들을 여전히 뜨거운 사랑으로, 보신다. 자녀인 우리에게 죄의 저주를 지워버릴 어린양 예수의 피가 있다. 짐승의 표조차 태워버릴 성령의 불과 인치심이 있다. 슬그머니 꽂으려 하는 짐승의 표같은 세상 유혹을 뽑아내 버리자.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천국의 상속자로,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어디를 봐도 종말의 참상이 보이는 이 마지막의 시대를 살아가자.

날이 선 예리한 낫 앞에서

2019-11-25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14:14-20 농사일을 오래동안 해 온 분들이 낫으로 풀을 깎는 것을 여러번 본 적이 있다. 잡풀숲의 바닥부분을 능숙하게 도려내듯 베어내고, 후려쳐 모아 시원하게 깎아내는 모습은 거의 장인의 수준이다. 그 장인의 수준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훈련된 손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날이 선 낫의 칼날이다. 제대로 날을 세워 갈 수 없다면 제대로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시퍼런 날”을 무서워하지 않고, 또 제대로 갈아 쓰는 것이 중요하다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필경 훌륭한 농부나 요리사가 아닐까 싶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이 들고 계신 예리한 낫의 광경을 요한이 보고 있다. 구원과 심판의 사이를 한치도 오차없이 베어내어 실행하실 권능의 손길을 거기서 보게 된다. 우리 모두가 그 예리한 날선 낫을 두려워말고 대면하고 또 잘 다루어 가자. 예리한 낫(계시록): 주님이 베어내시면 난 구원의 자리인가? 심판의 자리인가? 예수영접의 구원을 확신하고 심판 앞에 깨어있으라. 좌우의 날이 선 검(히브리서): 말씀의 숙련가인가? 세상정보통에 불과한가? 아직도 무딘 나의 말씀의 검을 갈아내고, 맛갈 난 영적 음식을 위해 무궁무진한 말씀의 재료를 찾으라. 성령의 검(에베소서): 지금 진동하는 영과 가슴저리는 은혜의 삶을 누리고 있는가? 애매하게 적당하게 살려하지 말라. 영적 삶과 육적 삶의 차이는 칼날처럼 분명하다. 날선 도끼(세례요한): 내 목이 잘리는 날선 칼날의 핍박을 두려워하나, 나무뿌리에 놓인 날선 도끼처럼 임박한 영원한 심판을 두려워하나? 오늘의 영혼구원과 내일의 주님 오실 날을 고대하며, 칼날처럼 선명하되, 죄를 자르시고 사랑으로 감싸신 주의 은혜속에서 우리 모두 오늘을 살아내자.

예수님을 앞에 두고 하는 싸움

2019-11-21

성경묵상의 나눔: 요한계시록 12:1-17 세상은 온통 싸움 투성이다. 정치가들이 싸우고, 사업가들이 싸우고, 치안을 맡은 이들이 끝없는 범죄와 싸우고, 학생조차 경쟁으로 싸우고 있다. 모두들 이겨야 하고, 이기면 주도권을 갖게 되고, 재정이나 남 앞에, 환경에 유리한 위치나 안정을 갖게 된다. 비록 한 때이겠지만.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싸우고 있다. 이 싸움이 진짜 싸움이다. 온갖 죄와 악, 전쟁과 인재, 불평등, 갈등과 아픔 뒤에서, 하나님을 외면하게 만드는, 그 원인이 되는 악한 세력에 대항하는 싸움이다. 그들의 공격이 우리의 삶에 근본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내 탓이라고 절망말고, 남 탓이라 원망말고, 수양부족이라 착각말고, 그 속에 악한 영의 계략부터 알아내고 싸워 이겨내자. 본문에서 붉은 용, 옛 뱀, 마귀, 사탄의 이름이 드러난다(3, 9). 지금까지도 우리를 흔들었고, 흔들려고 하는 영적 세력의 총칭이다. 그런데 이 악한 세력의 공격은 우리보다는, 태어날 한 어린아이, 곧 이 땅에 오셨고,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하고 있다. 누구를 잘라내야 완전히 패배시키고 승리할 줄을 너무나 잘 아는 사탄의 악한 공격이다. 우리도 잘 알아야 한다. 비록 육신의 몸에 해산된 어린아이같은 예수이시나 그 분이 결국 만국을 다스실 철장권세(5)를 가지셨고, 마귀 사탄을 내쫓는 최후의 승리자시다. 우리의 싸움은 철저히 그 예수 한 분을 앞세우고 싸우는 싸움이다. “우리 형제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그를 이겼으니(11)” -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시다. 아무리 강해도, 아무리 혹독해도, 아무리 오래 걸려도 승리는 예수님에게, 그 분을 앞에 둔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예수 앞에 악한 세력은 결국) 내쫓긴다”는 오늘 본문의 선포가 (9, 10, 13) 지금 시련을 겪는 여러분에게 담대한 대면이요, 완전한 소망이 되기를 기도한다.

부디 신앙의 동지를 찾으라

2019-11-19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 11:1-14 요한 계시록의 배경인 로마의 극심한 박해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믿음의 성도들이 받을 박해는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고난 속에 나 또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핍박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게 고난이 큼은 하나님의 때가 다가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없다 자만하지는 말라.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영적 순례의 길이 아닌 것이다. 본문에서는 숫자 둘(2)이 거듭 언급된다. “두 증인(3), 두 감람나무, 두 촛대(4), 두 선지자(10)...” 그리고 남은 자들(13)도 둘에서 시작한다. 혼자 이기보려 하지 말라. 주님은 혼자가 아닌 “두 세사람이 모인” 그 곳을 주목하신다. 그대의 고난과 문제가 신앙 안에 들어와 있다면 주님은 반드시 또 한사람을 붙여 주신다. 신앙은 하나님만을 의지하지만, 대부분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의지하게 하신다. “주님 저에게 어떤 한 사람을 지금 붙여주시렵니까?” 기도하고 둘러보라. 두감람나무와 두촛대가 교회를 상징하나, 두사람이 모인 곳에서 교회가 시작이고, 그 두 사람이 바로 교회이다. 그러나 그 두사람은 그냥 하나 더하기 하나가 아니다. 둘 사이에 예수의 피로 하나됨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그대가 먼저 낮아지고 그 영혼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 나보다 그를 낫게 여기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함께해야 모두 살 수 있다는 절박감이 있어야 한다. 주님이 이 환난의 시대에 우리 각자의 약함을 아신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도 주시고, 또 한사람의 영적 동반자를 찾으라 하신다. “생기가 (죽었던)그들 속에 들어가니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11)” 허무한 세상의 친구들에게 연연하지 말고, 부디 믿음의동지, 기도의 동지와 하나되어 성령의 생기가 그대의 삶에 충만하기를!

저도 보았고 사모합니다!

2019-11-14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 7:9-17 오래전에 캔사스시티에 살 때에는 저녁하늘이 너무 좋았다. 산이 없이 도시가 온통 평지 벌판인 관계로 저녁노을이 서쪽 하늘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동서남북에서 함께 노을이 보이곤 하였다. 그리곤 늘 생각하였다. “동서남북 주위를 보면 온통 벌판뿐이니 이곳은 엉뚱한 것 안 보고, 하늘만 보고 사는 곳이야. 축복이야!” 사도요한의 밧모섬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사방이 바다이니 위를 바라보았고, 소망하는 분이 주님뿐이니 더더욱 위만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런 요한에게 하늘의 문이 열렸다. 표현을 하지만,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늘의 영광과 주를 만나는 감동의 감동을 체험하며, 오늘 말씀을 적고 있다. 이런 놀라운 광경과 체험을 비교할 대박이 어디있을까! 흰옷으로 입히운 수많은 무리와 내가 함께 할 어린양 예수...(9) 생물과 장로들과 하나님을 경배하는 최상의 예배(10), “찬송, 영광, 지혜, 감사, 존귀, 권능”속에서...(12) 천국 장막의 보좌 위의 내가 만날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15) 내게 베풀어 주실 풍성한 식탁, 끝없이 흐르는 생수, 뜨거움도 추위도 감싸주시는 따뜻함...(16) 그리고 날 쉴만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 내 눈물, 내 상처 어루만져 주시는 자애로운 하나님의 미소와 손길...(17) 주여, 저도 살아있는 말씀 속에 주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모든 위로와 기쁨이 거기에 있군요! 저도 그 곳을 사모합니다. 그리고 이 짧은 세상을 끝까지 견디게 하소서, 기꺼이 이기게 하소서.

내게 주신 144,000보다 더 큰 것

2019-11-13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 7:1-8 유대인들에게 12숫자는 완전숫자이다. 그 수에 아주 큰 숫자 1000을 곱하고, 다시 12지파를 곱한 숫자가 오늘 계시록에 나오는 144,000이다. 단순한 한정된 숫자의 인원이라는 개념보다 핍박에도 이겨낼, 순교하면서도 지켜낼 순전한 믿음의 사람들을 말한다. 엘리야가 핍박받을 당시 신앙을 지키고 있던 7,000명의 사람들이 생각난다. 완전한 숫자의 12는 예수라는 한 분으로 모아지고, 1000이라는 숫자는 모든 주를 부르는 영혼으로 넓혀지고, 12지파는 오늘날의 각 교회 속에 자리잡고 있다. 그대가 예수를 믿고 교회 안에 진정한 지체로 천국을 소유했는가? 그대는 144,000을 뛰어넘은 더 큰 자로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144,000보다 큰 예수가 우리에게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144,000보다 큰 한 영혼을 구원하려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144,000보다 큰, 믿는 자라면, 누구든지 들어갈 천국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어찌 144,000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데 144,000이 예수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한 영혼의 소중함을 위해 사는 것이라면, 천국을 소유한 자의 넉넉함이라면, 그대는 그 144,000 안에 있음을 확신하는가? 겸손히 “그 하나님이 은혜와,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지금도 “은혜아니면 살아갈 수 가 없네”라는 찬양처럼 낮아져 예수를 따라가고 있는가? 후회없이 주는 자의 섬김을 살고 있는가? 잊지말자. 이마에 인침을 받은 사람(3)은 자기 눈에 인침이 보이지 않는다. 섬기는 이웃의 얼굴을 통해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같은 죽음은 아니다

2019-11-06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3:1-6 예수님은 사데교회와 교인들에게 죽은 신앙을 지적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녀들의 영적 죽음에 얼마나 마음이 상하실까? 그런데 사데교회 교적 속의 한 명의 이름은 내 이름, 당신의 이름이다. “살았다 하나 넌 죽은 자다!(1)” 이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두렵고 놀라겠는가! 이것은 버가모 교회의 안디바(2:13)의 순교적 죽음과는 다른 비참한 죽음이다. 죽음이 다같은 죽음이 아니다. 어떻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느냐는 전혀 다를 수 있다. “실상은 죽은”, 죽은 자가 있다(1 b). 성령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고, 사탄에 얽매인 자이다. “그 남은 바 죽게 된”, 죽어 가는 자가 있다(2). 메마르고 파리한 영혼의 상태로 예수께 인생을 맡기지 못하고 세상 속에서 흔들리는 영혼들이다. “도둑같이 긴박하게 오실 주 앞에”, 죽도록 부끄러울 자가 있다(3). 깨어서 후회없이 살지 못하다 천국에서 주님 앞에 서는 부끄러운 구원이 이것이다. “옷을 더럽히지 않는 몇명”의 죽은 영혼조차 살리는 자가 있다(4). 캄캄한 죽음의 위협에서도 한가닥의 예수의 생명의 빛을 나누는 사람들이다. 모든 교회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붙여주신다. “이기는 자,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는 자” 죽어도 영원히 사는 자가 있다(5). 환난의 시대 속에서조차 마지막까지 신앙을 지켜내고 예수 앞에 선 자이다. 그대는 어디에 속해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무슨 죽음을 원하는지... 아직도 은혜받을 때, 구원의 날이다. 사데교회를 향한 경고를 기꺼이 새기고 오직 예수 안에 죽은 신앙이 아닌, 생명의 신앙으로 살아가자.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 그 보혈, 그 이름, 그를 향한 믿음만 있다면, 아버지 품안에서, 천사들에게 둘러싸여(5b) 죽음을 넘어선 영생의 길을 가는 것이다.

회개가 겸손하고 건강한 신앙의 길이다

2019-11-05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2:18-29 열흘 동안을 회개라는 주제에 매달리며 특별기도회 중이다. 함께 기도하는, 이 주제에 마음의 심각함으로 꽂히는 모든 이들에게 회개의 영이 함께 하시는 복이 있기를 빈다. 본문의 두아디라 교회와 교인들은 대단하였다. 예수님은 “네 사업, 사랑, 믿음, 섬김과 인내”를 잘 안다고 하신다. 이것은 교회 안에 교우들이 갖추기를 원하는 전체목록이다. 헌신을 주제로 하는 설교는 이 주제들이 전부가 아닌가! 그리고 처음보다 나중의 행위가 많다고 하신다. 날이 갈수록 잘 한다니 이보다 더 큰 인정해주심과 위로가 어디있을까? 그러나 그런 아름답고 건강한 신앙에도 위기는 존재한다. 우상 앞의 성적 유희와 욕심나는 음식, 쾌락으로 유혹하는 이방 우상종교 의식으로 섞으려 하는 이베벨같은 선지자(20)들이 치고 들어오는 일이었다. 오늘날의 타락한 인간중심적 자만, 사탄적인 온갖 문화가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한번에 나빠지고 병드는 것이 아니다. 서서히 빠져들고, 끌려들다가 어느날 이세벨 옆에 있게 되는 것이다. 남의 문제같다가 어느새 내 문제로 옮겨와 있는 것이다. 그런 세상 속에서 신자로서의 삶은 어떻해야 하는가?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회개하라 하신다(21). 주님은 우리의 “마음과 뜻을 살피시는 분(23)”이라고 하신다. 그렇다 ! 회개에 깨어서 자신의 변질을 닦아내야 한다. 내 사업, 사랑, 믿음, 섬김, 인내” 속에 자발적인 마음이 있은가 살펴야 한다. 사랑과 긍휼의 생각(23)이 흘러나오는가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빗나간 마음과 생각을 불꽃같이(18) 보시고, 주석(18)같이 다루어 치유하시는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언제 한번 하나님 앞에 통렬하게 눈물을 쏟아본 적이 있는지... 하나님 앞에서 지금도 깨어있는 회개, 이것만이 신자의 참된 겸손이다. 즈금도 예수님이 우리 교회와 우리 마음에들어오셔서, 성령이 하시는 음성에 회개로 깨어있는, 들을 귀(29)가 있는 지체들을 찾으신다. 지금도 깨닫는 내가 용납하는 작은 죄악조차 부디 내일로 미루지 않기를!

내 수고를 주님은 아신다, 다 아신다

2019-11-04

성경묵상의 나눔: 계시록 2:12-17 주님은 다 아신다. 우리가 순교자 안디바처럼(13)은 아니어도 어떻게든 다가오는 핍박을 믿는 사람답게 이겨내려 한다는 것을. 주님은 다 보신다. 우리가 세상 발람(14), 세속 니골라당(15)의 교훈처럼 스며오는 육신의 쾌락과 정욕의 유혹에 흔들릴 때 거부하며 거룩함으로 몸부림친다는 것을. 그러므로 여전히 이기도록 순간순간 흔들리는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과 몸을 회개(16)로 주님과 하나되게 하자. 주님이 싸우시고 직접 다루시게 맡겨 드리자. 그러므로 끝까지 이기도록 약속으로 주신 성경의 말씀을(12) 굳게 붙잡자. 삶의 능력으로 주신 성령(17)에 사로잡히자. 감추었다 주시는 내 삶 속에 응답이라는 만나(17)를 먹으며 오늘을 살고, 천국의 흰돌에 떡-하니 새겨진 내 이름(17)을 환히 보며 천국까지 살아가자.

그대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기를

2019-10-30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7:14-25 한 마을에 순회선교자가 옥외에서 설교를 하였다. 한 부자는 지나가다 그의 설교를 듣게 되었는데, 목사의 설교가 “돈을 할 수 있는대로 많이 벌어야 합니다”는 말에 귀가 번쩍했다. “설교를 잘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돈을 잘 관리하고 저축해야 합니다”는 말에 “명설교가이네!”하면서 손뼉을 쳤다. 마지막으로 선교자는 “그리고 그 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써야 합니다!”라고 말하자, 부자는 “에이, 예수쟁이들은...시간 아깝게 버렸네”하면서 떠나고 말았다. 오늘 말씀이 집을 바치기로 서원한 사람, 밭을 바치기로 서원한 사람이 도중에 그 서원을 무를 때의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완전 취소가 아니라, 집과 밭이 저들의 생업에 필요하기에 대신 적절한 돈을 내고는 그 서원을 이행할 수 가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 작정한 것도 뚝 떼먹는 요즘의 시대에, 못 지켜낼까 두려워 서원도 안하는 요즘 신앙분위기에서, 본문의 집을 드리며 서원하는 성도, 밭을 드리며, 또 끝까지 서원을 지키는 성도들의 믿음이 소중하게 깨달아진다. 지금도 우리는 “주님께 충성하게 하소서, 헌신하게 하소서”라고 고백하지만, “내 집과 땅도 주님 원하시면 드리겠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느냐 물으면 대답이 시원하게 나올까? 그렇다! 분명 그렇게 아멘으로 고백할 수가 있는 성도들이 있음을 안다. 이번 주일에 그런 설교들을까 겁내지 말라. 주님은 더 풍성한 요청을 하신다. 집은 환대의 공간이고, 땅은 소득의 원천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 집, 내 땅에 연연하지 말고, 내 집을 열어 사람들을 초청하고 환대하며, 땅의 소득을 풀어 대접하고 섬기며 살라고 하신다. 우리 마음이 집이 되어 주를 아직도 모르는 불신자들을 품으라 하시고, 우리 손이 땅이 되어 필요한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적극적으로 찾아 변변찮은 내 소득이라도 나누며 섬기라 하신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가 이미 드린 집과 땅의 서원인 것이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주의 영광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기꺼이 써야 합니다”는 말에 뭐라 하겠는가? 노멘? 글쎄요멘? 부디 "아멘"으로 오늘도 내일도 살아가기를!

믿음이 있어야 서원도 한다

2019-10-29

성경묵상의 나눔: 레위기 27:1-13 레위기 마지막 장을 묵상한다. 지루한 것 같은 레위기도 은혜의 연속임이 감사하고, 한편 좀 더 주의 뜻을 깊이 알지 못하며 지나가기에 아쉽기도 하다. 오늘 말씀에는 서원하는 것과 그 예물드림에 대해서 나온다. 서원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만 생각하는데, 본문의 강조는 오히려 내 편에서 하나님께 드릴 예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남녀, 나이별, 빈부차이를 고려해 예물을 드리고, 드릴 예물을 변경할 경우 제사장을 통해 정하도록 하고 있다. 난 무얼 드릴까 생각해 본다. 다정한 부부, 친밀한 부모와 자녀, 친한 친구 사이에서는 서로의 나눔이 있다. 다른 것이 없다면 적어